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주의 & 비밀결사

미국의 예수회: 종교적 권위와 정치권력, 자유를 둘러싼 역사

종교적 권위는 어디까지 정치권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미국의 초기 개신교 정착민들에게 이 문제는 새로운 땅에서 어떤 신앙을 지키고 누구의 통치를 받을 것인가에 관한 질문이었다. 1630년 청교도 지도자 존 윈스롭은 아메리카 이주의 목적에 복음 전파와 예수회의 확장에 맞설 방벽을 함께 놓았다. 이후 예수회를 경계한 인물들도 교리의 차이만을 문제 삼지 않았다. 교황에 대한 복종이 시민의 자유와 국가의 독립을 위협할 수 있다고 보았다.

크리스 핀토 감독의 『미국의 예수회원들: 미국 예수회주의의 역사』가 추적하는 것은 이러한 경고와 그 배경에 놓인 종교·정치적 대립이다. 로욜라의 영성 훈련과 반종교개혁에서 시작된 문제는 미국의 교육기관과 정치 인맥, 정보기관과 대중문화로 넓어진다. 그 과정에는 링컨 암살과 세계대전, 전범 도피에 교황청과 예수회가 관여했다는 저술가들의 고발도 포함된다. 서로 다른 시대의 증언과 비판을 잇는 질문은 종교 조직이 공개된 선교와 교육을 넘어 국가의 결정과 사람들의 생각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해 왔느냐는 것이다.

이 대립의 밑바탕에는 권위를 어디에 두느냐는 문제가 있다. 구원의 근거를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과 하나님의 약속에서 찾는가, 교회와 성사에서 찾는가. 통치자도 명시된 법 아래 놓이는가, 통치자의 판단이 곧 법이 되는가. 국가 주권과 이민, 재산권과 사회정의, 종교통합을 둘러싼 비판도 이러한 질문과 맞물린다. 정치적 자유를 지키는 일과 전해 받은 복음을 지키는 일이 왜 함께 논의되어 왔는지를 이해하려면, 제도와 인맥뿐 아니라 그 권력을 정당화하는 믿음까지 살펴야 한다.

청교도 이주와 예수회에 맞선 방벽

1630년 아메리카로 이주한 청교도들에게 새로운 땅으로 향하는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자 예수회의 확장에 맞서는 일이었다. 그들의 최고 지도자 존 윈스롭(John Winthrop)은 이주의 가장 중요한 이유로 복음 전파와 이방인들의 충만함, 예수회에 대한 저항을 함께 들었다.

윈스롭이 청교도 이주에 부여한 복음 전파와 예수회 저지라는 두 목적.

“교회에 매우 중대한 봉사가 될 일은 세계의 그 지역들에 복음을 전하고,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이르도록 돕고, 예수회가 그 지역들에 세우려 애쓴 적그리스도의 왕국에 맞서 방벽을 세우는 것이다.”

윈스롭에게 아메리카는 복음을 전해야 할 지역인 동시에, 예수회가 적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려는 지역이었다. 그가 말한 방벽은 바로 그 확장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청교도의 이주를 교회를 위한 중대한 봉사로 여긴 데에는 복음을 널리 전하는 것뿐 아니라, 그에 맞서는 세력으로부터 새로운 정착지를 지켜야 한다는 목적도 있었다.

와일리 목사의 예수회 비판과 교황주의

19세기 역사가 제임스 에이트킨 와일리(James Aitken Wylie, 1808–1890) 목사는 예수회의 개별 활동을 넘어 조직의 성격과 교황주의의 발전을 문제 삼았다. 법학박사이기도 했던 와일리 목사는 대작 『프로테스탄티즘의 역사』와 『교황권』, 『스페인의 새벽』 등의 저자였으며, 예수회의 활동에 관해서도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예수회』는 그가 이 주제를 다룬 저술 가운데 하나다.

와일리 목사는 연구 끝에 예수회가 역사상 존재한 가장 악한 인간 집단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특정 회원의 잘못이나 일부 행위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예수회주의 자체를 교황주의가 도달한 최종 형태이자 악덕이 조직으로 구현된 모습으로 규정했다.

“예수회주의는 교황주의의 최종 발전 형태다. 이는 지상에 존재했던 가장 악한 단체일 뿐 아니라, 지상에 존재할 수 있는 가장 악한 단체다. 이는 순전히 추상적인 악덕이 구체적인 조직으로 구현된 것이다.”

‘존재했던’에서 ‘존재할 수 있는’으로 나아가는 표현에는 비판의 강도가 드러난다. 예수회를 과거의 다른 단체보다 악하다고 평가했을 뿐 아니라, 가능한 악의 극한에 놓은 것이다. 와일리 목사는 이를 다음과 같이도 표현했다.

그것은 악한 자의 화신이다. 그것은 실로 지상에 세워진 지옥 그 자체다.

반종교개혁과 예수회의 목적

예수회는 개신교의 확산을 저지하고 교황의 지배를 회복하려는 조직으로 이해된다. 단순한 선교 수도회가 아니라 종교개혁을 되돌리려는 세력이라는 시각에서, 와일리 목사의 비판과 아메리카·유럽에서 이어진 예수회 반대 움직임을 다룬다.

개신교의 확산과 이에 대응한 예수회 활동의 세계적 확대를 설명하는 개략도.

예수회(Society of Jesus)는 1540년 교황 바오로 3세의 승인을 받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 설립 목적은 마르틴 루터 시대에 시작된 개신교 운동을 뒤엎기 위한 반종교개혁이었다. 루터가 교황 칙서를 불태우고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선언하자 많은 사람이 로마를 등졌고, 개신교 운동은 유럽 전역을 넘어 해외 여러 나라로 퍼졌다. 이에 맞서는 예수회의 활동 범위도 전 세계로 확대되었다. 궁극적인 목적은 인류를 다시 암흑시대로 되돌리고 교황의 이름으로 모든 땅을 지배하는 데 있었다는 주장이다.

아메리카의 추방 조치와 유럽의 예수회 폐지

아메리카 식민지 초기의 기독교 정착민들은 로마 가톨릭 예수회 사제들이 교황을 대신하여 새로운 영토를 정복하려 한다고 경고했다. 그들에게 유럽의 종교적 대립은 먼 대륙의 일이 아니라 자신들이 정착한 땅의 지배권과 직결된 문제였다. 매사추세츠만 식민지는 1647년 5월 26일 예수회 사제들을 금지하고, 추방된 뒤 돌아오는 사제는 사형에 처하도록 했다. 활동 제한을 넘어 추방과 재입국 처벌로 대응한 것이다.

