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발전하는가: 창세기에서 시작하는 역사와 진화론 비판
인류의 역사는 낮은 상태에서 더 높은 상태로 올라가는 발전의 이야기일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이 타락한 뒤 드러내 온 실패의 역사일까? 인간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떤 존재인지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같은 유물과 기록을 읽는 방식도 달라진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피는 출발점이 창세기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에 놓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개별 사건의 연대를 정하기에 앞서, 역사를 이해하는 토대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
피터 럭크만 목사의 비판은 다윈주의를 인간의 기원에 관한 이론으로만 다루지 않는다. 인간이 점진적으로 올라왔다는 생각이 역사 교육과 종교의 기원 설명, 나아가 인간이 앞으로도 계속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지배한다는 점을 겨냥한다. 선사 인류의 두개골 복원, 고대 의례를 재구성하는 추정, 화석과 탄소-14 연대측정을 둘러싼 논쟁은 모두 과거를 설명할 때 무엇을 근거로 삼는가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다.
그 질문은 결국 인간이 자신에 관한 성경의 평가를 받아들이는가로 이어진다. 성경은 인간의 잘못뿐 아니라 스스로 자랑하는 의와 가장 좋은 상태까지 문제 삼는다. 인간의 끊임없는 향상을 역사의 전제로 삼을 것인가, 창조와 타락을 기록하고 인간의 죄를 드러내는 성경을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 여기서 전개되는 역사 연구의 출발점은 두 설명의 절충이 아니라, 성경의 기록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데 있다.
역사의 시작과 성경의 경고
성경의 역사를 시간순으로 살피는 출발점은 창세기 1장 1절이다.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느니라.
역사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를 묻는 순간부터 성경의 설명은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가르치는 설명과 충돌한다. 선사 역사와 선사시대, 진화론을 다루는 일은 단순히 오래전 사건에 이름을 붙이는 일이 아니다. 인간과 세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창조에서 시작하는 역사와 다른 기원 설명을 받아들이는 역사는 출발점부터 다르다.
성경과 맞서는 기원 이론들은 반기독교적이다. 기원이란 어떤 것이 시작된 때와 그 시작을 뜻한다. 그러므로 기원을 연구할 때는 오래된 사건이나 유물을 살피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시작을 설명하는 이론을 어떤 기준으로 받아들일지도 생각해야 한다. 디모데전서 6장 20절과 골로새서 2장 8절의 경고는 바로 이 문제에 적용된다.
디모데전서 6:20 오 디모데야, 네게 맡겨진 것을 지키고, 비속하고 허황된 말장난과 거짓되이 일컬어지는 과학의 반론을 피하라.
여기서 주목할 표현은 ‘거짓되이 일컬어지는 과학의 반론’이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제시된다고 해서 그 설명을 무조건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 경고를 귀담아듣지 않은 채 과학을 닥치는 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보통의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과학을 숭배하는 교인에 불과하다.
과학의 이름으로 제시되는 반론과 함께 경계해야 할 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원리를 따라 세운 철학이다.
골로새서 2:8 아무도 너희를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노략질하지 못하도록 주의하라. 그것들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를 따른 것이며 그리스도를 따른 것이 아니니라.
사도 바울은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노략질당하지 않도록 경고하며, 그것들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무엇을 따르는지 밝힌다. 따라서 철학에 손대는 일 역시 경계해야 한다. 역사와 기원을 연구할 때 이 두 경고가 함께 필요한 까닭은 과학과 철학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성경의 창조와 역사에 관한 설명을 무너뜨려 왔기 때문이다. 철학은 과거에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관한 이론과 추측을 만들었고, 과학은 여러 시기에 여러 가지를 발굴하여 그 이론들을 입증한다고 주장해 왔다.
역사 교육의 바탕에 놓인 다윈주의
럭크만 목사는 미국의 교육 체계가 역사에 관한 진실을 가르치지 않으며, 어느 학교의 역사 수업도 그 진실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특정 교재의 작은 오류가 아니라 역사 교육 전체의 출발점을 문제 삼는 것이다. 그가 준비한 기원에 관한 책 여섯 권가량은 미국 교육에서 가르치는 수천 권의 책을 대표하는 사례다.
그 교육의 근본적인 오류는 다윈주의를 바탕으로 역사를 이해한다는 데 있다. 인간이 먼지나 흙에서 천천히 올라왔다고 믿으면, 이후의 역사도 인간이 점차 나아지는 과정으로 읽게 된다. 진흙 웅덩이에서 시작해 지금의 상태에 이르렀다는 전제는 인간이 앞으로도 계속 좋아지고 더 높은 형태로 진화한다는 생각으로 뻗어 나간다. 역사를 공부하기에 앞서 살펴야 할 것은 개별 사건만이 아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이며 어디에서 왔다고 믿는지에 따라 같은 사건을 이해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유신진화론과 자연주의적 진화론의 공통 전제
유신진화론과 자연주의적 진화론은 진화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 서로 다른 답을 내놓는다. 유신진화론은 하나님께서 그 과정을 시작하셨다고 믿고, 자연주의적 진화론은 자연적으로 일어났다고 믿는다. 유신진화론을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들은 다윈처럼 인간이 진흙에서 저절로 올라왔다고 믿는 대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진흙에서 올라올 능력을 주셨다고 믿는다. 하나님이 관여하시는 진화론인 셈이다.

| 구분 | 진화 과정의 시작에 관한 설명 | 인간의 발전에 관한 공통 전제 |
|---|---|---|
| 유신진화론 | 하나님께서 과정을 시작하시고 인간에게 올라올 능력을 주셨다. | 인간이 낮은 상태에서 점진적으로 올라왔다. |
| 자연주의적 진화론 | 그 과정이 자연적으로 일어났다. | 인간이 낮은 상태에서 점진적으로 올라왔다. |
하나님의 관여 여부는 두 입장을 가르는 차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시작하셨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낮은 상태에서 점진적으로 발전해 왔다는 전제는 그대로 남는다. 두 입장 모두 인간의 점진적인 향상을 바탕으로 역사를 이해한다는 점에서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인간이 계속 발전한다는 전제와 실제 역사
인간이 낮은 형태에서 올라왔다는 생각을 역사 전체에 적용하면, 앞으로도 영원히 더 높은 형태로 진화해야 한다는 명제에 얽매인다. 함정은 ‘점진적으로’라는 말에 있다. 과거의 기원을 설명하던 말이 미래에도 인간은 계속 향상될 것이라는 판단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의 사실들은 인간이 점점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나빠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와 반대로 인간의 끊임없는 향상을 전제하는 역사관을 “정신 나간 역사관”이라고 비판한다. 인간이 계속 좋아진다고 배우면서 실제로는 그 반대의 역사를 마주한다면, 배운 전제로는 눈앞의 사건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학교에서 역사를 배우고도 연대와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고 관심조차 갖지 않는 문제도 이러한 교육 방식과 맞닿아 있다. 출발점을 잘못 잡으면 공부해도 사건들이 이해되지 않고, 성과나 흥미를 얻지 못한 채 끝내 남는 것도 없어진다. 인간이 처음부터 서서히 올라왔다는 이론은 역사 공부를 위해 당연히 받아들일 전제가 아니라,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배제해야 할 전제다.
