어둠 속의 등불: 성경을 읽을 권리와 말씀의 권위를 둘러싼 역사
성경을 자기 언어로 읽는다는 것은 누구의 설명을 따를 것인지 스스로 살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교회의 가르침을 성경에 비추어 판단할 수 있는가, 아니면 교회가 허락한 방식으로만 성경을 이해해야 하는가. 성경의 번역과 보급을 둘러싼 오랜 충돌에는 이 권위의 문제가 놓여 있었다. 그 대답은 책의 운명뿐 아니라 그것을 번역하고 읽고 전하던 사람들의 생사까지 갈랐다.
박해 속에서 성경을 지킨 공동체들과 위클리프, 후스, 틴데일에게 말씀은 보존해야 할 유산이자 사람들에게 전해야 할 구원의 소식이었다. 쟁기질하는 소년도 성경을 알게 하겠다는 틴데일의 열망은 모국어 번역의 목적을 선명하게 보여 준다. 가동 활자는 그 말씀을 더 많은 사람에게 전할 길을 열었고, 그리스어 사본 연구는 익숙한 라틴어 번역을 원문과 대조하게 했다. 보속과 회개, 성사를 통한 구원과 믿음으로 받는 은혜를 둘러싼 논쟁에서 번역의 한 단어는 신앙의 방향을 가르는 문제가 되었다.
영어 성경이 금지된 책에서 교회에 공개적으로 비치되는 책으로 바뀌고, 여러 세대의 번역이 1611년 킹제임스성경으로 이어진 뒤에도 다툼은 끝나지 않았다. 어떤 사본을 번역의 기초로 삼을지, 원문의 단어와 형태를 얼마나 보존할지, 번역과 주석이 교리와 예언의 이해를 어떻게 바꾸는지가 새로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성경의 역사는 책을 널리 보급한 역사인 동시에, 그 책이 전하는 말씀을 누가 해석하고 무엇을 최종 권위로 삼을 것인지를 둘러싼 역사다.
성경을 읽고 전하기 위해 치른 대가
거의 2,000년 동안 성경은 역사상 가장 큰 논란과 논쟁을 불러일으킨 책으로 남아 있다. 오늘날에는 여러 성경 번역본을 쉽게 구할 수 있고, 그 풍부함을 당연하게 여기기 쉽다. 그러나 한때는 성경을 다루거나 읽는 일만으로도 목숨을 걸어야 했다. 복음서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 이래, 성경은 역사상 가장 많은 피로 얼룩진 책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성경을 위해 싸웠고, 성경 때문에 화형을 당했다. 신자들은 성경을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았으며, 죽임을 당하거나 산 채로 묻히기까지 했다. 죽음조차 박해의 끝이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죽은 뒤에도 무덤이 파헤쳐져 유골이 꺼내졌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는 이유로 극심한 저주를 받았다.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보다 더한 고난까지 겪은 것은 잃어버린 채 죽어 가는 세상에 성경의 능력 있는 말씀을 전하려 했기 때문이다. 여러 세기에 걸쳐 복음 메시지에 담긴 사랑을 나누려는 사람들이 있었던 한편, 그 메시지를 없애기로 작정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 속에서도 믿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가장 어두운 시대를 밝히는 등불이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증언
2천 년 전, 유대인 목수 나사렛 예수의 삶과 죽음은 세상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라고 하셨고, 그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이단으로 정죄받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셨다. 그분을 따르던 이들마저 처음에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분을 버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힘을 얻어 다시 나섰다. 빈 무덤을 증언하며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셨다고 온 세상에 전하기 시작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구약의 약속과도 맞닿아 있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는 다윗의 말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주의 거룩하신 분을 지옥에 내버려 두지 않으시며 썩어짐을 보지 않게 하시리라는 약속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밝혔다.
사도행전 2:27 이는 주께서 내 혼을 지옥에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며 또 주의 거룩하신 분으로 썩어짐을 보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사도행전 2:31 그가 미리 앞을 내다봄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말한 것은, 주의 혼이 지옥에 버려지지 아니하였으며, 또 주의 육신도 썩어짐을 보지 아니하였다는 것이라.
다윗이 앞날을 내다보며 말한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 주의 혼이 지옥에 버려지지 않고 육신도 썩어짐을 보지 않으리라는 약속은, 십자가의 죽음이 예수의 마지막이 아니었음을 설명한다. 사도들은 이 약속을 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예수를 살리신 일의 증인으로 나섰다.
사도행전 2:32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살리셨으니 우리 모두가 그 일에 관한 증인이라.
사도행전 2:36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온 집이 분명히 알 것은,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신 것이라.”고 하더라.
베드로의 선포는 이스라엘의 온 집을 향했다.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바로 그 예수를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부활은 예수가 누구신지를 드러냈으며, 그분을 거부했던 사람들은 이제 그 사실 앞에서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사도행전 2:37 ○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아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말하기를 “형제 여러분, 우리가 어찌하여야 하리이까?”라고 하니
사도행전 2:38 베드로가 그들에게 답변하기를 “회개하라. 그리고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 너희 각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
마음에 찔림을 받은 유대인들은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자신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 베드로는 회개하고,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고 답했다. 부활의 소식을 듣고 응답하려는 이들에게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는 약속도 주어졌다.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전해진 복음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혼이 구원받았고, 처음 유대인에게 전해졌던 동일한 복음이 이방인에게도 전해졌다. 경건한 백부장 코넬료의 집에서도 그 소식이 선포되었다. 그곳에서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자신이 깨달았다고 밝혔다.

사도행전 10:34 ○ 그때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기를 “참으로 내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고
사도행전 10:35 어느 민족에서나 자기를 두려워하고 의를 행하는 사람은 받아 주신다는 것이라.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는 사람은 어느 한 민족에만 속하지 않았다. 어느 민족에서나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의를 행하는 사람을 받아 주신다는 말씀이 이방인의 집에서 선포되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보내신 화평의 소식이 이방인에게도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그 화평을 이루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의 주이시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0:3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보내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화평을 전하는 것이라. (그는 모든 것의 주시라.)
사도행전 10:37 내가 말하노니 너희도 알거니와 그 말씀은 요한이 전파한 침례 이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되었으며
그 소식에는 듣는 이들도 알고 있는 구체적인 시작과 전파 과정이 있었다. 요한이 침례를 전파한 뒤 갈릴리에서 시작된 말씀이 온 유대에 두루 퍼졌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을 상기시키며, 그 사역에 나타난 능력이 어디에서 왔는지 설명했다.
사도행전 10:38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께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부어 주셔서 그분이 두루 다니시면서 선한 일을 행하시며 마귀에게 억압받는 모든 자를 치유하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심이라.
하나님께서는 나사렛 예수께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부어 주셨고, 그분과 함께 계셨다. 예수께서는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고 마귀에게 억압받는 모든 사람을 치유하셨다. 부활의 증인들이 전한 예수는 사람들 가운데서 선을 행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치유하셨던 바로 그분이었다. 사도들의 증언은 부활뿐 아니라 유대인들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일에 걸쳐 있었다.
사도행전 10:39 우리는 그분이 유대인들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모든 일의 증인이라. 그들이 그분을 죽여서 나무에 매달았으나
이방인에게 전해진 복음도 예수의 구체적인 행적과 죽음, 부활을 떠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죽여 나무에 매단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셋째 날에 살리셨으며, 하나님께서 미리 택하신 증인들이 부활하신 그분을 만났다.
사도행전 10:39 우리는 그분이 유대인들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모든 일의 증인이라. 그들이 그분을 죽여서 나무에 매달았으나 사도행전 10:40 하나님께서 그분을 셋째 날에 살리셔서 드러나게 보여 주셨으니 사도행전 10:41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미리 택하신 증인들에게 하신 것이니 곧 그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신 후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신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신 대상은 모든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택하신 증인들이었다. 이들은 그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신 뒤 함께 먹고 마신 사람들이었다. 베드로도 그 증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코넬료의 집에 모인 이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증인들에게는 자신들이 만난 분이 누구신지를 사람들에게 전파하라는 명령이 주어졌다.
사도행전 10:42 그리하여 주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사 사람들에게 전파하게 하시고, 또 하나님께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로 지정하신 분이 바로 그분임을 증거하게 하셨느니라. 사도행전 10:43 그분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기를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죄들의 사함을 받으리라.”고 하였느니라.
전파할 내용에는 심판과 죄사함이 함께 들어 있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로 지정하셨으며, 누구든지 그분을 믿는 사람은 그분의 이름으로 죄들의 사함을 받는다. 사도들은 자신들만의 새로운 메시지를 전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선지자가 증거한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으며, 그분을 믿는 자가 죄사함을 받으리라는 약속도 앞선 성경의 증언에 담겨 있었다.
코넬료의 집에까지 전해진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퍼져 나갔다. 이어 사도 바울이 등장하여 많은 교회를 세웠다. 복음은 이를 전하는 사람들을 두고 “세상을 소란케 한 자들”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그 확산에는 반대와 충돌도 뒤따랐다.
사도행전 17:6 그러나 그들을 찾아내지 못하니 야손과 다른 형제 몇 사람을 성읍의 행정관들 앞으로 끌고 가서 외치기를 “세상을 소란케 한 자들이 여기에도 왔도다.
이 표현은 복음 전파자들을 향한 고발이었다. 그들을 찾아내지 못한 사람들은 야손과 다른 형제 몇 사람을 성읍의 행정관들 앞으로 끌고 갔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 대한 적대감은 이처럼 다른 형제들까지 관청 앞으로 끌려가게 했다.
신약의 기록과 구약을 잇는 예언
1세기 중엽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네 복음서에 기록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사도들이 쓴 서신들이 더해져 신약의 기록을 이루었다.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뿐 아니라 사도들이 교회에 전한 가르침도 기록으로 남았다.

구약과 신약을 잇는 가장 분명한 연결점은 예언이다. 성경의 예언은 사람이 자기 뜻으로 내놓은 전망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전해진 말씀이다.
베드로후서 1:21 예언은 예전에 사람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으로 감동을 받아 말한 것이니라.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처음 오실 것을 미리 알렸으며, 그분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재림도 바라본다. 이미 오신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과 다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기대는 이처럼 같은 성경 안에서 이어진다. 그러나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에 평탄한 길만 약속된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때가 오기 전에 교회가 복음 때문에 큰 시련과 고난을 겪으리라고 경고하셨다. 사도들 역시 외부의 반대뿐 아니라 공동체를 안에서부터 무너뜨릴 위험을 경고했다.
양떼를 흩고 말씀을 변개시키는 위험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과 작별하면서 자신이 떠난 뒤에 양떼를 위협할 자들이 나타나리라고 경고했다. 언더스탠드 더 타임스 인터내셔널(Understand the Times International)의 설립자 로저 오클랜드(Roger Oakland)는 바울을 비롯한 이들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경고했다는 점에 주목하며, 그 위험을 바울이 말한 사나운 이리들의 위협으로 설명한다.

사도행전 20:29 또 내가 이것을 아노니,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들이 너희 가운데로 들어와서 양떼를 아끼지 아니할 것이며 사도행전 20:30 또한 너희 가운데서도 사람들이 일어나서 왜곡된 것을 말하여 제자들을 끌어내어 자기들을 좇게 할 것이라.
양떼를 해치는 자들은 밖에서 들어오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 안에서도 사람들이 일어나 가르침을 왜곡하고 제자들을 끌어내어 자신들을 따르게 한다. 눈에 보이는 박해와 달리, 이들은 가르침을 뒤틀어 사람들이 따르는 대상을 바꾼다. 장로들에게는 이러한 위험을 알아보고 양떼를 지킬 책임이 있었다.
사도행전 20:31 그러므로 깨어 있어 내가 삼 년 동안 밤낮으로 각 사람에게 쉬지 않고 눈물로 훈계하던 일을 기억하라.
바울은 삼 년 동안 밤낮으로 각 사람에게 쉬지 않고 눈물로 훈계했다. 떠나는 순간에 처음 꺼낸 경고가 아니었다. 깨어 있으라는 당부에는 그동안 거듭 전한 훈계를 기억하고 경계를 늦추지 말라는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
사람들을 잘못 이끄는 위험은 말씀 자체를 다루는 방식에서도 나타났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켜 이익을 취하는 여러 사람들과 자신들을 구별했다.
고린도후서 2:17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킴으로써 이익을 취하는 여러 사람들과 같지 않고 오직 성실함으로써 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로서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말씀을 자기 이익에 이용하는 태도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실하게 말하는 태도는 서로 대조된다. 복음이 널리 전파된다고 해서 그 가운데 전해지는 모든 가르침을 신뢰할 수는 없었다.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왜곡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베드로도 과거 백성 가운데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공동체 안에 거짓 교사들이 나타나리라고 경고했다. 이들은 “저주받을 이단들”을 비밀리에 들여오며,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베드로후서 2:1 그러나 백성 가운데도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너희 가운데도 거짓 교사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저주받을 이단들을 비밀리에 불러들여서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기까지 하며, 급격한 파멸을 스스로 불러들이느니라. 베드로후서 2:2 또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파멸의 길을 따르리니 그들로 인하여 진리의 길이 비방을 받을 것이라.
거짓 교사들은 스스로 급격한 파멸을 불러들이지만, 피해는 그들에게만 머물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그들의 파멸의 길을 따르고, 그들 때문에 진리의 길까지 비방을 받는다. 바울과 베드로의 경고는 양떼를 빼앗는 자들, 말씀을 이익의 수단으로 삼는 자들, 주를 부인하는 이단을 들여오는 자들이 공동체에 끼칠 해악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 경고한 위험 | 사람들과 복음에 미치는 영향 | 관련 말씀 |
|---|---|---|
| 흉악한 이리들과 공동체 안의 왜곡된 가르침 | 양떼를 아끼지 않고 제자들을 끌어내어 자신들을 따르게 한다. | 사도행전 20:29–30 |
|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키는 행위 | 말씀을 이용하여 이익을 취한다. | 고린도후서 2:17 |
| 거짓 교사들이 들여오는 이단 | 많은 사람을 파멸의 길로 이끌고 진리의 길이 비방받게 한다. | 베드로후서 2:1–2 |
박해의 경고와 초기 교회의 시련
신앙을 무너뜨리는 위험은 진리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데만 있지 않다. 사탄은 모조 영과 모조 그리스도, 모조 복음을 만들어 사람들을 교묘하게 속인다. 진리를 닮은 거짓에 많은 사람이 넘어가면 진리의 길까지 비방을 받는다.
베드로후서 2:2 또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파멸의 길을 따르리니 그들로 인하여 진리의 길이 비방을 받을 것이라.
베드로후서 2:2의 경고에서 거짓 교사들의 해악은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파멸의 길에 들어서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들 때문에 진리의 길까지 비방을 받는다. 이처럼 거짓이 신앙을 위협하는 가운데, 믿음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박해와 죽음의 위협도 닥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믿음 때문에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하리라고 예고하셨다.
마태복음 24:9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고난받도록 넘겨주며 죽이리라. 또 너희는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제자들이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는 까닭은 예수님의 이름 때문이다. 이 박해는 몇몇 제자에게만 닥칠 시련이 아니었다. 사도 바울도 영감을 받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이 박해를 받으리라고 기록했다.
디모데후서 3:12 실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박해를 받을 것이라.
박해를 받으리라는 말씀은 몇몇 사도에게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그러나 예수께서 예고하신 앞날에는 고난과 죽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왕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해 온 세상에 전파되는 일도 있다.
마태복음 24:14 이 왕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런 후에야 끝이 오리라.
끝은 왕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도록 온 세상에 전파된 뒤에야 온다. 복음이 전파되는 동안 교회는 초기 수 세기에 걸쳐 박해를 겪었으며, 앞서 주어진 박해의 경고는 현실이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1세기의 네로부터 4세기 초의 디오클레티아누스에 이르기까지 역대 로마 황제들의 미움을 받으며 쫓기는 처지에 놓였다.

경기장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초기 교회의 박해를 묘사한 재현 장면이다.
콘스탄티누스의 보호와 교회 권력의 변화
서기 313년 무렵, 기독교라고 불리던 종교는 로마 제국 안에서 극적인 변화를 겪었다. 그 전해인 312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승리하여 훗날 로마의 유일한 황제가 되는 길을 열었다. 그는 전투 전에 태양에 십자가가 선명하게 새겨진 환상을 보고, “이 표징으로 정복하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그 상징을 채택한 뒤 출정하여 적들을 정복했고, 얼마 뒤인 313년에는 밀라노 칙령에 서명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관용과 보호를 베풀었다. 황제가 개종했다고 전해지는 가운데 기독교는 결국 국교가 되었다.

그러나 황제의 보호가 교회에 유익만을 가져온 것은 아니라는 비판이 있다. 박사이자 고대 사본 수집가인 데이비드 브라운 목사는 로마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로마 교회가 없었다고 말하며, 콘스탄티누스의 집권이 교회에 부패를 가져왔다고 평가한다. 문제는 황제가 측근들을 권좌에 앉히기 시작한 데 있었다. 이후 교회는 교리를 발전시키고 교황들을 임명하면서, 그들을 평신도와 구별하여 그 위에 세우기 시작했다.
황제의 권력은 신자들의 지위뿐 아니라 박해의 대상도 바꾸었다. 『현대 세계를 바꾼 거짓말』의 저자 H.D. 윌리엄스 박사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가 개종 후 내린 보호 칙령은 적어도 서기 331년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나 그해 내려진 또 다른 칙령은 로마의 권위 아래 들어오지 않은 이들을 체포하고 박해하며, 그들의 교회와 기록을 비롯한 모든 것을 불태우도록 명령했다. 윌리엄스 박사가 지적하는 변화는 그리스도인을 보호하던 권력이 로마의 권위에 따르지 않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권력으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콘스탄티누스의 신앙과 제국 통합
콘스탄티누스가 참된 기독교 신자였다면 어떻게 다른 기독교인들을 박해할 수 있었을까? 일부 연구자들은 그의 신앙이 기독교와 이교 사이에 나뉘어 있었다고 본다. 연구자 데이브 헌트는 그가 기독교회를 이끌면서도 이교 사제단의 수장으로 활동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회를 이끌면서도 계속 이교 사제단의 수장을 맡아 이교의 축제 의식을 집전하고 이교 신전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기독교 교회를 짓기 시작한 뒤에도 그랬다. 이교 사제단의 수장으로서 그는 최고 사제인 폰티펙스 막시무스였으며, 기독교회의 수장으로서도 그와 비슷한 칭호가 필요했다. 기독교인들은 그를 주교 중의 주교로 높였고,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을 비카리우스 크리스티, 곧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불렀다.
헌트가 지적한 교회 건축과 이교 신전 지원은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다. 따라서 그의 설명에서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은 이전 신앙과의 완전한 단절이 아니었다. 황제는 이교의 최고 사제라는 지위를 유지하면서 기독교회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권위를 얻었다.
제국 통합을 명분으로 로마의 이교 관행이 보편 교회, 또는 가톨릭교회라 불리는 교회와 결합하자, 많은 기독교인은 이를 교회와 세속 권력 사이의 배교적 결합으로 보았다. 콘스탄티누스 치하에서는 이 새로운 보편적 신앙에 반대하는 이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가 이단자들을 겨냥해 내린 칙령 때문에 개종 이전보다 이후에 더 많은 기독교인이 박해받았다고 전해진다.
황제의 칭호를 이어받은 로마의 주교들
로마 제국이 쇠퇴하자 로마의 주교들이 부상하여 콘스탄티누스의 칭호들을 자신들의 것으로 삼았다. 이 칭호들은 이교 사제단을 이끄는 권위와 다른 주교들 위에 서는 권위, 그리스도를 대신한다는 권위를 함께 담고 있었다.

| 칭호 | 뜻과 권위 |
|---|---|
|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 | 이교 사제단의 수장인 최고 사제 |
| 주교 중의 주교 | 기독교인들이 콘스탄티누스에게 부여한 존칭 |
| 비카리우스 크리스티(Vicarius Christi) | 그리스도의 대리자, 곧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자 |
17세기 역사가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는 교황권을 죽은 로마 제국의 권력이 다른 모습으로 존속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이 거대한 교회 권력의 기원을 살펴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교황권이 죽은 로마 제국의 무덤 위에 왕관을 쓰고 앉은 그 제국의 유령에 불과함을 쉽게 알 것이다.
일부 연구자들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이른바 개종을 암흑시대의 진정한 시작으로 보는 이유도 교회와 제국 권력의 결합에 있다. 그의 영향 아래 이루어진 결합은 황제의 보호를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 결합을 거부한 기독교인들이 박해받기 시작했고, 제국이 쇠퇴한 뒤에는 로마의 주교들이 황제의 칭호와 권위를 이어받았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명분으로 행하는 박해
기독교를 표방하는 권력이 다른 기독교인들을 죽이는 일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경고와 맞닿아 있다. 요한복음 16장에서 예고하신 박해자는 자신이 하나님을 대적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자들을 죽이는 일을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로 여긴다.

요한복음 16:2 그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출회할 것이라. 참으로 그 때가 오면 너희를 죽이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섬기노라고 생각하리라.
요한복음 16:3 또 그들이 이런 일들을 너희에게 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버지도 모르며 나도 모르기 때문이라.
하나님을 섬긴다는 확신 자체가 그 행동의 정당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예수께서는 박해자들이 그런 일을 행하는 까닭을 아버지도, 자신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밝히셨다. 교회와 세속 권력의 결합을 거부한 신자들이 종교적 명분 아래 박해받은 역사는 이 경고에 비추어 이해된다. 신앙을 내세우는 권력이 오히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6:4 그러나 내가 이런 일들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그 때가 오면 내가 그런 일들에 대해 말했음을 너희로 기억나게 하려 함이라. 내가 처음부터 이런 일들을 너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라.
예수께서 박해를 미리 말씀하신 목적은 그때가 왔을 때 제자들이 그 경고를 기억하게 하는 데 있었다. 박해자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내세우더라도, 제자들은 자신들이 겪는 일이 예수께서 이미 말씀하신 일임을 기억할 수 있었다.
성경의 빛을 차단한 종교재판
암흑시대의 시작을 콘스탄티누스에게서 찾는 견해가 있다면, 그 시대가 어두웠던 이유를 성경의 금지에서 찾는 설명도 있다.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을 알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시편의 등불과 빛이라는 비유는 성경을 빼앗긴 사람들이 무엇을 잃었는지 드러낸다.

말씀을 등불과 빛에 비유하는 시편 119:105.
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등불이 발을 디딜 곳과 앞으로 걸어갈 길을 밝히듯, 말씀은 사람이 걸어갈 길을 비춘다. 13세기 로마가 사람들이 성경 지식을 얻지 못하도록 조직적으로 벌인 활동은 그 빛을 끄려는 시도였다. 그 중심에 있던 종교재판은 로마의 가장 끔찍한 공포와 파괴의 도구였으며, 가톨릭 사제 도미니크 데 구스만(Dominic de Guzman)과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를 그 두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재판의 출발점으로 지목되는 대상도 마녀나 무슬림이 아니다. 마녀에 대한 대응이나 무슬림에 맞선 십자군이 아니라, 성경을 믿는 기독교인들을 탄압하기 위해 시작되었다는 설명이다.
그 탄압의 대상은 알비파(Albigenses)였다. 프랑스의 도시 알비에서 이름을 얻은 이들은 가톨릭 사제들과 자주 논쟁했다. 대표적인 상대가 오늘날 가톨릭교회에서 성 도미니크로 알려진 구스만 사제였다. 양측은 교리를 두고 다투었을 뿐 아니라, 참된 신앙과 거룩함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를 놓고도 맞섰다.
도미니크의 증언과 알비파의 신앙고백
도미니크 구스만 사제는 알비파가 이단 교리를 믿는다고 비난했지만, 그들을 고발하면서도 사람들이 그들에게 이끌리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단자들이 개종자를 얻는 것은 권력과 위세를 과시하거나 화려한 옷을 입기 때문이 아니다. 열성적인 설교와 사도적 겸손, 금욕으로 얻는 것이다.”

알비파의 영향력은 권력이나 외적인 화려함이 아니라 설교와 겸손, 절제된 생활에서 나왔다. 그러나 도미니크 구스만 사제는 그러한 생활을 신앙의 진실성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의 거룩함은 겉모습에 불과하므로 가톨릭의 이른바 참된 거룩함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상대가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방식은 인정하면서도, 그 믿음은 부정한 것이다.
처음에는 설교로 알비파에 맞서려 했으나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폭넓은 성경 지식으로 알려진 알비파는 도미니크 구스만 사제가 전하는 교리를 로마에서 나온 배교적 가르침으로 여겨 거부했다. 가톨릭 측이 알비파를 이단으로 지목한 것과 반대로, 알비파는 로마 교회가 그리스도에게서 떠났다고 판단했다.
1206년 알비파의 신앙고백에는 로마 교회를 거부한 이유가 분명히 담겨 있었다. 로마 교회는 그리스도의 배우자가 아니라 순교자들의 피에 취한 혼란의 교회이며, 선하지도 거룩하지도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도 아니라는 고백이었다. 일부 사제의 잘못된 행실을 고치는 정도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알비파는 로마 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내세우는 정당성 자체를 부정했다.
알비파와의 논쟁에서 십자군 원정으로
1207년 몽레알 회담에서는 도미니크 구스만 사제가 대표한 가톨릭 사제단과 알비파 사이에 마지막 신학 논쟁이 벌어졌다. 역사가들의 서술에서 도미니크 구스만 사제는 알비파 지도자 브누아 드 테름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논쟁은 그의 패배로 전해진다. 연구자 제임스 맥도널드는 이 실패로 굴욕을 당한 구스만 사제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말한다면서 반대자들에게 노예 신세와 죽음을 예고했다고 기록한다.

도미니크 구스만 사제가 그 위협을 실행하기 위해 도미니크회를 설립했으며, 이 수도회가 로마의 ‘거룩한 종교재판’을 수행하는 주된 도구가 되었다. 또한 논쟁으로부터 2년 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알비파를 겨냥한 십자군 원정을 명령한 데에는 구스만 사제의 분노도 일부 작용했다는 설명이다.
유혈 원정을 이끈 인물은 도미니크 구스만 사제의 절친한 친구인 시몽 드 몽포르였다. 그를 기억하는 방식은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서 극명하게 갈린다.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용감한 십자군이지만, 개신교도들에게는 알비파뿐 아니라 그들의 가르침이 남긴 흔적까지 없애려 한 사악하고 잔혹한 대량 학살자였다. 원정의 파괴를 전하는 기록은 시몽이 한 집단과 그 집단의 문헌을 함께 말살했다고 표현한다. 사람들을 죽이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들이 무엇을 믿고 가르쳤는지 후대에 전할 글까지 없애려 했다는 것이다.
종교재판과 성경의 번역·소유·독서 금지
1233년에 이르러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종교재판을 교회의 공식 교리로 확립했다. 이로써 성경을 믿는 이들을 향한 약 600년간의 유혈 박해가 시작되었다. 알비파 십자군 원정의 직접적인 결과로 교황들은 성경을 번역하거나 소유하거나 읽는 일을 금지하기 시작했다. 신앙 공동체를 탄압하는 일과 그들이 의지하던 성경을 금하는 일이 함께 진행되었다.
역사가 데이비드 클라우드는 성경이 가져온 빛 때문에 이러한 박해가 일어났다고 설명한다. 성경이 로마의 이단들을 분명히 드러냈으므로, 로마가 평화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쏟아부은 박해는 그들과 그들의 성경을 함께 없애려는 것이었다.

알비파에서 시작되어 수 세기 동안 이어진 종교재판의 유혈 박해에 관해, 역사가 존 다울링은 1845년에 다음과 같은 희생 규모 추정치를 기록했다.
“신중하고 신뢰할 만한 역사가들의 추정에 따르면, 5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단이라는 죄목으로 교황파 박해자들에게 학살당했습니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로마 가톨릭만이 유일한 기독교였다는 통념과 달리, 알비파는 그 이전부터 로마 교회에 맞서 성경을 믿던 공동체였다. 종교개혁 이전의 기독교 역사에는 로마 교회뿐 아니라, 그 권위를 거부하고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킨 사람들의 역사도 포함된다.
로마 교황권이 아니라 성경을 최종 권위로 삼은 공동체
로마 교회 밖에서도 신앙 공동체들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으며, 로마에 속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미움을 받았다. E. H. 브로드벤트(Broadbent)는 『순례하는 교회(The Pilgrim Church)』에서 이들의 역사를 다루며 한 가지 공통점을 짚었다. 이들은 로마 교황권에 복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최종 권위로 따르려 했다. 알비파와 왈도파도 그처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공동체들이었다.