매사추세츠만의 금지·추방 조치와 유럽에서의 추방 및 교황의 예수회 폐지를 비교한 그림.

유럽에서도 예수회는 수십 차례 추방되었다. 추방의 원인으로는 예수회의 기만과 반역, 암살 수법이 지목된다. 추방을 주도한 이들은 대부분 같은 가톨릭 신자들이었다. 예수회에 대한 반대가 개신교 진영에만 국한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마침내 1773년에는 교황 클레멘스 14세(1705–1774)가 직접 예수회를 폐지했다.

클레멘스 14세의 죽음도 예수회와의 갈등에 연결된다. 교황이 예수회를 추방한 지 1년도 안 되어 독살당했으며, 그의 죽음이 예수회 암살자의 소행으로 지목되었다는 것이다.

1814년 예수회 복원과 미국의 자유에 대한 경고

1814년 예수회가 복원되자 존 애덤스는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같은 해 12월 17일 존 테일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수회와 종교재판을 함께 거론하며 복원을 비판했다.

“우리는 종교재판과 예수회를 저주하지만, 종교재판과 예수회는 다시 복원되었다.”

1816년 8월 9일 토머스 제퍼슨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자신이 쓴 예수회 역사의 근거와 복원이 가져올 위험을 더 구체적으로 밝혔다.

“내가 쓴 예수회 역사는 문장이 유려하지는 않지만, 의심할 여지 없이 권위 있는 자료에 근거하며, 매우 상세하고 몹시 끔찍하다. 그들의 복원은 실로 암흑과 잔혹함, 배신, 전제정치와 죽음으로 향하는 한 걸음이다. 나는 우리가 편협한 신념과 예수회주의의 위험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애덤스가 내세운 것은 자신이 쓴 문장의 유려함이 아니라 그 역사를 뒷받침하는 자료의 권위와 상세함이었다. 그가 기록한 끔찍한 역사는 과거에 끝난 일이 아니었다. 예수회의 복원은 암흑과 잔혹함, 배신과 전제정치가 되돌아오는 일이었으며, 편협한 신념과 예수회주의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경고로 이어졌다.

미국 독립혁명에서 조지 워싱턴과 함께 싸운 라파예트 후작에게도 예수회를 경계하는 발언이 귀속된다. 제임스 L. 채프먼의 1856년 저서 『미국주의 대 로마 가톨릭주의, 또는 대서양 이쪽에서 벌어지는 샘과 교황의 전투』 127쪽에 실린 것으로 소개된 발언이다.

“내 생각에 이 나라, 미합중국의 자유가 언젠가 파괴된다면, 그것은 로마 가톨릭 예수회 사제들의 교묘한 책략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시민적 자유와 종교적 자유를 위협하는 가장 교활하고 위험한 적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유럽에서 일어난 전쟁 대부분을 부추겼다.”

라파예트에게 귀속된 이 경고는 유럽의 전쟁과 미국의 장래를 연결한다. 예수회 사제들이 유럽에서 일어난 전쟁 대부분을 부추겼다는 비판을 바탕으로, 그들의 교묘한 책략이 언젠가 미국의 자유까지 파괴할 수 있다고 내다본 것이다. 여기서 지키려는 자유는 종교적 자유만이 아니라 시민적 자유이기도 했다.

로욜라의 군 생활을 끝낸 부상과 회복기의 독서

예수회를 세운 이그나티우스 로욜라(1491–1556)는 스페인의 군인이었다. 그리 큰 세력을 갖지 못한 왕족 가문 출신으로, 1521년 팜플로나 전투에서 포탄에 맞아 다리가 부서지면서 군 경력을 마쳤다. 부상 뒤 이어진 회복기는 그가 군인으로서 품었던 뜻을 종교적 헌신으로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로욜라의 전투 부상과 귀환, 회복기의 독서가 종교적 헌신으로 이어지는 과정.

칙 출판사의 저자이자 연구자인 데이비드 대니얼스는 로욜라의 군 생활을 높이 평가한다. 포탄이 날아와 다리를 맞힌 일을 “백만 분의 일 확률”이라고 표현하면서, 뜻밖의 부상을 당한 그를 적군이 돌본 뒤 로욜라에 있는 가족에게 돌려보냈다는 일화를 든다. 적에게도 그런 대우를 받을 만큼 고귀하고 훌륭한 군인이었으며, 그의 출발은 훌륭했다는 평가다. 그러나 대니얼스는 바로 그런 사람을 악마가 타락시키려 한다며, 군인으로서의 덕성과 이후의 종교적 체험을 다르게 바라본다.

로마 가톨릭 신자였던 로욜라는 평소 로맨스 소설을 즐겨 읽었다. 하지만 부상에서 회복하는 동안 접한 책은 가톨릭 성인들의 생애를 다룬 책들이었다. 그중에는 종교재판을 운영한 도미니코회의 창립자 도미니크 구스만의 이야기도 있었다. 성인들이 로마에 쏟은 열성과 마리아를 향한 헌신은 로욜라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 역시 마리아에게 깊이 헌신하게 되었다.

마리아 신심과 교리를 확인해 준 환상

『미국의 예수회원들: 미국 예수회주의의 역사』는 로욜라가 회복 중에 환상을 보기 시작했으며, 환상 속 마리아와 교류한 뒤 회심했다고 전한다. 마리아만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로욜라는 하프나 리라 같은 현악기 형태로 성삼위일체를 보았다고 했고, 온몸에 눈이 달린 뱀의 환상도 경험했다고 했다. 작품 속 인터뷰는 이 체험들을 극도로 기괴하다고 비판하며, 예수회의 설립을 마리아와 하프, 뱀의 환상에 연결한다.

마리아 발현을 다룬 『정반대: 마리아 발현에 대한 성경적 재고찰』의 저자 티머시 F. 카우프먼은 이러한 체험의 주인공이 로마 가톨릭에서 가장 두드러진 수도회 가운데 하나인 예수회를 세웠다는 점에 주목한다. 개인의 환상을 이해하는 문제는 그가 세운 수도회의 기원과도 맞닿아 있다.

마리아 발현 관련 저서의 저자 티머시 F. 카우프먼.