진화론 비판을 위한 네 권의 책과 주요 논제
인간이 흙에서 점진적으로 올라왔다는 전제를 검토하려면, 진화론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되는 주장들과 그에 대한 반론을 함께 살펴야 한다. 인간이 그렇게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아직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다음 네 권을 구입해 읽도록 권한다.
| 책 | 저자 또는 출판 단체 | 소개한 출판 연도 |
|---|---|---|
| 『그러므로 굳게 서라』(Therefore Stand) | 윌버 스미스(Wilbur Smith) 박사 | 1950년 |
| 『그 종류대로』(After Its Own Kind) | 바이런 넬슨(Byron Nelson) | 1952년 |
|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 | J. 그레셤 메이천(J. Gresham Machen) | 1946년 |
| 『진화론, 과학이라고 잘못 불리는 것』(Evolution, Science Falsely So-Called) | 국제 기독교 십자군(International Christian Crusade) | 연도 언급 없음 |
이 가운데 국제 기독교 십자군이 출판한 『진화론, 과학이라고 잘못 불리는 것』은 문고판이다. 럭크만 목사는 당시 출판된 관련 서적 가운데 아마 가장 좋은 책일 것이라고 평가하면서, 총 12만 1천 부가 나왔다고 소개했다. 이 책은 100권이 넘는 참고문헌을 사용했으며, 그와 별도로 약 50권의 추천 도서 목록도 실었다. 추천 목록에는 짐머만, 히멜파브, 클로츠, 닐손, 스탠든, 듀어, 드 비어, 바르쥔의 책들이 포함되어 있다.
작은 문고판이지만 다루는 주제는 폭넓다. 다윈이 가르친 내용과 관련해 비교 해부학, 배아 발생의 반복, 흔적 기관, 혈액 침강 검사, 돌연변이를 다루고, 최근의 발견과 문화인류학까지 검토한다. 따라서 이 책을 읽도록 권한 이유는 특정 사례 하나에 대한 반론을 얻는 데 있지 않다. 인간의 점진적 상승을 당연한 출발점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여러 분야에서 그 근거로 내세우는 논거들을 함께 검토하려는 데 있다.
다수의 동의와 과학자의 권위가 진리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인간이 점점 나아지고 있으며 동물에서 진화해 올라왔다는 전제를 받아들이면, 인류의 역사도 처음부터 상승과 발전의 이야기로 읽게 된다. 그러나 이 출발점 자체를 거부해야 한다. 인간이 더 나아지고 있지 않으며 동물에서 나온 것도 아니라는 증거가 결정적이고 압도적이므로, 다윈주의의 전제를 조사하는 데 시간을 들일 가치조차 없다. 공립학교에서 가르치는 인간의 동물 기원설을 “나치 파시스트 선전”이라고 부를 만큼 비판도 거세다.

어떤 생각을 믿는 사람의 수와 그 생각의 진실성은 별개의 문제다. 아나톨 프랑스의 말로 인용되는 문장은 그 차이를 짧게 드러낸다.
“5천만 명이 어리석은 말을 해도 그것은 여전히 어리석은 말이다.”
학생과 교수와 교사 5천만 명이 진화론을 믿더라도, 그 숫자가 인간의 기원을 입증해 주지는 않는다. 그 숫자가 입증하는 것이라곤 “매분 잘 속는 바보가 태어난다”는 사실뿐이라고 조롱한다. 교육받은 사람들의 동의도 그 자체로 증거를 대신할 수는 없다는 비판이다.
그렇다면 진화론을 지지하는 뛰어난 과학자들의 권위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과학이라는 이름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관한 성경적 기준은 디모데전서 6:20에 있다.
디모데전서 6:20 오 디모데야, 네게 맡겨진 것을 지키고, 비속하고 허황된 말장난과 거짓되이 일컬어지는 과학의 반론을 피하라.
“거짓되이 일컬어지는 과학”이라는 표현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제시되는 주장도 분별해야 한다는 경고로 적용된다. 유명한 과학자의 이름을 내세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진화론을 믿지 않는 뛰어난 과학자들은 연구하지 않은 채, 지지하는 과학자들만을 근거로 삼고 있지는 않은지도 살펴야 한다.
언어 능력과 인간의 위치, 초기 인류 복원의 문제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보여 주는 첫 사례는 언어다. 시카고대학교의 일자 바이트 교수는 그 차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인간을 동물과 구별하는 가장 두드러진 단일 특성은 언어를 사용하는 능력이다.”
동물에게 일곱 개의 단어가 있더라도 그것이 곧 언어를 사용한다는 뜻은 아니다. 몇 가지 표현을 지니는 것과 언어를 구사하는 것은 다르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단순히 표현의 수가 많고 적은 데 있지 않고, 언어를 사용하는 능력 자체에 있다.
런던대학교의 H. H. 울러드 교수는 인간이 점진적으로 출현했다는 관념이 줄곧 해부학자들의 마음을 매혹해 왔다고 말한다. 럭크만 목사는 그 ‘매혹’을 해부학 전문가가 거짓 가르침에 현혹되는 것으로 풀이하며, 전문 지식도 잘못된 관념으로부터 사람을 지켜 주지는 못한다고 비판한다. 한편 조지 게일로드 심프슨 교수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견해를 제시한 인물로 소개된다.
고 아서 에딩턴 경이 제시한 비교는 인간의 크기에 주목한다. 인간은 원자와 별 사이에서 크기가 거의 중간에 놓인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은 우주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며, 창조주의 계획에서도 중심적인 자리에 있는 존재로 설명된다. 언어가 인간의 고유한 능력을 보여 준다면, 원자와 별의 비교는 창조 세계 안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자리를 드러낸다. 어느 쪽으로 보더라도 인간의 위치를 동물과 같게 볼 수 없다는 결론이다.