연구자이자 은퇴 교수인 앨런 오라일리(Alan O’Reilly) 박사는 성경을 믿는 공동체로서 왈도파의 기원이 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설명한다. 일부 성경 비평가들이 이 기원설에 반대한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오래된 기원을 지지하며, 왈도파가 이미 2세기부터 고대 라틴어 성경인 이탈릭 역본(Italic version)을 지녔던 것으로 본다. 이들은 ‘계곡 사람들’이라는 뜻의 보두아(Vaudois)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졌다.
그들이 살던 계곡과 산악 지대는 오랜 박해를 견디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로마는 천 년 넘게 거듭 박해하며 이들을 없애려 했지만, 북부 이탈리아의 산악 지대는 방어하기가 쉬웠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러한 지역에 자리 잡은 공동체들은 적어도 목숨을 부지하며 수 세기를 버틸 수 있었다. 성경을 향한 이들의 헌신은 전설적이었다.
피터 왈도의 번역과 박해 속에 이어진 신앙
왈도파가 처음 사용한 성경은 라틴어로 되어 있었다. 12세기에는 이들의 가장 유명한 지도자인 피터 왈도(Peter Waldo)가 성경을 로망어(Romant)로 번역했다. 로망어는 중세 영어와 고대 프랑스어가 결합된 언어였다. 그러나 로마 교회는 이 번역을 거부했다.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왈도와 그의 추종자들을 추방했고, 교황 루키우스 3세는 그들에게 교황의 저주를 선포했다. 박해 속에서 공동체의 기록도 불태워지고 파괴되었으며, 그들의 이름은 비방을 받았다.
영국 선교사이자 『영원히 확정되었도다(Forever Settled)』의 저자인 잭 무어먼(Jack Moorman) 박사는 참된 교회사를 찾으려면 로마에 한 번도 속하지 않았던 신자들의 ‘은빛 물줄기’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로마의 제도와 그 안에서 일어난 변화만을 살펴서는 교회 역사를 온전히 알 수 없으며, 그 밖에서 끊이지 않고 이어진 신앙 공동체들의 발자취도 따라가야 한다는 뜻이다. 그 신자들은 북부 이탈리아와 프랑스 남부 사이에 있는 피에몬테의 계곡들에 살았다. 프랑스 남부에서는 왈도파, 알비파, 카타리파, 도나투스파라는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로마가 이들을 없애려 했어도 순례하는 교회의 오랜 믿음은 살아남아 승리했다. 성경을 붙들고 박해를 견딘 공동체들의 본보기는 뒤이어 등장할 믿음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존 위클리프의 영어 성경과 롤라드의 전파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로마는 마르틴 루터가 오래전에 정죄된 왈도파와 알비파의 이단을 되살렸을 뿐이라고 비난했다. 루터 이전부터 성경을 믿고 전하던 ‘순례하는 교회’의 신앙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 역사에서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는 영어 성경 번역과 설교자 양성을 통해 후대 종교개혁자들에게 길을 열었다.

최초의 영어 완역 성경은 위클리프의 번역으로 여겨진다. 그는 약 1384년까지 라틴어 성경을 당시의 언어인 중세 영어로 옮겼다. 목사이자 고대 필사본 수집가인 데이비드 브라운(David Brown) 박사는 위클리프가 ‘종교개혁의 새벽별’로 불리는 이유를 후대 개혁자들에게서 찾는다. 위클리프가 믿고 가르쳤던 내용을 100년도 더 지난 뒤 윌리엄 틴데일과 마르틴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영어 번역을 남기는 일과 더불어, 훗날 종교개혁에서 다시 드러날 신앙을 먼저 가르친 것이 그의 중요한 유산이었다.
위클리프는 추종자들이 사람들에게 나아가 설교하도록 훈련했다. 롤라드(Lollards)로 알려진 이들의 활동은 널리 퍼져, 잉글랜드의 거리에서 두 사람을 만나면 그중 한 사람은 롤라드라는 말까지 나왔다. 그만큼 전파 활동의 영향력이 컸지만, 여전히 가톨릭 국가였던 잉글랜드에서 이들은 심한 박해를 받았고 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했다.
연구자이자 은퇴 교수인 앨런 오라일리(Alan O’Reilly)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잉글랜드의 개신교 종교개혁이 시작되기 전인 14세기에 붙잡힌 롤라드들은 화형에 처해졌다. 위클리프의 번역본을 가지고 있으면 그 책을 목에 매달아 소유자와 함께 불태웠다. 박해는 성경을 전하던 사람뿐 아니라 그들이 지녔던 영어 성경에도 향했다.
인간의 권위보다 높은 성경과 화체설 거부
위클리프는 자신보다 앞선 순례하는 교회처럼 성경의 권위가 어떤 인간의 권위보다도 높다고 가르쳤다. 가르치는 사람의 지위가 높다는 이유만으로 그 말을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지, 성경에 반하는 것을 가르치는지 살펴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 권위를 믿어서는 안 된다. 땅의 사람이든 하늘의 천사든, 성경에 반하는 것을 가르친다면 우리는 지옥의 사악한 마귀를 피하듯 그에게서 피해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복음의 진리와 자유를 굳게 붙들어야 한다.”
거부의 기준은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라 성경에 반하는 가르침이었다. 위클리프는 그 기준을 하늘의 천사에게까지 적용하면서, 어떤 권위에도 내줄 수 없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복음이 주는 진리와 자유를 꼽았다. 성경을 최종 기준으로 삼는 태도는 로마 교회가 지지하는 교리에도 그대로 적용되었고, 위클리프는 성경 번역뿐 아니라 화체설을 거부한 인물로도 알려졌다.
화체설은 주의 만찬에서 축성된 빵과 포도주 안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교리다. 이에 대한 비판은 화체설이 암흑시대의 가장 치명적인 교리이며, 화체설에 대한 거부가 종교개혁자들을 박해한 주된 이유였다는 것이다. 성경과 인간의 권위 가운데 무엇을 따를 것인가는 추상적인 질문이 아니었다. 로마 교회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것인지, 거부하고 처벌을 감수할 것인지 결정해야 하는 문제였다.
생사를 가른 화체설의 인정과 거부
‘Understand the Times International’의 설립자 로저 오클랜드(Roger Oakland)는 종교개혁자들이 왜 화형을 당했는지 설명하면서 J. C. 라일의 글을 인용한다. 라일이 지목한 주된 이유는 그들이 로마 교회 특유의 한 교리, 곧 화체설을 거부했다는 것이었다. 오클랜드는 이 글을 통해 종교개혁자들에 대한 공격이 로마 가톨릭 교회가 지지하는 가르침에 대한 반대와 맞물려 있었음을 짚는다.

목사이자 고대 필사본 수집가인 데이비드 브라운(David Brown) 박사는 재판을 받은 거의 모든 사람이 화체설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기소되었다고 설명한다. 그의 설명에서 이 교리에 대한 답변은 피고인의 생사를 갈랐다. 인정하면 살아남을 수도 있었지만, 끝까지 거부하면 죽어야 했다. 교리의 옳고 그름을 두고 벌어진 논쟁이 재판정에서는 신앙을 굽힐 것인지, 죽음을 감수할 것인지의 선택이 된 것이다.
로마 교회가 성체 앞에 절하도록 요구하고 성체를 땅에 떨어뜨리지 못하게 한 이유는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 자신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빵과 포도주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신다는 말은 단순한 상징을 뜻하지 않았다. 그분의 몸과 피가 문자 그대로 물리적으로 실제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화체설과 미사에 대한 비판의 핵심도 여기에 있다. 미사가 이러한 실제 임재를 전제로 발전했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라는 비판이다.
위클리프의 사후 정죄와 사라지지 않은 가르침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는 화체설을 담대하게 거부했다. 가톨릭 당국은 생전에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려 했으나 거듭 실패했으며, 그는 살아 있는 동안 파문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죽음이 정죄의 시도를 끝내지는 못했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그의 사후에 공식적으로 아나테마, 곧 저주를 선언했다.
위클리프에 대한 적대감은 그가 내놓은 최초의 영어 완역 성경과도 맞물려 있었다.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아룬델(Thomas Arundel)은 위클리프를 다음과 같이 비난했다.
“옛 마귀의 자식” “성경을 모국어로 번역하여 자신의 악행을 완성했다”
아룬델에게는 사람들이 자기 언어로 성경을 읽도록 한 번역 자체가 악행이었다. 로마 교회는 위클리프의 영어 성경 때문에 그를 극도로 증오했으며, 그 증오는 죽은 사람의 유골을 파내는 데까지 이르렀다. 1428년, 위클리프가 죽은 지 44년이 지난 뒤 로마 교회의 명령에 따라 잉글랜드 루터워스의 교회 묘지에서 그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유해는 산산이 부서졌고 뼛조각은 불태워졌다.
중세에 누군가에게 아나테마를 선언할 때에는 ‘종·책·촛불 의식’이라는 의식을 거행했다. 파문과 저주는 교회 공동체에서 내쫓는 데 그치지 않고 영원한 형벌을 선고하는 것이었다.

문서와 촛불을 사용하는 ‘종·책·촛불 의식’의 재현 장면이다.
위클리프에게 내려진 공식 저주가 어떤 내용이었을지를 가정한 재현 대사는 그 배제와 형벌의 범위를 드러낸다.
우리는 이 위클리프와 그의 공모자들, 그리고 동조자들을 주님의 보배로운 몸과 피에서, 또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에서 분리한다. 우리는 그를 하늘과 땅에 있는 우리의 거룩한 어머니 교회에서 배제한다. 우리는 그를 파문하고 저주받은 자로 선언한다. 우리는 그가 마귀와 그의 천사들, 그리고 버림받은 모든 자와 함께 영원한 불에 처해질 것을 선고한다. 그렇게 될지어다.

위클리프에 대한 사후 정죄를 묘사한 재현 이미지다.
불태운 유골의 재는 스위프트강에 버려졌다. 그러나 유골을 없애는 일이 그의 가르침까지 없애지는 못했다. 한 역사가는 스위프트강이 세번강으로, 세번강이 해협으로 흘러가는 모습을 들어 위클리프의 가르침이 온 세계로 퍼져 나간 일을 비유했다. 그의 가르침과 영어 성경이 남긴 영향은 후대 기독교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졌으며, 중세의 가장 위대한 사건으로 꼽히는 종교개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후스의 화형과 한 세기 뒤의 종교개혁
콘스탄츠 공의회는 위클리프뿐 아니라 그의 가장 저명한 추종자 중 한 사람인 얀 후스도 정죄했다. 보헤미아의 열정적인 개혁자였던 후스의 제자들은 후스파라고 불렸다.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은 후스는 교황이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교리인 교황 무류설에 반대했다. 교회 지도자들의 견해보다 성경의 권위가 높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그 결과 후스는 이단자로 정죄되어 1415년에 화형당했다.

후스는 죽기 전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약속을 주셨다고 말했다. 후스라는 이름은 체코어로 ‘거위’를 뜻한다. 주님께 받았다고 한 약속에서 거위는 후스 자신을 가리키며, 백조는 그가 죽은 뒤 나타날 인물과 대비된다.
그들이 거위는 침묵시키겠지만, 백 년 뒤에는 내가 너의 재에서 백조를 일으키리니, 아무도 그 백조를 침묵시키지 못할 것이다.
한 세기 뒤, 후스의 설교에서 일부 영향을 받은 마르틴 루터는 독일 비텐베르크의 교회 문에 자신의 95개조 논제를 못 박았다. 이 사건은 개신교 종교개혁의 시작을 알렸다.
가톨릭 사제들에게서 시작된 개혁
종교개혁을 단순히 반가톨릭 운동으로만 이해하면, 개혁자 대부분이 가톨릭 사제로 출발했다는 사실을 놓치게 된다. 존 위클리프는 로마 가톨릭 사제였지만 그리스도를 구주로 알게 되면서 신학이 바뀌었다. 윌리엄 틴데일도 로마 가톨릭 사제였으며, 훗날 빌보르더 성에서 성직을 박탈당했다. 얀 후스, 존 녹스, 울리히 츠빙글리, 그리고 가장 널리 알려진 마르틴 루터 역시 가톨릭 사제 출신이었다. 개혁은 로마 교회 밖에서만 일어난 운동이 아니었다.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던 사제들도 자신이 속한 교회의 가르침을 다시 살피게 되었다.

루터의 등장은 수세기 동안 모여든 거대한 물줄기를 가로막던 둑이 무너진 일에 비유할 수 있다. 그 물줄기에는 알비파와 왈도파를 둘러싼 논쟁, 위클리프와 후스의 활동, 후스의 친구인 프라하의 제롬이 남긴 자취가 함께 들어 있었다. 이들이 이어 온 성경 신앙의 역사에서 많은 사람이 성경을 읽고 믿었다는 이유로 로마의 정죄를 받고 화형당했다. 루터 시대의 종교개혁은 그보다 앞서 쌓여 온 갈등과 박해의 역사를 배경으로 일어났다.
개혁자들이 선택한 무기는 성경 자체였다. 믿음을 지키고 로마 교회의 권위에 맞서는 그들의 싸움은 에베소서에 나오는 믿음의 방패와 성령의 칼에 비유된다.
에베소서 6: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짐으로써 능히 너희가 악한 자의 모든 불붙은 화살을 끌 수 있을 것이라.
에베소서 6:17 또한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칼,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이들에게 성경은 박해 속에서 지켜 내야 할 책인 동시에, 교회의 가르침과 권위에 맞설 근거였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 믿으며 그 권위를 의지한 사람들은 루터 이전에도 있었다. 루터 시대의 개혁이 독일을 넘어 유럽 전역으로 퍼질 수 있었던 데에는, 앞선 세대와 달리 성경과 개혁자들의 글을 널리 전할 수 있게 된 새로운 여건도 있었다.
가동 활자가 바꾼 성경과 책의 보급
종교개혁이 널리 퍼질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한 기술 가운데 하나가 1440년 요한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가동 활자였다.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것은 인쇄기 자체가 아니라, 분해한 뒤 다시 조합할 수 있는 활자였다. 금세공인으로 출발한 그는 글자를 하나씩 따로 만들어, 인쇄를 마친 뒤에도 그 활자들을 재배열해 다른 내용을 찍을 수 있게 했다.

목사이자 고대 필사본 수집가인 데이비드 브라운 박사는 사람들이 그보다 오래전부터 목판으로 인쇄해 왔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가동 활자의 장점은 인쇄를 처음 가능하게 했다는 데 있지 않았다. 한 번 만든 활자를 다른 책을 찍는 데에도 쓸 수 있어 책 제작이 쉬워졌다는 점이 중요했다. 훗날 종교개혁 서적과 성경을 대량으로 제작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기술 덕분이었다.
그전에는 보통 필사자 한 사람이 성경 한 권을 베끼는 데 약 10개월이 걸렸다. 반면 구텐베르크는 1455년 오늘날 구텐베르크 성경으로 알려진 성경을 출판하면서 한 해에 200부를 제작했다.
| 제작 방식 | 제시된 제작량과 기간 | 성경 보급에서 달라진 점 |
|---|---|---|
| 손으로 필사 | 필사자 한 사람이 성경 한 권을 베끼는 데 약 10개월 | 한 권을 만드는 데 긴 시간이 필요했다. |
| 구텐베르크의 인쇄 | 1455년, 한 해에 200부 제작 | 같은 성경을 한꺼번에 여러 부 보급할 수 있었다. |
로마는 수세기 동안 성경과 위클리프 같은 인물들의 저서를 불태워 왔다. 가동 활자가 등장한 뒤에는 그렇게 없애려던 책들을 전례 없는 규모로 다시 찍어낼 수 있었다. 위클리프 성경 한 권을 만드는 데 필사자가 열 달을 보내야 했던 것과 달리, 이제는 몇 주 만에 성경 여러 부를 제작해 배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루터와 틴데일이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가르침과 번역이 널리 퍼지려면 무엇보다 책이 독자에게 도달해야 했다. 인쇄술은 손으로 한 권씩 베끼던 방식의 한계를 넘어, 종교개혁의 주장과 성경 번역을 훨씬 많은 사람에게 전할 수 있게 했다.
성경 보급에서 원어 본문 연구로
성경을 빠르게 많이 만드는 기술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 어떤 본문을 바탕으로 인쇄하고 번역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구텐베르크의 첫 성경은 제롬이 4세기에 번역한 라틴어 불가타에 기초했다. ‘불가타’라는 이름은 통속어, 곧 일상적으로 쓰는 언어를 뜻한다. 존 위클리프의 영어 번역 역시 라틴어 사본에 기초했지만,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사본들을 사용했는지를 두고는 논쟁이 있었다.

위클리프를 비롯한 이들도 성경이 처음부터 라틴어로 기록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성경의 원래 기록 언어는 대부분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였다. 유대인 필사자들은 히브리어로 기록되고 일부 구절은 아람어로 된 구약 본문을 주의 깊게 보존했으며, 신약 본문은 코이네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다. 라틴어 번역본을 넘어 원래 기록된 언어의 본문을 살피는 일도 중요했다.
인쇄술이 성경을 널리 보급할 수단을 마련하던 시대에, 종교개혁을 낳은 또 하나의 큰 사건이 일어났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으로 그리스어 사본과 그 언어를 아는 학자들이 서방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그리스어 사본의 서방 이동
콘스탄티노플은 4세기에 도시를 세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원래 로마를 대신할 제국의 수도로 계획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가 죽은 뒤 로마 제국은 동서로 분열되었다. 서방에서는 초기부터 주로 라틴어 성경을 사용한 반면, 동방 사람들은 계속 그리스어로 읽고 쓰고 말하면서 그리스어 성경 전통을 이어 갔다. 동방 제국은 시간이 흐르면서 비잔틴 제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453년, 이슬람의 술탄 무함마드 2세가 이끄는 오스만 튀르크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자 서방 세계는 경악했다. 많은 비잔틴 학자들이 서방으로 피신하면서 수천 점의 고대 그리스어 사본을 가져갔고, 그 가운데에는 그리스어 신약 사본도 많이 있었다. 고대 사본 수집가인 데이비드 브라운(David Brown) 목사의 설명에 따르면, 학자들은 오스만 튀르크가 도시를 장악하자 사본을 챙겨 서유럽으로 피신했다.
서방에 도착한 것은 사본만이 아니었다. 그리스어를 읽고 가르칠 수 있는 학자들도 함께 왔다. 이후 여러 해에 걸쳐 많은 비잔틴 학자들이 유럽의 대학에서 그리스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중 한 사람이 스파르타의 헤르모니무스라고도 불린 조지 헤르모니무스(George Hermonymus)였다. 그는 자신이 가르친 대학에서 처음으로 그리스어를 가르친 사람이었다고 전해진다.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신약과 원문 대조
로테르담의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는 최초의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하나의 판본으로 펴낸 학자였다. 서방에 소개된 그리스어 신약성경은 에라스무스와 당시 학자들에게 성경을 새롭게 이해할 길을 열어 주었다. 익숙한 라틴어 번역만 읽는 데서 벗어나, 그 번역을 그리스어 본문과 직접 비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연구자이자 은퇴 교수인 앨런 오라일리 박사는 에라스무스의 작업이 종교개혁에 추진력을 주었을 뿐 아니라 개혁을 지속시키는 힘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벨기에 안데를레흐트에 있는 에라스무스의 집 수석 큐레이터 알렉상드르 바노트하르던은 에라스무스가 여러 언어로 된 다양한 사본을 연구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 연구는 책의 구성에도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당시에는 보통 라틴어 본문만 출판했지만, 에라스무스는 1516년에 처음으로 그리스어 본문과 라틴어 번역을 같은 페이지에 나란히 실었다. 왼쪽에는 그리스어를, 오른쪽 단에는 라틴어를 배치하여 독자가 책을 펼치면 곧바로 두 본문을 대조할 수 있게 했다.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배치였다. 독자가 원문과 번역을 직접 비교하며 에라스무스가 원문의 뜻을 어떻게 옮겼는지 살펴볼 수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고 상세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두 언어를 나란히 놓은 책은 읽기 편한 형식을 넘어 당시의 종교적 사고 체계를 바꾸는 데 기여했다. 에라스무스는 라틴어 학문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그리스어 연구의 가치를 시내와 샘, 웅덩이와 강에 빗대어 표현했다.
“라틴어 학문은 아무리 정교해도 그리스어가 없으면 불구가 되어 반쪽으로 줄어든다. 우리 라틴인에게는 작은 시내 몇 개와 흙탕물 웅덩이 몇 개뿐이지만, 그리스인에게는 수정처럼 맑은 샘과 금이 흐르는 강이 있었기 때문이다.”
불가타와 새로운 라틴어 번역의 차이
그리스어 사본을 구할 수 있게 되자 학자들은 라틴어 불가타를 그리스어 본문과 대조하기 시작했다. 목사이자 저자·연구자인 커크 디비에트로 박사는 이 비교를 통해 불가타가 그리스어 본문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사실이 아주 빠르게 명백해졌다고 설명한다. 그리스어를 배운다는 것은 새로운 언어를 익히는 일에 그치지 않았다. 오랫동안 읽어 온 라틴어 성경이 원문의 뜻을 제대로 전하는지 다시 살피는 일이기도 했다.

고대 필사본 수집가인 데이비드 브라운 목사는 에라스무스가 불가타의 심각한 변질 때문에 그리스어에 기초한 완전히 새로운 라틴어 번역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그 결과 그리스어를 읽지 못해도 라틴어를 아는 사람이라면 에라스무스의 번역과 로마 가톨릭교회가 사용하던 불가타를 비교할 수 있었다. 두 본문을 읽은 사람들에게서는 “어, 서로 맞지 않네”라는 반응이 나왔다. 이제 원어를 아는 학자들뿐 아니라 라틴어 독자들도 같은 언어로 된 두 번역의 차이를 직접 살펴볼 수 있었다.
읽고 이해한 다음 판단하라
라틴어 성경을 원어와 대조하는 작업은 가톨릭 전통의 핵심을 건드렸다.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쳐 온 표현들이 과연 원문의 뜻을 제대로 전하는지가 쟁점이었기 때문이다.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저술에 대해서도 독자가 내용을 읽고 이해한 뒤에 판단하기를 요청했다. 표제지에는 다음과 같은 권고가 실렸다.
“그러므로 참된 신학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읽고, 이해하고, 그런 다음 판단하라.”

먼저 읽으라는 ‘레게’, 이해하라는 ‘코그노스케’, 그런 다음이라는 ‘아크 데인데’는 판단에 앞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차례로 짚는다. 이는 판단을 무작정 미루라는 요구가 아니었다. 새로 그의 저술을 접한 독자도 내용을 직접 읽고 뜻을 이해한 뒤, 그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의 의견을 형성하라는 요청이었다.
보속을 행하는 것과 하나님을 향해 회개하는 것
에라스무스가 라틴어 본문에서 문제 삼은 핵심적인 변개 가운데 하나는 보속(penance)과 회개(repentance)의 차이였다. 무엇을 해야 죄를 용서받는지, 죄인이 누구를 향해야 하는지가 이 번역에 달려 있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경고를 두 표현으로 비교하면 차이가 드러난다.

누가복음 13:3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아니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이와 같이 멸망하리라.
같은 경고를 라틴어 번역은 보속을 행하라는 요구로 전달했다.
“너희가 보속을 행하지 않으면 너희도 모두 이와 같이 멸망할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이를 보속을 행하라는 말이 아니라 회개하라는 말로 옮겼다. 세부적인 교리 논쟁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보속을 수행하는 것과 하나님을 향해 회개하는 것은 서로 다른 요구다. 가톨릭교회에서 보속은 사제의 사죄가 필요한 성사로 설명된다. 사제는 용서를 베풀기 전에 용서받는 사람에게 금식이나 구제, 기도 또는 그 밖의 수고를 요구할 수 있다. 트렌트 공의회도 보속 성사에 많은 눈물과 수고가 필요하다고 선언했다. 따라서 보속에는 사제의 사죄뿐 아니라 용서받는 사람이 수행해야 할 일이 따른다.
반면 회개는 마음과 생각의 변화다.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향하는 것으로, 사람의 내적 방향이 하나님을 향해 달라지는 것을 뜻한다. 보속과 회개를 서로 바꾸어 쓰는 일은 단순한 단어 선택에 그치지 않는다. 죄와 용서를 이해하고 그 말씀에 응답하는 방식까지 달라진다.
| 구분 | 보속 | 회개 |
|---|---|---|
| 중심 의미 | 사제의 사죄와 관련된 성사 및 수행 | 마음과 생각의 변화 |
| 구체적인 내용 | 금식, 구제, 기도 또는 그 밖의 수고가 요구될 수 있음 |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향함 |
| 번역에서 드러나는 요구 | 보속을 행하라 | 회개하라 |
한 저자는 에라스무스의 작업이 교회의 복잡하고 다소 번거로운 보속 체계를 단번에 개인의 마음에 관한 단순한 요구로 바꾸었다고 표현했다. 정해진 보속 절차를 수행하는 대신 마음을 돌이키라는 요구가 전면에 놓였다는 평가였다. 회개하라는 명령은 누가복음의 경고뿐 아니라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전한 말씀에도 나타난다.
사도행전 2:38 베드로가 그들에게 답변하기를 “회개하라. 그리고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 너희 각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
베드로의 명령도 ‘회개하라’로 시작한다. 누가복음에서는 회개하지 않을 때의 멸망을 경고했다면, 여기서는 회개를 명령한 뒤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고 하며 성령의 선물을 약속한다. 두 구절 모두에서 회개라는 표현은 죄인에게 요구되는 응답을 전달한다. 보속과 회개의 차이는 에라스무스가 라틴어 본문에서 발견한 중대한 변개 가운데 하나였으며, 번역의 문제는 이 표현에만 머물지 않았다.
마리아는 은혜를 베푸는 존재인가, 은혜를 받은 사람인가
보속과 회개의 차이처럼, 마리아에게 전한 천사의 인사도 번역에 따라 서로 다른 가르침의 근거가 되었다. 수 세기 동안 마리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관장한다는 믿음을 뒷받침한 것은 천사 가브리엘이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는 누가복음 1장의 라틴어 번역이었다. 라틴어 불가타에서 천사는 마리아를 “은혜가 충만한 이”라고 부른다.