예수회 역사에서 마리아는 수도회의 어머니로 불린다.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로 여기는 신앙 안에서는 자연스러운 호칭이다. 로욜라에게 환상은 새롭게 시작할 거룩한 삶과 헌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 생각하게 했으며, 동시에 로마와 교황권의 교리를 확인해 주는 체험이었다.

만레사의 체험에서 영성 훈련으로

로욜라는 회복기에 스페인 만레사의 동굴에서 1년을 지내며 영적 체험을 하고 그 내용을 기록했다. 그때 받은 영적 인도에 따라 고안한 훈련은 이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용되었다. 작품의 한 인터뷰 출연자는 로욜라를 인도한 분이 하나님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히며, 이 훈련을 세뇌에 비유한다.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말 그대로 자신을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느꼈다는 것이다.

만레사의 개인적 체험과 기록이 여러 사람에게 적용되는 영성 훈련으로 이어지는 과정.

이들은 결국 알룸브라도스(alumbrados)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소개된다. 인터뷰는 그 이름을 라틴어 일루미나티(illuminati), 곧 ‘깨달음을 얻은 자들’이라는 뜻으로 풀이하며, 훈련을 통해 특별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느끼는 체험과 연결한다.

로욜라의 영성 훈련은 지금도 예수회원뿐 아니라 다른 이들 사이에서 실천된다. 이를 비판하는 인터뷰 출연자들은 로욜라의 환상이 흔히 성경에 어긋나는 이단 교리를 뒷받침했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영성 훈련을 무해한 수련이 아니라 마리아의 발현과 그 발현에서 받은 마귀적 교리에 영감을 받은 훈련으로 규정한다. 로욜라 개인의 환상이 교리를 확인하는 근거가 되고, 그 체험에서 나온 훈련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용했다는 점에서 그 영향은 개인의 신앙생활에 머물지 않았다는 비판이다.

예수회가 승인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교황 바오로 3세는 예수회에 주요 역할을 맡도록 요청했다.

트리엔트 공의회와 믿음으로 받는 구원

1545~1563년에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는 반종교개혁의 첫 번째 주요 사건이었다. 공의회는 개신교의 개혁, 특히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을 규탄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만으로 은혜를 얻기에 충분한가, 아니면 교회가 집행하는 성사가 반드시 필요한가가 대립의 중심에 있었다.

구원을 믿음으로 받는 선물로 보는 설명과 성사를 필수로 삼는 입장의 대조.

공의회의 제7차 회기 「성사에 관한 교령」 제8조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만으로 충분하다는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정죄한다.

“누구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만으로 은혜를 얻기에 충분하다고 말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에 맞서는 개신교 구원론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밝힌 은혜와 믿음의 관계에 근거한다.

에베소서 2:8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에베소서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구원을 만들어 내거나 행위의 보상으로 얻지 못한다는 뜻이다. 사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받으므로 자신의 공로를 자랑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만으로는 은혜를 얻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공의회의 선언은, 구원을 받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를 놓고 바울의 가르침과 대립한다.

성사를 통한 구원과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

성사는 로마 교회가 규정하고 집행하는 여러 의식이다. 로마 가톨릭에 대한 비판은 이러한 의식을 구원의 필수 통로로 삼는 데 집중된다. 공의회의 제7차 회기 「성사에 관한 교령」 제4조에는 성사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사람에 대한 정죄가 나온다.

성사로 돌아가는 구조와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믿는 구조를 비교한 그림.

“누구든 새로운 법의 성사가 구원에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성사 중심의 구원관에서는 성사가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며, 사람이 떨어져 나가더라도 다시 성사로 돌아가면 진리로 돌아올 수 있다고 가르친다. 반면 Truth International Ministries 대표 로널드 쿡 박사는 종교개혁자들이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믿는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다고 믿었다는 점을 짚는다. 사람이 의롭게 되기 위해 교회의 성사로 돌아가야 하는지, 그리스도께서 이미 완성하신 사역을 믿어야 하는지가 두 입장을 가른다.

사도행전 13장 38~39절은 죄사함을 선포하면서, 모세의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없었던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통한 의롭게 됨을 약속한다.

사도행전 13:38 ○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분을 통하여 너희에게 죄들의 사함이 선포되었으며

사도행전 13:39 너희가 모세의 율법으로는 의롭게 되지 못하였던 그 모든 일에 있어서도 믿는 자는 모두 그분을 통하여 의롭게 된다는 것이니라.

에베소서가 구원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은혜로 받는 선물임을 밝혔다면, 이 말씀은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했던 일들에서도 믿는 자가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게 된다는 점을 더한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약속을 의지했다. 구원의 근거는 사람이 성사를 통해 이루어 가는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미 완성하신 사역이며, 사람은 그것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확신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가, 교회를 믿는가

루터와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의 명확한 가르침으로 돌아가 성경을 유일한 참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원을 얻는 수단을 둘러싼 대립은 곧 믿음을 어디에 두느냐는 문제이기도 했다. 개신교의 설교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라고 전하며, 로마서 10장 17절은 그 말씀을 듣는 일과 믿음의 관계를 밝힌다.

말씀을 전하고 듣는 방식과 교회 의식에 참여하는 방식을 대비한 그림.

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니라.

저자이자 연구자이며 전 로마 가톨릭 신자인 티머시 F. 카우프먼 연구자는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는 어리석음을 통해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로 정하셨다는 개신교의 이해를 설명한다. 그러므로 구원의 소식을 전하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와 대조되는 로마 가톨릭의 입장은 교회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말씀과 약속을 믿는가, 교회와 그 성사를 믿는가에 따라 구원을 전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논점개신교의 입장비판 대상으로 제시된 로마 가톨릭의 입장
의롭게 됨의 근거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믿는 믿음구원에 필요한 성사
구원을 전하는 방식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의 전파교회가 규정하고 집행하는 의식
믿음의 대상하나님의 말씀과 약속교회와 그 성사

연옥과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정결

교회와 성사를 믿더라도 천국에 곧바로 이르지 못한다는 비판은 연옥을 겨냥한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구원관 아래에서 로마 가톨릭 신자가 바랄 수 있는 것은 연옥에 이르는 것뿐이라는 비판이다. 연옥은 죄가 완전히 제거될 때까지 기한도 정해지지 않은 채 불타야 하는 곳으로 설명된다. 모든 성사를 거쳤더라도 여전히 하나님과 화평하지 못하고, 죽은 뒤에도 죄가 제거되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비판이다.