초기 인류를 그린 그림과 모형에서는 상상한 모습이 실제 모습으로 받아들여지는 문제가 생긴다. 영국 왕립외과의사협회의 우드 존스 교수는 초기 인류를 복원한다며 상상 속의 악몽 같은 형상을 만들고 채색하고 그리는 일을 과학, 곧 인류학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작업으로 평가한다. 지극히 유행에 뒤떨어진 일이며, 그렇게 만든 형상에 완전히 거짓된 가치를 부여해 실제 모습처럼 보이게 한다는 비판이다. 그림이나 모형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보다, 상상으로 만든 모습이 구체적인 형상을 얻으면서 실재했던 모습처럼 받아들여진다는 데 문제가 있다.
만장일치에 대한 경계와 진화 사상의 오래된 뿌리
학자들이 모두 동의한다 해도 그 동의가 진리를 보증하지는 않는다. 왕립학회 회원 노먼 W. 피리는 스테팬슨의 말을 인용하며 만장일치를 경계한다.

“스테팬슨은 오류만큼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장일치를 경계해야 한다.”
럭크만 목사는 이 경고보다 훨씬 강하게 말한다. 모두가 옳다고 받아들이면 그것은 언제나 100퍼센트 완전히 틀렸다는 것이다. 만장일치를 조심하라는 피리의 경고를 넘어, 보편적인 동의 자체를 철저히 불신하는 태도다.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받아들이는 과정도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지는 않다. 위스콘신대학교의 C. 레너드 허스킨스 교수는 그 변화를 세 단계로 표현한다.
| 단계 | 어떤 생각을 대하는 반응 |
|---|---|
| 첫째 | “우리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 |
| 둘째 |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
| 셋째 | “우리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
처음에는 믿을 수 없다며 부정하고, 그다음에는 중요하지 않다며 가치를 낮추다가, 마침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마지막에 익숙한 생각으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반대로 새로운 발견처럼 여기는 생각이 실제로는 오래된 것일 수도 있다. 애그니스 스콧 칼리지의 메리 맥두걸 박사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와 달리 진화라는 생각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고대 그리스의 많은 철학자가 이미 생물 진화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엠페도클레스는 흔히 진화론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진화를 믿었지만, 동시에 자연법칙이 지적인 설계에 따라 작용한다고 믿었다. 진화에 대한 믿음과 지적 설계에 대한 믿음이 그에게는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다윈의 이론을 둘러싼 학자들의 발언과 화석 문제
진화에 관해 말하는 학자라고 해서 모두 다윈이 믿었던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학자의 명성이나 진화라는 용어를 사용하는지 여부가 아니라, 실제로 다윈의 설명을 얼마나 받아들이느냐는 점이다. 컬럼비아대학교의 도브잔스키 교수는 진화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진화는 우연에 의한 것도, 설계에 의한 것도 아니다.”
고 아서 키스 경은 생명체 내부에 작용하는 힘에 관해 말한다.
“생명을 불어넣는 창조력이 내부에서 작용하며, 그것은 살아 있는 물질에 내재하는 속성이다.”
럭크만 목사는 이런 발언이 수백에 이르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류학자·발생학자·생물학자 중 일부는 다윈의 이론을 아편 중독자가 아편을 피우며 꾸는 헛꿈 이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진화를 언급하는 학자들의 이름을 한데 모아 다윈의 이론을 지지하는 권위로 내세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화석에서는 점진적인 변화에 걸맞은 흔적이 지층에 나타나는지가 문제가 된다. C. E. 터너 박사는 앞선 지층과 화석이 풍부한 지층을 대비하며 반론을 제기한다.
“지질학은 이러한 점진적 진화의 증거를 제시해 달라는 요구를 받아 왔다. 그러나 화석은 서서히 나타나는 대신 갑자기 수천 개씩 지층에 나타난다. 반면 그 이전 지층에는 화석이 사실상 없다. 선캄브리아기의 유해라고 주장되는 이 흔적들은 무기적 과정으로 생겼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음이 입증되었다.”
터너 박사가 제기하는 어려움은 두 가지다. 하나는 화석이 거의 없는 앞선 지층에 비해 뒤의 지층에서는 수천 개의 화석이 갑자기 나타난다는 점이다. 점진적인 진화를 뒷받침하려면 지층에서도 그에 해당하는 점진적 출현을 보여 주어야 하는데, 그 대신 급격한 차이가 나타난다는 반론이다. 다른 하나는 선캄브리아기의 흔적을 생물 유해로 볼 수 있느냐는 문제다. 무기적 과정으로도 생길 수 있는 흔적이라면, 그것을 앞선 생명체의 증거로 판단하는 데 어려움이 생긴다.
이와 관련해 J. R. 너설 교수, 심프슨 박사, 한스 가프론 교수, 조지 게일로드 심프슨, A. F. 휘트너 교수, 제인 오펜하이머 박사도 거론된다. 럭크만 목사는 관련 학자가 수백에 이른다고 말하면서,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은 시간을 들여 『라이프』 잡지와 AP 통신 보도를 보는 고등학교와 대학 교사들뿐이라고까지 비판한다. 진화론 자체에 대한 평가도 단호하다. 인간이 만들어 낸 것 중 가장 얼빠지고, 터무니없고,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규정하며 한바탕 웃음거리로 취급한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 종교를 방어기제로 보는 설명
하등한 생물에서 출발해 학위를 가진 인간으로 올라왔다는 진화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짧은 풍자시의 소재가 된다.

“처음 시작할 때 나는 올챙이였고, 그다음엔 꼬리가 들어가자 개구리가 되었고, 다음에는 반얀나무에 원숭이가 있었고, 이제 나는 박사 학위를 가진 박사라네.”
올챙이에서 개구리로, 나무 위의 원숭이에서 박사 학위를 가진 인간으로 이어지는 시는 학문적 성취까지 생물의 상승 과정에 포함하는 생각을 조롱한다. 럭크만 목사는 이와 달리 동물들 사이에 혈통적 연결이 없다고 단언하며,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신체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동물은 4부 화음으로 노래할 수 없고, 죄사함이 필요한 혼도 지니지 않는다. 반면 인간은 기도해야 하는 존재다. 인간을 동물과 구별하는 데에는 음악적 능력뿐 아니라 혼과 죄사함, 기도의 필요까지 포함된다.
인간의 종교를 마음속에서 생겨난 방어기제로 보는 과학자들의 설명은 기도와 죄사함의 필요를 인간 정신의 작용으로 돌린다. 종교가 두려움에 대처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럭크만 목사는 이 설명을 정반대로 뒤집어 비판한다. 종교를 방어기제라고 부르는 것이야말로 성경이 하는 말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방어다. 두려움 때문에 종교를 만들어 냈다는 설명에 맞서, 성경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종교를 방어기제로 설명한다는 반론을 내놓는다.
진화론을 풍자하는 또 다른 시로는 「우주의 알」(The Cosmic Egg)이 거론된다. 이 시는 진화론의 문제를 제대로 짚은 명작이다.