천사가 들어가서 그녀에게, 은혜가 충만한 이여, 평안하라. 주께서 그대와 함께하시니 그대는 여인들 가운데 복되도다. — 누가복음 1:28, 라틴어 불가타 인용
교회사가 앨리스터 맥그래스(Alastair McGrath)에 따르면, 중세에는 이 인사를 마리아가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찬 저장소와 같다는 뜻으로 해석하곤 했다. 마리아 안에 은혜가 가득하다면 은혜가 필요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것을 공급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마리아를 은혜의 원천으로 이해한 사람들은 마리아에게 기도함으로써 그 은혜를 얻을 수 있다고 여겼다.
맥그래스가 전하는 에라스무스의 비판은 번역 자체를 겨냥했다. 천사의 말을 “은혜가 충만한 이여, 평안하라”라고 번역할 수는 결코 없으며, 그 대신 “은혜를 입은 이여, 평안하라” 또는 “호의를 입은 이여, 평안하라”라고 옮길 수 있을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여기서 번역이 가르는 차이는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존재인가, 자신이 은혜를 받은 사람인가에 있다. 마리아가 하나님의 호의를 받았다는 말은 그 호의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권한까지 받았다는 뜻이 아니었다.
누가복음 1:28 그 천사가 그녀에게 와서, 말하기를 “기뻐하라. 은총을 받은 자여,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니 너는 여자 중에서 복받은 자로다.”라고 하니
천사의 인사에서 마리아를 부르는 말은 “은총을 받은 자여”다. 마리아 자신이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은혜를 받았다는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공급한다는 가르침의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
| 비교할 점 | 중세의 라틴어 본문 해석 | 에라스무스가 제시한 번역과 의미 |
|---|---|---|
| 천사의 인사 | “은혜가 충만한 이여” | “은혜를 입은 이여” 또는 “호의를 입은 이여” |
| 마리아와 은혜의 관계 | 은혜로 가득 찬 저장소이자 다른 이들에게 은혜를 공급하는 원천 | 하나님의 호의를 받은 사람 |
|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의미 | 마리아에게 기도하여 은혜를 얻을 수 있다고 이해함 | 은혜를 받았다는 말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다는 뜻은 아님 |
그러나 일부 가톨릭 신자들은 라틴어 표현을 더욱 극단적으로 해석하여 모든 은혜가 오직 마리아를 통해서만 온다고 주장했다. 루이 마리 드 몽포르(Louis Marie de Montfort)가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저술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영감을 주었다. 마리아를 모든 은혜의 통로로 보는 가르침과 대조되는 말씀은 요한복음 1장에 있다. 그리스어 신약에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말하는 대상은 마리아가 아니라 예수님이다.
요한복음 1:14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므로,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으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은 육신이 되어 사람들 가운데 거하신 말씀을 아버지의 독생자로 밝히며, 그분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말한다. 누가복음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마리아와 요한복음에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그리스도는 같은 자리에 놓이지 않는다. 마리아가 받은 은혜를 그리스도께 충만한 은혜와 혼동하면, 은혜를 받는 사람을 은혜를 공급하는 원천으로 바꾸게 된다.
원어 연구와 믿음으로 받는 은혜
에라스무스가 그리스어 사본에서 발견한 내용은 중세 교회에 폭탄과 같은 충격을 주었다. 그가 글에서 말한 수정처럼 맑은 지식의 샘은 뒤이어 일어날 종교개혁의 토대가 되었다. 그의 활동은 그리스어 본문 연구에 머물지 않았다. 성직자들의 부도덕을 비판하는 글을 많이 썼고, 종교재판을 규탄했으며, 모든 사람이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마르틴 루터에게도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길을 새롭게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수년간 수도사로 살았던 루터는 보속과 가톨릭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애썼다. 그러던 중 로마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발견했다.
로마서 1:17 이 복음 안에는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었으니 기록된 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씀은 루터가 그동안 의지했던 노력과는 다른 길을 보여 주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그런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만을 믿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때문이었다. 은혜는 사람이 행위로 얻어 내는 대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었다.
사도행전 10장 43절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죄사함의 약속을 전한다.
사도행전 10:43 그분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기를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죄들의 사함을 받으리라.”고 하였느니라.
모든 선지자가 증언하는 대상은 그리스도이며, 죄사함은 그의 이름으로 주어진다. 그 약속을 받는 조건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보속과 행위에 힘쓰던 루터의 노력과 달리, 이 말씀은 믿음의 대상을 그리스도께 둔다.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본문에서 독일어와 영어 성경으로
원어 성경을 연구하면서 얻은 발견이 널리 전해지려면, 사람들이 자신이 이해하는 언어로 성경을 읽을 수 있어야 했다. 로테르담의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가 펴낸 그리스어 신약성경은 이러한 모국어 번역의 토대가 되었다. 그는 여러 지역을 다니며 사본과 그 안에 담긴 본문을 수집했다. 사본을 읽고 일부를 옮겨 적었으며, 그렇게 모은 자료를 한데 모아 출판했다.

고대 사본 수집가인 데이비드 브라운(David Brown) 목사이자 박사에 따르면, 이 작업은 1516년 초판 출판으로 결실을 맺었다. 다만 초판은 서둘러 제작되었고, 에라스무스는 1519년에 새 판을 내놓았다. 그를 기념하는 박물관은 벨기에 안데를레흐트에 있다.
루터는 에라스무스의 1519년판을 사용해 1522년 독일어 신약성경인 『9월 성경』을 내놓았다. “에라스무스가 낳은 알을 루터가 부화시켰다”는 말처럼, 에라스무스가 편집한 그리스어 본문은 루터의 번역을 거쳐 독일어로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은 1526년 영어 성경 번역에 에라스무스의 1522년판을 사용했다. 두 번역은 에라스무스의 작업을 공통된 토대로 삼았지만, 사용한 판은 서로 달랐다.
| 에라스무스의 판본 | 출판과 후속 번역의 관계 |
|---|---|
| 1516년 초판 | 여러 곳에서 수집하고 옮겨 적은 사본 자료를 모아 출판했으나 서둘러 제작했다. |
| 1519년판 | 루터가 1522년 독일어 신약성경인 『9월 성경』에 사용했다. |
| 1522년판 | 틴데일이 1526년 영어 성경 번역에 사용했다. |
틴데일의 죽음과 빌보르더에 남은 기억
윌리엄 틴데일은 ‘잉글랜드의 사도’라 불렸고, 어떤 이들은 그를 역사상 가장 훌륭한 인물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사랑받았던 그가 로마로부터 미움과 추적을 받은 이유로 지목되는 것은 그리스어 성경을 처음으로 영어로 번역한 일이었다. 틴데일은 결국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해 한동안 투옥되었으며, 벨기에 브뤼셀 바로 북쪽에 있는 빌보르더에서 목 졸려 죽임을 당한 뒤 화형대에서 불태워졌다.
그러나 그가 죽음을 맞은 고장에서조차 그의 이름은 낯설었다. 현지에서는 틴데일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많지 않고, 사람들이 그를 잊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거리에서 그의 이름을 묻자 한 사람은 “틴데일이요?”라고 되물었고, 다른 사람은 동행인이 방금 그가 누구인지 알려 주었다고 답했다. 영어 성경의 역사에 큰 자취를 남긴 인물이지만, 그 기억이 지역 사람들 사이에 널리 남아 있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틴데일을 기리는 이들은 있었다. 엄숙한 석조 기념비에는 그의 이름과 모습을 새긴 청동판이 붙어 있고, 마을의 다른 곳에 자리한 지역 개신교 교회에는 틴데일 박물관이 있다. 기념비와 박물관은 그의 이름뿐 아니라 그가 무엇을 위해 살고 죽었는지를 기억하게 한다.
박물관 문 위에는 네덜란드어 문구 ‘Spreek, want uw knecht hoort.’가 새겨져 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 사무엘이 드린 응답으로, 사무엘상 3장 10절에 나오는 말이다.

사무엘상 3장 10절로 소개되는 문구를 새긴 표지.
사무엘상 3:10 주께서 오셔서, 서서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신지라, 사무엘이 대답하기를 “말씀하소서. 주의 종이 듣나이다.” 하니라.
일반인도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성경
박물관의 목제 표지에 새겨진 문구는 “말씀하소서. 주의 종이 듣나이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다는 이 응답은 틴데일이 일반인에게 열어 주려 했던 길과도 맞닿아 있다.

사무엘상 3장 10절로 소개되는 문구를 새긴 표지.
사무엘상 3:10 주께서 오셔서, 서서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신지라, 사무엘이 대답하기를 “말씀하소서. 주의 종이 듣나이다.” 하니라.
틴데일은 평범한 사람들도 성경의 말씀을 듣고 이해하기를 바랐다. 그에게는 마르틴 루터뿐 아니라 존 위클리프, 그리고 그보다 앞서 일반인에게 복음을 전하려 했던 이들의 본보기가 있었다. 틴데일 박물관 큐레이터의 설명에 따르면, 틴데일이 사제로 서품받은 해는 1517년이었다. 같은 해 루터는 비텐베르크의 작은 교회에 95개조 논제를 못 박아 붙였다. 틴데일이 성직 생활에 들어선 시기는 루터가 종교개혁에 나선 때와 겹쳤다.
하지만 일반인이 성경을 직접 접하려면 로마 교회의 금지를 넘어야 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때부터 로마가 내세웠다고 전해지는 금지의 근거는 다음과 같았다.
“옛 율법에 따라 거룩한 산에 닿은 짐승을 돌로 쳐 죽여야 했듯이, 배움이 없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은 성경에 손대거나 감히 그 교리를 설교해서는 안 된다.”
거룩한 산에 접근하지 못하게 한 옛 율법을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적용하여, 성경을 접하는 일과 그 교리를 설교하는 일까지 막았다. 여기에 언어의 장벽도 있었다. 틴데일 당시 잉글랜드는 여전히 가톨릭 국가였고, 사제들은 일반인이 알아듣지 못하는 라틴어로만 미사를 집전했다. 일반인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이해할 수 없는 언어와 성경 접근을 금하는 권위라는 두 장벽을 함께 넘어야 했다.
그리스어 공부와 케임브리지에서의 갈등
틴데일은 이미 라틴어를 알았지만, 성경을 더 깊이 이해하려고 그리스어도 배우고 싶어 했다. 옥스퍼드 대학교에 진학해 1515년 문학석사 학위를 받은 뒤에도 그의 목표는 신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라틴어로 가르치던 옥스퍼드를 떠나 케임브리지로 향한 까닭은 그곳에서 그리스어를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케임브리지의 그리스어 교육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에라스무스다. 틴데일 박물관 큐레이터는 그를 신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인물로 소개하며, 읽는 것이 금지되어 있던 상황에서도 케임브리지에서는 그리스어로 가르쳤다고 설명한다. 틴데일이 에라스무스에게 직접 배웠는지를 두고는 두 견해가 있다. 직접 가르침을 받았을 가능성을 인정하는 견해가 있는 반면, 에라스무스가 떠난 직후 틴데일이 도착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어느 쪽이든 틴데일과 로마의 갈등은 케임브리지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젊은 틴데일은 울지 추기경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울지는 막강한 성직자이자 헨리 8세의 궁정에서 잉글랜드 대법관을 맡은 인물이었다. 박물관에서 전하는 일화에 따르면, 울지가 금반지를 끼고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방문했을 때 틴데일은 이를 수치스러운 일이라며 외쳤다. 그의 비판은 교회뿐 아니라 왕실에서도 권력을 행사하던 성직자를 향한 것이었다.
쟁기질하는 소년도 읽을 수 있는 성경
성직자들이 부유하게 사는 동안 가난한 사람들은 생활의 궁핍에 언어의 장벽까지 겪었다. 라틴어를 한마디도 모르는 이들은 성직자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알아듣지 못했다. 틴데일에게 모국어 성경은 이 장벽을 허무는 데 반드시 필요했다. 평신도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성경을 눈앞에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고서는 그들을 어떤 진리 안에도 굳게 세울 수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틴데일은 리틀 소드버리에 있는 존 월시 경의 집으로 갔다. 기사였던 월시 경은 가톨릭 고위 성직자들과 교회 고위 관리들을 저택에 초대하곤 했다. 틴데일은 그 집에서 자녀들을 가르쳤고, 당시 집 뒤에 있던 교회에서 목회도 했다. 그가 신약 번역을 시작한 곳을 리틀 소드버리 저택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사람들에게 성경을 직접 읽게 하려는 열망을 키우던 이곳에서 그는 가톨릭 사제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한번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사제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틴데일이 “말씀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라고 응수했다. 틴데일이 거듭 성경을 들어 맞서자 화가 난 사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교황의 법 없이 지내느니 차라리 하나님의 법 없이 지내는 게 낫겠소.”
교황의 법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법 없이도 지낼 수 있다는 말을 틴데일은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뜨거운 열정으로 맞섰다.
“나는 교황과 그의 모든 법에 도전하오. 하나님께서 내 목숨을 살려 두신다면, 여러 해가 지나기 전에 쟁기질하는 소년이 당신보다 성경을 더 많이 알게 하겠소.”
이 선언 때문에 틴데일은 큰 곤경에 처했다. 『폭스의 순교사』에 따르면 그는 지역 교회 당국자들 앞에 출석해야 했고, 그들은 마치 개를 대하듯 그에게 호통을 쳤다. 그러나 질책을 받고도 틴데일은 쟁기질하는 소년이 읽을 수 있는 언어로 성경을 옮기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쟁기질하는 소년은 논쟁에서 상대를 압도하려고 꺼낸 비유만은 아니었다. 틴데일은 리틀 소드버리 저택의 작은 방에서 밖을 내다보며 세번 계곡 너머로 소년들이 밭을 가는 모습을 보곤 했다. 그에게는 그 소년들이 성경을 읽을 수 없다면 구원에 이르도록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지 못하리라는 절박함이 있었다. 사람들이 성경을 직접 읽고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이 번역과 보급의 원동력이었다. 소년에 관한 선언은 그의 평생 과업이 되었고, 그 일로 그는 로마의 미움과 박해를 받게 되었다.
틴데일의 고난과 매이지 않는 말씀
윌리엄 틴데일은 사람들이 자기 언어로 성경을 읽고 그리스도를 알게 하려다 감옥에 갇히고 죽음에 이르렀다. 그러나 번역자를 가두는 것이 곧 말씀을 가두는 일은 아니었다. 사도 바울도 복음 때문에 죄인처럼 결박당했지만, 자신이 매인 처지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고 기록했다.

디모데후서 2:9 이 복음으로 인하여 내가 악을 행하는 자처럼 매여서까지 고난을 받고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느니라.
디모데후서 2:10 그러므로 내가 택함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고난을 견딘 목적은 택함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는 데 있었다. 틴데일 역시 다른 사람들이 구원의 말씀을 읽을 수 있도록 번역에 힘썼다. 그의 수감과 죽음은 그 일을 위해 치른 대가였다.
틴데일을 박해로 몰아간 것은 신앙과 성경에 대한 확신이었다. 그는 구원은 은혜로, 믿음을 통해 얻는다고 가르쳤고, 성인들에게 기도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으며, 사람들이 자기 언어로 된 성경을 가져야 한다고 단언했다. 이러한 가르침 때문에 성직을 박탈당했고 결국 처형당했다.
처형은 목을 졸라 죽인 뒤 시신을 불태우는 방식이었다. 불태우기 전에 먼저 죽인 것을 얼마간의 ‘자비’를 베푼 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처형을 면해 준 것이 아니라 죽이는 방식만 달리한 일을 과연 자비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약 16개월을 보낸 빌보르더의 감방
틴데일은 처형되기 전 약 16개월 동안 감방에 갇혀 있었다. 수감 중인 그를 그린 회화들은 감옥을 거의 낭만적인 공간처럼 묘사하지만, 실제 환경은 상당히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틴데일 박물관에는 그가 갇혔던 감방을 실제 크기로 재현한 복원물이 있다. 박물관 설명자는 실제 감방도 그처럼 작았다고 답했다. 잠자는 자리와 용변을 보는 곳이 있었을 뿐, 내부는 거의 텅 비어 있었고 몹시 추웠다.

틴데일이 처형된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는 빌보르더 성 밖에 있다. 성은 이후 파괴되었지만, 박물관에 남아 있는 모형을 통해 당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좁은 감방 복원물과 함께 보면 틴데일이 갇혀 지내다가 성 밖에서 처형되기까지의 공간을 이해할 수 있다.

수백 년이 지난 뒤에도 틴데일이 마지막 순간에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를 두고 논쟁이 계속되었다. 유럽 개신교 연구소(European Institute of Protestant Studies)는 교살로 그가 완전히 숨을 거두지는 못했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틴데일은 산 채로 불태워지는 동안에도 고통을 겪었다.

기둥에 묶인 틴데일과 주변에 쌓인 장작을 묘사한 순교 삽화다.
영어 성경과 교회의 권위, 헨리 8세와의 갈등
틴데일의 처형 이유를 두고도 설명이 갈린다. 한 설명자는 틴데일의 유일한 잘못이 교황을 가톨릭 교회의 수장으로 인정하지 않은 데 있었다고 말한다. 반면 런던 대영도서관의 모이라 고프(Moira Goff) 큐레이터는 근본적인 이유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일에 있었다고 본다.

고프 큐레이터가 짚는 당시의 불안은 일반 사람들이 성경을 직접 읽을 때 교회의 권위가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성경을 일상에서 쓰는 말인 영어로 번역해서는 안 된다는 정서가 강했고, 표면상의 처형 사유인 이단 혐의 뒤에는 누구나 영어 성경을 읽게 되는 데 대한 깊은 불안이 있었다. 사람들이 교회의 위계에 귀를 기울이고 윗사람들의 권위 아래 머무는 대신,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헨리 8세와의 갈등이 겹쳤다. 틴데일은 처음에는 헨리가 교회의 최고 수장이 되려는 움직임을 지지했지만, 이후 왕의 이혼에는 반대했다. 교황의 권위를 거부하는 것과 헨리의 결혼 문제를 지지하는 것은 같은 선택이 아니었다. 영어 성경을 둘러싼 종교적 대립에는 이처럼 왕권과 혼인 문제까지 얽혀 있었다.
헨리 8세와 토머스 모어의 교황 충성
헨리 8세는 아라곤의 캐서린과 맺은 혼인을 무효로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번잡한 행정 절차를 뜻하는 ‘레드 테이프(red tape)’라는 말도 그가 교황에게 청원하는 과정에서 받은 수많은 붉은 인장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결국 헨리는 교황권을 떨쳐 버리고 스스로 잉글랜드 교회의 세속적 수장이 되었지만, 마음속으로는 로마에 깊은 충성심을 품고 있었다. 한때 교황에게 지나친 경의를 표한다는 경고를 받았을 때도 다음과 같이 답했다.
“교황에게 표하는 경의가 지나치다는 법은 없다.”
당시 잉글랜드 대법관이었던 토머스 모어 경 역시 교황권에 충성했으며, 훗날 틴데일과 그의 성경을 가장 강하게 반대하는 인물이 되었다. 모어는 틴데일을 짐승이자 악마의 개집에 사는 지옥의 사냥개라고 불렀다. 그가 쓴 책은 모두 아홉 권이었고, 틴데일을 반박하는 데 쏟아부은 글만 천 쪽이 넘었다. 논박과 독설로 가득한 그 글에서 모어는 일관되게 교황과 로마 가톨릭 교회의 최종 권위를 옹호했다.
그러나 헨리 8세가 로마와 결별하면서 두 사람의 충성은 서로 다른 길로 갈라졌다. 모어는 계속 교황에게 충성한 탓에 반역자로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 로마는 훗날 교황권에 대한 그의 변함없는 충성을 기려 그를 성인으로 추대했다.
수호성인 지정과 종교개혁 박해의 기억
200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 토머스 모어를 위정자와 정치인의 천상 수호성인으로 지정했다. 교황에 대한 모어의 변함없는 충성이 그 배경이었을지도 모른다. 선포 날짜는 10월 31일이었다. 유럽 일부 지역에서 종교개혁 기념일로 지키는 이날은 마르틴 루터가 1517년 비텐베르크의 교회 문에 95개조 논제를 못 박은 날을 기념한다. 종교개혁에 맞섰던 인물을 바로 그 기념일에 수호성인으로 선포한 것은 현대에 와서 종교개혁을 모욕하려는 의도였을까?

유럽의 일부 개신교도들이 모어의 수호성인 지정을 우려한 데에는 박해의 기억이 있었다. 모어는 틴데일을 증오하며 수년 동안 그를 잡으려 추적했고, 그의 추종자 여러 명을 이단이라는 이유로 고문하고 화형에 처하게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첼시에 있는 자기 집에 차꼬와 채찍질용 나무 기둥을 설치해 이단자들을 직접 심문했다고 한다. 모어의 글로 인용되는 다음 구절에는 성직자가 이단을 선고하고 세속 권력이 처형하는 일을 함께 정당화하는 태도가 드러난다.
“그들은 이단자이므로 성직자들은 그들을 이단자로 선고하고, 그들은 마땅히 그런 벌을 받아야 하므로 세속 권력은 그들을 불태운다. 스미스필드의 불길을 거친 뒤에는 지옥이 그들을 받아들이고, 그 비참한 자들은 거기서 영원히 불탄다.”
개신교 역사가들은 틴데일이 배신당하고 처형되도록 배후에서 일을 꾸민 인물도 모어였다고 믿어 왔다. 이들이 기억하는 모어는 교황에 대한 충성을 지킨 인물인 동시에, 틴데일과 그의 추종자들을 억압한 인물이었다.
틴데일의 죽음 뒤에 승인된 영어 성경
틴데일은 살아서 자기 번역이 왕의 승인을 받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번역의 끝은 아니었다. 죽음을 앞두고 드린 마지막 기도는 이후 영어 성경의 운명과 함께 기억되었다.

틴데일의 마지막 순간을 재현한 장면이다.
빌보르더 틴데일 박물관 큐레이터는 틴데일이 죽고 불과 6개월 뒤에 일어난 변화를 이 역사의 슬픈 역설로 꼽는다. 왕은 마일스 커버데일에게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라고 명했고, 커버데일은 그 작업에 윌리엄 틴데일이 남긴 번역을 사용했다. 처형된 번역자의 성경이 이제 왕명으로 이루어지는 번역의 바탕이 된 것이다.
헨리 8세는 역사상 처음으로 영어 성경 번역을 승인했다. 사람들은 이를 하나님께서 틴데일의 마지막 기도에 응답하신 일로 믿어 왔다. 반대자들이 막으려 했던 번역은 왕의 승인 아래 이어졌으며, 이후에 나온 거의 모든 영어 성경에 영향을 미쳤다.
성경의 문장이 영어의 일상 표현이 되다
틴데일 성경은 최초로 널리 보급된 영어 성경 번역본이었다. 그 문장들은 후대 성경뿐 아니라 오늘날의 영어에도 남아 있다. 런던 대영도서관의 큐레이터 모이라 고프는 대표적인 예로 “빛이 있으라.”를 꼽는다.

창세기 1:3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더라.
“빛이 있으라.”에 해당하는 영어 표현은 틴데일의 번역에서 직접 유래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창조의 장면에 등장하는 이 짧은 명령문은 성경 밖에서도 쓰이는 일상 언어가 되었다.
고프가 특히 좋아하는 또 다른 예는 로마서 13장 1절의 ‘모든 권세’에 해당하는 영어 구절이다.
로마서 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지 않은 권세는 없나니,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라.
본래 위에 있는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에 들어 있는 표현이지만, 오늘날에는 성경의 원래 맥락과 상당히 다른 상황에서도 쓰인다. 성경을 직접 인용하려는 사람이 아니어도 성경 번역이 남긴 말을 사용하게 된 셈이다.
목사이자 저자이며 고대 문헌 수집가인 데이비드 브라운 박사는 틴데일이 1526년 신약성경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아는 영어의 토대를 놓았다고 평가한다. 말하자면 잉글랜드 사람들에게 영어를 선사했다는 평가다. 번역문이 인쇄되어 널리 퍼지면서 독자들은 성경의 표현에 익숙해졌고, 그 언어는 영어 자체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이전에는 일반 사람이 읽을 수 없고 읽는 일 자체가 금기시되던 성경이 가장 많이 읽히는 책이 되면서, 사람들에게 읽기를 배우는 길도 열어 주었다.
교회에 보관하던 큰 책에서 개인이 휴대하는 성경으로
틴데일 성경은 책을 사용하는 방식도 바꾸려 했다. 이전의 성경들은 매우 커서 교회에 보관되었지만, 틴데일은 개인이 어디를 가든 성경을 가지고 다닐 수 있도록 크기를 줄이려 했다. 자신의 언어로 읽는 성경을 자신이 지니고 다니는 책으로 만들려는 목적이 그 판형에 담겨 있었다.
틴데일 성경 대부분은 종교재판으로 파괴되어 몇 부만 남았다. 그중 한 부가 영국 런던의 대영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을 소개한 설명자는 외관의 아름다움과 함께 언어적 중요성을 짚는다. 1526년에 인쇄된 책인데도 그 언어가 오늘날까지 친숙한 까닭은 후대 성경들, 특히 1611년 킹제임스성경에 틴데일의 표현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대영도서관의 보물 전시실에서는 보통 틴데일 성경과 킹제임스성경을 함께 전시한다. 관람객은 인쇄 시기가 거의 100년 차이 나는 두 역본을 나란히 비교하면서, 먼저 나온 번역의 표현이 후대 성경에 어떻게 남았는지 살펴볼 수 있다.

영어 누가복음 제1장의 본문이다.
미완성 구약 번역과 후대 영어 성경
틴데일의 작업은 신약성경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죽기 전에 구약성경의 상당 부분을 최초로 히브리어에서 영어로 번역했다. 모세오경과 여호수아부터 역대기하까지의 책들, 요나서가 그 범위에 포함되었다. 구약 전체를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남겨진 모든 번역 자료는 후대 영어 성경의 기반이 되었다.

헨리 8세의 명으로 제작된 대성경과 종교개혁의 성경으로 알려지게 될 제네바 성경은 모두 이 작업을 이어받았다. 킹제임스성경에도 틴데일의 표현이 깊이 남았다. 컴퓨터 기술을 활용한 현대 학자들은 킹제임스성경의 약 83%가 그의 작업에 기초했다고 본다.
| 연도 | 성경 | 틴데일의 작업과 맺는 관계 |
|---|---|---|
| 1526년 | 틴데일 신약성경 | 널리 보급되어 영어의 발전과 후대 성경의 표현에 영향을 주었다. |
| 1539년 | 대성경 | 헨리 8세의 명으로 제작되었으며, 틴데일이 남긴 번역 자료를 기반으로 삼았다. |
| 1557년 | 제네바 성경 | 틴데일의 작업을 기반으로 삼았으며, 종교개혁의 성경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
| 1611년 | 킹제임스성경 | 틴데일의 표현을 이어받았다. 컴퓨터 기술을 활용한 학자들은 약 83%가 그의 작업에 기초했다고 본다. |
이처럼 번역이 거듭되는 동안에도 오래 기억되고 인용되는 문장들이 있었다. 앞서 나온 “빛이 있으라.”와 함께,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에 해당하는 영어 표현도 틴데일의 번역에서 직접 유래한 잘 알려진 사례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행방을 물으셨을 때 카인이 내놓은 대답이다.
창세기 4:9 ○ 주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가 말하기를 “나는 모르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하니,
축복과 기도, 슬픔과 권면에 남은 번역의 유산
틴데일의 번역이 남긴 익숙한 문장들은 신앙과 삶의 여러 모습을 담고 있다. 민수기의 축복은 주께서 복을 주시고 지켜 주시기를, 그분의 얼굴을 비추시고 은혜를 베푸시기를 구한다.
민수기 6:24 ‘주께서 너에게 복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민수기 6:25 주께서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시고 네게 은혜로우시기를 원하노라.
요한복음 첫머리의 선언과 주기도문도 대표적인 사례다. 말씀께서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하나님이셨다는 선언,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구하는 기도에 틴데일의 번역이 남긴 표현이 이어져 왔다.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느니라.
마태복음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시옵고,
그 유산은 축복과 기도의 언어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마태복음의 “시대의 표적들”은 시대를 분별하는 표현으로, 영은 원하지만 육신이 연약하다는 말씀은 인간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말로 꼽힌다.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가 밖으로 나가 비통하게 울었다는 문장에는 깊은 슬픔이 담겨 있다.
마태복음 16:3 또 아침에 하늘이 붉고 찌푸리면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 하나니, 오 너희 위선자들아, 너희가 하늘의 현상은 분별할 줄 알면서도 시대의 표적들은 분별할 줄 모르느냐?
마태복음 26:41 너희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참으로 영은 원하지만 육신이 연약하도다.”라고 하시더라.
마태복음 26:75 그때 베드로가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밖으로 나가 비통하게 울더라.
고린도전서에는 사람들과 천사들의 방언으로 말한다는 표현이 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의 범위를 넓게 펼쳐 보이는 문장이다. 사도행전의 문장은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한다고 말하며, 삶과 움직임과 존재를 한데 담는다. 이 두 표현 역시 틴데일이 영어에 남긴 언어적 유산으로 꼽힌다.
고린도전서 13:1 내가 사람들과 천사들의 방언들로 말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내는 놋이나 시끄러운 꽹과리가 되고
사도행전 17:28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 어떤 이들도 말한 바와 같이 우리도 그분의 자손이라 하였으니
믿음의 실천을 권면하는 짧은 문장들도 오래 남았다.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명령,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는 격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보자는 권면이다. 틴데일의 번역은 하나님을 말하고 기도하는 언어에서부터 연약함과 슬픔을 표현하고 믿음의 삶을 격려하는 말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흔적을 남겼다.
디모데전서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원한 생명을 붙잡으라. 이를 위하여 네가 또한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들 앞에서 선한 고백으로 고백하였느니라.
데살로니가후서 3:13 그러나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히브리서 12:2 그리고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자기 앞에 놓인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견디시고 수치를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
살아남은 작은 성경에 담긴 개인의 소유와 애정
틴데일이 길을 연 개인이 자기 성경을 소유하고 휴대한다는 생각은 오늘날에는 익숙하지만, 당시에는 성경을 접하는 방식을 바꾸는 일이었다. 자기 언어로 말씀을 읽는 데서 나아가, 그 말씀이 담긴 책을 자신의 소유물로 지니고 다닐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틴데일 신약의 원본은 분명 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책이었다. 이를 보여 주는 영인본은 원본보다 조금 더 클 수도 있다고 소개된다. 영인본을 넣으려면 큰 주머니가 필요하겠다는 농담은 원본이 얼마나 작은 책이었는지를 떠올리게 한다. 휴대용 판형은 단순히 크기를 줄인 것이 아니라, 독자가 어디서든 자기 성경을 펼칠 수 있게 하려는 선택이었다.