죽음 뒤 추가 정결을 기다리는 설명과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를 씻는다는 약속의 대조.

개신교 측 반론은 그리스도의 피가 죄를 온전히 씻는가에 집중된다. 연옥에서 다시 깨끗해져야 한다면 그리스도의 피만으로는 모든 죄에서 정결하게 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인터뷰에서는 이를 단순한 교리 차이가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규정한다. 죄를 자백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깨끗하게 하신다는 약속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요한일서 1:7 그러나 그분이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간에 교제가 있게 되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요한일서 1:9 우리가 우리 죄들을 자백하면 그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요한일서 1:7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깨끗하게 하는 범위는 ‘모든 죄’다. 이어지는 1:9은 죄를 자백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용서와 정결을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의로우심에 연결한다. 연옥에 대한 반론에서 결정적인 것은 죄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신다는 약속이다. 죽은 뒤 별도의 정결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가르침은 그 약속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기에 비판받는다.

개신교가 전하는 구원은 사람이 복음을 믿을 때 일어나는 갑작스럽고 분명한 변화다.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받고 위로부터 태어나며, 이전에는 하나님과 원수였으나 이제 하나님과 화해한다. 구원과 거듭남과 화해는 서로 떨어진 목표가 아니라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 함께 일어나는 일이다. 인터뷰에서는 로마 가톨릭이 이런 변화에 결코 초점을 맞추지 않기 때문에 그 어느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정죄와 교회의 절대적 권위

트리엔트 공의회는 이러한 반론에도 불구하고 연옥 교리를 부정하는 사람은 누구든 저주받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연옥에서 추가로 정결해져야 하는지를 묻는 사람은 교리의 내용뿐 아니라 교회의 판단을 거부할 수 있는지도 마주하게 된다. 교회가 내린 결정을 받아들여야 한다면, 개인은 그 결정에 반대되는 판단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자신에게 희게 보이는 것과 교회가 검다고 규정하는 판단 사이의 충돌.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의 『영성 훈련』은 추종자들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까지 규칙으로 정했다. 로마의 절대적 권위를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한 원칙으로 다음 문구가 인용된다.

우리는 다음 원칙을 굳게 지켜야 한다. 내게 희게 보이는 것도 나는 교계제도의 교회가 그렇게 규정한다면 검다고 믿겠다.

자신의 눈에는 희게 보이더라도 교계제도를 갖춘 교회가 검다고 규정하면 검다고 믿겠다는 복종이다. 개인의 인식과 교회의 판단이 어긋날 때 최종 기준은 교회의 결정이다. 연옥을 부정하는 사람에 대한 정죄 역시 이러한 권위의 문제와 맞물린다. 성사와 연옥을 둘러싼 대립에는 구원에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질문과 함께,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최종적으로 누가 결정하는가라는 질문이 놓여 있다.

무력 사용 주장과 비밀 맹세의 존재 논쟁

반종교개혁에서 교리와 신학을 통한 대응은 신앙의 내용뿐 아니라 교회의 권위에 대한 복종을 요구했다. 다큐멘터리는 이러한 초기 수단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예수회가 무력 사용으로 눈을 돌려 첩자와 암살자들의 연결망을 구축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수도회 안에서 상위 단계에 도달한 이들을 위한 비밀 맹세가 어느 시점에 제정되었다고 설명한다.

비밀 맹세 문헌의 소장·수록 근거와 존재 논쟁, 문헌에 묘사된 상급자와 입회자의 관계.

이 맹세는 알려진 지 200년이 넘었지만, 그 존재 자체를 의심하는 견해도 있다. 이에 맞서 다큐멘터리가 내세우는 것은 여러 책과 기사에 맹세가 반복해서 실렸다는 점과 미국 의회도서관 및 호주 국립도서관의 소장 기록이다. 관련 문헌은 ‘비밀 유지 서약’과 ‘예수회 서약’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다.

인용되는 부분은 훨씬 긴 맹세 전문에서 중요하다고 선정한 발췌다. 문헌은 예수회 상급자가 젊은 입회자에게 말하는 형식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입회자는 처음 사제가 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예수회 사제로서, 이제 ‘제4서원’이라 불리는 서원 아래 들어가는 사람이다. 상급자는 그가 이전까지 받은 훈련을 언급하며 말을 건넨다.

내 아들아, 너는 지금까지 속마음을 감추고 가장하는 법을 배웠으나,

속마음을 숨기고 겉으로 다른 모습을 보이는 훈련을 마쳤다는 전제 아래, 입회자에게 더 높은 단계의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다. 교회의 판단을 자신의 인식보다 앞세우는 복종이 이 문헌에서는 상급자의 명령에 따르겠다는 구체적인 서약으로 나타난다.

비밀 맹세 문헌에 나타난 교황권과 폭력의 서약

『미국의 예수회원들: 미국 예수회주의의 역사』가 예수회의 비밀 맹세로 소개하는 문헌은 로욜라의 군대를 지휘할 자격을 이단자의 피와 연결한다. 맹세를 앞둔 사람은 아직 지휘에 필요한 모든 것을 부여받지 못했으며, 이단자의 피로 자신의 노고를 거룩하게 바치지 않은 사람은 누구도 지휘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이어 “피 흘림 없이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말로 이단자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한다.

“그러므로 나를 따라 말하라.”라는 지시에 따라 입회자가 되풀이할 맹세가 이어진다. 전능하신 하나님과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 앞에서 자신의 영적 아버지인 예수회 총장에게 바치는 이 맹세는, 먼저 교황의 권위를 세속 통치의 정당성보다 위에 둔다.

교황 성하께서는 그리스도의 대리 통치자이시며, 그분께서는 이단적인 왕과 군주를 폐위하고 국가와 정부를 무너뜨릴 권능이 있으십니다. 그분의 신성한 승인이 없으면 이들 모두 불법입니다.

여기서 교황의 승인은 왕과 군주의 통치권뿐 아니라 국가와 정부의 합법성까지 결정한다. 따라서 교황을 그리스도의 대리 통치자로 인정한다는 고백은 종교적 권위에 대한 복종에 머물지 않는다. 교황이 이단적이라고 여기는 통치자를 폐위하고 정부를 무너뜨릴 권능까지 받아들이겠다는 서약이다.