선사시대 연대와 인간이 나아진다는 전제
인간과 종교의 기원을 설명할 때는 인간의 역사를 어디에서 시작하느냐가 중요해진다. 비판의 대상인 다윈주의의 연대 체계는 인간이 지구에 약 60만 년 전에 나타났다고 가르치며, 그 범위를 넓혀 100만 년에서 60만 년 전 사이라고도 말한다. 그 시기를 간빙기라고 부르고, 홍적세와 구석기 시대에 해당한다고 설명한다.
| 구분 | 비판 대상으로 소개된 내용 |
|---|---|
| 인간의 출현 시점 | 약 60만 년 전, 또는 100만 년에서 60만 년 전 사이 |
| 그 시기를 부르는 명칭 | 간빙기 |
| 함께 제시되는 시대 구분 | 홍적세와 구석기 시대 |
그러나 시대에 이름을 붙이는 것과 그 연대가 참임을 밝히는 것은 다르다. 그리스어를 쓰면 거창하게 들리고 라틴어를 쓰면 더욱 거창하게 들리지만, 명칭의 권위가 내용의 진실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이 체계 전체가 사람들이 자신이 점점 나아지고 있음을 입증하려고 지어낸 것이라는 단정이다. 비판의 대상은 오래된 연대만이 아니라, 그 연대를 바탕으로 인간이 오랜 시간을 거쳐 계속 향상되어 왔다고 보는 전제다.
초기 인류의 연대와 두개골 숭배
민델 빙하기를 약 25만 년 전부터 20만 년 전까지로 잡는 선사시대 서술은 하이델베르크인과 피테칸트로푸스를 이 시기에 배치한다. 이들을 최초의 초기 인류로 소개하고, 두개골을 보관하는 행위가 이때 숭배의 한 형태로 시작되었다고 설명한다. 럭크만 목사는 이들의 모습이 사실상 원숭이라고 비판하며, 두개골 보관에서 숭배의 시작을 찾는 설명도 잘못된 추측으로 일축한다. 그와 대조되는 성경의 기록은 그리스도께서 ‘해골의 장소’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사실이다.

두개골의 발견지로 거론되는 곳은 중국 저우커우뎬 마을 근처의 룽구산 동굴들이다. 베이징에서 남서쪽으로 약 37마일 떨어진 이곳에서 나온 두개골은 전기 또는 중기 홍적세에 속하며, 아주 초기 인류의 속을 나타내는 것으로 소개된다. 조이너의 계산에 따른 연대는 50만 년 전이다.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 곧 이른바 자바의 원인도 이 초기 단계에 놓이며 네안데르탈인보다 앞선 인류로 분류된다.
두개골을 종교의 흔적으로 읽는 선사 종교 서술은 보관 행위에서 더 나아가 식인과 죽은 자 숭배를 재구성한다. 두개골들이 아마 식인 잔치의 잔해일 것이며, 그렇다면 조직적인 식인이 중기 홍적세 중국 북부의 죽은 자 숭배에 자리 잡은 관습이었다는 설명이다. 머리나 두개골, 머릿가죽을 잘라 보존하는 행위는 성스러운 식사 뒤에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으로 여겨진다. 두개골이라는 유물에서 출발해, 그것을 남긴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어떤 의례를 행했으며 무엇을 숭배했는지까지 추론하는 것이다.
머리를 부수는 예언과 해골의 장소
두개골 숭배에 대한 비판의 성경적 근거는 최초의 예언인 창세기 3:15에서 시작된다.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씨가 뱀의 머리를 부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창세기 3:15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또 네 씨와 그녀의 씨 사이에 적의를 두리니, 그녀의 씨는 너의 머리를 부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부술 것이라.” 하시고
여기서 주목할 말은 ‘머리’다. 뱀의 머리를 부수겠다는 약속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결하면, 십자가에 못박히신 장소의 이름도 중요해진다. 요한복음 19:17은 그곳의 이름과 뜻을 함께 기록한다.
요한복음 19:17 주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히브리어로 골고다, 즉 해골의 장소라고 하는 곳으로 가시니라.
골고다가 뜻하는 ‘해골의 장소’는 창세기의 예언과 맞닿는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지 어느 장소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뱀의 머리를 부수겠다는 첫 예언과 연결되는 사건이다. 이 관계에 비추어 보면, 인류의 가장 이른 종교를 두개골 보관과 죽은 자 숭배에서 찾는 서술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방한 것으로 규정된다. 다윈의 체계는 하나님의 말씀을 모방하려고 세운 체계라는 비판이다. 인간과 종교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성경의 기록을 대신하려 하지만, 정작 그 내용은 성경을 모방한다는 데 비판의 초점이 있다.
『선사 종교』의 추정 표현과 고대 의례의 재구성
두개골에서 고대의 식인 의례와 숭배 관습을 읽어 내는 방식은 E. O. 제임스의 『선사 종교』(Prehistoric Religion)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런던대학교 종교사 명예교수로 소개되는 제임스의 이름 앞에는 Ph.D., D.Litt., F.S.A.라는 자격 표기가 붙는다. 럭크만 목사는 이 책에서 25만 년 또는 50만 년 전에 나타났다는 초기 인류를 다룬 부분을 들어, 학문적 자격과 직함이 아니라 과거를 재구성하는 문장 자체를 문제 삼는다.

원시 네안데르탈인이라는 분류와 오늘날 보르네오를 언급하는 대목에는 확신을 나타내는 말과 조건·추정을 나타내는 말이 함께 나온다.
“그러므로 그들은 원시 네안데르탈인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오늘날 보르네오에서.” “만일 그랬다면”, “아마 그것들은 나타낼 것이다”, “아마 그들은 뇌를 꺼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이 있는 듯하다”, “더 나아가 …인 듯하다”
‘만일’, ‘아마’, ‘듯하다’라는 말은 초기 인류가 무엇을 했는지를 조건부로 설명한다. 뇌를 꺼냈다는 설명에도 이런 추정이 붙지만, 같은 대목에는 ‘의심할 여지 없이’라는 확신도 섞여 있다. 비판의 대상은 이처럼 추정에 기대어 초기 인류의 행동을 그려 놓고, 그것으로 먼 과거의 종교와 생활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두개골을 식인 잔치의 잔해로 보는 대목에서는 유물의 흔적에서 의례를 재구성하는 과정이 한층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시사하는 것은 잔해가 식인 잔치의 것이라는 점” “두개골 하나에는 인위적으로 자른 흔적이 있었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의 결과였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이라는 제안이 있었다.” “도구로 미루어 볼 때 …일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두개골에 인위적으로 자른 흔적이 있다는 기술에서 출발해, 그 흔적이 생긴 원인을 제안하고 도구를 근거로 어느 가능성이 더 큰지를 판단한다. 여기에 뇌를 꺼냈다는 추정과 식인 잔치라는 설명이 결합하면서, 두개골은 특정한 식사와 숭배 관습의 흔적이 된다. 비판의 대상은 두개골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남아 있는 흔적을 근거로 당시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했고 그 행동에 어떤 종교적 의미를 부여했는지까지 재구성하는 데 있다.