성경을 불태우라는 명령이 내려진 뒤, 소장본을 소개할 당시까지 남은 틴데일 성경은 단 세 권뿐이었다. 그 가운데 한 권은 거의 완전한 상태로 살아남았으며 아름다운 장식까지 간직하고 있었다. 펼친 페이지의 본문과 작은 채색 장식에는 한때 이 책을 소중히 여겼던 소유자의 애정이 남아 있다.

소장본을 소개한 설명자는 이 책을 아름답고 마음을 뭉클하게 하며, 매우 중요한 책으로 평가했다. 사람들에게 소중한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귀중한 물건이고, 극히 드물게 살아남은 책이자 비범한 번역자 틴데일과 연결된 특별한 유물이기 때문이다. 책의 아름다움과 희소성뿐 아니라 그것을 아꼈던 사람의 마음과 번역자의 생애도 이 작은 성경을 소중하게 만든다.
수천 가지 오류라는 비난과 틴데일의 답변
일부 학자들은 틴데일을 모든 영어 번역자 가운데 단연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한다. 그러나 그가 번역하던 시대의 반대자들은 그의 성경뿐 아니라 감히 그 성경을 읽은 사람들까지 불태웠다. 번역의 정확성을 둘러싼 논쟁은 책과 독자를 향한 박해와 맞물려 있었다.
런던 주교 커스버트 턴스털과 토머스 모어 경은 틴데일을 ‘지옥의 사냥개’라고 부르며 그의 성경에 수천 가지 오류가 있다고 선언했다. 틴데일은 이에 맞서 하나님을 증인으로 모시고, 자신의 양심을 거슬러 하나님의 말씀을 한 음절도 바꾸지 않았다고 답했다. 명예와 쾌락과 재물을 모두 얻을 수 있더라도 말씀을 바꾸지 않겠다는 다짐에는, 번역자로서 사람의 평가보다 주 예수님 앞에 설 날을 의식했던 그의 태도가 담겨 있다.
“우리가 우리 주 예수님 앞에 설 날에 대비하여 하나님을 증인으로 모십니다. 나는 양심을 거슬러 하나님의 말씀을 한 음절도 바꾼 적이 없으며, 명예든 쾌락이든 재물이든 이 땅의 모든 것을 내게 준다 해도, 지금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구원과 심판의 말씀을 자기 언어로 읽는 일
윌리엄 틴데일에게 사람들이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아는 일은 구원과 마지막 날의 심판에 관계된 문제였다. 요한복음 12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빛과 구원으로 밝히셨다.

요한복음 12: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12:47 만일 누가 내 말을 듣고 믿지 아니한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내가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라.
그분을 믿는 사람은 어두움에 거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다는 말씀을, 그분을 거절하는 사람에게도 심판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어지는 말씀은 그분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마지막 날 무엇으로 심판받는지를 분명히 한다.
요한복음 12:48 나를 거절하고 내 말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말한 그 말이 그를 마지막 날에 심판하리라.
마지막 날의 심판 기준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이다. 틴데일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알도록 힘쓴 까닭도 여기에 있었다. 영어 성경의 번역과 보급은 단순히 읽을 책을 하나 더 만드는 일이 아니라, 사람들이 믿어야 할 말씀과 마지막 날 자신을 심판할 말씀을 자기 언어로 읽게 하는 일이었다.
커버데일과 로저스가 이어 간 영어 성경
마일스 커버데일(Miles Coverdale)은 케임브리지에서 함께 지내던 때부터 틴데일의 친구였다. 그는 틴데일의 작업을 활용해 구약 번역을 마치고, 1535년에 커버데일 성경을 펴냈다. 구약과 신약을 모두 담아 영어로 인쇄한 최초의 완역 성경이었다.

틴데일은 이듬해인 1536년에 처형되었지만, 그의 번역 작업은 추종자들을 통해 이어졌다. 그중 존 로저스(John Rogers)는 토머스 매튜(Thomas Matthew)라는 가명으로 1537년에 매튜 성경을 출판했다. 틴데일과 커버데일의 작업을 결합한 이 성경은 영국에서 인쇄된 최초의 완역 성경이었다. 앞서 틴데일의 신약은 독일에서, 커버데일 성경은 스위스에서 인쇄되었으며, 두 성경 모두 불법으로 영국에 밀반입해야 했다. 커버데일 성경이 신·구약 전체를 영어로 인쇄한 성경이었다면, 매튜 성경은 완역 성경을 영국 안에서 인쇄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단계에 이르렀다.
| 연도 | 성경·사건 | 영어 성경이 이어진 과정 |
|---|---|---|
| 1535년 | 커버데일 성경 | 틴데일의 작업을 활용해 구약 번역을 마치고 신·구약을 함께 영어로 인쇄했다. |
| 1536년 | 틴데일 처형 | 이후 그의 추종자인 존 로저스가 번역 작업을 이어 출판했다. |
| 1537년 | 매튜 성경 | 틴데일과 커버데일의 작업을 결합한 완역 성경을 영국에서 인쇄했다. |
| 1539년 | 대성경 | 왕실의 공식 승인 아래 커버데일의 기존 번역을 개정했다. |
왕실의 승인을 받아 교회에 비치된 대성경
틴데일이 죽음을 앞두고 기도한 뒤, 토머스 크롬웰(Thomas Cromwell)은 헨리 8세에게 새로 세워진 영국 국교회를 위한 영어 성경을 공식 승인하도록 압박했다. 이어 커버데일에게 기존 번역의 개정을 맡겼고, 그 결과 1539년에 대성경(Great Bible)이 나왔다. 해외에서 인쇄해 몰래 들여와야 했던 영어 성경이 이제 왕실의 승인을 받게 된 것이다.
대성경이라는 이름은 책의 큰 크기에서 나왔다. 이 성경은 크롬웰 성경으로도 알려졌으며,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크랜머(Thomas Cranmer)가 서문을 썼기 때문에 크랜머 성경이라고도 불렸다. 세 이름은 서로 다른 성경이 아니라, 책의 크기와 제작에 관여한 인물들을 따라 같은 성경을 달리 부른 명칭이었다.
대성경은 왕실의 승인을 받는 데 그치지 않고 영국의 모든 교회에 비치하도록 명령되었다. 교회에서는 이 성경을 강단에 사슬로 묶어 두었기 때문에 ‘사슬 성경’이라고도 불렀다. 책 받침에 펼쳐 놓고 사슬로 연결한 성경은 영어로 된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에서 공개적으로 접할 수 있게 된 변화를 보여 준다.

영어 성경의 공인과 에드워드 6세의 개혁
대성경이 공인되면서 영어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 잉글랜드 백성에게 공개적으로, 자유롭게 선포되었다. 누구나 성경을 읽고 들을 수 있게 된 변화는 교황의 권위에서 벗어나는 일과 맞물려 있었다. 개신교도들은 참된 복음의 말씀이 도미니크 시대는 물론 그 이전부터 로마 교황의 가르침과 상반되었다고 보았다. 가톨릭 성직자들이 영어 성경의 공개적인 선포를 달가워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1547년 헨리 8세가 죽자 아홉 살 아들 에드워드 6세가 왕위에 올랐다. 새 왕은 개혁자들의 대의를 지지했고, 토머스 크랜머 대주교의 도움으로 잉글랜드는 한동안 확고한 개신교 국가가 되었다. 개신교도들은 에드워드가 잉글랜드를 우상숭배와 교황주의에서 벗어나게 하고 철저히 개혁하리라 기대했다. 그를 성경의 요시야 같은 인물로 바라본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들에게 개혁은 단순히 왕권이나 교회 조직을 바꾸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로마의 기만 사이의 투쟁이었다. 어린 왕에게 거는 기대와 교황제를 향한 반대는 당시의 종교적 회화에도 뚜렷하게 나타났다.
회화에 담긴 성경과 교황 권위의 대조
에드워드를 묘사한 한 회화에서는 어린 왕이 왕좌에 앉아 있고, 교황은 그 발치에 놓여 있다. 교황 주위에는 ‘우상숭배’, ‘미신’, ‘모든 육체는 풀이요’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반면 교황의 머리 위에 펼쳐진 책에는 ‘주의 말씀은 영원토록 남아 있음이라.’라는 문구가 놓인다. 그림은 쇠하는 인간과 영원히 남는 말씀을 위아래로 배치해 대조한다.

교황 곁에 적힌 육체에 관한 문구는 이사야 40:6의 말씀과 맞닿아 있다.
이사야 40:6 그 음성이 말하기를 “부르짖으라.” 하였더니 그가 말하기를 “내가 무엇을 부르짖으리이까?” 하였느니라. 모든 육체는 풀이요,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라.
‘모든 육체는 풀이요’라는 표현을 교황에게 적용하면, 교황 역시 풀처럼 쇠하는 인간이다. 그를 둘러싼 우상숭배와 미신이라는 말은 교황의 종교적 권위를 겨냥한 개신교의 비판을 담고 있다. 반대로 머리 위의 책에 적힌 말씀은 베드로전서 1:25에서 그 대조를 분명히 한다.
베드로전서 1:25 주의 말씀은 영원토록 남아 있음이라. 이것이 너희에게 복음으로 전해진 말씀이니라.
교황의 권위에 맞서는 것은 다른 인간의 영구적인 권위가 아니라 영원토록 남는 주의 말씀이다. 교황의 머리 위에 성경을 놓은 배치는 개신교도들이 최종 권위를 어디에 두었는지 보여 준다.
또 다른 개신교 우의화는 같은 대립을 더 격렬한 행동으로 표현한다. 네 복음서 기자인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쓰러진 교황에게 돌을 던진다. 그림 일부에 보이는 돌에는 요한을 가리키는 ‘IOANNES’라는 명문이 있다. 마치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황을 짓누르는 듯한 이 장면에서, 돌을 던지는 행동은 복음서의 권위가 교황의 권위를 무너뜨린다는 뜻을 나타낸다.

에드워드 자신의 글에서도 교황제를 향한 강한 적대감을 볼 수 있다. 그는 열한 살에 다음과 같이 썼다.
“교황은 진정 악마의 아들이며, 악인이며, 적그리스도이며, 가증스러운 폭군이다.”
그러나 개혁을 지지하던 어린 왕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에드워드는 즉위한 지 6년이 채 지나기 전에 병들어 죽었다. 그는 종교개혁을 보존하려고 개신교도인 사촌 제인 그레이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제인은 ‘아홉 날의 여왕’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제인과 맞선 인물은 에드워드의 가톨릭 신자인 누이 메리였다.
메리의 로마 복귀 정책과 영어 성경에 대한 박해
메리가 왕위 계승에 이의를 제기하고 왕권을 주장하면서 제인 그레이는 처형되었고, ‘피의 메리’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메리는 잉글랜드를 다시 로마 가톨릭으로 돌려놓으려 했으며, 그 과정에서 벌어진 박해로 이 악명 높은 별칭을 얻었다. 저자 게리 드마르는 메리의 정책이 영어 성경을 없애려는 명령으로 이어졌다고 기록한다.
“잉글랜드 국민을 강제로 로마 가톨릭으로 되돌리기로 결심한 그녀는 영어로 된 모든 성경을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박해는 책을 불태우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영어 성경을 읽던 사람들과 일부 번역자들까지 화형의 대상이 되었다. 메리 치하에서 처음 화형을 당한 순교자는 매튜 성경을 출판한 존 로저스였다. 그는 믿음을 지킨 채 죽음을 맞았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의 자녀들도 곁에서 아버지를 도우며 위로했다. 그 모습은 아버지를 처형장이 아니라 혼인 잔치로 인도하는 듯했다고 한다.
크랜머의 마지막 선언과 제네바로 향한 망명자들
대성경의 서문을 쓴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크랜머도 처형을 피하지 못했다. 나이 든 크랜머는 메리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자 두려움에 자신의 믿음을 버리고 로마를 지지하는 글을 썼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해 그 글을 철회했고, 결국 화형대로 보내졌다. 화형을 앞두고 그는 자신의 손으로 쓴 글이 마음속 믿음에 반하는 것이었다고 고백했다. 「1556년: 크랜머 대주교의 처형」이라는 익명의 목격자 기록에는 그의 마지막 선언이 남아 있다.
“나는 사실이 아닌 것들을 많이 썼다. 그리고 내 손이 내 마음에 반하는 글을 써서 죄를 지었으므로, 내 손이 먼저 불태워져야 한다. 교황에 대해서는, 그를 그리스도의 원수이자 적그리스도로 여겨 그의 모든 거짓 교리와 함께 거부한다.”

크랜머는 로마를 지지한 글을 철회했을 뿐 아니라, 교황을 적그리스도(‘Antichrist’)로 지목하며 그의 교리도 거부했다. 그리고 선언한 대로 그 글을 쓴 손을 불길 속에 먼저 내밀며 화형을 당했다.

메리 치하 개신교 신자들의 화형을 묘사한 역사 삽화다.
화형은 성경 번역자나 교회 지도자에게만 닥친 일이 아니었다. 존 다울링은 『로마교의 역사』에서 메리의 명령에 따라 죽은 사람들의 수와 함께, 박해가 재산과 직업, 성별과 나이를 가리지 않았음을 기록했다.
“가장 적게 잡아도 288명이 이단이라는 죄목으로 그녀의 명령에 따라 산 채로 불태워졌다. 그중에는 부자와 가난한 자, 사제와 평신도, 상인과 농부, 앞을 못 보는 이와 다리를 저는 이, 무력한 여성과 갓 태어난 아기도 있었다.”
이러한 박해를 피해 약 800명의 영국 학자가 나라를 떠났다. 그중 다수는 제네바로 피신해 장 칼뱅과 스위스 개혁자들의 보호를 받았다. 영어 성경 번역자 마일스 커버데일과 저명한 스코틀랜드 개혁자 존 녹스도 이 망명자들 가운데 있었다.
왕실과 로마의 제약을 벗어난 영어 성경
제네바로 피신한 망명자들은 영어 성경을 다시 개정하기로 뜻을 모았다. 마일스 커버데일과 저명한 스코틀랜드 개혁자 존 녹스도 이 작업에 참여했다. 이들이 만들려는 성경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원어로 된 가장 좋은 사본들을 토대로 하면서도, 잉글랜드 왕실이나 로마의 제약을 받지 않는 영어 성경이었다.

신약 번역에는 윌리엄 틴데일이 죽기 전인 1534년에 개정한 신약성경을 활용했다. 이를 바탕으로 1557년 제네바 성경의 첫 부분인 신약성경이 나왔다. 이듬해인 1558년에는 메리 여왕이 죽고 개신교 신자인 자매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올랐다. 1560년에 출판된 제네바 성경 신구약 완역본은 잉글랜드의 새 여왕 엘리자베스 1세에게 헌정되었다.
| 연도 | 번역과 출판의 진행 |
|---|---|
| 1534년 | 틴데일이 자신의 신약성경을 개정했다. |
| 1557년 | 틴데일의 개정판을 활용한 제네바 신약성경이 나왔다. |
| 1558년 | 메리 여왕 사후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올랐다. |
| 1560년 | 제네바 성경 신구약 완역본이 출판되어 엘리자베스 1세에게 헌정되었다. |
목사이자 저자이며 고대 문헌 수집가인 데이비드 브라운(David Brown) 박사는 제네바 성경을 성경 전체가 히브리어·아람어·그리스어에서 번역된 최초의 성경으로 소개한다. 이 역본은 흔히 필그림들의 성경이라고도 불린다. 필그림들이 사랑했고, 미국으로 건너가 1620년 플리머스에 상륙할 때 가져간 성경이 바로 제네바 성경이었기 때문이다.
개혁자들의 해설을 한 권에 담은 학습용 성경
제네바 역본은 그때까지 출판된 영어 성경 가운데 가장 인기 있고 널리 사용되는 성경이 되었다. 1560년부터 1644년까지 200개가 넘는 판본이 나왔으며, 존 번연, 존 밀턴, 올리버 크롬웰, 윌리엄 셰익스피어, 윌리엄 브래드퍼드도 이 성경을 사용했다.

독자들은 제네바 성경 한 권으로 성경 본문뿐 아니라 당대의 대표적인 성경 학자들과 개혁자들의 해설도 함께 읽을 수 있었다. 장 칼뱅, 테오도르 베자, 존 녹스, 마일스 커버데일 등의 해설이 각주에 담겼고, 그 분량은 30만 단어가 넘었다. 이처럼 방대한 해설을 갖춘 제네바 성경은 최초의 학습용 성경으로도 여겨진다. 한 권 안에서 여러 개혁자의 주석을 함께 공부할 수 있었기에, 그 책을 공부하는 일은 성경 대학 교육을 받는 것에 비유될 정도였다.
장과 절로 본문을 찾는 방식과 제네바 성경의 금지
방대한 해설과 함께 독자의 성경 공부를 도운 것은 장과 절의 구분이었다. 장 구분은 13세기 캔터베리 대주교 스티븐 랭턴이 확립했고, 구약의 절 구분은 유대인 랍비 나단이 맡았다. 제네바에서 개혁자들과 함께 활동하던 로베르 스테파누스는 1551년에 출판한 그리스어 신약에 처음으로 절 구분을 사용했다.

제네바 성경 번역자들은 이러한 구약과 신약의 구분 방식을 함께 활용했다. 그 결과 1560년 완역본은 성경을 장과 절로 나눈 최초의 신구약 완역 성경이자, 절 구분을 갖춘 최초의 영어 성경이 되었다. 독자들은 이제 ‘요한복음 3장 16절’처럼 본문의 위치를 정확히 가리키고 해당 구절을 찾아갈 수 있었다. 사람들이 이 방식을 반긴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제네바 성경은 이후에도 널리 읽히며 우위를 지켰다. 그 자리를 이어받은 성경은 훗날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책으로 불리게 된 1611년 킹제임스성경이었다. 그러나 새 번역의 등장만으로 두 성경의 자리가 바뀐 것은 아니었다. 제네바 성경이 잉글랜드에서 금지되고, 소유했다는 이유로 체포되는 사람들까지 생긴 뒤에야 킹제임스성경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금지의 원인은 제네바 성경을 인기 있게 만든 바로 그 각주와 해설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석에는 당시 개혁자들의 공통된 견해가 담겨 있었으며, 로마 교회와 정면으로 대립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독자가 성경을 이해하도록 돕는 동시에 종교 권력을 비판했던 것이다.
일곱 언덕의 도시와 성도들의 피
개혁자들은 로마 교회가 성경을 믿는 사람들을 계속 박해하는 모습을 보며, 로마가 요한계시록 17장의 큰 창녀라는 확신을 굳혔다. 이 장은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창녀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고, 그 여자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로 가득한 주홍빛 짐승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요한계시록 17:1 또 일곱 호리병을 가진 일곱 천사 가운데 하나가 와서 나와 대화하며 말하기를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그 큰 창녀의 심판을 네게 보여 주리라.
요한계시록 17:3 그가 나를 영 안에서 광야로 이끌어가니라. 또 내가 보니, 한 여자가 주홍빛 짐승 위에 앉아 있는데, 그 짐승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로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졌더라.
개혁자들이 주목한 것은 여자의 화려한 차림만이 아니었다. 제네바 역본의 다음 대목에서 여자는 성도들과 예수의 순교자들의 피에 취해 있다. 성경을 믿는 사람들이 박해받고 죽임을 당하는 현실은 개혁자들에게 이 묘사를 로마와 연결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요한계시록 17:4–6 중 인용 부분 · 제네바 역본 또 그 여자는 자주색과 주홍색 옷을 입고 그녀의 이마에 한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신비, 큰 바빌론, 땅의 음행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또 내가 보니, 그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순교자들의 피에 취하였더라. 그러므로 내가 그녀를 보고 크게 의아해 하며 놀랐노라.
박해자의 모습을 특정 도시와 연결하는 단서는 같은 장의 9절과 18절에 있었다. 여자가 앉은 곳은 일곱 산이며, 여자 자체는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큰 도성으로 설명된다.
요한계시록 17:9 지혜 있는 생각이 여기 있으니 일곱 머리는 그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요한계시록 17:18 네가 본 그 여자는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큰 도성이라.”고 하더라.
제네바 성경 번역자들은 일곱 산을 일곱 언덕으로 읽고, 주석에서 그 도시를 로마라고 명시했다.
그토록 자주 언급되는 일곱 언덕의 도시가 어디인지는 어린아이들도 안다. 그곳은 저주받을 음녀, 영적 바빌론, 곧 로마다.
이어지는 주석은 로마가 거리낌 없이 피를 흘려 그 행실이 피로 붉게 물들었으며, 성도들의 피로 물든 존재라고 묘사했다. 번역자들은 일곱 언덕이라는 도시의 특징과 성도들을 박해한 행위를 함께 짚으며, 본문에 등장하는 도시와 박해자의 모습을 로마에 적용했다.
교황을 향한 비판에는 요한계시록 11장 7절도 중요했다. 이 구절에서는 증거를 마친 이들이 짐승의 공격을 받아 죽임을 당한다. 개혁자들은 피에 취한 여자뿐 아니라 증거하는 이들과 전쟁을 벌이는 짐승에서도 박해자의 모습을 읽었다.
요한계시록 11:7 또 그들이 자기들의 증거를 끝마칠 즈음에 끝없이 깊은 구렁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전쟁을 하여 그들을 이기고 또 죽이리라.
교황의 권세를 겨냥한 주석과 제네바 성경의 금지
제네바 성경의 주석은 짐승이 하는 일에서 더 나아가, 그 짐승이 어디에서 올라오는지에도 주목했다. 요한계시록 11장 7절의 ‘끝없이 깊은 구렁’은 교황의 권세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설명하는 근거가 되었다.

요한계시록 11:7 또 그들이 자기들의 증거를 끝마칠 즈음에 끝없이 깊은 구렁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전쟁을 하여 그들을 이기고 또 죽이리라.
개혁자들은 이 짐승을 교황으로 지목하며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았다.
이는 교황으로, 지옥에서 권세를 얻고 그곳에서 나오는 자다.
교황의 권위를 단순히 잘못 행사된 교회 권력으로 비판한 것이 아니라, 그 권세의 근원을 지옥으로 지목한 것이다. 로마의 심기를 거스를 수밖에 없는 가르침이었지만, 교황제를 이처럼 이해하는 전통은 수 세기에 걸쳐 전해 내려왔다.
제임스 1세가 죽고 아들 찰스 1세가 왕위에 오른 뒤, 개신교도들은 새 왕의 행위를 친교황적이고 전제적이라고 비난했다. 찰스 1세가 개신교 신앙을 겨냥한 교황주의자들의 국제적 음모를 지원한다는 의혹도 제기했다. 제네바 성경은 그의 재위 중에 금지되었다. 로마와 교황의 권세를 정면으로 공격한 주석이 금지의 이유였을까?
개신교의 항의와 인쇄술이 바꾼 전파 속도
개신교도(Protestant)라는 명칭은 본래 로마 교회의 주장에 항의하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로마와의 대립은 종교개혁 당시에 끝나지 않았다. 19세기에도 찰스 스펄전은 그 항의를 계속해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진리를 위해 우리 개신교는 끊임없이 항의해야 한다. 로마와의 화평은 없다.
이처럼 로마에 맞선 가르침이 살아남아 널리 퍼지기까지는 오랜 박해를 견뎌야 했다. 알비파와 왈도파, 위클리프와 그의 가르침을 전한 롤라드의 가르침 상당 부분은 십자군과 종교재판의 억압으로 거의 사라질 지경에 이르렀다.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뿐 아니라 그 내용을 담은 책까지 없애려는 박해는 신앙을 후대에 전하는 일 자체를 위협했다.
가동 활자는 이러한 억압 속에서도 책을 보급할 수 있는 속도를 바꾸었다. 책과 성경이 교황들이 불태우는 속도보다 더 빨리 인쇄되기 시작하면서, 개혁자들의 가르침은 불길처럼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한곳에서 책을 없애더라도 계속 인쇄되는 책들이 더 넓은 지역에 가르침을 전할 수 있었다.
종교개혁의 결의를 굳힌 교황제에 대한 예언 해석
종교개혁의 추진력을 은혜에 의한 구원이라는 가르침만으로 설명하지 않는 견해도 있다. 개혁자들이 교황제 안에서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가장 엄중한 예언적 경고가 성취되고 있다고 인식한 일이 그들의 결의를 굳혔다는 것이다. 틴데일과 루터를 비롯한 개혁자들이 무엇 때문에 그토록 단호하게 로마에 맞섰는지를 묻는다면, 구원의 가르침과 함께 그들이 교황제를 어떤 체제로 보았는지도 살펴야 한다.
개신교 목사인 이언 페이즐리 박사는 루터가 교황제를 적그리스도로 인식한 시점에 주목하는 견해를 소개했다.
루터가 교황제를 적그리스도로 인식하고 나서야 비로소 종교개혁에 탄력이 붙었다는 주장이 있다.
은혜에 의한 구원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는지를 가르쳤다면, 교황제에 대한 예언 해석은 개혁자들이 맞서던 권력의 정체를 설명했다. 페이즐리 박사가 소개한 견해에서 종교개혁에 추진력을 더한 것은 바로 교황제를 적그리스도로 알아보았다는 인식이었다.
루터 목사 자신은 이를 새로운 발견으로 내세우지 않았다. 수 세기 전부터 내려온 가르침을 이어받았다고 인정하며 이렇게 썼다.
교황제를 적그리스도의 왕국이라고 선언한 것은 우리가 처음이 아니다.

루터 목사는 자신들보다 훨씬 앞선 시대에 이미 같은 문제를 다룬 위대한 인물들이 수없이 많았으며, 그들이 영원히 기억될 사람들이라고 덧붙였다. 교황제를 적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보는 가르침은 자신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앞선 이들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교황제를 죄의 사람으로 본 성경 해석
교황제가 적그리스도라는 믿음은 개혁파 신자들 사이에서 일반적인 견해였다. 많은 개혁자들은 교황에게서 사도 바울이 경고한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단순히 교황의 정치적 영향력이 아니었다. 교회 안에서 자신을 높여 하나님께 속한 지위를 차지한다는 점이었다.