맹세는 이어 이단자와 개신교도, 자유주의자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겠다고 약속한다. 기회가 주어지면 은밀히든 공개적으로든 가차 없는 전쟁을 일으키고 수행하여, 그들을 온 지면에서 뿌리 뽑고 절멸시키겠다는 내용이다. 공개적으로 실행할 수 없을 때에는 독이 든 잔, 목을 조르는 끈, 강철 단검 또는 납 탄환을 은밀히 사용하겠다고 서약한다. 이러한 살해 수단의 실행 조건은 교황의 대리인이나 예수회 상급자의 명령이다. 어느 대리인이나 상급자에게서 내려오든, 언제든 그 명령에 따르겠다는 복종을 요구한다.

마지막 명령은 복종의 범위를 전 세계의 영토로 넓힌다. 교황의 이름으로 모든 땅을 차지하고, 그를 예수의 대리자이자 지상의 대리 통치자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저주와 절멸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명령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온 세계로 나아가 교황의 이름으로 모든 땅을 차지하라. 그를 예수의 대리자이자 지상의 대리 통치자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저주받고 절멸당하게 하라.

맹세 문헌 속 교황권의 우위와 명령에 따른 폭력, 전 세계 지배 서약을 나타낸 도해

새뮤얼 모스와 미국의 자유를 지키려 한 비판 저술

예수회 비밀 맹세를 인용한 작품은 교황의 이름으로 모든 땅을 차지하라는 명령을 예수회의 해외 선교와 연결한다. 모든 나라를 굴복시키려는 야망 때문에 세계 곳곳에 선교사를 파견했고, 마침내 미국에도 진출했다는 주장이다. 미국에서 로마와 예수회의 영향력을 경고한 19세기 저술가들은 이러한 활동을 미국의 자유와 제도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그 가운데 새뮤얼 F. B. 모스(Samuel F. B. Morse, 1791–1872) 교수가 있었다. 전신과 모스 부호의 발명자로 소개되는 모스 교수는 라파예트 후작의 가까운 친구였으며, 그와 함께 미국이 로마와 예수회 사제들로부터 받는 위험을 논의했다. 1841년에는 『미국의 자유에 맞선 외국의 음모』(Foreign Conspiracy Against the Liberties of the United States)를 출판했다. 이 책에는 브루투스(Brutus)라는 필명으로 쓴 연재 글이 실렸다. 그는 미국 땅에서 유럽의 음모를 실행하는 공작원들이 있다고 경고하며, 그들의 정체를 다음과 같이 지목했다.

“그렇다면 이 공작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대부분 예수회원들이다. 이 수도회는 교활함과 표리부동함, 도덕 원칙의 철저한 부재로 전 세계에 악명이 높다. 이 수도회는 기만술에 너무나 능숙하여 가톨릭 국가들, 심지어 이탈리아에서조차 더는 용납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고, 사람들은 그 해체를 요구했다.”

모스 교수가 경고의 근거로 삼은 것은 개신교 국가들의 반감만이 아니었다. 가톨릭 국가들, 특히 이탈리아에서도 예수회의 해체를 요구했다는 점이 중요했다. 가톨릭 국가조차 용납하지 못한 조직이라면 미국에서도 단순한 교파 간 갈등의 대상으로 볼 수 없다는 논리였다. 그가 우려한 것은 예수회의 활동이 미국의 자유와 국가 제도에 미칠 영향이었다.

19세기에는 로마와 예수회 사제들이 미국을 상대로 품은 의도를 경고하는 책과 논문, 설교가 다수 출판되었다. 저자들은 대부분 기독교 교역자였지만, 비판의 대상은 교리와 비밀 서약에 머물지 않았다. 교육과 공립학교, 국가 제도와 워싱턴의 정치까지 문제 삼았다. 관련 저술의 제목과 부제에는 종교적 권위가 교육과 정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우려가 드러난다.

저술저자 또는 저자 표기제목과 부제에 드러난 비판 대상
『미국 내 로마』(Rome in America)저스틴 D. 풀턴(Justin D. Fulton) 신학박사미국 안에서 행사되는 로마의 영향력
『사탄의 발자취』(Foot Prints of Satan)부제에서 성경과 공립학교에 맞서는 교황과 예수회를 지목한다.
『검은 교황』(The Black Pope)부제는 ‘미국의 제도에 맞선 예수회의 음모’다.
『예수회와 그들의 교재, 또는 독신자들의 공산주의』(The Jesuits and Their Class-Books; or, The Communism of Celibates)『오래된 진리에 관한 새로운 생각』의 저자신뢰할 만한 자료에 근거한 비밀 서약과 지침의 설명을 포함한다고 밝힌다.
『예수회의 속임수』(Jesuit Juggling)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적발하고 폭로한 교황주의의 사기 40가지’를 내세운다.
『로마의 품 안에 있는 워싱턴』(Washington in the Lap of Rome)저스틴 D. 풀턴 신학박사워싱턴과 로마의 관계를 비판한다.
『로마 가톨릭주의: 국가에 대한 위협』(Romanism: A Menace to the Nation)교구 학교를 ‘교회에 대한 저주이자 국가에 대한 위협’으로 부른다.

일라이저 루커스(Elijah Lucas) 목사는 이러한 비판을 미국의 자유를 지키라는 호소로 펼쳤다. 그는 뉴욕 할렘 제일침례교회에서 여러 해 동안 목회했으며, 뉴저지주 트렌턴 제일침례교회에서는 20년 넘게 사역했다. 저자 약력에는 할렘의 교회가 당시 마운트 모리스(Mount Morris) 교회로 표기되어 있다.

루커스 목사가 1897년에 펴낸 『자유는 죽어야 하는가, 아니면 애국자들이 앞장설 것인가』(Shall Liberty Die? or Patriots to the Front)는 부제에서 거대한 적그리스도에 대한 성경적·역사적 고찰을 내세웠다. 그는 미국의 자유를 수호하는 일을 적그리스도에 맞서는 종교적 책임과 연결했고, 반기독교 세력이 이미 국가 제도와 자유를 공격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반기독교 세력은 지금 이 위대하고 자유로우며 번영하는 나라의 제도를 약화시키고 자유를 파괴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링컨 암살을 둘러싼 교황청과 예수회 책임론

20세기에도 가톨릭 지도부의 활동을 경고하는 저술은 계속되었다. 전직 가톨릭 사제 에멧 매클로플린(Emmett McLoughlin, 1907–1970)은 이 문제를 다룬 여러 책을 썼다. 그중 『에이브러햄 링컨 암살에 관한 조사』(An Inquiry Into the Assassination of Abraham Lincoln)는 교황청의 정치적 영향력을 비판하는 데서 더 나아가, 로마 가톨릭 교회가 링컨 암살에 의도적으로 가담했다는 혐의를 제기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링컨 대통령 암살에 고의로 관여했으며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매클로플린은 그 안에서 예수회가 맡은 역할을 비밀리에 살인을 집행하는 일로 묘사했다. 같은 책 27쪽에서는 예수회를 교황청의 실행 조직으로 지목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예수회원들은 교황청의 진정한 비밀 살인 집행자들, 곧 살인적인 교황의 마피아가 되었다.”