어떤 대상이 지녔다고 여겨지는 힘과 동물 머리의 매장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도 비슷한 표현이 이어진다.
“그리고 이것들에 따르면 그것들은 큰 힘을 지녔다고 추정된다.” “같은 이유로 동물의 머리도 묻혔던 듯하다” “예를 들어, 의심할 여지 없이 그것은 그 엄청난 힘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관련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크므로.”
‘추정된다’, ‘묻혔던 듯하다’, ‘관련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라는 말로 힘에 대한 믿음과 매장 행위를 연결하면서, 그 사이에 ‘의심할 여지 없이’라는 단정이 다시 등장한다. 물건이나 동물의 머리가 큰 힘을 지녔다고 여겼을 것이라는 추정은, 그것을 왜 묻었는지를 설명하는 이유로 쓰인다. 이런 문구들을 나란히 놓고 보면, 권위 있는 학자의 저술이라도 고대의 종교 관습을 추측으로 세울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뼈의 질과 다양성을 다루는 문장도 같은 비판을 받는다. 무엇인가가 상당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그 범위가 한정되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추론하며, 기울인 정성에서 가능성을 읽어 내면서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다고 말한다. 이렇게 추정과 확신을 오가는 서술에 대한 질타는 저자가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다는 것으로, 그 서술을 당나귀가 울어대는 것에 빗댄다.
문제는 몇 군데의 조심스러운 표현에 그치지 않는다. ‘그런 듯하다’, ‘아마도’, ‘시사하는’, ‘보아하니’ 같은 말이 거의 400쪽에 걸쳐 한 쪽마다 여덟아홉 번씩 등장한다는 것이다. 추정이 책 전체의 역사 서술을 떠받친다는 비판이며, 『선사 종교』 한 권을 넘어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이어진다.
이는 다윈 체계의 전형이라는 비판이다. 학자들을 불가지론자라고 부른 뒤, 라틴어 표현 ‘이그노라무스’를 끌어와 ‘무식쟁이’라고 조롱한다. 학문적 권위를 내세우면서도 정작 다루는 대상을 알지 못하고, 그 빈자리를 추정으로 채운다는 공격이다.
두개골 조각에서 복원한 인간의 모습
다윈의 선사 인류 연대 체계로 소개되는 구분은 기원전 15만 년부터 기원전 1만 년 사이에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을 배치한다. 이들의 모습을 복원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발굴된 두개골 조각과 그 위에 덧붙인 부분이다. 실제로 발견된 것이 두개골의 약 5분의 1, 3분의 1 또는 4분의 1에 불과한데도 나머지를 소석고와 점토로 채운 뒤, 그렇게 완성한 형상을 실제 인간의 모습처럼 제시하는 것은 터무니없다는 비판이다.

럭크만 목사는 어떤 두개골을 가져오더라도 자신은 그것을 바탕으로 1964년의 거리에서 볼 법한 사람을 그려 낼 수 있다고 말한다. 같은 두개골로 당대의 평범한 사람도 그릴 수 있다면, 복원 그림의 낯선 외모를 곧바로 과거 인류의 실제 모습으로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는 반론이다. 남아 있는 뼈가 보여 주는 것과 복원하는 사람이 채워 넣은 외모는 같지 않다는 점을 그림의 예로 드러낸다.
그 뒤의 시대 구분에는 중석기 시대가 등장한다. 후기 빙하기와 프리보레알기, 서브보레알기라는 명칭이 나열되고, 현대 유럽 인종들의 선조들이 배치된다. 그런데 기원전 4000년 무렵에 이르면 유인원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던 서술이 급격히 달라진다. 비판의 요지는 그 이후는 청동기 시대나 철기 시대처럼 이름을 달리 붙이기는 해도 대체로 역사를 있는 그대로 기술하면서, 그 이전에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인류 역사를 설정한다는 것이다. 이런 경계를 정하는 학자를 ‘배운 당나귀’라고 조롱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원전 4000년과 인간의 영원한 운명
기원전 4000년이라는 경계는 인류의 외모나 도구뿐 아니라 인간이 무엇을 생각하고 물었는지를 다루는 철학사에서도 중요하다.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명예교수이자 박사로 소개되는 앨버트 E. 에이비는 『철학사 편람』에서 고대 기록에 나타난 인류 최초의 관심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류의 최초 관심사는, 고대 기록에 드러나 있듯이, 영원에 걸친 인간의 운명이었다.”
그 관심을 보여 주는 문헌으로 『사자의 서』가 거론되며, 연대는 기원전 3500년으로 제시된다. 중요한 것은 문헌의 오래된 연대만이 아니다. 기록에 등장하는 초기 인간이 이미 영원 속에서 자신이 맞을 운명에 관심을 두었다는 점이다. 럭크만 목사는 기록된 역사의 시작과 이러한 관심을 아담과 이브의 타락에 연결하며, 이를 ‘놀라운 우연’이라고 반어적으로 표현한다.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성경의 역사와 맞닿는다는 뜻이다.
| 연대 또는 경계 | 연결되는 내용 | 논점 |
|---|---|---|
| 기원전 15만 년~기원전 1만 년 |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을 배치하는 선사 인류 구분 | 두개골 일부에 덧붙인 복원 모습의 신뢰성 |
| 기원전 4000년 무렵 | 선사 인류 서술이 갑자기 달라지는 경계 | 그 이전에 설정한 역사와 이후의 역사 사이의 차이 |
| 기원전 3500년 | 『사자의 서』에 부여된 연대 | 고대 인간이 영원한 운명에 관심을 두었다는 설명 |
여기서 비판의 대상인 선사시대는 성경의 기록보다 앞선 시간을 가리키는 중립적인 명칭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일어났다고 말씀하신 일을 거부하고, 그 앞에 다른 사건들을 배치하기 위해 만들어 낸 대체 역사다. 다윈조차 이 문제를 피하려면 선사시대를 지어내야 한다는 비판도 같은 이유에서 나온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 이전에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고 꾸미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사건 대신 다른 사건이 일어났다고 설정한다는 것이다.