데살로니가후서 2:3 아무도 어떤 모양으로든지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이는 먼저 배교하는 일이 이르지 않고, 또 그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지 않고서는 그 날이 오지 아니함이라.
데살로니가후서 2:4 그는 대적하는 자며, 또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받는 대상 위에 자신을 높여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하나님처럼 보여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하느니라.
개혁자들이 교황제를 이 예언과 연결한 데에는 신약이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부른다는 근거가 있었다. 그들은 죄의 사람이 앉는 성전을 교회와 무관한 별도의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께서 거하시는 신자들의 공동체로 이해했다. 따라서 교황이 교회 한가운데서 신적 권위를 요구하는 것은 성전 안에서 자신을 하나님처럼 높이는 행위였다.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전서 3:17 만일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이는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너희는 그 성전이기 때문이라.
고린도전서 3장 16절은 성전이 누구인지를 밝히고, 17절은 그 성전을 더럽히는 자에게 임할 심판을 경고한다. 교회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그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지, 지도자의 높은 지위가 아니다. 개혁자들은 이 말씀에서 교회 지도자가 자신을 높일 근거가 아니라 교회를 훼손하는 권력에 대한 경고를 읽었다. 같은 장에 나오는,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는 권면도 교황을 높이는 일에 대한 비판을 뒷받침했다.
고린도전서 3:21 그러므로 아무도 사람들을 자랑하지 말라. 이는 모든 것이 너희의 것이기 때문이니라.
하나님의 자리를 주장하는 교황의 권위
교황들이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높인다는 비판은 오래전부터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다.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종교개혁자들이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인 선언들은 교황의 호칭뿐 아니라 그 호칭에 따르는 권한과도 관련되어 있었다. 땅에 있는 사람을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교황이 취한 호칭부터 문제가 되었다.
마태복음 23:9 또 땅에 있는 사람을 너희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 이는 너희 아버지는 한 분, 곧 하늘에 계신 분이시기 때문이라.
교황들은 그럼에도 성부(Holy Father)라는 호칭을 취하고, 그 이름에서 비롯될 수 있는 모든 권위를 함께 주장했다. 이는 존칭 하나를 어떻게 부르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늘에 계신 한 분 아버지께 속한 권위를 지상의 사람이 자신의 직분에 부여할 수 있느냐는 문제였다.
『어둠 속의 등불』은 인노켄티우스 3세를 종교재판의 창시자로 지목하며, 그에게 다음 선언을 귀속한다.
“교황은 지상에서 단순히 사람의 자리가 아니라 참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한다.”
이 선언에서 교황이 차지하는 자리는 단순한 인간의 직분이 아니라 참 하나님의 자리다. 니콜라오 교황에게 귀속된 다음 선언은 그 자리에 어떤 권한이 따른다고 보았는지를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나는 모든 것 안에 있고 모든 것 위에 있으므로, 하나님 자신과 그분의 대리자인 나는 하나의 법정을 공유하며, 나는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것 위에 있는 나는, 이런 이치로 모든 신들보다도 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지위는 여기서 하나님과 하나의 법정을 공유하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거의 모든 일을 하며, 모든 것 위에 서는 권한을 뜻한다. 개혁자들이 데살로니가후서 2장 4절과 연결한 것도 바로 이 권한이었다. 교회 안에서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이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받는 대상 위에 자신을 높인다는 경고가 교황제에 들어맞는다고 본 것이다.
그리스도의 명령과 복음을 바꿀 수 있는가
교황이 그리스도의 명령을 지킬 의무까지 면제할 수 있다면, 이미 주어진 복음도 바꿀 수 있을까? 니콜라오 교황에게 귀속된 다음 발언은 그리스도의 명령을 포함한 모든 준수 의무를 면제할 권한이 교황에게 있다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모든 것에 대한 준수 의무를 면제할 권한이 내게 있다 해도, 심지어 그리스도의 명령까지 면제할 수 있다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신 문을 사람이 닫을 수 없고, 그분이 닫으신 문을 사람이 열 수 없다면, 교황의 권위도 그리스도의 결정을 뒤집을 수 없다.
요한계시록 3:8 내가 너의 행위들을 아노라. 보라,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니 아무도 그것을 닫을 수 없노라. 이는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나의 말을 지켰고 내 이름을 부인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요한계시록 3:7 필라델피아 교회의 천사에게 편지하라. 거룩하신 분, 진실하신 분,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 열면 아무도 닫을 수 없고 또 닫으면 아무도 열 수 없는 분께서 이 일들을 말씀하시느니라.
요한계시록 3장 8절에서 열린 문을 두신 분은 그리스도이며, 7절에서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도 그리스도다. 문을 열고 닫는 권한은 그분께 있고, 사람에게는 그 결정을 뒤집을 권한이 없다. 따라서 지상의 교황이 그리스도의 명령을 지킬 의무를 면제하거나 복음의 내용을 바꿀 수 있다는 주장도 받아들일 수 없다.
바울은 다른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경고에서 사도 자신조차 예외로 두지 않는다. 자신이나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이미 전한 복음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는다고 선언한다.
갈라디아서 1:8 그러나 우리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것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으리라.
갈라디아서 1:9 우리가 전에도 말한 것같이 지금도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으리라.
판단의 기준은 전하는 사람의 지위나 권위가 아니라 이미 전해지고 받아들여진 복음이다. 바울은 자신들이 전한 복음과 갈라디아인들이 받은 복음을 기준으로 삼아,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내릴 저주를 거듭 경고한다. 사도와 천사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일이 교황이라는 직분 때문에 허용될 수는 없다. 사람의 권위가 먼저 주어진 복음 위에 설 수 없으므로, 교황도 그리스도의 명령을 면제할 권한을 주장할 수 없다.
교황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자리에 놓는 선언
교황의 권위가 그리스도의 명령과 복음까지 바꿀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교황이 자신을 누구의 자리에 놓는가와 맞닿아 있다. 교황권을 향한 비판은 교회를 다스리는 권한을 넘어 하나님과 동등하거나 그보다 높은 지위를 주장했다는 데까지 이른다. 가톨릭 신자들이 교황을 ‘우리의 주 하나님이신 교황’이라고 불렀다는 사례도 그 가운데 하나다. 생명과 구원을 주는 권한을 교황에게 돌리고 그의 말을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과 동일시한다면, 교황의 권위를 검토할 여지는 사라지고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요구가 남는다.
라테라노 공의회가 교황 율리오 2세에게 했다고 인용되는 말은 교황에게 어떤 지위를 부여했는지 보여 준다.
“당신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구원과 생명과 호흡을 잃지 않도록 보살펴 주십시오. 당신은 목자이시며, 의사이시며, 통치자이시고, 농부이시며, 마침내 지상의 또 다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목자와 의사, 통치자와 농부는 각각 돌보고 치료하며 다스리고 기르는 역할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 호칭들에 구원과 생명과 호흡을 주었다는 말과 ‘지상의 또 다른 하나님’이라는 선언이 더해지면, 교황은 교회를 돌보는 직무를 맡은 사람을 넘어 하나님께 속한 지위와 권한을 가진 존재가 된다.
19세기에 주세페 사르토 추기경, 곧 훗날 교황 비오 10세가 된 인물에게 귀속되는 선언은 교황과 그리스도를 더욱 직접적으로 동일시한다.
“…교황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육신의 장막 아래 계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교황이 말하는가? 말씀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누구든 교황에 관해 말할 때는 검토할 필요가 없고, 복종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사람과 그리스도 자신은 다르다. 하지만 이 선언은 그 차이를 없애고, 교황이 말할 때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다는 이유로 검토 없이 복종할 것을 요구한다. 교황의 말을 판단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앞서, 그 말을 누가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정해 버린 것이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아버지께 이르는 유일한 길로 자신을 밝히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다.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아무도 없느니라.
교황 비오 9세에게 귀속되는 다음 선언에서는 예수께서 자신에 관해 하신 말씀이 교황 자신에게 적용된다.
“나만이 사도들의 후계자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사도들의 후계자이며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주장을 넘어,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자신의 지위로 선언한 것이다. 교황권을 신성모독으로 비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를 증언해야 할 사람이 그리스도께만 속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비판이다.
교황에 대한 복종을 구원의 조건으로 삼다
교황을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와 동일시하는 선언은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하는 문제로 이어진다. 복종은 더 이상 교회 안의 질서를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구원받기 위해 반드시 충족해야 할 조건이 된다.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선언은 그 요구를 모든 인간에게 적용한다.

“우리는 모든 인간이 로마 교황에게 복종하는 것이 구원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선언하고, 말하고, 규정하고, 선포한다.”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말은 로마 교황에게 복종하지 않고 구원받을 가능성을 남겨 두지 않는다. 교황 클레멘스 6세에게 귀속되는 발언도 로마 교황에게 복종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나아가 로마 교회의 신앙에 맞서 일어나 끝내 회개하지 않은 채 죽은 자들은 모두 정죄받고 지옥으로 내려갔다고 선언한다. 로마 교회에 대한 저항을 죽음 이후의 심판과 연결한 것이다.
이러한 요구는 중세에만 머물지 않는다. 교황 요한 23세는 1958년에 다음과 같이 선언한 것으로 인용된다.
“아무도 최고 교황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 양 우리에 들어갈 수 없으며, 그와 연합할 때에만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있다.”
요한복음 14장 6절은 아버지께 나아가는 길을 예수 그리스도께 둔다. 반면 이 선언은 그리스도의 양 우리에 들어가려면 교황의 인도를 받아야 하고, 구원받으려면 교황과 연합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리스도께 속하는 데 교황이 반드시 필요한가 하는 문제가 두 말씀 사이에 놓여 있다.
죄의 용서를 누구에게 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서도 같은 대립이 나타난다. 아서 노블 교수가 유럽개신교연구소(European Institute of Protestant Studies)에 온라인으로 게재한 「교황의 사과」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4년에 했다는 다음 발언이 인용되어 있다.
“죄를 용서받으러 하나님께 가지 말고 내게 오라.”
이 발언을 향한 비판은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향해야 할 대상을 하나님에게서 교황으로 바꾼다는 데 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도 요한 바오로 2세가 하나님께 직접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일축했다고 보도했다. 기사에서는 개신교도들뿐 아니라 점점 더 많은 로마 가톨릭 신자들도 그 믿음을 공유한다고 소개했다. 따라서 하나님께 직접 용서를 구할 수 있는가는 두 교파 사이의 차이일 뿐 아니라,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도 널리 퍼지는 믿음과 교황의 입장이 부딪치는 문제였다.
교황의 인격과 무관하게 복종해야 하는가
교황에 대한 복종이 구원의 필수 조건이라면, 교황이 아무리 끔찍한 인물이어도 복종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전통적인 가톨릭교의 복종 요구를 향한 비판은 바로 그 의무가 교황의 인격이나 행동과 무관하게 유지된다는 데 있다.
이탈리아의 수호성인 가운데 한 사람인 시에나의 카타리나에게 귀속된 발언은 이를 극단적인 가정으로 표현한다. 미라가 된 머리가 로마에 보존되어 있는 인물로 소개되는 카타리나는, 교황이 사탄의 화신인 경우까지 들어 복종을 요구한다.
“교황이 사탄의 화신이라 해도, 우리는 그에게 맞서 고개를 들지 말고 그의 품에 조용히 누워 쉬어야 합니다. 우리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자는 사형에 처해집니다. 우리가 그에게 하는 일은 곧 그리스도께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교황을 공경하면 그리스도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교황에게 하는 행동을 곧 그리스도께 하는 행동으로 본다면, 교황을 공경하는 일은 그리스도를 공경하는 일이 되고 그에게 반항하는 일은 죽음의 형벌을 받을 행위가 된다. 심지어 교황이 사탄의 화신이라는 가정 아래에서도 복종 의무는 사라지지 않는다. 종교개혁자들이 맞선 것은 교황 개인의 잘못만이 아니었다. 교황들 자신도 확인한 이러한 무조건적인 복종 요구가 그리스도인의 구원과 양심을 한 사람의 권위에 묶어 놓는다는 점이 문제였다.
루터의 교회법 비판과 교황제를 적그리스도로 보는 전통
교황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요구에 맞서 마르틴 루터가 문제 삼은 것은 교회법 조항 ‘Si papa’였다. 교황이 온 세상을 지옥의 지배 아래로 이끌더라도 그에게 이의를 제기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루터는 교황이 이 조항으로 자신의 폭정을 옹호한다고 비판하며, 그를 마귀들에게 사로잡힌 존재라고 규탄했다. 교황의 권한이 어디까지 미치는가는 단순한 교회 행정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 피로 구속하신 영혼을 한 사람의 권위에 복종하느라 잃어야 하느냐는 구원의 문제였다.
“이 사람의 권위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보배로운 피로 구속하신 우리 영혼을 잃어야 한다니 끔찍한 일이다.”
앞서 시에나의 카타리나에게 귀속된 발언에서는 교황에게 복종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공경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루터에게는 바로 그 무조건적인 복종이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신 영혼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었다. 교황이 무슨 일을 하더라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요구는 루터가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판단한 근거가 되었다.
“나는 교황이 가면을 쓰고 육신을 입은 마귀라고 믿는다. 그가 적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교황제를 적그리스도로 보는 믿음은 루터 개인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14세기의 존 위클리프부터 19세기 후반의 찰스 스펄전에 이르기까지 모든 개혁자가 공유한 믿음이었다. 스펄전은 교황제를 적그리스도로 식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에 대항하여 기도하는 일을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로 삼았다.
“적그리스도에 대항하여 기도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그리고 적그리스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의문을 제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로마 교회의 교황제가 아니라면, 세상에는 그 이름으로 불릴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스펄전이 지목한 대상은 특정 교황의 인격이나 잘못이 아니라 로마 교회의 교황제 자체였다. 따라서 교황제가 존속하는 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이에 맞서 기도할 의무가 있었다. 교황제를 적그리스도로 보는 믿음은 개인들의 발언을 넘어 신앙고백과 교파의 가르침에도 담겼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사보이 신앙고백, 구 침례교 신앙고백, 존 웨슬리의 감리교적 견해가 모두 같은 선언을 담은 사례였다.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직분을 잇는 여러 사람
개혁자들은 교황을 교회 안에서 자신을 높이는 ‘죄의 사람’이자 ‘멸망의 아들’로 보았다. 킹제임스성경 번역자들도 이 믿음을 공유했다. 왕에게 드리는 서두의 헌정문에서 번역자들은 제임스 왕이 진리를 옹호하는 글을 써서 그 죄의 사람에게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주었다고 칭송했다. 교황제에 대한 비판은 성경 번역과 무관한 정치적 의견이 아니었다. 성경이 경고하는 적그리스도가 누구인가 하는 이해와 맞물려 있었다.

여기서 적그리스도는 단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직분을 차례로 맡는 여러 사람을 가리킨다. 개별 교황은 바뀌어도 교황 직분은 계속되므로, 그 직분을 이어 맡는 여러 교황을 하나의 적그리스도로 이해한 것이다. 이 견해는 부분적으로 존 위클리프의 가르침에 근거했다.
| 적그리스도를 보는 방식 | 가리키는 대상 |
|---|---|
| 한 인물로 보는 견해 | 적그리스도인 한 사람 |
| 교황 직분으로 보는 견해 | 하나의 직분을 이어 맡는 여러 교황 |
위클리프가 주목한 마태복음 24장은 주께서 오실 표적과 세상 끝의 표적을 묻는 제자들의 질문으로 시작한다.
마태복음 24:3 ○ 주께서 올리브 산 위에 앉으셨을 때, 제자들이 조용히 나아와서 말씀드리기를 “언제 이런 일이 있겠으며, 주께서 오실 표적과, 세상 끝의 표적이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소서.”라고 하니
예수님께서는 그 질문에 답하시면서 먼저 미혹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셨다.
마태복음 24:4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도록 주의하라.
마태복음 24: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라.’고 말하며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위클리프가 여러 교황에게 적용한 표현은 ‘내가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교황의 칭호인 ‘비카리우스 크리스티’(Vicarius Christi)를 문자 그대로 ‘또 다른 그리스도’라는 뜻으로 풀이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와서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를 이 칭호와 연결한 것이다. 그렇게 보면 적그리스도는 한 개인으로 끝나지 않고, 같은 직분을 계승하는 여러 교황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된다. 위클리프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그러므로 적그리스도는 괴물 같은 복합체다.”
저자 데이브 헌트는 교황의 칭호를 언어적으로 풀이하여 같은 결론을 뒷받침했다. 그는 그리스어 ‘안티’에 대응하는 라틴어가 ‘비카리우스’이며, 여기서 ‘비커’라는 말이 나왔다고 썼다.
“그리스어 ‘안티’에 해당하는 라틴어는 ‘비카리우스’이며, 여기서 ‘비커’라는 말이 나왔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는 문자 그대로 ‘적그리스도’를 뜻한다.”
위클리프가 마태복음의 ‘많은 사람’에 주목하여 여러 교황을 하나의 적그리스도로 이해했다면, 헌트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칭호 자체가 적그리스도를 뜻한다고 보았다. 두 설명은 각각 교황 직분을 잇는 사람들과 그 직분에 부여된 칭호를 통해 교황제를 적그리스도로 지목했다.
현대의 교황 인식과 개혁자들의 믿음
2009년 무렵 개신교 안에서는 교황제를 적그리스도로 보는 견해가 더 이상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개혁자들의 믿음을 계속 지키는 이들도 있었고, 교황에게 부여되는 칭호와 지위는 여전히 비판의 대상이었다. 당시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바티칸 공식 초상화로 소개된 작품에는 ‘진리, 길, 생명: 교황 베네딕토 16세 성하의 초상’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으며, 소장처는 로마 바티칸으로 표시되어 있다. 교황에게 ‘진리, 길, 생명’이라는 표현을 붙인 제목은 현대에도 교황을 그리스도 및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지, 그래서 개혁자들의 교황 비판이 여전히 필요한 것은 아닌지 묻게 한다.

2008년 4월 EWTN의 대통령 인터뷰에서도 교황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드러내는 문답이 오갔다. 질문자는 대통령이 블라디미르 푸틴의 눈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의 영혼을 보았다고 말한 일을 상기시켰고, 대통령은 이를 인정했다. 이어 질문자가 베네딕토 16세의 눈에서는 무엇을 보았는지 묻자 다음과 같은 답변이 나왔다.
“베네딕토 16세의 눈에서는 무엇을 보십니까?” “하나님이요.”

2008년 4월 EWTN 자료로 표시된 대통령 인터뷰 발췌.
이언 페이즐리 목사의 종교개혁 계승 의식과 유럽의회 항의
교황을 높이는 이러한 태도와 대조되는 인물이 이언 페이즐리(Ian Paisley) 목사다. 박사 학위를 지닌 개신교 목사로서 영국 의회와 유럽의회 의원을 지냈고, 영국 안에서 로마의 영향력에 오랫동안 반대했다. 2008년 북아일랜드 수반직에서 물러난 페이즐리 목사는 자신을 종교개혁자들의 현대적 계승자로 여겼다. 그에게 박해의 역사는 교회의 패배를 뜻하지 않았다. 교회 역사에서 가장 어두웠던 날들이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는 가장 밝았던 날들이었으며, 성도들이 불태워지는 가운데서도 복음은 강렬하게 타올랐다는 확신이 그의 설교를 관통했다.

이러한 신념은 1988년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의 유럽의회에서 공개적인 항의로 드러났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연설하자 페이즐리 목사는 화형을 당한 토머스 크랜머 대주교의 말을 외쳤다. 손에 든 팻말에는 “요한 바오로 2세, 적그리스도”라고 쓰여 있었다.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규탄한 종교개혁자들의 입장을 공적인 자리에서 그대로 이어 간 행동이었다.
현장에서는 소란을 멈추라는 요구가 나왔지만 항의는 계속되었다. 보도에 따르면 페이즐리 목사는 팻말을 빼앗길 때마다 주머니에서 다른 팻말을 꺼냈다. 유럽을 문명의 등불로 묘사한 연설문을 들고 기다리던 교황은 조금 재미있다는 듯 상황을 지켜보았다. 결국 페이즐리 목사에게 의회에서 퇴장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페이즐리 목사는 이 과정에서 주먹으로 맞았으며, 나중에 경호 책임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하지 못한 데 대한 개인적인 사과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페이즐리 목사는 자신의 항의를 교황 개인에 대한 반감이 아니라 역사적 개신교 신앙의 계승으로 설명했다.
저는 종교개혁자들의 역사적 계승선에 있습니다.
그 신앙을 자신이 새로 만들어 낸 것은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했다. 한 여성이 언론에 편지를 보내 페이즐리 목사가 신앙고백서를 쓰고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불렀다고 하자, 페이즐리 목사는 그런 판단이 자신보다 훨씬 앞선 개신교 전통에 속한다고 답했다. 로마 교회가 거짓 교회이며 요한계시록 17장에 묘사된 교회라는 믿음을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페이즐리 목사는 그 입장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바로 이것이 역사적 개신교 신앙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이미 드러났는가, 앞으로 나타날 것인가
교황제를 적그리스도로 보는 개혁자들에게 성경의 경고는 이미 역사 속에서 성취되고 있었다. 반면 오늘날 많은 예언 교사들은 적그리스도가 아직 오지 않았으며, 앞으로 나타날 한 인물이 교황들처럼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할 것이라고 믿는다. 두 견해 모두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를 내세우는 데 주목하지만, 적그리스도가 누구이며 언제 나타나는지를 다르게 이해한다.

‘Understand the Times International’의 설립자 로저 오클랜드(Roger Oakland)가 설명하는 미래의 적그리스도는 언젠가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선언할 한 사람이다. 그는 인간이지만 사탄에게서 능력을 받으며, 바로 그 사람이 성경이 말하는 적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개혁자들은 이와 달리 미래의 한 인물이 정체를 드러내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적그리스도가 이미 교황제를 통해 나타났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 구분 | 교황제를 적그리스도로 보는 견해 | 미래의 한 인물을 적그리스도로 보는 견해 |
|---|---|---|
| 대상 | 교황제와 교황 직분 | 앞으로 등장할 한 사람 |
| 나타나는 시점 | 이미 역사 속에서 드러남 | 아직 오지 않음 |
| 하나님과의 관계를 내세우는 방식 | 교황들이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를 주장함 |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선언함 |
| 이 대목에서 제시된 설명 | 개혁자들의 입장 | 많은 현대 예언 교사들의 입장과 오클랜드의 설명 |
존 위클리프는 교황제가 적그리스도라는 확신에서 이렇게 물었다.
“왜 믿지 못하고 또 다른 적그리스도를 찾아야 하는가?”
위클리프에게 다른 적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은 단순히 예언의 성취 시점을 달리 잡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드러난 적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한 채 다른 대상을 찾는 일이었다.
말씀으로 교황제를 소멸시킨다는 루터의 이해
마르틴 루터는 교황제를 적그리스도로 보았을 뿐 아니라, 그 세력이 어떻게 무너질지도 바울이 죄의 사람을 경고한 말씀에서 찾았다. 데살로니가후서 2:8에는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영으로 소멸하시는 일과 찬란한 오심으로 제거하시는 일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

데살로니가후서 2:8 그리고 나서 그 악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께서 그를 자기 입에서 나오는 영으로 소멸하시고 그의 찬란한 오심으로 제거하시리라.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개혁자들 자신이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영과 같으며, 그 말씀으로 교황제를 소멸시키고 있다고 믿었다. 불이 나뭇단을 태워 없애듯, 말씀은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던 교황제의 권위를 무너뜨린다. 그 싸움은 교황제의 거짓말을 드러내어 사람들이 그것을 멸시하고 더 이상 그 권위에 매이지 않게 하는 일이었다. 루터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우리는 말로 그를 죽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입이 그 일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그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뽑혀 나가고, 그의 거짓말이 드러나 멸시받게 된다. 지혜롭게 처신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감사하고, 담대히 말하자.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해 교황제를 죽이시는 방법이다.”
그러나 루터는 교황제의 소멸이 종교개혁 당대에 끝난다고 보지 않았다. 말씀을 통한 소멸은 계속되며, 완전한 멸망은 주께서 아마겟돈에서 이루신다고 믿었다. 개혁자들은 말씀을 전파하여 사람들의 마음에서 교황제의 지배력을 무너뜨리고, 주께서는 마침내 그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신다. 말씀의 전파와 주님의 오심은 같은 순간에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각각 진행 중인 소멸과 최종적인 멸망을 이루는 일이었다.
말씀으로 교황제의 권위를 무너뜨리려면 사람들이 먼저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어야 했다. 그만큼 성경을 번역하고 출판할 필요성도 어느 때보다 컸다. 오클랜드의 설명에 따르면, 루터는 사람들이 어둠에 갇혀 있는 까닭을 말씀의 빛이 그들에게 없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자 말씀이 전달되었고, 그것이 종교개혁을 일으켰다. 성경 번역과 보급은 사람들을 가톨릭교에서 벗어나 참된 기독교로 이끄는 일이었다.
성사를 통한 구원에 대한 비판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문제는 교황의 권위뿐 아니라 구원을 어떻게 받는가 하는 문제와도 맞닿아 있었다. 목사이자 저자이며 고대 필사본 수집가인 데이비드 브라운(David Brown) 박사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강하게 고수한 구원 방식을 ‘성사를 통한 구원’이라고 부른다. 구원을 받으려면 성찬에 참여하고 여러 성사를 행해야 한다는 요구가 그 비판의 대상이었다.
브라운 목사는 존 폭스가 『폭스의 순교사』에서 바로 이 점을 들어 로마를 질책했다고 설명한다. 폭스가 문제 삼은 것은 개별 성사의 시행 방식이 아니었다. 성찬과 여러 성사를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삼으면서 구원의 토대 자체를 바꾸었다는 것이었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그렇게 완전히 새로운 토대를 세움으로써 본래의 구원을 떠났다는 비판이다.
미사와 연옥: 계속되는 속죄라는 가르침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가르침은 구원을 얻으려면 행위를 해야 한다는 로마의 가르침과 대립한다. 개혁자들이 비판한 행위에는 성사에 참여하는 것뿐 아니라 자신의 죄와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해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생각도 포함되었다. 미사와 연옥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한 속죄가 계속 필요하다는 가르침으로 서로 맞물린다.
미사에서 사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성체 안에 임하도록 불러내고, 그리스도를 산 자들과 연옥에 있는 죽은 자들의 죄를 위한 제물로 거듭 바친다. 화체설을 향한 비판은 이때 사제에게 부여되는 권능에 집중된다. 사제가 성찬용 빵인 제병을 들어 그리스도의 임재를 불러낸 뒤, 그 제병을 그리스도로서 인간의 죄를 위한 피 흘림 없는 제물로 바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성찬에 참여하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사제의 행위를 통해 그리스도가 계속 제물로 바쳐진다는 데 있다.
연옥에 있는 영혼들은 불신자가 아니라 참된 신자들로 설명된다. 그런데도 죄가 아직 완전히 씻기지 않았기 때문에 일정 기간 불타는 고통을 겪어야 하며, 정기적으로 드리는 미사는 이 죽은 영혼들을 위한 속죄를 계속 수행한다고 가르친다. 신자에게도 아직 끝나지 않은 속죄가 남아 있다는 전제가 연옥의 고통과 죽은 자를 위한 미사를 함께 뒷받침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손과 옆구리에서 흐르는 피를 천사들이 잔에 받는 교회 미술은 그리스도의 피와 미사를 연결하는 사례다. 이 그림에 붙는 설명에서는 사제가 성체를 봉헌하면 그리스도께서 임하시고, 미사를 드릴 때마다 연옥에서 여전히 고통받는 영혼들을 위해 다시 피를 쏟으신다고 한다. 죄가 완전히 속죄되지 않은 영혼들을 위해 그리스도의 봉헌이 거듭 필요하다는 가르침을 그림과 연결한 것이다.
구원의 필수 조건이 된 성체성사와 사제
로마의 가르침에서 그리스도를 성체 안으로 불러낼 권능은 서품받은 가톨릭 사제에게만 있다. 여기에 성찬이 구원을 위해 도덕적으로 필요하다는 교리가 결합하면, 사제는 예식을 집례하는 사람을 넘어 구원을 얻는 데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된다.
구원을 위해 성체성사에 참여해야 한다.
성체성사를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성체 안으로 불러낼 권능을 가진 사제가 필요하다.
따라서 사람에게 구원을 나누어 주는 과정에 사제가 필수적으로 개입한다.
미사를 어떻게 이해할지도 개인의 선택으로 남겨 두지 않는다. 로마는 미사를 실제 제사가 아니라 십자가의 희생을 기념하는 상징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미사에서 하나님께 참되고 실제적인 제사가 드려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 미사가 십자가의 희생을 기념할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 산 자와 죽은 자의 죄를 위해 미사를 드려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아나테마, 곧 저주를 선언한다.

개혁자들이 힘써 맞서 싸운 것은 교회가 구원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교리였다. 교회가 구원을 분배하고 그 과정에 사제와 성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가르침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개혁자들의 비판이었다. 미사의 형식이나 의식이 서로 다르다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구원을 반드시 교회의 사제와 성사를 거쳐 받아야 하는 것으로 바꿀 수 있는가가 쟁점이었다.
십자가에서 완결된 희생
연옥의 영혼들을 위해 계속 속죄해야 한다는 가르침과 대조되는 것은 십자가에서 하신 예수님의 선언이다. 요한복음 19:30은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을 기록한다.
요한복음 19:30 그때 예수께서 그 식초를 받으시고 말씀하시기를 “다 이루었다.”고 하시더니 고개를 떨구시고 숨을 거두시더라.
“다 이루었다.”는 선언은 구원을 위해 드린 희생이 완결되었음을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희생 제사는 이미 드려졌다. 따라서 그 희생에 더하여 드릴 수 있는 다른 희생 제사는 없다. 사제가 거듭 봉헌해야 속죄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로부터 구원을 이해해야 한다.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사본의 ‘테텔레스타이’는 대금이 완전히 지불되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 표현은 아직 치러야 할 대가가 남아 있다는 생각과 정면으로 대조된다.
요한복음 19:30 그때 예수께서 그 식초를 받으시고 말씀하시기를 “다 이루었다.”고 하시더니 고개를 떨구시고 숨을 거두시더라.