더 베리언 비컨(The Berean Beacon)의 그레그 벤틀리(Greg Bentley) 대표는 암살 이후 미국의 정치적 대응에서도 예수회의 영향력을 읽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링컨 대통령이 살해된 직후 모든 의혹이 예수회의 암살 음모 쪽으로 모이는 듯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의회는 교황청과의 모든 외교 관계를 단절하는 조치를 취했다. 벤틀리 대표는 이를 예수회의 활동이 미국 국정의 중심부에까지 여파를 미쳤음을 보여 주는 사례로 평가했다.

케네디 암살 뒤 제기된 바티칸·예수회 연루 의혹

바티칸과 예수회를 대통령 암살의 배후로 지목하는 혐의는 존 F. 케네디의 죽음 뒤에도 제기되었다. 퇴역 준장 허버트 C. 홀드리지는 1963년 11월 27일 텍사스주 법무장관에게 편지를 보냈다. 케네디가 사망한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때였다. 홀드리지는 케네디와 리 하비 오즈월드의 죽음이 린든 존슨 부통령이 연루된 음모의 일부라고 주장하며, 그 배후를 다음과 같이 지목했다.

오즈월드의 강연 보도와 케네디 사망 뒤 제기된 홀드리지의 의혹을 구분한 시간선.

“이 살인들은 바티칸과 예수회 세력이 계획했다.”

오즈월드가 암살 전에 예수회와 접촉했다는 이야기도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관련 보도에 따르면, 그는 케네디 암살 불과 4개월 전에 예수회의 초청으로 예수회 소속 스프링힐 칼리지에서 강연했다. 초청자는 예수회원인 그의 사촌이었으며, 강연 뒤에는 오즈월드에게 감사 편지도 보냈다고 한다. 일부 사람들은 암살을 얼마 앞두고 이런 접촉이 있었다는 점을 의심스럽게 여겼다. 관련 기사의 제목도 오즈월드가 케네디를 쏘기 4개월 전에 예수회원들에게 강연했다는 시간적 근접성을 전면에 내세웠다.

E. 하워드 헌트가 평가한 예수회의 정보망

전직 CIA 요원 E. 하워드 헌트는 예수회의 정보 수집 능력을 높이 평가한 인물이다. 1918년에 태어나 2007년에 사망한 헌트는 워터게이트 재판으로 널리 알려졌다. 『미국의 예수회원들』은 헌트가 예수회를 CIA와 협력해 온 정보망으로 공개적으로 인정했다고 소개하며, 캐나다 텔레비전 프로그램 『역사의 전환점』의 2001년 작품 「쿠데타: 미국에서 만들어지다」에 담긴 그의 발언을 인용한다.

헌트는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 누가 어떤 권한을 행사하고 어떤 경로로 정보를 얻는지까지 자신이 감히 추적하려 하지는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교회가 실제로 정보를 입수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히 했으며, 자신과 동료들이 예수회의 정보 수집 능력에 늘 감탄했다고 회고했다.

“우리는 늘 감탄하며, 예수회가 당시에 세계 최고의 정보기관을 이루었다고 말했습니다.”

헌트의 평가는 예수회가 갖춘 정보망의 규모와 능력에 관한 것이었다. 『미국의 예수회원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그 정보망이 미국 정치에 미친 영향력을 문제 삼는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체제 전복적인 움직임들에 예수회 정보망의 자취가 남아 있다고 주장하며,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 대유행도 그 범위에 포함한다.

파우치의 예수회 교육과 코로나19 대응 인사들의 관계

『미국의 예수회원들: 미국 예수회주의의 역사』는 코로나19 대응과 예수회를 연결하는 중심 인물로 당시 국립 알레르기·감염병 연구소 소장이었던 앤서니 파우치 박사를 지목한다. 내레이션은 그를 코로나19 사태의 주역으로 묘사하며, 스스로를 “잘 훈련된 예수회원”이라고 인정한다고 소개한다. 이어지는 파우치 박사의 회고는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받은 예수회 교육이 의학을 선택하는 데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에 관한 내용이다.

파우치 박사는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나 자랐다. 아버지가 약사여서 보건 문제를 어느 정도 접했지만, 아버지의 직업이 의학을 택한 주된 이유는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더 큰 계기는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예수회원들에게 받은 교육이었다. 특히 인문학과 고전,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자신의 의학 진로를 이 인문 교육과 연결했다.

반면 뒤이어 등장하는 인터뷰 발언자는 같은 교육 배경을 비판의 근거로 삼는다. 당시를 기준으로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지난 3년 사이에 파우치 박사를 알게 되었지만, 자신은 그를 예수회 교육 체계의 간판 인물로 본다는 것이다. 이 발언자는 예수회 교육이 일반적인 교육과 달리 특정 의제를 매우 강하게 추구하며, 되풀이하는 구호 가운데 하나로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를 꼽는다. 파우치 박사가 긍정적으로 회고한 교육을 예수회의 목적 지향적인 교육이 낳은 대표적 사례로 비판한 것이다.

같은 발언자는 데버라 벅스 박사도 예수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며, 첫 취임 선서 때 예수회 사제 곁에 서 있었다는 점을 든다. 벅스 박사의 오랜 가족 친구로 소개된 예수회 사제 댄 맥도널드는 관련 행사에서 기원 기도를 맡았다. 맥도널드 사제는 자신이 알기로 벅스 박사가 원래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기도를 부탁했으나, 교황이 바빠 자신이 대신 파견되었다고 이야기했다.

교육 이력과 가족 관계, 재정 지원을 통한 접점도 등장한다. 코로나19 당시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를 이끌었던 로버트 레드필드 박사는 조지타운대학교에서 예수회 교육을 받은 인물로 소개된다. 빌 게이츠와 당시 아내 멀린다는 가족 중에 예수회 사제가 있었으며, 두 사람의 재단은 예수회 교육 프로그램에 해마다 수백만 달러를 지원했다고 『미국의 예수회원들』은 설명한다.