종교사의 전환점과 창세기의 인류 역사
종교사를 다루는 자료로는 존 루이스 박사의 『쉽게 풀어 쓴 세계의 종교들』도 거론된다. 영국 런던의 몰리 칼리지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인물의 역사 서술에서도 종교의 기원을 설명하다가 창세기의 연대와 맞닿는 전환점이 나타난다. 조상 숭배, 인간의 마술과 심리, 위대한 대지모신, 풍요 제의, 씨족 잔치와 음식 의례를 다루고, 모든 종교의 특징으로 입문 의례를 거론한 뒤 다음과 같은 발전을 언급한다.
“기원전 4000년에서 3000년 사이에 일어난 커다란 경제적·사회적 발전.”
럭크만 목사는 그 앞의 24쪽을 허풍이라고 혹평하며, 이 대목에서는 저자가 두 발로 창세기 2장과 3장에 정확히 내려앉는다고 비꼰다. 종교가 발전해 왔다는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아도 결정적인 경제적·사회적 발전의 시점에 이르면 결국 아담과 이브의 역사로 돌아온다는 비판이다. 그런데도 그 연관성을 알아채지 못한다는 이유로 해당 학자를 “불쌍하고 멍청한 박사”라고 질타한다.
기원전 4000년 이전에는 기록된 인류 역사가 없다. 따라서 역사 연구의 출발점은 아담과 이브다. 그 이전에 설정한 인류 역사는 인간이 점진적으로 진화했다고 믿고 싶은 사람들이 꾸며 낸 모방 역사다. 창세기보다 앞선 인류의 발전 과정을 먼저 가정하고, 그 틀에 역사를 맞추어서는 안 된다.
스미스소니언의 화석과 복원된 동물의 크기
성경보다 앞선 인류 역사를 부정하면 스미스소니언에 전시된 화석은 어떻게 설명할까? 럭크만 목사는 자신도 그곳을 방문해 인간과 동물의 유골을 보았다며, 남아 있는 뼈와 그 뼈를 바탕으로 복원한 전체 모습을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반박한다. 누구라도 같은 방식으로 뼈를 다시 조립하면 키가 30피트나 40피트에 이르는 거인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럭크만 목사가 관람한 동물 전시에는 온전한 골격이 남아 있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한 부셸짜리 바구니에 들어갈 만한 양의 뼈로 길이가 10피트나 15피트에 달하는 동물 형상을 세워 놓았고, 그 뼈들은 점토 속에 들어가 있었다. 이 사례에서 문제 삼는 것은 뼈의 존재가 아니라, 적은 양의 유골을 바탕으로 채워 넣은 거대한 몸체까지 그대로 믿는 태도다. 눈앞에 완성된 동물 형상이 서 있더라도, 남아 있던 뼈와 복원 과정에서 덧붙인 부분을 구분해야 한다는 비판이다.
무엇을 믿고 무엇을 의심하는가의 문제는 박물관 전시에만 머물지 않는다. 듣는 말을 모두 믿어서는 안 되는데도,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만 제외하고 듣는 대로 다 믿는다. 참 이상한 시대라는 탄식이 나오는 까닭은, 복원된 형상은 쉽게 받아들이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거부하는 이 뒤바뀐 태도에 있다.
탄소-14 연대측정으로 성경을 무너뜨릴 수 있는가
리비의 탄소-14 실험은 성경의 역사를 무너뜨린 과학적 성과로 내세워진다. 현대 과학 연구자들이 마침내 성경의 허구를 폭로했다는 것이다. 지구에 40만 년 동안 생명체가 존재했고, 동물들이 창세기의 첫 기록보다 앞서 있었으며, 아담도 적어도 2만 년 전의 인물이라는 주장들이 그 실험의 성과로 제시된다. 럭크만 목사는 이를 반어적으로 열거한 뒤 헛소리라고 일축한다. 그의 비판은 탄소-14 측정 결과만으로 성경의 기록을 뒤집을 수 있다고 여기는 과학의 권위를 겨냥한다.


창세기 1:2 땅은 형체가 없고 공허하며 어두움이 깊음의 표면에 있으며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에서 거니시더라.
창세기 1:2는 땅이 어떤 상태였으며 하나님의 영께서 어디에서 거니셨는지를 기록한다. 성경이 전하는 이 시작과 맞서는 것은 탄소-14 측정으로 그보다 앞선 생명의 역사를 확정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생명체의 역사가 40만 년에 이르고 아담이 2만 년 전의 인물이라는 연대도 반박의 대상에 포함된다.
탄소-14 연대측정에 대한 비판을 이해하려면 먼저 연대를 거슬러 계산하는 방식을 살펴야 한다. 유기물이 죽을 때 탄소-14를 잃고, 이후에도 해마다 일정량을 잃는다고 가정하면, 지금까지 잃은 양을 통해 처음 가지고 있던 양을 추정하고 그 물체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계산할 수 있다. 계산은 세 단계를 거친다.
유기물이 죽은 뒤 해마다 탄소-14를 일정량씩 잃는다고 가정한다.
잃어버린 탄소-14의 양을 측정하고, 원래 가지고 있던 양을 거슬러 추정한다.
두 양의 관계를 이용해 그 물체의 연대를 계산한다.
그러나 같은 물체를 계산한 결과 사이에 차이가 난다면 그 측정을 얼마나 정확하다고 할 수 있을까? 여기서 제시되는 사례는 바이킹 배다. 리비의 탄소-14 실험으로 측정한 그 배는 3000년 된 것으로 제시되었지만, 계산한 사람들의 결과 사이에는 180년의 차이가 있었다. 이것이 상당한 오차라는 거듭된 지적은 “거의 5%”라는 표현으로 이어진다. 과학이 참 정확하다는 반어는 바로 이 차이를 겨냥한다. 성경의 역사를 무너뜨릴 만큼 확실한 측정이라고 내세우면서도, 정작 같은 배의 연대를 계산한 결과는 180년이나 벌어져 있다는 비판이다.
탄소-14 연대측정의 오차와 대기 변화
3,000년에 5% 정도의 차이라면 대수롭지 않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박은 같은 오차를 3만 년, 30만 년, 300만 년에 적용했을 때 그 차이가 얼마나 커질지 계산해 보라는 것이다. 지구의 나이를 알아내려는 계산이라면 짧은 기간의 오차만 보고 넘어갈 수 없고, 훨씬 긴 시간에 걸쳐 벌어지는 차이까지 고려해야 한다. 3,000년에 180년이나 차이가 나는 추측에는 과학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다는 비판이다. 그 정도 확률은 경마에서도 얻을 수 있다는 비꼼 역시 연대측정에 부여된 정확성의 권위를 겨냥한다.

측정 결과에 과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해서 그 권위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디모데전서 6:20은 과학의 이름으로 제기되는 반론을 경계할 기준을 준다.