히브리서 10장은 그리스도의 희생이 완결되었다는 뜻을 더 구체적으로 밝힌다. 그리스도의 몸을 드리신 횟수와 그 제사의 효력, 그리고 죄를 용서받은 뒤에도 속죄제가 필요한지를 차례로 짚는다.
그리스도의 몸을 한 번 드리심으로 거룩하게 되었다. 사람이 거듭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드리신 일이 거룩하게 되는 근거다.
히브리서 10:10 그 뜻에 따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한 번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드리심으로 우리가 거룩하게 된 것이라.
한 번의 제사는 영원한 효력을 지닌다. 히브리서 10:14는 제사를 드린 횟수에서 그 결과가 지속되는 기간으로 초점을 넓힌다. 한 번 드린 제사의 효력이 일시적이지 않으므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온전하게 하려고 제사를 반복할 필요가 없다.
히브리서 10:14 이는 그가 한 번의 제사로써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기 때문이라.
용서하신 곳에는 더 이상 속죄제가 없다. 죄사함이 이루어졌다면 그 죄를 위해 다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 따라서 죄를 용서받은 뒤에도 계속 속죄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희생이 충분하다는 말씀과 맞지 않는다.
히브리서 10:18 이제 이것들을 용서하신 곳에는 더 이상 속죄제가 없느니라.
믿음으로 받는 구원과 돈을 요구하는 종교 제도
그리스도의 희생이 이미 완결되었다면,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빌립보의 간수가 바울과 실라에게 던진 질문이 바로 이것이었다.

사도행전 16:30 그리하여 그들을 데리고 나와서 말하기를 “선생님들이여, 내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이까?”라고 하니
사도행전 16:31 그들이 말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안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니라.
바울과 실라는 간수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답했다. 그러나 교황과 성직자들이 이끄는 로마 교회는 자신들이 구원을 나누어 주므로 사람들이 반드시 자신들을 거쳐야 한다는 생각을 세웠다. 구원을 받으려는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대신 인간의 종교적 권한 아래 두는 것은 이 답변과 완전히 반대된다.
한 인터뷰 참여자는 자신의 생각으로는 이런 제도가 제법 짭짤한 장사였다고 비판한다. 이것저것 명목을 붙여 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구걸하며 돌아다니는 탁발 수도사들에게는 가난한 사람들조차 음식과 여러 물품을 제공해야 했고, 그런 베풂도 구원의 일부로 요구되었다. 마지막에는 자기 영혼을 연옥에서 꺼내기 위해 돈을 내고 미사를 드리게 해야 했다. 이 비판에서 돈을 요구하는 관행은 단순한 재정 문제가 아니다. 살아 있는 동안의 물질적 부담을 죽은 뒤 영혼의 운명에 결부시켰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인간의 영혼을 상품으로 삼는 문제는 면죄부 판매에서 뚜렷하게 드러났으며, 종교개혁을 촉발한 직접적인 쟁점이 되었다. 면죄부는 교황이 죄를 용서하는 문서로 승인한 허가증이었고,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비를 마련하기 위해 판매되었다. 바로 이 문제가 마르틴 루터와 다른 개혁자들이 목소리를 내게 한 주된 이유였다.
목사이자 저자이며 고대 필사본 수집가인 데이비드 브라운(David Brown) 박사는 개혁자들이 구원이 행위에서 비롯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재발견했다고 설명한다. 구원은 사람이 행위로 얻어 내는 대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요한복음 3:16은 그 선물이 어디에서 비롯되며 어떻게 주어지는지를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고, 그를 믿는 사람에게 영생을 약속하셨다.
요한복음 3:16 ○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은혜의 복음 확산과 로마의 반격
로마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 구원의 가르침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연구자이자 은퇴 교수인 앨런 오라일리(Alan O’Reilly) 박사는 마르틴 루터와 다른 위대한 개신교 지도자들을 통해 종교개혁이 힘을 얻자, 로마가 이를 저지하려고 필사적으로 대응했다고 설명한다. 개혁자들은 20년 넘게 은혜의 복음을 전하며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규탄했고, 그들의 전파로 세상은 다시 뒤집혔다.

Understand the Times International의 설립자 로저 오클랜드(Roger Oakland)는 로마의 대응을 영적 싸움으로 이해한다. 이 세상의 신이 기만의 배후에 있다면 복음의 확산에 반격할 것이며, 실제로 그런 반격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성경의 번역과 보급으로 사람들이 사제의 설명 없이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되면서 로마의 권위는 크게 약화되었다.
반종교개혁은 개신교 종교개혁을 파괴하려는 로마의 음모로 규정된다. 그 배후에서는 사탄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세우는 사람들을 일으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 가는 이들을 공격하게 했다는 해석이다. 예수회의 탄생을 묘사하는 표현도 극렬하다. 지옥의 깊은 곳이 열려 일찍이 결성된 어느 조직보다 끔찍하고 사악한 조직을 토해 낸 것에 비유된다.
이 영적 싸움을 이해하는 근거는 사도 바울이 악한 사람들과 사기꾼들에 관해 남긴 경고다.
디모데후서 3:13 악한 사람들과 사기꾼들은 더욱 악해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리라.
로마가 개혁자들의 가르침과 하나님 말씀의 광범위한 출판을 저지하려고 갈수록 더 많은 힘을 쏟은 일은, 속이는 자 자신도 속으며 악이 더욱 심해진다는 경고에 맞닿아 있다. 반종교개혁은 성경을 직접 읽게 된 사람들을 다시 사제의 권위 아래 두려는 대응이었다. 따라서 그 공격 대상에는 개혁자와 그들의 가르침뿐 아니라 널리 출판되는 모국어 성경도 포함되었다.
1540년 예수회의 승인과 창립 목적
잉글랜드가 대성경을 출판한 지 불과 1년 뒤인 1540년, 교황 바오로 3세는 로마에서 새로운 수도회를 승인했다. 예수회, 곧 예수의 동료회(Society of Jesus)였다. 창립자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는 1491년 스페인에서 태어난 군인 출신으로, 실제 이름은 이니고 로페스였다. 그가 세운 새로운 사제 집단은 군사적 수도회로 출발했다.

예수회에 부여된 목적은 개신교 종교개혁에 맞서 싸우고, 가능하다면 그것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사제의 도움 없이 모국어 성경을 이해하게 된 상황에서, 예수회는 로마의 권위를 회복하려는 대응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예수회를 향한 비판은 창립 당시의 목적에 그치지 않는다. 역사 전반에 걸쳐 ‘갈라진 형제들’을 ‘모든 교회의 어머니’에게 돌아오게 하려는 시도에서도 예수회가 주된 역할을 맡았다는 것이다. ‘갈라진 형제들’은 로마가 이단자로 여기는 개신교도들을, ‘모든 교회의 어머니’는 로마 교회를 가리킨다. 곧 개신교도들을 로마와 다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 목표였으며, 예수회는 이를 위해 어떤 수단이라도 사용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예수회의 정치 활동과 추방 기록
예수회를 향한 비판은 교리 논쟁을 넘어 각국의 정치에 개입하고 권력을 행사한 방식까지 겨냥한다. 예수회의 역사적 역할을 비판하는 한 발언자는 기만, 첩보, 침투, 암살, 혁명을 그들의 음흉한 수법으로 지목한다. 예수회가 수행해 온 역할을 이해하지 않고는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평가다.
J. E. C. 셰퍼드는 『배빙턴 음모』에서 예수회가 정치적 음모와 전복 모의에 가담한 탓에 1555년부터 1931년 사이에 적어도 83개 국가·도시국가·도시에서 추방되었다고 썼다. 이 수치는 국가뿐 아니라 도시국가와 도시에서 이루어진 추방까지 포함한다.
미국 대통령 존 애덤스가 토머스 제퍼슨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예수회의 활동에 대한 강한 경계심이 드러난다. 애덤스는 예수회의 부활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예수회원들이 온갖 모습으로 위장해 미국에 몰려올 것을 우려했다. 로욜라의 조직을 향한 적대감은 다음과 같은 비난으로 이어졌다.
“나는 예수회의 부활이 달갑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곳에 떼 지어 몰려오지 않겠습니까? 집시의 왕이나 할 법한 온갖 변장을 하고서 말입니다. 지상에서나 지옥에서나 영원한 저주를 받아 마땅한 집단이 있다면, 바로 이 로욜라의 무리입니다.”
링컨 암살에 관한 시니키의 주장
19세기 저술가 에드윈 셔먼은 예수회를 ‘지옥의 공병대’라고 불렀다. 그의 책을 현대에 펴낸 판본에는 ‘로마의 공병과 갱도병’을 뜻하는 표제 문구와 함께 에이브러햄 링컨의 암살 장면이 실려 있다. 앉아 있는 링컨의 뒤에서 한 인물이 권총을 겨누는 그림은 예수회를 암살과 연결하는 비판을 표지에 담은 것이다.

링컨 암살의 책임을 예수회에 돌린 인물은 19세기 가톨릭 사제 샤를 시니키 신부다. 시니키 신부는 『로마 교회에서의 50년』에서 그 주장을 자세히 전개했다. 셔먼의 책 표지에 등장하는 암살 장면 역시 예수회에 책임을 묻는 주장과 연결된다.
한편 링컨의 말로 인용되는 다음 발언은 암살의 책임이 아니라, 링컨 자신이 누구와 싸우고 있다고 여겼는지를 담고 있다. 여기서 투쟁의 상대는 남부의 미국인들에 그치지 않고 로마 교황과 예수회원들까지 포함된다.
“내가 싸우는 상대는 남부의 미국인들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맞서 자신을 지켜야 할 상대는 오히려 로마 교황과 그의 배신적인 예수회원들, 그리고 그들의 맹목적이고 피에 굶주린 노예들입니다.”
나치 조직에 대한 영향 주장과 ‘검은 교황’
예수회의 정치적 영향력을 둘러싼 비판은 20세기의 나치 체제로도 이어진다. 에드먼드 파리는 『예수회의 비밀 역사』에서 예수회가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에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SS 조직이 예수회의 원리에 따라 구성되었다고 주장한다. 히틀러가 하인리히 힘러를 자신의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라고 불렀다는 일화도 그 근거로 소개한다. SS의 조직 원리뿐 아니라 그 조직을 이끈 힘러까지 예수회 창립자에 빗대었다는 것이다. 파리의 책에는 히틀러가 가톨릭 수도원에서 하겐이라는 신부에게 만자 문양을 얻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예수회의 지휘 체계를 이끄는 총장직은 로욜라 자신이 만들었다. 총장은 흔히 ‘검은 교황’이라고 불리는데, 검은 예복과 함께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다는 평판이 이 별칭의 이유로 꼽힌다. 이 직책을 맡았던 미켈란젤로 탐부리니에게 귀속된 말은 그 권력이 국경을 넘어 은밀하게 행사된다는 비판에 자주 인용된다.

예수회 총장을 지낸 미켈란젤로 탐부리니.
찰스 치니퀴의 『로마 교회에서의 50년』 484쪽을 출처로 제시한 다음 발언은 통치의 범위를 파리에서 중국으로, 다시 전 세계로 넓히면서 그 방법은 외부에 드러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파리뿐 아니라 중국까지, 중국뿐 아니라 온 세계를 다스리며, 그 방법을 아무도 모르게 한다.
페이즐리 목사의 비판과 제3제국·가톨릭의 결합 주장
목사이자 정치인인 이언 페이즐리 목사는 주류 언론에서도 예수회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예수회 수장을 검은 교황이라고 불렀고, 언론에 그 명칭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설명했다고 밝혔다. 페이즐리 목사는 예수회를 게슈타포와 연결하면서 에드먼드 파리의 『예수회의 비밀 역사』를 근거로 들었다.


페이즐리 목사가 소개한 문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스페인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권위 아래 발표되었다는 추도사의 일부였다. 프랑코와 아돌프 히틀러가 함께 있는 사진도 이와 함께 제시된다. 파리는 그 추도사를 단순히 스페인에서 나온 발언이 아니라, 마드리드를 통해 바티칸의 입장을 전달한 성명으로 규정했다.
이 추도사는 교황청 자체의 목소리다. 마드리드를 통해 발표된 바티칸의 공식 성명이다.
파리의 책 164쪽에는 예수회와 나치 체제의 관계를 뒷받침하는 또 다른 문구가 제시된다. 이 책을 근거로 한 비판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예수회는 제3제국 건설이 국가사회주의 국가와 가톨릭 기독교를 결합시킨다고 주장했다. SS의 조직 원리와 게슈타포의 연관성을 지적한 앞선 비판에 더해, 여기서는 나치 국가와 가톨릭의 결합 자체를 지지했다는 책임을 묻는다.
이러한 정치적 역할은 로욜라의 창립 목적에서 벗어난 일이 아니라는 평가다. 예수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역사 내내 창립 당시와 같았으며, 설립된 지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첩보원과 암살자들로 이루어진 정예 조직으로 성장했다는 주장이다.
반종교개혁과 예수회의 위장 활동을 둘러싼 비판
예수회는 1540년 교황에게서 반종교개혁을 시작하라는 특별한 위임을 받았다.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와 동료들이 세우려 한 조직은 교황에게 충성하며 종교개혁에 맞서는 조직이었다. 이미 일어난 종교개혁의 변화를 저지하고 사람들을 로마 가톨릭으로 되돌리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예수회는 지식인으로 이루어진 정예 집단으로 성장하면서 왕과 평민 모두에게 미움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예수회에 관한 수많은 책과 논문은 교황을 위해 세계를 장악하려는 계획을 교회와 다른 이들에게 거듭 경고해 왔다고 한다. 그 수단으로 지목된 것은 교육, 사회사업, 조직 침투다. 교육과 사회사업으로 영향력을 넓히는 한편, 다른 조직 내부에서 신뢰를 얻어 로마 가톨릭교회의 대의를 진척시킨다는 비판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문서로 예수회원에게 요구되는 선서가 소개된다. 이 선서는 특히 섬뜩한 문서로 묘사되며, 20세기 이전에는 널리 알려져 있었고 미국 의회도서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다음 대목은 예수회 상급자가 입회자에게 건네는 훈계 형식이다.
“내 아들아, 지금까지 너는 자신을 위장하도록 배워 왔다. 개혁자들 사이에서는 개혁자로, 칼뱅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칼뱅주의자로, 개신교인들 사이에서는 개신교인으로 행세하며 그들의 신뢰를 얻어, 심지어 그들의 강단에서 설교하려고까지 하도록 배워 왔다. 너는 첩자로서 환심을 사서 모든 계층과 온갖 성향의 이단자들뿐 아니라 학교와 대학에서도 신뢰를 얻어야 한다는 의무를 배워 왔다.”
훈계가 요구하는 것은 상대 집단에 속한 사람처럼 행동하여 신뢰를 얻고, 나아가 그들의 강단에서 설교할 자리에까지 들어가는 일이다. 개혁자, 칼뱅주의자, 개신교인을 구체적으로 열거한 뒤 모든 계층과 성향의 이단자들, 학교와 대학으로 대상을 넓힌다. 밖에서 반대 의견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 공동체 안에서 신뢰받는 지위를 얻는 것이 활동의 방법으로 명시되어 있다.
학문의 주도권과 예수회의 교육망
연구자이자 은퇴 교수인 앨런 오라일리(Alan O’Reilly) 박사는 로욜라와 추종자들이 종교재판을 돕고 종교개혁에 맞서는 데 기여한 분야로 학문과 교육을 꼽는다. 예수회는 모든 학문 분야에서 지도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학문과 지적 활동에 집중하여 대학과 학문의 중심지들을 장악하려 했다는 것이다. 학교 안에서 개별 회원이 신뢰를 얻는 데 그치지 않고, 조직 전체가 학문의 주도권을 확보하려 했다는 설명이다.

이 교육 전략에 대한 비판은 개신교의 성경에 기초한 교육을 무너뜨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는 데 있으며, 이를 “학문에 맞서는 학문”으로 규정한다. 성경의 가르침 대신 계몽된 인문주의의 가르침을 사람들의 정신에 주입하려 했다는 것이다. 교육을 통해 바꾸려 한 것은 배우는 지식만이 아니라, 무엇을 권위로 삼아 생각하느냐는 문제였다.
예수회를 다룬 『악의 지배자들』(Rulers of Evil)의 저자 F. 터퍼 소시(F. Tupper Saussy)는 전체 회원의 4분의 3이 46개 예수회 칼리지에 투입되어 학문에 전념했다고 기록한다. 교육 활동에 회원의 상당수가 집중되었으며, 교육망도 크게 확대되었다. 같은 책 65쪽에 제시된 1749년까지의 규모는 다음과 같다. 이 기관들은 일부 또는 전부가 예수회의 지도 아래 있었다.
| 교육기관 종류 | 1749년까지의 규모 |
|---|---|
| 칼리지 | 669개 |
| 신학교 | 176개 |
| 학습 시설 | 61개 |
| 대학 | 24개 |
교육이 설교에 미치는 영향은 19세기 찰스 스펄전 목사의 비판에서도 드러난다. 스펄전 목사는 「모든 교회를 향한 엄숙한 경고」(A Solemn Warning for All Churches), 설교 제68호에서 일부 설교자들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그들은 마귀의 새로운 예수회식 칼리지에서 배웠기에 복음의 일부를 숨긴다.”
스펄전 목사가 문제 삼은 사람은 복음을 전혀 말하지 않는 설교자가 아니라 복음의 일부를 숨기는 설교자였다. 예수회식 교육이라는 표현으로 겨냥한 것은 그들이 가르치는 내용뿐 아니라, 전하지 않고 감추는 내용이었다.
교황에 대한 복종과 폭력을 명령하는 선서문
예수회가 학문과 교육을 활용하는 한편, 개종을 거부하는 이단자들을 박해하는 수백 년 된 관행도 버리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그 근거로 인용된 예수회 입회 선서문은 교황의 권위에 대한 모든 반대를 힘을 다해 제거하겠다는 맹세를 담고 있다. 제거할 대상으로 이단자뿐 아니라 개신교인과 자유주의자를 명시하며, 공개적인 전쟁과 은밀한 살해를 모두 상급자의 명령에 따라 수행할 일로 규정한다.
“나는 또한 기회가 주어지면 다음과 같이 하겠다고 약속하고 선언한다. 명령에 따라 은밀하게든 공개적으로든 모든 이단자와 개신교인과 자유주의자들을 상대로 가차 없는 전쟁을 일으키고 수행하여, 온 지면에서 그들을 뿌리 뽑고 말살하겠다. 이를 공개적으로 할 수 없을 때에는 은밀하게 독이 든 잔과 목을 조르는 끈, 단검의 칼날이나 납탄을 사용하겠다. 언제든 그러한 명령을 내리는 이가 교황의 대리인이든 예수회의 상급자이든 그 명령에 따르겠다.”

선서문이 은밀한 살해 수단으로 열거한 ‘단검의 칼날’을 형상화한 장면이다.
공개적으로 공격할 수 없으면 은밀한 수단을 쓰겠다는 맹세에서, 폭력의 방식은 달라져도 명령에 복종할 의무는 달라지지 않는다. 선서 뒤에 이어지는 예수회 상급자의 명령은 교황의 이름으로 모든 땅을 차지하라는 요구로 나아간다. 여기서는 교황을 예수의 대리자이자 지상의 통치자로 받아들이는지가 생존과 말살을 가르는 조건이 된다.
“그러면 너희는 온 세상으로 가서 교황의 이름으로 모든 땅을 차지하라. 교황을 예수의 대리자이자 지상에서 그분을 대신하는 통치자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저주받고 말살되게 하라.”
아서 노블 교수는 이러한 박해의 책임을 예수회에 돌리면서, 16세기 종교재판의 부활과 그에 따른 잔혹 행위를 예수회가 주도했다고 서술한다. 같은 세기에 목숨을 잃은 개신교 순교자의 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추정치를 제시한다.
“16세기의 종교재판 부활을 주도한 것은 예수회였으며, 그 잔혹 행위도 마찬가지였다. 그 세기에만 무려 90만 명 이상의 개신교 순교자가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으로 추정된다.”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은 예수회의 선동으로 일어난 참극으로 지목된다. 당시 프랑스 전역에서 개신교인 약 7만에서 10만 명이 학살당했다는 서술이다.
낭트 칙령 폐지와 프랑스 개신교도의 권리 박탈
프랑스 개신교도들의 권리를 보호하던 낭트 칙령은 1685년 루이 14세에 의해 폐지되었다. 예수회가 왕을 조종하여 폐지를 이끌어 냈다는 주장의 근거로는 왕의 고해 사제인 피에르 라셰즈가 예수회 소속이었다는 점이 함께 제시된다. 칙령의 폐지로 개신교도들은 법적 보호를 잃었고, 그들의 신앙은 불법이 되었다.

찰스 시니키의 『로마 교회에서의 50년』 489쪽을 출처로 든 기록에 따르면, 그 결과 남녀와 어린이 50만 명이 프랑스 곳곳의 큰길에서 목숨을 잃었다. 탄압은 성경을 읽는 일에도 미쳤다. 같은 기록은 낭트 칙령이 폐지된 뒤 프랑스에서 성경 읽기가 100년 동안 금지되었다고 전한다.
윌리엄 로드의 제네바 성경 금지와 개신교도 탄압
잉글랜드에서는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로드가 제네바 성경의 인쇄와 수입을 금지했다. 아서 노블 경은 EIPS 온라인 기사 「예수회와 영국을 파괴하려는 그들의 전략」에서 로드가 예수회와 긴밀히 협력했다고 서술하며, 성경의 유통 금지와 함께 종교개혁의 교리를 지지한 사람들에 대한 박해를 지적한다.
“로드는 감히 종교개혁의 교리를 지지한 개신교도들에게 극도로 잔혹한 행위를 저질렀다.”

박해를 받은 사람 가운데는 저명한 개신교도 윌리엄 프린이 있었다. 프린은 두 차례 귀를 잘렸고, 그 뒤에는 남아 있던 귀마저 도려내졌다. 다른 이들도 채찍질을 당하거나 공개적으로 코가 찢기고 얼굴에 달군 쇠로 낙인이 찍혔다.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억누르는 처벌은 책의 인쇄와 반입을 막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가르침을 지지한 사람들에게 신체적 고통과 공개적인 모욕을 가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같은 기사에 따르면, 로드는 결국 예수회와 공모하여 잉글랜드를 다시 교황의 지배 아래 두려 한 죄가 인정되어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그의 개인 문서들 가운데서는 브뤼셀의 예수회 상급자에게 보내는 편지가 발견되었다.
왈도파의 신앙과 1655년의 박해
왈도파는 교황의 권위와 신앙 체계에 굴복하지 않았고, 종교개혁자들은 바로 그 때문에 이들이 박해를 받았다고 보았다. 로마가 수 세기 동안 왈도파를 탄압했으며, 예수회도 이들을 끝내 전멸시키려는 시도를 집요하게 이어 갔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테오도르 베자는 왈도파를 “초기의 순수한 교회의 바로 그 씨앗”이라고 불렀다. 그에게 왈도파는 오랜 박해 속에서도 초기 교회의 신앙을 이어 온 공동체였다.
“그들은 결코 교황의 미신을 따르지 않았고, 그 때문에 주교들과 종교재판관들에게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계속 존속한 것은 분명 기적이다.”
하인리히 불링거는 세계 각지의 왈도파가 저술과 끊임없는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고백했다고 기록했다. 그들은 교황이야말로 사도 요한이 예고한 진짜 적그리스도라고 공개적으로 규탄했다. 불링거의 기록에서 이러한 신앙고백은 글과 말에 그치지 않았다. 왈도파는 한결같이 영광스러운 순교로 자신의 믿음을 증언했으며, 불링거가 그 기록을 남기던 때에도 같은 증언을 이어 가고 있었다. 오랜 박해 속에서도 공동체가 존속했을 뿐 아니라, 목숨을 걸고 그 가르침을 전했던 것이다.
왈도파가 겪은 박해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사건으로는 1655년의 박해가 꼽힌다. 연구자이자 은퇴 교수인 앨런 오라일리 박사는 당시 왈도파를 공격한 군대가 사보이 공작의 군대였다고 설명한다. 오라일리 박사는 공작 역시 “교황의 꼭두각시”였으며, 왈도파를 완전히 없애 버리려고 군대를 투입했다고 비판한다.
피에몬테의 왈도파 학살과 보호 약속
왈도파는 첫 공격을 막아 냈지만, 이후 자신들을 보호하겠다는 약속을 믿고 군대를 받아들였다. 이 보호 약속은 예수회 특유의 교활한 전술을 이용한 가톨릭 측의 기만으로 묘사된다. 다른 군대가 들어와 보호해 줄 것이라고 설득한 뒤, 바티칸 군대라고 지칭된 병사들을 왈도파의 집에 숙영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병사들은 자신들을 받아들인 주민들에게 칼을 돌려 끔찍한 학살을 자행했다. 주민들이 보호를 기대하며 내준 집이 도리어 그들을 공격하는 장소가 되었다.

피에몬테 학살로 알려진 이 사건은 영국 시인 존 밀턴의 「최근 피에몬테에서 일어난 학살에 부쳐」에도 남아 있다. 밀턴은 살해당한 왈도파를 오랫동안 하나님의 진리를 지켜 온 성도들로 묘사하며 그들의 고난을 추모했다.
“오 주여, 학살당한 주의 성도들의 원수를 갚으소서. 그들의 뼈는 차가운 알프스 산에 흩어져 있나이다. 그들은 우리 조상 모두가 나무와 돌을 숭배하던 옛날에도 주의 진리를 순수하게 지킨 이들이니이다.”
시에서 ‘나무와 돌’은 우상을 가리킨다. 밀턴은 조상들이 우상을 숭배하던 때에도 진리를 순수하게 지킨 사람들의 신앙을, 이제 차가운 알프스 산에 흩어진 그들의 뼈와 대비한다.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는 하나님께 희생자들의 원수를 갚아 달라는 호소이기도 하다.
살아남은 왈도파는 어렵게 잉글랜드의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크롬웰은 프랑스의 마자랭 추기경과 협상하여 박해를 중단시키는 데 성공했다.
장 레제 목사의 경고와 생존자들의 고통
왈도파의 장 레제(Jean Leger) 목사는 군대를 받아들이기 전부터 동료 신자들에게 로마의 기만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군대는 마을에 들어왔고 학살이 벌어졌다. 가까스로 탈출한 레제 목사는 이후 돌아와 충격에 빠진 생존자들을 힘껏 돌보려 했다.
레제 목사는 무고한 성경 신자들에게 가해진 잔혹 행위를 직접 목격했다. 가톨릭 측이 저지른 참상을 기록하면서, 자신이 본 일을 글로 옮기는 고통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이 어둠의 행위들을 기록할 때 내 눈물이 잉크와 섞인다. 정녕 어둠의 군주 자신의 행위보다도 더 악한 일들이다.”
레제 목사는 군대를 받아들이기 전에 동료 신자들을 설득해야 했고, 학살 뒤에는 살아남은 이들을 돌보아야 했다. 눈물이 잉크와 섞인다는 표현에는 그가 목격한 참상뿐 아니라 생존자들의 고통을 곁에서 감당해야 했던 목회자의 슬픔도 담겨 있다.
중세의 박해와 관련하여 예수회는 지금까지 생겨난 단체 가운데 의심할 여지 없이 가장 급진적인 단체로 규정된다. 예수회의 활동과 그에 대한 반발을 다루는 자료로는 아서 노블 교수의 글이 인용된다.
예수회의 추방과 1773년 해산
아서 노블의 EIPS 기사 「예수회와 영국 파괴 전략」에 따르면, 예수회는 자신들이 끼친 해악 때문에 70개가 넘는 나라에서 추방되었고, 그중 5분의 4는 로마 가톨릭 국가였다. 교황 11명도 예수회의 위선을 저주하고 비난했다고 한다. 예수회에 대한 반발은 개신교 국가뿐 아니라 가톨릭 국가와 교황들 사이에서도 일어났다. 노블은 예수회가 거듭 탄압을 받으면서도 보복으로 악명을 떨쳐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고 서술한다.