브라이언 아디스 박사의 렘데시비르 비판과 교황청 통제 주장

브라이언 아디스 박사는 코로나19 치료에 렘데시비르를 사용하는 데 경고를 제기하면서 미국 전역에서 주목받은 인물로 소개된다. 아디스 박사는 두 달 전에 진행된 길리어드 연구를 보고, 신부전과 다발성 장기부전이 전부 렘데시비르 때문에 발생했으며 바이러스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결론을 곧바로 내렸다고 말했다. 나아가 코로나19 대응 전반을 지휘하는 세력으로 교황청을 지목했다.

럼블에 소개된 「J.D. 러커 쇼」 인터뷰에서 아디스 박사는 사람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진짜 위협’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우려했다. 그가 지목한 대상은 로마 가톨릭 교회와 프란치스코 교황이었다. 교황이 코로나19와 관련된 일 전체를 지휘하고, 그에 관한 담론까지 조작하고 통제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앤서니 파우치 박사를 교황의 손아귀에 있는 인물로 묘사했으며, 조 바이든과 도널드 트럼프, 프랜시스 콜린스도 같은 관계에 놓여 있다고 보았다.

아디스 박사는 이 인물들을 통제하는 조직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 안의 예수회를 지목했다. 예수회의 유일한 임무가 미국 헌법을 파괴하려는 음모였다고 주장하면서 그 기간을 ‘지난 200년 동안’이라고 표현했고, 자신이 아는 시점으로는 1857년부터라고 덧붙였다.

바이든의 국경 정책과 가톨릭의 이민 지원

브라이언 아디스 박사는 바이든의 국경 정책도 교황청의 영향력과 연결했다. 바이든이 국경을 열어 사람들이 물밀듯 들어오게 했으며, 이는 교황과 로마 가톨릭 교회가 늘 원하던 일이라는 비판이었다. 아디스 박사는 남쪽 국경을 통해 들어오는 이들을 멕시코의 가톨릭 신앙과 연결하면서, 가톨릭 교리가 미국을 가톨릭 신자들로 넘쳐나게 해야 한다고 명시했다고 주장했다. 그가 지목한 목적은 단순히 입국을 허용하는 데 있지 않았다. 이민을 통해 미국의 종교적 구성을 바꾸려 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예수회원들: 미국 예수회주의의 역사』는 바이든과 예수회의 관계를 보여 주는 사례로 취임 선서에 사용한 성경과 그가 다니는 본당을 든다. 바이든이 손을 얹은 책을 예수회의 두에랭스 성경으로 소개하며 반종교개혁의 상징으로 해석하고, 그가 워싱턴 D.C.의 예수회 교회에 다닌다는 점을 짚는다. 함께 제시하는 자료는 마이클 J. 오로플린이 2021년 6월 30일 작성한 기사다. 기사 제목은 바이든이 다니는 예수회 운영 본당이 그에게 성체성사를 거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는 내용이다.

이민 정책에 대한 비판은 정치인 개인과 예수회의 관계에서 두 나라 가톨릭 주교들의 공동 대응으로 넓어진다. 『미국의 예수회원들』은 로마가 불법 이민을 사회정의의 한 형태로 받아들인다고 비판한다. 이와 관련해 트리니티 재단 라디오의 연구자이자 진행자인 스티브 매슈스가 소개하는 문서는 미국 가톨릭 주교회의와 멕시코 가톨릭 주교회의가 함께 낸 『더 이상 낯선 이들이 아닌: 희망의 여정을 함께하며』다. 문서에는 미국 가톨릭 주교회의가 2003년 1월 22일 발행한 것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부제는 멕시코와 미국 가톨릭 주교들의 이민에 관한 사목 서한임을 밝힌다. 매슈스는 이를 이민에 대한 가톨릭의 입장을 담은 문서로 소개한다.

『미국의 예수회원들』은 이 서한이 미국으로의 대규모 불법 이민을 촉진한다고 비판하며, 그 취지를 “여러분, 여기로 올라오세요”라는 초대로 풍자한다. 이는 서한의 문구를 직접 인용한 것이 아니라 주교들의 이민 정책을 빗댄 표현이다. 작품은 제작 당시의 국경 상황을 그러한 정책이 낳은 결과로 지목한다.

국경에서 미국 전역으로 이어지는 이민자 이동에 관한 증언

라디오 진행자이자 전직 연방 경찰관인 더그 손턴은 국토안보부에서 10년간 근무했으며, 그중 상당 기간을 멕시코 국경에서 보냈다. 손턴은 불법 이민에 관여하는 단체로 거의 모든 가톨릭 교회와 적십자를 거론했다. 이들이 모두 바티칸의 후원과 통제를 받으며 사람들을 이동시키는 주범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손턴이 회고한 국경 부근의 야간 탑승과 미국 내 재배치 과정.

손턴의 회고에 따르면, 불법 이민자들이 버스 한두 대를 채울 만큼 모여 있으면 자정 무렵 가톨릭 교회 측이 밴을 몰고 와서 사람들을 태워 데려갔다. 그는 이런 일이 반복되었고, 교회 측이 정부를 도와 이민자들을 다른 지역에 재배치했다고 설명한다. 손턴이 문제 삼은 것은 국경에서 제공하는 일시적인 지원만이 아니었다. 이 단체들이 사람들을 국경 너머로 데려온 뒤 미국 전역으로 보내는 과정까지 맡고 있다는 비판이었다.

멕시코 국경에서 남북전쟁의 배후 문제로

『미국의 예수회원들: 미국 예수회주의의 역사』는 멕시코 국경을 통한 불법 이민을 비판하면서, 멕시코를 통해 미국에 침입하려는 계획이 남북전쟁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한다. 미국인 대부분이 알지 못하는 오래된 계획이라는 것이다. 그 역사적 배경을 경고한 문헌으로는 에멧 매클로플린의 에이브러햄 링컨 암살 관련 저서, 특히 제4장 「국경 남쪽의 음모」를 든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시기 가운데 하나인 남북전쟁은 가장 유혈이 낭자했던 전쟁으로도 일컬어진다. 과거와 현재의 역사가들이 묘사한 전장은 부상자와 죽어가는 이들의 비명으로 가득했다. 병사들은 추수꾼 앞의 곡식처럼 쓰러졌고, 남북 양측 모두 맹렬한 살상 사격에 노출되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서로를 완전히 몰살시켜야만 이 끔찍한 살육이 멈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전쟁 중 사망자를 60만 명 이상으로 추산한다. 전장에서 쓰러진 병사들뿐 아니라 질병으로 죽거나 전쟁 포로로 지내다 목숨을 잃은 이들까지 포함한 수치다.