디모데전서 6:20 오 디모데야, 네게 맡겨진 것을 지키고, 비속하고 허황된 말장난과 거짓되이 일컬어지는 과학의 반론을 피하라.
여기서 주목하는 표현은 ‘거짓되이 일컬어지는 과학’이다. 과학이라는 이름만으로 결론을 받아들이지 말라는 경고는 연대측정에도 적용된다. 계산 결과를 신뢰하려면 그 숫자를 떠받치는 가정부터 살펴야 한다.
리비의 탄소-14 실험에서 문제 삼는 가정은 붕괴 속도, 곧 원소가 방사성 탄소를 잃는 속도가 일정하다는 것이다. 현재의 대기를 근거로 그 속도를 정한다면, 과거에도 대기가 지금과 같았는지가 연대 계산을 좌우한다. 대기가 한 번이라도 달라졌다면 붕괴 속도 역시 같지 않았을 것이라는 반론이다. 현재의 조건을 과거 전체에 적용할 수 있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여기서 창세기 초반의 변화와 창세기 6장과 7장의 또 다른 변화가 중요해진다. 이 변화들을 대기의 변화로 받아들이면, 과거의 대기는 현재와 같지 않았다. 그러므로 현재의 대기를 근거로 정한 속도를 그대로 적용하여 과거의 연대를 계산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대기 변화가 리비의 실험을 무너뜨린다는 반론은 다음 네 단계로 정리된다.
리비의 탄소-14 실험은 방사성 탄소를 잃는 속도가 일정하다고 가정한다.
그 가정은 현재의 대기를 근거로 하므로, 대기가 달라졌다면 붕괴 속도도 같지 않게 된다.
창세기에 기록된 변화를 받아들이면 과거의 대기가 현재와 달랐음을 알게 된다.
따라서 현재의 조건에 기대어 과거의 연대를 계산하는 리비의 실험은 대실패가 된다.
인간은 나아지는가, 악화되는가
연대측정의 전제를 받아들이는 문제는 인간의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와 맞물린다. 인간이 점점 나아진다고 믿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체계를 받아들이게 된다. 반대로 인간이 점점 악화된다는 성경의 체계를 받아들이면, 과거에 대기가 변했으며 그 변화가 리비의 탄소-14 실험을 무너뜨린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계속 나아진다는 다윈의 가설을 붙드는 한, 그와 반대되는 인간의 실상을 드러내는 성경도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인간을 완전한 실패자로 드러낸다. 이런 평가를 듣고, 세상에 원한을 품은 사람이 무엇이든 무너뜨리고 파괴하려는 욕망에서 내놓은 주관적 의견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특히 교육받은 사람 가운데 그렇게 반응하는 이를 향해 다음과 같은 강한 책망이 이어진다.
이보게, 자네는 지옥으로 향하는 불경건한 사람이야.
성경을 ‘증오 문학’과 ‘반사회적인 책’이라고 부르는 것도 인간의 자존심을 거스르는 성경의 성격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다.
성경은 지금까지 쓰인 가장 위대한 증오 문학입니다.
성경은 출판된 다른 어떤 책 열 권보다도 인간을 더 많이 비판한다. 인간을 칭찬하고 발전을 약속하기보다 감추고 싶어 하는 실상을 드러낸다는 뜻에서 ‘증오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또한 ‘세상에서 가장 반사회적인 책’이라는 표현은 성경이 세상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1세기와 2세기, 3세기에 그리스도인들이 죽임을 당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은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함께 움직이기를 거부했으며, 그런 의미에서 반사회적이었다.
성경을 좋아하지도 믿지도 않는 태도와, 성경의 인간 평가를 누군가의 주관적인 적대감으로 돌리는 태도는 같은 불편함에서 나온다. 성경이 사람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그것을 말해 버리기 때문이다. 자신을 드러내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대신,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게 원한이나 파괴적 욕망이 있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성경이 드러내는 인간의 실상
인간을 이해하려면 인간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가 아니라 성경이 인간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지부터 살펴야 한다. 피터 럭크만 목사가 사람을 속속들이 안다고 말하는 근거도 성경을 읽었다는 데 있다.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나 주관주의 철학자들을 연구해서 얻은 지식이 아니다. 럭크만 목사는 이들이 성령을 밀어내려고 방어기제를 고안했다고 비판한다. 성경은 그런 방어 뒤에 숨은 인간의 상태까지 드러낸다.

시편 39:5 보소서, 주께서 내 날들을 손 너비만큼 주셨으므로 내 연수가 주 앞에서는 없는 것 같사오니 진실로 가편 좋은 상태에 있는 모든 사람도 다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
시편 39:5의 평가는 인간이 가장 형편없을 때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사람이 가장 좋은 상태에 있을 때조차 헛되다고 말한다. 자신의 가능성과 장점을 내세워 스스로를 옹호해도 그 판단을 피할 수 없다. 이 말씀을 역설적으로 ‘증오 문학’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성경을 미워한다는 뜻이 아니라, 자존심을 거스르는 말씀을 인간이 증오의 말처럼 받아들인다는 책망이다.
이사야 64:6 그러나 우리는 다 불결한 것 같고,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걸레 같으며, 또 우리는 다 잎사귀처럼 시들며 우리의 죄악들은 바람처럼 우리를 옮겨갔나이다.
이사야 64:6은 악행을 넘어 인간이 자랑하는 의까지 문제 삼는다. 우리의 모든 의가 더러운 걸레 같다면, 스스로 훌륭하다고 여기는 행위도 자신을 높일 근거가 되지 못한다. 피터 마셜, A. J. 크로닌, 로이드 더글러스의 글에서는 이런 말을 읽어 보지 못했을 것 아닌가. 인간에게 듣기 좋은 말을 기대하는 독자에게는, 잘못뿐 아니라 자랑거리까지 겨냥하는 성경의 평가가 그만큼 부정적이고 불편하다.
로마서 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도다.
로마서 3:12 모두가 탈선하여 함께 무익하게 되었으며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없도다, 한 사람도 없도다.
시편 14:3 그들은 모두 곁길로 갔으며 그들이 모두 함께 더럽게 되어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없도다, 한 사람도 없도다.
로마서 3:11–12는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으며 사람들이 함께 무익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시편 14:3은 사람들이 함께 더럽게 되었다고 표현한다. 두 본문에서 되풀이되는 ‘한 사람도 없도다’는 말은 이 평가를 특별히 악한 일부 사람에게만 돌릴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자신은 예외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그 판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이 점점 나빠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은 까닭은 단순히 어두운 이야기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상태를 묘사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나아진다는 이론과 다윈에 대한 비판
성경이 드러내는 인간의 실상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마음은 인간이 점점 나아진다는 이론을 만들어 낸 동기와도 맞닿아 있다. 거칠게 비유하자면, 성경은 인간의 가죽을 털째 벗겨 놓았다. 자기변명으로 감추려는 모습까지 낱낱이 드러낸다는 뜻이다. 인간의 향상을 내세우는 이론은 그 폭로를 거부하고 자신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라는 비판을 받는다.