존 애덤스가 토머스 제퍼슨에게 보낸 편지에도 예수회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나타난다. 애덤스는 자신이 소장한 네 권짜리 예수회 역사서의 저자가 이름을 밝히지 않은 까닭을 암살에 대한 두려움에서 찾았다. 이는 저자가 직접 밝힌 이유가 아니라 애덤스 자신의 추측이었다.
“내가 가진 예수회 역사서는 네 권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의 저자가 익명인 것은, 내 생각에는 그가 유럽의 모든 군주들처럼 예수회의 암살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1773년 교황 클레멘스 14세는 영구 칙령으로 예수회를 해산했다. 노블의 기사에 인용된 일화에 따르면, 클레멘스 14세는 교황 칙서에 서명하면서 “나는 내 사형 집행 영장에 서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같은 일화는 그가 1년 뒤 독살당해 극심한 고통 속에서 숨졌다고 전한다. 해산 칙서에 서명할 권한을 가진 교황조차 그 결정으로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리라 여겼다는 이야기다.
잉글랜드를 무너뜨리려 한 이유
로마가 종교개혁의 진정한 요새로 여긴 나라는 잉글랜드였다. 예수회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25회 넘게 암살하려 했으며, 외국 군대를 동원해 잉글랜드를 침공하려는 시도도 거듭했다는 주장이다. 잉글랜드를 장악하려는 목적은 한 나라를 개종시키거나 왕위를 바꾸는 데 그치지 않았다. 세계 개신교의 힘을 꺾으려면 그 중심지인 잉글랜드부터 무너뜨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매닝 추기경에게 귀속된 1859년 발언에는 잉글랜드를 겨냥한 전략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잉글랜드는 개신교의 머리이자 그 운동의 중심이며, 그 세력의 요새다. 잉글랜드에서 약화되면 개신교는 어디서나 마비된다. 잉글랜드에서 정복되면 전 세계에서 정복되는 것이다. 일단 이곳에서 무너지면 나머지는 모두 세부적인 전투에 불과하다.”
잉글랜드는 개신교 운동을 이끌 뿐 아니라 다른 지역의 저항을 지탱하는 거점으로 지목되었다. 따라서 그곳에서의 승리는 한 나라를 정복하는 것보다 훨씬 큰 의미를 지녔다. 중심을 먼저 무너뜨려 세계 개신교의 힘을 마비시키면, 나머지 지역에서는 개별적인 전투만 치르면 된다는 계산이었다.
로욜라 조각상에 놓인 두 권의 책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 안에 있는 예수회 창립자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의 조각상에는 두 권의 책이 등장한다. 로욜라가 손에 들고 있는 펼친 책의 한쪽에는 ‘예수회 회헌’이, 다른 쪽에는 ‘하나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라는 뜻의 라틴어 문구가 새겨져 있다. 예수회의 규범과 활동 목적을 한 권의 책에 나란히 담은 모습이다.

조각상 아래에서는 로욜라의 발이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인물의 목을 밟고 있고, 그 인물 아래에는 뱀이 있다. 밟힌 인물은 개신교를 상징한다고 전해진다. 그 인물도 팔 아래에 책 한 권을 끼고 있다.

로욜라가 든 책과 달리, 아래 인물이 지닌 책에는 알아볼 만한 표기가 없다. 그렇다면 이 책은 무엇을 가리킬까? 이 질문은 중세 내내 개신교가 권위의 근거로 삼았던 성경과 연결해 볼 수 있다. 교황제를 거부할 근거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개신교를 상징하는 인물이 책을 끼고 짓밟히는 모습은, 그 책이 무엇인지 묻는 데서 더 나아가 성경과 교황 중 어느 쪽을 최종 권위로 삼을 것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성경과 교황 가운데 무엇이 더 높은 권위인가
로마는 성경을 개신교의 ‘종이 교황’이라고 조롱했다. 개신교가 성경에 부여한 권위를 교황의 권위에 빗댄 표현이다. 예수회는 성경의 권위에 맞서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개신교도들에게 다음과 같은 고백문을 낭독하게 했다고 한다.

우리는 로마 교황이 새로 제정한 것은 무엇이든, 성경에 있든 없든 참되고 신성하며 구원이 충만하므로, 평신도들은 그것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계명보다도 더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교황에게 자신의 뜻에 따라 성경을 변경하거나 더하거나 덜할 권한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지극히 거룩한 교황에게 그리스도 자신께 마땅히 드릴 때보다도 더 깊이 엎드려 신적 경의를 표해야 한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요구하는 복종은 교황의 가르침을 존중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교황이 새로 제정한 것을 하나님의 계명보다 귀하게 여기고, 교황에게 성경을 변경하거나 더하고 덜할 권한을 인정하며, 그리스도께 드리는 것보다 더 깊은 신적 경의를 표해야 한다. 성경이 교황의 권위를 판단하는가, 교황이 성경의 내용과 권위를 결정하는가라는 대립이 고백문의 각 요구에 담겨 있다. 『어둠 속의 등불』은 이 고백문을 뒷받침하는 19세기와 20세기의 출처가 여러 개 있다고 밝히며, 그중 하나를 제시한다.
트렌트 공의회의 칭의 선언과 종교개혁에 대한 반대
성경과 교황 가운데 무엇을 최종 권위로 삼을 것인가 하는 대립은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는가라는 문제와도 맞물렸다. 교황 바오로 3세가 소집한 트렌트 공의회는 종교개혁의 교리와 가르침을 반박하려는 명확한 목적을 지녔다. 1545년에 시작하여 1563년까지 18년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연구자이자 은퇴 교수인 앨런 오라일리(Alan O’Reilly) 박사는 자신의 기억으로는 적어도 세 회기에 걸쳐 열렸다고 설명한다.

예수회는 공의회의 지적·교리적 대응을 주도한 배후로 지목된다. 종교개혁자들이 찬성하는 것은 무엇이든 예수회가 반대했으며, 공의회와 대학들을 장악하고 학식과 지성을 동원해 개신교 성경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려 했다는 비판이다. 그 대응은 구원 교리를 반박하는 일과 종교개혁자들이 번역한 성경을 공격하는 일을 함께 겨냥했다.
그 대립의 핵심에는 은혜와 구원이 있었다.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칭의, 곧 의롭다 하심의 은혜를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는 가르침에 맞서, 트렌트 공의회 제7회기 교령 제4조의 선언으로 다음 문구가 인용된다.
누구든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직 믿음으로 칭의의 은혜를 얻는다고 말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정죄의 초점은 ‘오직 믿음으로’ 칭의의 은혜를 얻는다는 데 있었다. 교회 조직이나 관행을 유지하는 문제를 넘어,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다 하시는 조건을 둘러싼 충돌이었다. 무엇을 구원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일지, 그리고 그 가르침의 근거가 되는 성경을 어떤 번역으로 읽을지가 함께 쟁점이 되었다.
트렌트의 선언들은 20세기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재확인되었다. 이에 관한 근거로 제시되는 문헌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헌장, 교령, 선언』 77쪽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어둠 속의 등불』 제작 당시 로마의 가장 최근 교리 선언으로 소개된다. 따라서 트렌트의 칭의 선언은 16세기에 끝난 논쟁이 아니라 이후에도 유지된 교리적 입장이었다.
불가타와 외경에 부여한 권위
성경 번역을 둘러싼 대립에서는 번역과 원문이 서로 다를 때 어느 쪽을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가 중요했다. 영어 성경의 역사를 다룬 저자 벤슨 보브릭(Benson Bobrick)에 따르면, 트렌트 공의회는 불가타가 다른 모든 라틴어 번역보다 나을 뿐 아니라 그리스어 본문과 서로 다른 곳에서는 그리스어 본문 자체보다도 낫다고 선언했다. 번역을 원문에 비추어 판단하는 대신, 불가타에 원문보다 높은 권위를 부여한 것이다.

공의회의 주요 결의들은 순수한 성경, 곧 개신교 성경에 반대하는 방향으로 내려졌다는 비판을 받는다. 공의회가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저술에서 내용을 가져와 직접 정죄한 것으로 보인다는 지적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외경의 지위다. 가톨릭 성경은 외경을 구약의 일부로 포함하지만, 공의회는 그 책들이 성경이 아니라는 견해를 정죄했다. 더 나아가 외경을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을 이른바 이단자로 몰아 사형에 처할 태세였다는 비판이다.
외경의 수록과 영감의 인정은 다르다
외경을 둘러싼 차이는 어느 성경에 그 책들이 들어 있었는지만 살펴서는 이해할 수 없다. 목사이자 저자이며 고대 필사본 수집가인 데이비드 브라운(David Brown) 박사는 복도 건너편 자신의 사무실에도 초기 성경들을 소장하고 있다고 밝히며, 초기 개신교 성경에도 외경이 실렸다는 사실을 짚는다. 외경이 없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1611년 킹제임스성경에는 외경이 들어 있었다. 그보다 앞선 제네바 성경에도 외경이 수록되었고, 다만 1599년판의 일부 무단 판본에서는 빠졌다.

그러나 책에 수록하는 것과 영감받은 성경으로 인정하는 것은 다르다. 이 초기 개신교 성경들에서 외경은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지닌 책도, 영감받은 책도 아니었다. 반면 로마 가톨릭 교회는 외경이 영감받았다고 선언했다. 같은 책들을 한 권 안에 실었더라도, 그것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입장이 달랐다.
| 성경·교회 | 외경의 수록과 지위 |
|---|---|
| 1611년 킹제임스성경 | 외경을 수록했지만 영감받은 성경과 동등하게 인정하지 않았다. |
| 제네바 성경 | 외경을 수록했지만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부여하지 않았다. 1599년판의 일부 무단 판본에서는 외경을 제외했다. |
| 로마 가톨릭 교회 | 외경을 구약의 일부로 포함하고 영감받은 것으로 선언했다. |
두에랭스 역본과 ‘일용할 양식’의 번역
로마와 예수회는 개신교 교리를 정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종교개혁 성경에 맞설 영어 신약을 만드는 데도 힘을 쏟았다. 프랑스 랭스에서 예수회 학자들이 편찬한 이 신약은 ‘예수회 랭스 역본’으로 알려졌으며, 나중에는 두에랭스(Douay-Rheims) 역본으로 불렸다. 이들이 번역에 힘을 쏟은 목적 가운데 하나는 특이한 번역어와 각주를 통해 가톨릭 교리를 정당화하는 데 있었다는 비판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마태복음 6장에서 양식을 구하는 기도다. 위클리프와 틴데일의 번역, 제네바 성경은 이 구절의 양식을 ‘일용할 양식’으로 옮긴다.
마태복음 6: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이에 비해 두에랭스 역본은 다음과 같이 옮긴다.
오늘 우리에게 초실체적 양식을 주소서
차이는 ‘일용할’과 ‘초실체적’이라는 단어에 있다. 두에랭스 역본에 대한 비판은 ‘초실체적’에 대응하는 그리스어 단어에 그런 뜻이 전혀 없는데도, 화체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 표현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쟁점은 단순히 낯선 말을 썼다는 데 있지 않다.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번역하면서 특정 교리를 뒷받침하는 뜻을 넣었느냐는 문제다.
박해의 희생자를 순교자로 인정하지 않은 주석
번역어뿐 아니라 주석도 종교개혁자들의 비판에 맞서는 수단이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교회가 종교재판을 통해 성도들을 대량 학살해 왔다고 비판했다. 두에랭스의 주석은 박해받은 개신교도들을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성도들과 동일시하는 것부터 거부했다. 논쟁의 중심에는 신비의 바빌론을 묘사하는 요한계시록 17장 6절이 있었다.
요한계시록 17:6 또 내가 보니, 그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순교자들의 피에 취하였더라. 그러므로 내가 그녀를 보고 크게 의아해 하며 놀랐노라.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순교자들의 피’에 취했다는 표현은 박해한 권력의 정체를 가리는 데 중요했다. 희생자들이 성도이자 순교자라면, 그들의 피를 흘린 권력은 정죄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에랭스의 예수회 각주는 개신교도들의 죽음에 이 표현을 적용하는 것을 거부했다. 데이비드 클라우드의 『로마와 성경』(Rome & the Bible) 235쪽에 재인용된 초기 두에랭스 각주는 다음과 같다.
그러나 개신교도들의 피는 성도들의 피라 불리지 않는다. 도둑과 살인자, 그 밖의 악행자들의 피도 마찬가지다. 정의의 명에 따라 그들의 피를 흘린 일에 대해서는 어떤 국가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각주는 개신교도들을 순교자가 아니라 도둑이나 살인자 같은 범법자와 나란히 놓음으로써, 그들을 죽인 일을 성도에 대한 박해가 아닌 정의에 따른 처벌로 취급했다. 그에 따라 국가도 그 피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했다. 종교개혁자들의 고발에 맞서 죽음 자체를 부인한 것이 아니라, 죽임당한 사람들의 신분과 그들을 죽인 행위의 성격을 달리 규정한 것이다.
두에랭스 역시 바빌론의 창녀가 로마라는 도시를 상징한다는 점은 인정했다. 그러나 그 로마는 반드시 네로 시대의 이교 로마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종교개혁자들이 박해를 행한 로마 교회를 지목한 것과 달리, 두에랭스는 같은 도시를 가리키면서도 그 대상을 과거의 이교 권력으로 한정했다.
| 쟁점 | 종교개혁자들의 비판 | 두에랭스의 반박 |
|---|---|---|
| 종교재판의 희생자 | 로마 교회가 대량 학살한 성도들 | 개신교도들의 피는 성도들의 피가 아님 |
| 피를 흘린 책임 | 성도들을 박해한 로마 교회에 책임이 있음 | 정의에 따른 처벌에 대해서는 국가가 책임지지 않음 |
| 바빌론의 창녀가 가리키는 로마 | 박해를 행한 로마 교회와 연결 | 네로 시대의 이교 로마로 한정 |
왕위 계승과 1605년 화약 음모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죽자 잉글랜드의 왕위를 누가 이을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로마가 가톨릭 군주를 왕위에 앉히려 했으며, 그 뜻이 좌절되자 잉글랜드를 다시 로마의 지배 아래 두기 위해 1605년의 화약 음모를 꾸몄다는 설명이다. 이는 예수회가 중세에 꾸민 음모 가운데 단연 가장 사악한 사건으로 규정된다.

당시 교황은 잉글랜드의 예수회 관구장 헨리 가넷(Henry Garnet) 신부에게 왕위 계승에 관한 교서 두 통을 보냈다고 한다. 교서는 자신을 충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라고 선언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도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지 못하게 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제임스 1세는 자신이 개신교도라고 선언했다. 이 때문에 로마가 제임스 왕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는 주장이다.
왕을 제거할 인물로 지목된 가이 포크스(Guy Fawkes)는 스페인의 가톨릭 군대에서 싸운 직업 용병이었다. 포크스는 의사당 아래에 화약 약 36통을 설치했다. 폭파의 목표는 제임스 왕 한 사람만이 아니라 잉글랜드 정부 전체였다. 로마와 예수회는 폭파 뒤에 닥칠 혼란을 이용해 나라의 지배권을 되찾으려 했다는 설명이다. 한 인터뷰 참여자는 자신이 아는 한 포크스가 예수회 사제는 아니었지만, 예수회와 함께 활동한 선동가라고 볼 수 있다는 판단을 덧붙였다.
그러나 포크스는 화약을 폭발시키기 직전에 발각되었다. 잉글랜드 사람들은 음모가 좌절된 것을 분명한 하나님의 개입으로 받아들였다. 포크스는 공개 처형되었고, 공모자로 지목된 가넷 신부도 처형되었다. 잉글랜드에서 해마다 ‘가이 포크스의 밤’에 포크스를 본뜬 인형을 불태우는 풍습은 왕과 정부를 한꺼번에 제거하려 했던 이 폭파 계획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재판과 『맥베스』에 담긴 예수회 비판
화약 음모 재판에서 제기된 예수회에 대한 고발은 가넷 신부 한 사람에게 그치지 않았다. 존경받는 법률가 에드워드 코크 경은 여러 나라에서 활동하던 예수회원들의 이름과 활동 지역을 열거하며 이들을 반역의 주범으로 지목했다.
“나는 로마교 사제가 빠진 반역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이번에는 알려진 예수회원이 매우 많다. 잉글랜드의 가넷, 스페인의 크레스웰, 플랑드르의 볼드윈, 로마의 파슨스다. 그러므로 주범은 사람들을 미혹하는 예수회원들이다. 이들은 지극히 거룩하고 복된 예수의 이름을 온갖 악행을 덮는 망토로 이용한다.”
코크 경의 고발은 잉글랜드에서 실행하려던 폭파 계획의 책임을 스페인과 플랑드르, 로마에서 활동하던 예수회원들에게까지 물었다. 또한 예수의 이름을 내세우는 이들이 그 이름으로 악행을 감추고 있다고 비난했다.
터퍼 소시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에서도 화약 음모에 대한 반응을 읽었다. 소시는 이 작품을 화약 음모를 기념하는 이른바 ‘화약극’이라고 부르며, 예수회를 사탄 숭배자와 살인자, 마녀로 치밀하게 규탄한 작품이라고 썼다. 『맥베스』가 당시의 음모와 예수회에 대한 비판을 담았다는 것이다.
진행 중이던 성경 번역과 왕의 생존
화약 음모가 좌절되기 한 해 전인 1604년, 청교도 지도자 존 레이놀즈는 새로운 성경 번역본을 내놓자고 제안했다. 제임스 왕이 이를 승인하면서 킹제임스성경 번역 작업이 시작되었다. 새 번역을 승인한 왕을 겨냥해 불과 1년 뒤 반역 사건이 일어난 것은 우연이었을까?
연구자이자 은퇴 교수인 앨런 오라일리(Alan O’Reilly) 박사는 음모가 성공했다면 번역 작업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를 짚었다. 왕이 제거되었다면 1604년에 시작되어 진행 중이던 새 성경 번역은 모두 중단되었을 것이며, 다시 시작되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번역을 영구적으로 중단시키는 것 역시 예수회가 의도한 결과였음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왕의 죽음이 번역에 미칠 결과뿐 아니라, 번역 중단 자체가 음모의 목적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화약 음모는 좌절되었고, 제임스 왕은 살아남아 자신의 이름을 딴 성경이 완성되는 것을 보았다. 그 성경의 배경에는 거의 100년 동안 박해의 불길과 유혈 속에서도 이어진 수고가 있었다.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는 노력이 왕의 승인 아래 시작된 새 번역에서도 계속되었다.
틴데일의 번역에서 1611년 킹제임스성경까지
1611년에 완성된 킹제임스성경은 많은 이들이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가장 뛰어난 성취로 꼽는 결실이다. 이 성경이 나오기까지는 1526년부터 이어진 번역과 출판의 역사가 있었다. 후대 번역자들은 틴데일의 번역을 받아들이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했다. 그 과정에서 영어 성경은 구약과 신약을 갖춘 한 권의 책이 되었고, 원어에 더욱 충실하면서 영어 표현도 다듬어진 번역으로 발전했다.
윌리엄 틴데일은 신약성경뿐 아니라 창세기부터 역대기하까지와 요나서도 번역했다. 그러나 구약의 책들은 개별적으로 출판되었으며, 그의 신약과 함께 한 권의 성경으로 묶이지는 않았다. 마일스 커버데일은 틴데일의 번역을 바탕으로 나머지 부분을 독일어와 라틴어에서 옮겨 최초의 완전한 영어 성경을 만들었다. 구약과 신약을 모두 갖추기는 했지만, 모든 부분을 성경 원어에서 직접 번역한 것은 아니었다.
존 로저스는 틴데일의 번역을 모두 모아 성경에 담았다. 그래도 남는 부분은 커버데일의 번역으로 채워야 했다. 모든 본문을 원어에서 번역한 영어 성경은 그 뒤 제네바 성경에 이르러 나왔다. 제네바 성경은 그리스어 수용본문(Textus Receptus)과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을 기초로 삼았고, 킹제임스성경과도 매우 가까웠다. 이 번역사를 설명한 인터뷰 참여자는 다만 제네바 성경의 문장에 아직 다소 거친 부분이 남아 있었다고 평가했다. 원어에 충실하게 옮기는 일뿐 아니라 영어 문장을 다듬는 일도 남아 있었던 것이다.
| 연도 | 번역자·참여 집단 | 성경 |
|---|---|---|
| 1535년 | 마일스 커버데일 | 커버데일 성경 |
| 1537년 | 존 로저스 | 토머스 매튜 성경 |
| 1539년 | 마일스 커버데일 | 대성경 |
| 1557년 | 잉글랜드 종교개혁자들 | 제네바 신약성경 |
| 1560년 | 잉글랜드 종교개혁자들 | 제네바 성경 |
| 1611년 | 킹제임스성경 번역자들 | 킹제임스성경, 공인역(A.V.) |
킹제임스성경은 히브리어와 아람어, 그리스어 본문에서 번역되었으며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제네바 성경의 문장을 평가한 같은 인터뷰 참여자는 1526년 이후 잇따르던 번역과 출판이 킹제임스성경의 등장 뒤 갑자기 멈췄다는 데 주목했다. 그는 이것을 마침내 제대로 된 번역에 도달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1611년의 성경은 앞선 번역들을 버리고 새로 시작한 결과가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친 작업이 결실을 맺은 성경이었다.
선행 번역자에 대한 존중과 성경의 영감
킹제임스성경 번역자들은 독자에게 보내는 서문에서 앞선 번역자들과 그들이 남긴 번역본에 존중을 표했다. 부족한 표현을 다듬는다고 해서 그들의 수고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었다. 앞선 번역들은 이미 교회를 세우고 영혼을 구원하는 데 기여했으며, 서문은 그 일을 맡았던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기렸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일으키시어 그분의 교회를 세우고 갖추게 하셨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복이 있고, 그 이름이 가장 존귀히 여겨지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을 진전시키는 이들입니다.
영국에서 활동한 선교사이자 『영원히 확정되었도다』의 저자인 잭 무어먼(Jack Moorman) 박사는 성경 번역자에게 기대할 자질을 이들에게서 찾았다. 필요한 것은 언어를 다루는 학문적 능력만이 아니었다. 독자 서문에 나타난 번역자들은 자신들의 지식만을 의지하지 않고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을 찾았다.
요한계시록 3:7 필라델피아 교회의 천사에게 편지하라. 거룩하신 분, 진실하신 분,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 열면 아무도 닫을 수 없고 또 닫으면 아무도 열 수 없는 분께서 이 일들을 말씀하시느니라.
요한계시록 3:7에 나오는 이 표현에는 번역자들이 누구를 의지했는지가 담겨 있다. 이들은 학문적 역량을 갖춘 학자들이면서도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었다. 성경을 옮기는 일에는 언어 지식과 함께 겸손하고 영적인 태도가 필요했다.
번역위원회는 자신들이 다루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졌다는 믿음을 고백하는 일도 중요하게 여겼다.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하기에 유익하니
디모데후서 3:16에서 번역의 출발점이 되는 것은 성경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번역자들이 옮겨야 할 것은 단지 오래된 종교 문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말씀이었다. 그러므로 번역에 임하는 태도는 그 말씀의 저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믿음과 떨어질 수 없었다.
베드로후서 1:21 예언은 예전에 사람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으로 감동을 받아 말한 것이니라.
베드로후서 1:21은 그 말씀이 사람을 통해 어떻게 기록되었는지를 밝힌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자기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말했으며, 성경 원문은 그렇게 주어졌다. 여기서 영감은 먼저 원문을 기록한 저자들에게 적용된다. 번역자에게 필요한 학식과 영적 태도는 그렇게 기록된 원문을 다른 언어로 옮기는 일을 위한 것이었다.
킹제임스성경의 독자 서문도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성경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저자가 하나님이심을 밝힌다. 앞선 번역자들의 수고는 존중받아야 했지만, 번역의 권위가 그들의 명성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 권위는 그들이 옮기고자 했던 성경을 누가 주셨는가에 달려 있었다.
새 번역보다 좋은 번역을 더 좋게 만드는 일
성경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성경과 교회의 관계도 그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성경을 편집하신 분도 사도나 선지자 자신의 지혜가 아니라 성령이시다. 교회는 성경에 권위를 부여한 주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을 인정한 공동체였다.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하기에 유익하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말씀은 그리스어 표현 ‘파사 그라페 테오프뉴스토스’와 함께 성경의 기원을 밝힌다. 디모데후서 3:16을 통해 분명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시고 교회는 그 성경을 인정한다는 차이다. 교회의 승인이 말씀에 권위를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다.
번역자들은 이 말씀을 옮긴 앞선 영어 성경들을 모두 잘못된 번역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독자에게 보내는 서문에는 기존 번역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그보다 나은 번역을 만들려는 목적이 명시되어 있다.
“선한 그리스도인 독자 여러분, 참으로 우리는 처음부터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 새 번역을 만들거나 나쁜 번역을 좋은 번역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좋은 번역을 더 좋게 하거나, 여러 좋은 번역에서 대표적인 좋은 번역 하나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힘써 온 일이자 우리의 목표였습니다.”
여러 좋은 번역에서 장점을 살려 대표적인 번역 하나를 만들려면, 앞선 작업을 평가하는 안목과 직접 번역할 능력이 함께 필요했다. 번역자들은 기존 번역과 단절하거나 그것을 전면적으로 대체하기보다 더 나은 번역으로 다듬고자 했다. 서문은 이 일을 위해 선정된 많은 사람이 자신을 스스로 평가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더 높이 평가받는 이들이었다고 덧붙인다. 또한 모든 참여자는 다른 사람의 번역에 의견을 내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직접 번역할 수 있을 만큼 원어에 능숙해야 했다.
개인 번역에서 공동 검토까지
처음 선정된 학자는 54명이었으나, 실제로 작업에 참여한 사람은 그중 47명이었다고 전해진다. 그 뒤 7년 동안 진행된 번역은 각자의 언어 능력을 충분히 활용하면서도 여러 집단의 검토를 거치도록 설계되었다. 전후 어느 시대에도 능가할 수 없는 공동 작업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그 절차 역시 이제껏 구상되거나 실행된 번역 작업 가운데 아마도 가장 독창적이고 세밀하며 철저하고 체계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번역자들은 ‘번역단’이라 불리는 여섯 팀으로 나뉘어 런던을 비롯한 세 도시에서 작업했다. 작업은 구약과 신약의 두 부문으로 나뉘었다. 공동 번역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의 번역을 읽고 의견만 내는 것은 아니었다. 각 팀원은 자신에게 배정된 구약 또는 신약의 성경 부분을 먼저 독립적으로 번역해야 했다. 이렇게 마련한 번역들을 비교하는 데서 공동 검토가 시작되었다.
『킹제임스성경 옹호』의 저자인 D. A. 웨이트(D. A. Waite) 목사는 팀당 인원을 평균 일곱 명으로 잡아, 킹제임스성경의 모든 단어가 열네 차례 검토를 거쳤다고 설명한다. 일곱 사람이 각각 번역한 것을 일곱 차례로 세고, 여기에 팀 내부의 검토, 다른 다섯 팀의 검토, 대표들의 최종 검토를 더한 계산이다.
| 단계 | 작업 방식 | 누적 검토 횟수 |
|---|---|---|
| 개별 번역 | 평균 일곱 명의 팀원이 맡은 본문을 각자 번역한다. | 7회 |
| 팀 내부 검토 | 일곱 번역을 함께 비교하여 좋지 않은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을 남긴다. | 8회 |
| 다른 번역단의 검토 | 팀의 결과물을 나머지 다섯 팀에 보내 검토받는다. | 13회 |
| 최종 공동 검토 | 각 팀에서 두 명씩 나온 열두 명이 전체를 검토한다. | 14회 |
일곱 개의 번역이 모이면 팀원들은 함께 앉아 표현들을 비교했다. 어느 표현이 가장 좋은지 살피면서 좋지 않은 선택은 제외하고 좋은 선택은 남겼다. 각자가 원문을 읽고 내린 판단을 동료들의 번역과 대조하여 팀의 번역문을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한 팀이 합의했다고 해서 그 표현이 그대로 확정되지는 않았다. 제임스 왕은 각 팀의 결과물을 다른 다섯 팀에도 보내도록 구체적으로 지시했다. 다른 팀들은 이를 읽고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나 바꾸고 싶은 부분을 찾아 의견을 돌려보냈다.
작업이 끝날 무렵에는 각 팀의 지도적인 인물 두 명씩, 모두 열두 명이 모여 전체를 다시 검토했다. 이 최종 공동 검토까지 마친 뒤에도 초안을 살피는 일은 계속되었다. 왕의 구체적인 지시에 따라 잉글랜드 국교회의 감독이나 지도자들은 초안을 한 부씩 받아, 자신이 관할하는 사람들 가운데 히브리어에 능숙한 모든 이에게 보냈다. 번역위원회 안에서 여러 차례 검토한 본문을 교회 안의 다른 언어 전문가들에게도 살피게 한 것이다.
원문의 단어와 문법적 형태를 보존하는 번역
여러 팀이 번역문을 주고받으며 검토한 목적은 원문의 단어와 문법적 형태를 가능한 한 충실하게 옮기는 데 있었다. 웨이트 목사는 이러한 번역 원칙을 언어적 등가와 형식적 등가로 설명한다. 언어적 등가는 히브리어·아람어·그리스어의 단어를 영어 단어로 옮기는 방식이다. 메시지나 생각, 개념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가능한 한 원문의 단어 하나하나가 번역문에 대응하도록 한다. 형식적 등가는 그 단어의 문법적 형태까지 보존하려는 원칙이다.

| 번역 원칙 | 보존하려는 대상 | 구체적인 적용 |
|---|---|---|
| 언어적 등가 | 원문에 쓰인 단어 | 히브리어·아람어·그리스어 단어를 가능한 한 영어 단어로 대응시킨다. |
| 형식적 등가 | 단어의 문법적 형태 | 명사는 명사로, 대명사는 대명사로, 형용사는 형용사로 옮긴다. |
웨이트 목사는 이 두 원칙을 역동적 등가와 대조하며, 역동적 등가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하고 빼고 바꾸는 방식이라고 비판한다. 킹제임스성경 번역자들이 원한 것은 그러한 변경이 아니라 원문의 단어와 형태를 최대한 그대로 옮기는 일이었다.
번역위원회는 세밀한 번역 작업과 함께 각주를 최소한으로 제한하라는 지시도 받았다. 허용된 것은 다른 성경 구절을 찾아볼 수 있는 상호 참조와 원어에 관한 짧은 설명이었다. 본문에 덧붙이는 해설은 제한하되, 관련 구절을 찾고 원어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간단한 도움은 남겼다.
제네바 성경을 대신하기까지
킹제임스성경은 단순한 구성과 신뢰받는 정확성, 언어의 시적 아름다움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번역본들을 앞질렀다. 그러나 제네바 성경을 곧바로 대체하지는 못했다. 제네바 성경은 학습용 성경의 역할도 했기에 독자들은 익숙한 책을 쉽게 내려놓지 못했고, 반드시 포기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킹제임스성경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잉글랜드의 개신교도들이 성경과 그 교리에 깊이 익숙해지는 가운데, 킹제임스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개혁자들의 공동 노력을 상징하게 되었다. 런던 대영도서관의 모이라 고프(Moira Goff) 큐레이터는 1611년에 나온 흠정역을 잉글랜드 개신교를 하나로 묶어 주는 본문과도 같은 책으로 평가한다. 여러 개혁자가 목숨을 걸고 이어 온 성경 번역과 보급의 노력이 이제 함께 읽는 성경 본문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교회 비치용 초판과 장 머리 요약문
킹제임스성경 초판은 교회에 비치할 목적으로 제작되어 크기가 매우 큰 폴리오 판형이었다. 누가복음 첫머리에는 두 단으로 인쇄된 본문과 복음서 도입부를 꾸민 장식이 보인다.

마가복음의 마지막 장인 16장 앞에는 그 장의 내용을 짧게 정리한 요약문이 있다. 성경 구절 자체가 아니라, 이어지는 본문에서 어떤 사건을 다루는지 알려 주는 안내문이다.

마가복음 마지막 장의 본문 앞에 놓인 요약문을 읽으며 내용을 소개한다.
천사가 세 여인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알린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시고, 시골로 가는 두 사람에게, 그 뒤에는 사도들에게 나타나신다. 사도들을 보내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다.
이처럼 장 머리의 요약문은 긴 해설 없이도 사건의 순서를 미리 파악하도록 도왔다. 본문에 덧붙이는 해설을 제한한 구성 안에서도 독자가 장 전체의 전개를 따라갈 수 있게 한 장치였다.
킹제임스성경은 때로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책이라 불린다. 동시에 이만큼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역본도 아마 없을 것이다. 널리 받아들여지기까지의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번역이 완성되자마자 로마 가톨릭 측뿐 아니라 일부 개신교인들에게서도 공격을 받았다.
휴 브로턴의 반대와 로마 측 접촉에 관한 전언
청교도 학자 휴 브로턴(Hugh Broughton)은 킹제임스성경을 격렬하게 반대했다. 잉글랜드의 가엾은 교회들에 이 성경을 강요하느니 차라리 야생마들에게 갈기갈기 찢기겠다고 할 정도였다. 이 발언은 새뮤얼 콕스가 편집하고 1882년에 출판한 『The Expositor』 제2시리즈 제3권, 280–281쪽에 실려 있다.

브로턴은 교황제에 완강하게 맞섰지만, 로마 측에서도 그의 학식을 높이 평가했다. C. 매슈 맥마흔 박사는 『청교도 회고록: 휴 브로턴의 삶과 죽음』에서 그에게 추기경직까지 제안되었다고 기록했다.
그는 학식 있는 많은 예수회원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고, 교황제에 대담하고 완강하게 맞선 적대자였지만 추기경직을 제안받았다.
예수회가 여러 세기에 걸쳐 돈과 찬사로 사람들을 유혹했으며, 겉으로는 로마에 반대하면서 은밀히 로마의 대의와 교리를 지지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다. 브로턴도 그런 경우였을까? 동시대 영국 시인 존 던(John Donne)의 편지에는 그가 로마 측으로 넘어갔다는 전언과 그를 끌어들이려는 접촉에 관한 내용이 함께 담겨 있다. 훗날 런던 세인트폴 대성당의 수석사제가 된 던은 자신을 찾아온 방문객에게 들은 소식과 이전부터 알고 있던 일을 다음과 같이 구분해 적었다.
어제 나를 찾아온 한 신사가 우리 교회가 휴 브로턴 씨를 잃었다고 내게 말했다. 그가 로마 측으로 넘어갔다는 것이다. 예수회원 세라리우스가 바로니우스 추기경의 대리인으로서 그를 로마로 끌어들이려 했다는 것은 나도 전부터 알고 있었다.
이 편지는 아우구스투스 제섭의 『전 세인트폴 대성당 수석사제 존 던의 생애』 98쪽에 인용되어 있다. 브로턴이 로마 측으로 넘어갔다는 소식은 방문한 신사에게서 들은 것이지만, 예수회원 세라리우스가 바로니우스 추기경을 대신해 브로턴을 끌어들이려 했다는 사실은 던 자신도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던에 따르면 브로턴은 가톨릭교회와 논쟁하지 않는 대가로 수당을 제안받았다. 브로턴이 회중에게도 로마와의 충돌을 피하도록 요구한 점은 그가 어느 정도 협조했던 듯하다는 추정으로 이어진다. 회중에게 자주 했다는 권고는 성경을 공부하고 서로 덕을 세우며 평화롭게 살라는 당부에 그치지 않았다. 교황제가 다시는 잉글랜드를 뒤덮지 못하리라는 확언과, 그 다툼에 끼어들지 말라는 요청도 담겨 있었다.
성경을 공부하고,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며, 평화롭게 지내십시오. 그러나 교황제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시는 이 나라를 뒤덮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손을 깨끗이 지키고 그 다툼에 끼어들지 마십시오.
현대 영국과 로마의 관계
교황제가 다시는 잉글랜드를 뒤덮지 못하리라는 브로턴의 확언과 달리, 현대 영국의 종교·정치 지도자들은 로마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2003년에는 캔터베리 대주교이자 영국 국교회의 종교적 수장이었던 로언 윌리엄스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몸을 굽혀 반지에 입을 맞추었다. 교황제와 거리를 두던 과거의 태도와 대비되는 장면이다.

정치 영역에서는 당시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가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의 거대한 조각상 아래에서 유럽연합 헌법에 서명했다. 합의가 이루어진 곳은 로마의 일곱 언덕 가운데 하나인 카피톨리노 언덕이었다. 국교회 수장이 교황에게 경의를 표하고 총리가 로마에서 유럽 통합을 위한 합의에 서명한 일을, 로마의 권위를 회복하려는 반종교개혁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을까? 『어둠 속의 등불』의 한 인터뷰 참여자는 “네, 저는 반종교개혁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고 믿습니다.”라고 답한다.
이 인터뷰 참여자는 당시 영국이 유럽연합 회원국이라는 사실도 그 징후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브뤼셀에 본부를 둔 유럽연합은 분명히 바티칸의 기획이며, 계속되는 반종교개혁의 전술이라는 주장이다. 연구자 에이드리언 힐턴(Adrian Hilton)의 저서 『유럽의 정사와 권세』(The Principality and Power of Europe)도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로 언급된다. 유럽의 정치적 통합을 로마의 종교적 권위 회복과 함께 바라보는 시각이다.
블레어의 바티칸 방문과 뉴먼의 사진
토니 블레어의 바티칸 방문에는 정치적 관계뿐 아니라 개인의 종교적 선택도 걸려 있었다. 당시 보도는 블레어가 총리직에서 물러나기 직전인 2007년 7월, 교황 베네딕토 16세와 비공개로 면담했다고 전한다. 바티칸 방문은 그의 마지막 해외 일정이 될 예정이었으며, 총리로서 놓치기 어려운 만남이었다. 일부 가톨릭 신자들에게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 방문이었다. 면담 당일에는 블레어의 개종 여부가 언급되지 않았지만, 장차 그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리라고 예상하는 사람이 많았다.
블레어가 준비한 선물도 그런 기대와 맞물렸다. 액자에는 성공회 사제였다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존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 추기경의 사진들이 담겨 있었다. 당시 보도는 블레어 자신의 개종 가능성이 이 선물을 고른 이유일지도 모른다고 풀이했다. 뉴먼은 개인적으로 종교를 바꾼 데 그치지 않고, 19세기 잉글랜드 국교회를 가톨릭적 뿌리로 되돌리려 했던 주요 인물이었다. 그가 참여한 옥스퍼드 운동을 살펴보면, 영국과 로마의 관계가 성경의 권위를 둘러싼 갈등과 어떻게 맞물렸는지 알 수 있다.
옥스퍼드 운동과 이머징 교회의 전통 회복
1833년에 시작된 옥스퍼드 운동(Oxford Movement)은 잉글랜드 국교회의 방향을 바꾸려는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국교회를 사실상 로마 가톨릭화하고, 성경에서 벗어나 로마의 의례적 관행으로 돌아가게 하려 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뉴먼은 19세기 중반 이 운동의 개신교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개신교 내부에서 지도자로 출발해 로마로 향한 그의 행적은 반종교개혁을 완벽하게 상징하는 사례로 제시된다.
당시 미국의 이머징 교회 운동에서도 이와 유사한 움직임을 보는 이들이 있다. Understand the Times International의 설립자 로저 오클랜드(Roger Oakland)는 이머징 교회가 사람들에게 과거로 돌아가, 한때 사람들을 교회로 이끌었던 경험들을 다시 찾으라고 권한다고 설명한다. 문제는 회복하려는 경험이 무엇이며, 그것이 사람들을 어디로 이끄느냐는 데 있다.
그 비판에서 목적지로 지목되는 곳은 로마 가톨릭이다. 조각상과 우상, 성화와 향을 사용하는 관행, 관상적 기독교, 과거 수도원의 규율을 배우는 일이 구체적인 사례로 거론된다. 이 모든 것은 성경에 없으며, 비성경적인 사상과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을 공격하고 있다는 강한 비판이 뒤따른다. 두 운동을 비교하는 이유는 단순히 옛 전통에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 아니다. 사람들을 성경보다 과거의 의례와 종교적 경험으로 향하게 한다는 점이 공통점으로 지적된다.
19세기 잉글랜드에서 뉴먼이 이끈 변화는 실제 교회 소속의 변화로 나타났다. 옥스퍼드 운동의 핵심 인물이었던 뉴먼은 많은 성공회 신자들이 잉글랜드 국교회를 떠나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했다. 자신도 가톨릭 사제가 되었고, 마침내 추기경에 임명되었다.
웨스트콧과 호르트의 그리스어 본문과 번역 논쟁
존 헨리 뉴먼 추기경을 특히 존경한 인물 가운데 브룩 포스 웨스트콧과 펜턴 존 앤서니 호르트가 있었다. 두 사람은 옥스퍼드 운동을 호의적으로 평가했으며, 19세기 후반에는 성경 학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새로운 그리스어 본문을 만들었다. 이 본문을 처음 사용한 성경은 영어 개정역이었다. 이후 100년이 넘도록 이어진 논쟁은 본문의 차이뿐 아니라 두 사람의 실제 의도와 그 작업에 기만이 있었는지까지 다루었다.

『현대 세계를 바꾼 거짓말』의 저자인 H. D. 윌리엄스 박사는 이 번역을 1611년에 출간된 역본과 동일시하는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웨스트콧과 호르트가 만든 새로운 그리스어 본문을 기초로 삼았으므로, 1611년의 역본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번역이라는 비판이다. 단순히 기존 영어 표현을 고친 것인지, 아니면 번역의 기초가 되는 그리스어 본문 자체를 바꾼 것인지가 쟁점이었다.
두 사람이 뉴먼 추기경과 옥스퍼드 운동에 보인 호의를 근거로, 로마의 반종교개혁에도 어떤 식으로든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지 않느냐는 의혹이 제기된다. 이때 주목하는 인물은 두 사람만이 아니다. 웨스트콧과 호르트의 개정 본문은 20세기에 네슬레·알란트 위원회에서 더욱 발전했는데, 그 위원 가운데 예수회 사제 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가 있었다. 마르티니는 훗날 로마 가톨릭 추기경이 되었다.
1825년 키에리 회의 기록과 성경 장악 주장
예수회 사제가 성경 본문을 다루는 위원회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문제 삼는 배경에는, 예수회가 성경을 장악하려 했다고 고발한 기록이 있다. 옥스퍼드 운동이 시작되기 얼마 전인 1825년, 이탈리아 키에리에서 열린 예수회 지도자들의 회의에 관한 기록이다. 예수회 입회자로 소개되는 아바테 레오니는 『예수회 음모: 수도회의 비밀 계획』에 이 회의 내용을 담았다. 이 책은 1848년에 출판되었으며, 저자명은 Abbate Leone으로 표기되어 있다.

책 5쪽에 따르면, 예수회원들이 말한 ‘위대한 과업’은 교회를 일으키고 세상을 구원하며 모든 종파와 정파를 하나의 권위 아래 통합하는 일이었다. 그 권위를 가진 존재는 지상에서 하나님 자신을 대표하므로 모두의 이익을 위해 행동할 수밖에 없다고 묘사된다. 그러나 교회와 세계의 구원을 약속하는 이 구상에는 모든 사람이 그에게 복종하는 데 동의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레오니는 성경을 장악하는 일도 이러한 세계 지배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기록했다. 성경이 자신들의 권위를 위협하는 동안에는 적대적인 힘으로 남지만, 붙잡아 통제하면 자신들을 위한 도구로 바꿀 수 있다는 발상이었다. 책 98쪽에는 한 예수회 상급자의 발언으로 다음과 같은 비유가 실려 있다.
“그러면 머리를 치켜들고 눈을 번뜩이며 독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그 뱀, 곧 성경은 우리가 그것을 붙잡을 수 있게 되는 즉시 다시 지팡이로 변할 것이다. 지난 3세기 동안 이 잔인한 독사가 우리를 편히 쉬지 못하게 했음을 여러분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몸놀림으로 우리를 휘감고 어떤 독니로 우리를 물어뜯는지 여러분은 잘 안다.”
지난 3세기 동안 자신들을 괴롭혔다는 성경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손에 쥐고 다룰 수 있는 도구로 바꾸려 했다는 고발이다. 뱀이 지팡이로 변한다는 비유에는 성경을 둘러싼 싸움의 목표가 제거에서 통제로 바뀐다는 뜻이 담겨 있다.
킹제임스성경을 둘러싼 권위의 대립
1611년 공인역 킹제임스성경은 개신교 종교개혁의 최고 성취이자 그 결실로 평가된다. 연구자이자 은퇴 교수인 앨런 오라일리 박사는 예수회가 무엇보다 파괴하려는 표적이 바로 이 성경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지목하는 목적은 잉글랜드와 온 세계를 다시 교황제의 지배 아래 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킹제임스성경의 권위를 먼저 무너뜨려야 하며, 그 권위가 남아 있는 한 교황제 아래로의 복귀를 확신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티셴도르프의 시내 사본 발견과 수많은 수정
키에리에서 예수회 회의가 열린 지 18년 뒤, 독일 학자 콘스탄틴 폰 티셴도르프는 로마를 방문해 교황을 만났다. 그는 이 만남을 장시간의 알현이라고 표현했다. 그로부터 1년 뒤에는 이집트에서 시내산이라 불리는 산기슭의 성 카타리나 수도원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발견한 사본은 종교개혁자들이 사용했던 어떤 사본보다도 오래되었다고 주장했다. 이후 수도원을 더 방문하는 과정을 거쳐 이 사본은 시내 사본(Codex Sinaiticus)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시내 사본은 오래되었다는 평가와 함께 수많은 수정과 변경으로도 주목받았다. 티셴도르프가 제시한 수정 횟수는 약 14,800개였다. 런던 대영도서관 서양 필사본 부문 책임자인 스콧 맥켄드릭 박사는 이 수치가 맞느냐는 질문에 “대략 맞는 것 같습니다.”라고 답했다. 정확한 횟수에는 유보를 두었지만, 시내 사본이 그리스어 성경 사본 가운데 가장 많이 수정된 사본이라는 점은 분명히 했다.

여러 해 뒤 티셴도르프가 시내 사본을 출판했을 때, 출판본 한 부는 교황 비오 9세에게 증정되었다. 비오 9세는 편지를 보내 그 출판물에 최고의 찬사를 표했다.
바티칸 사본의 덧쓰기와 비평 그리스어 본문
비슷한 시기에 바티칸 도서관에서는 또 다른 사본이 등장했다. 바티칸 사본(Codex Vaticanus), 곧 ‘바티칸의 책’으로 불리는 사본이다. 이 역시 종교개혁자들이 사용했던 사본들보다 더 오래되었다고 알려졌다.

바티칸 사본은 4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본을 다루는 전문가의 눈에는 15세기 사본처럼 보인다는 특징이 있었다. 15세기 필사자가 기존 본문 거의 전체를 덧썼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본의 제작 시기로 제시되는 4세기와, 지금 보이는 글씨의 모습에 영향을 준 덧쓰기 시기인 15세기를 구분해야 한다.
시내 사본에서는 수정과 변경의 횟수가, 바티칸 사본에서는 본문 거의 전체에 걸친 덧쓰기가 문제로 제기되었다.
| 사본 | 오래되었다는 평가 | 수정·덧쓰기의 특징 |
|---|---|---|
| 시내 사본 | 티셴도르프는 종교개혁자들이 사용한 어떤 사본보다도 오래되었다고 주장했다. | 약 14,800개의 수정이 있었다는 수치가 제시되며, 맥켄드릭 박사는 대략 맞는 것 같다고 답했다. 그리스어 성경 사본 가운데 가장 많이 수정된 사본으로 설명된다. |
| 바티칸 사본 | 종교개혁자들이 사용한 사본들보다 오래된 4세기 사본으로 알려졌다. | 15세기 필사자가 본문 거의 전체를 덧써서 외관은 15세기 사본처럼 보인다고 설명된다. |
19세기에 두 사본은 종교개혁자들이 사용한 본문보다 더 오래되고 신뢰할 만한 그리스어 사본으로 받아들여졌다. 웨스트콧과 호르트는 시내 사본과 바티칸 사본을 결합하여 오늘날 비평 그리스어 본문으로 알려진 본문을 만들었다. 이 본문은 20세기 내내 성경 번역에 사용되었다.
교파 간 번역 협력과 기능적 등가의 확대
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 추기경은 이탈리아 키에리의 신학부에서 신학 공부를 마쳤으며, 1952년 그곳에서 처음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후 성경 번역을 둘러싼 가톨릭과 개신교 기관의 협력은 국제적인 번역 사업으로 확대되었다. 1967년에는 유진 나이다의 도움으로 세계성서공회가 바티칸과 협약을 맺고, 전 세계에서 수백 건의 교파 간 성경 번역 사업을 기능적 등가 원칙에 따라 추진하기로 했다.

기능적 등가를 의역의 다른 이름으로 보는 비판에서 가장 우려하는 것은 번역문과 원어 사이의 거리다. 많은 신자들은 의역이 점점 늘어날수록 번역문이 원어에서 더욱 멀어진다고 우려했다. 성경의 표현을 바꾸는 일은 단순히 문장을 쉽게 읽도록 다듬는 데 그치지 않는다.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서 나온다면, 어떤 말씀을 전달하느냐는 독자가 무엇을 믿게 되느냐와도 관계되기 때문이다.
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니라.
로마서 10장 17절이 믿음의 근원을 하나님의 말씀에 두는 데 비해, 유다서는 성도들이 지켜야 할 믿음이 이미 전해졌다는 점을 강조한다.
유다서 1:3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함께 나누어 받은 구원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글을 쓰려는 마음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들에게 단번에 전해 주신 믿음을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를 써서 권고해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단번에 전해 주신 믿음을 위하여 힘써 싸우는 일이다. 따라서 번역에서 새로운 표현을 사용하는 문제도 읽기 쉬운지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 달라진 표현이 같은 교리를 온전히 전달하는가가 중요하다. 원어에서 멀어지는 번역에 대한 우려는 말씀을 통해 받은 믿음을 그대로 지키려는 요구와 맞물린다.
인자가 오실 때 찾으실 믿음은 무엇인가
『킹제임스성경 옹호』의 저자인 D. A. 웨이트 목사는 교리 보존의 문제를 누가복음 18장 8절에서 인자가 오실 때 믿음을 찾으실 수 있겠느냐고 하신 질문과 연결한다.

누가복음 18: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원한을 속히 갚아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 그가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고 하시더라.
웨이트 목사가 주목하는 것은 ‘믿음’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단어 피스티스에 관사가 붙어 있다는 점이다. 그는 이를 막연한 믿음이 아니라 ‘그 믿음’으로 읽으며, 신약의 그리스어에서 이 표현이 나올 때마다 교회들이 지켜 온 교리 전체를 뜻한다고 설명한다. 그리스도의 신성, 육체적 부활, 피의 속죄, 기적에 관한 교리가 여기에 포함된다. 인자가 오실 때 찾으실 믿음은 단순히 어떤 종교적 신념을 지니는 일이 아니라, 이러한 교리를 계속 붙드는 일이라는 것이다.
웨이트 목사는 이 질문에 그분이 오실 때 그 믿음을 찾지 못하실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해석한다. 또한 디모데후서에서 속이는 자들이 다른 사람을 속이면서 자신도 속는다고 한 경고를 교리의 쇠퇴와 함께 마지막 때의 징조로 본다.
디모데후서 3:13 악한 사람들과 사기꾼들은 더욱 악해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리라.
속임의 위험은 거짓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있지 않다. 거짓을 전하는 사람 자신도 속을 수 있으므로, 교리를 훼손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 훼손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교리를 전하는 이들 역시 속임에서 안전하다고 여길 수 없다.
‘적그리스도’를 ‘그리스도의 원수’로 바꾸면 무엇이 달라질까?
2008년 10월, 미국성서공회 대표단은 교황 베네딕토 16세에게 특별한 다언어 성경을 증정했다. 이 성경에는 바티칸과 미국성서공회의 인장이 함께 찍혀 있었다. 미국성서공회는 현대 영어 역본 CEV(Contemporary English Version)를 출판하는 기관이기도 하다.

CEV가 비판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적그리스도’라는 단어를 번역문에서 완전히 없애고,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원수’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두 표현의 차이를 이해하려면 그리스어 ‘안티’의 두 가지 의미를 살펴야 한다. 안티에는 ‘대항하여’뿐 아니라 ‘대신하여’라는 뜻도 있다. 따라서 적그리스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항할 뿐 아니라, 주 예수님을 대신하여 그 자리를 차지하는 존재다.
| 안티의 의미 | 적그리스도의 성격 | ‘그리스도의 원수’라는 표현과의 차이 |
|---|---|---|
| 대항하여 | 주 예수 그리스도께 맞선다 | 원수라는 표현에도 적대의 뜻이 남는다 |
| 대신하여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다 | 원수라는 표현에서는 대체의 뜻이 사라진다 |
이 때문에 ‘그리스도의 원수’로 바꾸면 원래 의미의 절반이 사라진다는 비판이 나온다. 그리스도께 공개적으로 맞서는 원수만 떠올리게 하고,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자리를 차지한다는 의미는 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단어가 더 마음에 드느냐가 아니라, 독자가 적그리스도를 어떤 존재로 알아보게 되느냐가 걸린 문제다.
인터뷰에서는 그 위험을 더 구체적으로 지적한다. CEV처럼 적그리스도라는 말과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없애면,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자가 들어설 여지를 마련하게 된다는 비판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4 그는 대적하는 자며, 또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받는 대상 위에 자신을 높여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하나님처럼 보여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하느니라.
데살로니가후서 2장 4절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동과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행동을 함께 묘사한다. 대적하는 자는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받는 대상 위에 자신을 높이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한다. ‘대항함’만 남기고 ‘대신함’을 지우면, 하나님께 맞서는 것과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한 존재의 행동이라는 점을 놓치게 된다.
적그리스도의 정체와 성경 번역의 영향
성전에 들어가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하며 신성을 주장하는 죄의 사람이 적그리스도다. 데살로니가후서 2:3–4는 그를 멸망의 아들이라고 부르며, 그 날에 앞서 배교하는 일이 일어나고 그 죄의 사람이 나타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자신을 높여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는 묘사는 적그리스도의 정체를 알아보는 데 중요하다.

데살로니가후서 2:3 아무도 어떤 모양으로든지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이는 먼저 배교하는 일이 이르지 않고, 또 그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지 않고서는 그 날이 오지 아니함이라.
데살로니가후서 2:4 그는 대적하는 자며, 또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받는 대상 위에 자신을 높여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하나님처럼 보여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하느니라.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대적하면서도 자신을 하나님으로 내세운다. 그러므로 번역에서 대적한다는 뜻만 전달하면, 예언에 묘사된 그의 성격과 행위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이 예언의 사건들이 어떻게 온전히 전개될지는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번역하느냐가 성경 예언의 이해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분명하다. 독자는 번역문에 쓰인 말을 통해 그 인물이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지 이해하기 때문이다.
일부는 요한계시록을 완전히 제외한 새로운 국제적 성경이 계획되고 있다고까지 예측한다. 특정 구절의 표현을 바꾸는 수준을 넘어, 요한계시록 전체를 성경에서 빼는 일이 일어나리라는 예측이다.
바티칸의 번역 참여를 둘러싼 질문
바티칸은 여러 성경공회를 통해 세계 수백 언어의 성경 번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로마 교회가 성경을 읽는 성도들을 천 년 동안 박해하고 죽였다는 비판은 그 과거에 비추어 오늘날의 번역 참여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진다. 성경을 읽지 못하게 억압했던 권력이 이제 여러 언어로 성경을 옮기는 일에 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변화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질문을 던진다. 로마는 이제 마음을 고쳐먹은 것일까? 아니면 오래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새로운 전술을 사용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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