이러한 사상의 배경으로 함께 거론된 인물과 저작, 각각에 연결된 연도는 다음과 같다.
| 인물 또는 저작 | 연결된 연도 |
|---|---|
| 에라스무스 다윈 | 1731년 |
| 윌리엄 페일리 | 1743년 |
| 장바티스트 라마르크 | 1744년 |
| 로버트 체임버스의 저작 | 1844년 |
| 루소 | 1712년 |
| 찰스 다윈 | 1809년 |
윌리엄 페일리는 다윈에 앞선 영향과 관련해 거론된다. 다윈과 스펜서의 체계에 대한 비판은 그 토대에 놓인 칸트와 라플라스의 성운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성운설은 거짓이며, 다윈과 스펜서가 그 위에 자신들의 체계를 세웠다는 비판이다. 찰스 다윈이 좋아했다는 라이엘의 『지질학 원리』 역시 같은 맥락에서 다뤄진다. 이들을 묶는 공통점은 모든 변화를 규칙적이고 자연적인 것으로 보는 태도다.
찰스 다윈 개인을 향한 비판은 성경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 집중된다. 다윈이 엇나가기 전에는 성직자가 되려 했고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지만, 그 내용을 지독하게 싫어했다는 주장이다. 성경이 다윈 자신의 상태까지 드러냈기 때문에 격렬하게 반발했다는 비판이다. 그 반발을 ‘발작’과 ‘경련’에 빗대어 조롱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인간이 나아진다는 이론을 받아들이는 일과 성경을 거부하는 일은 여기서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둘 다 자신을 폭로하는 말씀에 저항하며 인간을 달리 평가하려는 태도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과 말씀을 거부하는 태도
성경이나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증오의 설교자’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럭크만 목사는 그 비난을 되돌린다. 자신과 성경을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이야말로 정작 증오에 차 있다고 책망한다. 하나님과 성경을 미워하면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그 사랑의 고백은 거짓이다.

요한복음 8:47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들을 듣느니라.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들을 듣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음이라.”고 하시니라.
요한복음 8:47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씀을 거부하는 태도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과 어긋날 뿐 아니라, 그 사람이 하나님께 속했는지를 드러낸다. 따라서 인간의 실상을 드러내는 성경의 말씀을 싫어하는 마음은 단순한 취향이나 지적 견해 차이로 끝나지 않는다. 말씀에 대한 반응에서 구원받지 않은 사람의 근본적인 문제가 드러나는 것이다.
야고보서 4:4 너희 간음하는 남자들과 간음하는 여자들아, 세상과 친구 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느니라.
야고보서 4:4는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 더해 세상과 맺는 관계를 문제 삼는다. 세상과 친구가 되려는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그러므로 세상과 친밀하게 지내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고 여길 수는 없다.
요한일서 2:15 세상도, 세상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를 사랑함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요한일서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생의 자랑이요, 아버지께 속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라.
요한일서 2:15~16은 사랑하지 말아야 할 세상에 무엇이 속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힌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생의 자랑은 아버지께 속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다. 야고보서 4:4가 세상의 친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을 하나님의 원수라고 한다면, 요한일서는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 안에 아버지를 사랑함이 없다고 말하며 그 사랑의 대상을 짚어 준다. 인간이 자신을 높이고 자신의 욕망을 옹호하는 태도를 그대로 둔 채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인간과 성경을 토대로 한 역사 연구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역사를 읽는 방식도 달라진다. 인간이 점점 나아진다는 전제를 고수하면, 인간이 오히려 악화된다는 성경의 판단을 거부하게 된다. 그 말씀이 자신의 상태를 드러낸다는 이유로 성경을 밀어낸다면, 과거의 인간도 잘못 이해하게 된다. 교육을 많이 받거나 지식인으로 인정받는다고 해서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다윈을 지지하는 교육받은 지식인의 역사 논평을 ‘세 살짜리 에스키모가 핵물리학을 논하는 것’에 비긴다. 학식은 갖추었어도 인간에 관한 출발점이 잘못되어 있다면, 역사에 관해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른다는 신랄한 비판이다. 인간이 계속 향상된다는 믿음을 고수하는 한, 건전한 역사 연구와 논평을 가로막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역사에서 배우는 유일한 것은 사람들이 역사에서 결코 배우지 않는다는 사실이라는 격언은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짚는다. 거듭나지 않은 인간은 자신이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고집하며, 오히려 악화되고 있다는 성경의 말씀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과거를 돌아보아도 그 속에 드러나는 자신의 실상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같은 문제를 되풀이하면서도 교훈을 얻지 못한다.
따라서 역사 연구는 인간의 창조와 그 이후의 역사에 관한 성경의 기록을 마지막 글자 하나까지 절대적으로 참되다고 받아들이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진화 가설은 그 기록을 설명하거나 판단하는 기준으로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인간이 점점 나아진다는 전제에 성경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밝히는 인간의 기원과 상태를 토대로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이와 반대되는 미국의 역사 교육을 “아편에 취한 몽상”이자 “미혹된 바보의 자기중심적인 환각”이라고 맹렬히 비판하며, 미국에서 가르치는 역사는 성경의 사실들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단정한다. 성경과 진화 가설 사이에서 절충점을 찾는 방식으로는 역사 연구의 잘못된 출발점을 바로잡을 수 없다. 처음부터 성경의 역사 기록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토대를 세워야 한다.
적어도 25년의 검토 끝에 내린 결론
럭크만 목사는 적어도 25년 동안 사실들을 철저히 검토할 시간이 있었으며, 증거를 살펴보지 않은 채 진화론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고 역설한다. 자신을 자만하고 오만한 바보로 여기더라도, 자신이 청중만큼 많은 증거를 검토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청중보다 틀림없이 훨씬 더 많은 증거를 검토했다고 자부한다.
자신의 검토 경험을 이렇게 내세우는 것이 자랑임을 인정하면서, 바울이 자랑할 때 어리석은 사람처럼 말한다고 표현했던 일을 끌어온다. 그러면서도 최대한 친절하게 말하는 것이라며, 스스로 “합리적이고 제정신이며 분별 있는, 20세기의 계몽된 결론”이라고 부르는 결론을 제시한다. 다윈의 진화론을 믿는 사람이라면 정신과 의사에게 머릿속을 검사받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럭크만 목사는 이 날 선 조롱으로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판단 자체를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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