나라를 갈라놓은 핵심 쟁점으로는 노예제가 거론된다. 그러나 『미국의 예수회원들』은 전쟁의 원인을 묻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배후에 누가 있었는지를 문제 삼는다. 에이브러햄 링컨에게 노예무역을 폐지할 의도가 없었다면, 어떻게 전쟁이 시작되었을까? 작품은 전쟁 중 로마 세력이 수행한 역할에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제기한다.

전쟁의 비극이 절정에 이른 사건은 링컨 암살이었다. 링컨의 죽음에 이르는 사건 경위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예수회 연루설이 겨냥하는 것은 공모자들의 정체와 범행 동기다. 누가 암살에 공모했고 무엇 때문에 범죄를 저질렀는지에 관한 진실이 현대에 은폐되었다는 주장이다. 가톨릭 사제이자 링컨의 개인적인 친구였던 찰스 치니케이(Charles Chiniquy, 1809–1899)는 그 배후를 구체적으로 지목했다. 링컨을 죽이려는 음모를 사주한 조직이 예수회였다는 고발이다.

암살 가담자들의 관계와 치니케이의 고발

『미국의 예수회원들』은 링컨을 죽이는 사람에게 영예를 약속하는 말을 제시한다.

암살 연루설에서 사용되는 소속·친족·연결·복종 관계와 치니케이의 책임 주장을 구분한 그림.

에이브러햄 링컨을 죽이는 사람은 불멸의 인물이 될 것이다.

작품은 “에이브러햄 링컨을 죽이는 사람은 불멸의 인물이 될 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암살에 연루된 사람들의 배경을 파헤치면 예수회원들이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주목하는 대상은 암살자 한 사람만이 아니라 그 주변의 인적 관계다. 칙 출판사(Chick Publications)의 저자 데이비드 대니얼스(David Daniels)는 이를 직접 예수회원이었던 사람, 예수회원의 친척, 예수회원들과 연결된 사람, 그들의 권위 아래 있던 사람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작품은 이 관계들을 근거로 링컨 암살을 예수회의 음모라고 단정한다.

이 배후론의 주요 출처는 치니케이의 『로마 교회에서의 50년』이다. 치니케이는 부스를 ‘예수회 암살자’라고 부르며, 그가 링컨을 살해한 때를 1865년 4월 14일 오후 10시로 기록했다. 치니케이의 고발에서 부스는 예수회의 도구에 불과했다. 부스의 마음을 타락시키고 영혼을 파멸시킨 뒤 그의 팔을 움직인 것은 로마였다는 것이다. 암살의 책임을 교황제에 돌린 치니케이는 자신이 조사에 들인 시간과 그 결론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20년에 걸쳐 끊임없이 극히 어려운 조사를 이어 온 나는 오늘 미국 국민 앞에 두려움 없이 나서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로마의 사제들과 예수회원들에게 암살되었음을 말하고 입증합니다.” 치니케이, 『로마 교회에서의 50년』, 718쪽

『로마 교회에서의 50년』은 암살 혐의만을 다룬 책이 아니라, 치니케이가 가톨릭 사제로 살아온 생애와 링컨의 친구가 된 경위를 상세히 서술한 자서전이다. 링컨 개인의 배경과 암살 사건, 당시 예수회의 활동을 함께 다루는 이 책은 치니케이가 어떤 경험을 거쳐 예수회를 암살의 배후로 지목했는지 이해하는 중심 자료다.

캐나다의 금주 운동과 세인트앤의 설립

찰스 치니케이는 에이브러햄 링컨과 같은 해인 1809년, 캐나다 퀘벡의 로마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가톨릭 신앙 안에서 자라는 한편, 아버지가 소장한 프랑스어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다. 1833년 캐나다에서 가톨릭 사제로 서품받은 뒤에는 퀘벡에서 알코올 남용에 반대하는 활동에 헌신해 ‘절주의 사도’로 알려졌다. 이후 미국으로 이주해 일리노이주 세인트앤의 설립자가 되었으며, 그곳에서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그의 영향을 기억했다.

캐나다 출신 저자 폴 세럽(Paul Serup)이 소개하는 치니케이는 뛰어난 웅변으로 퀘벡 주민의 약 절반을 설득해 술을 끊게 한 인물이다. 퀘벡의 가정 대부분이 집 안에 그의 초상을 둘 만큼 명성이 높았다. 『로마 교회에서의 50년』(Fifty Years in the Church of Rome)의 속표지에도 저자를 소개하는 말로 ‘캐나다의 금주 운동 사도’라는 호칭이 붙어 있다.

폴 세럽이 치니케이를 조사한 계기

치니케이의 저술은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세럽은 후대에 그 기록을 옹호한 사람 가운데 하나다. 1986년 『로마 교회에서의 50년』을 처음 읽었을 때, 세럽을 놀라게 한 것은 강력한 종교 조직이 링컨 살해에 관여했다는 치니케이의 주장이었다. 그는 당시 “와, 정말, 정말 엄청난 말이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그처럼 중대한 혐의를 제기한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지 알고 싶어졌고, 놀라움과 호기심은 치니케이의 생애를 조사하는 계기가 되었다.

세럽은 20년 넘게 치니케이의 생애와 링컨·미국 남북전쟁에 관한 그의 주장을 조사했다. 그 결과를 담은 『누가 에이브러햄 링컨을 죽였는가?』(Who Killed Abraham Lincoln?)는 암살 문제와 함께 치니케이가 당대에 어떤 인물이었는지도 다룬다. 세럽은 그를 업적과 명망을 갖추고 생전에 세계적인 영향력을 누린 성직자로 소개한다. 치니케이가 사망했을 때는 부고가 《뉴욕타임스》 1면에 실렸고, 사망 소식이 영어권 전역에 보도되었다.

1856년의 소송과 링컨의 변호

치니케이는 『로마 교회에서의 50년』에서 1856년에 링컨을 처음 만났다고 기록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같은 가톨릭 신자인 피터 스핑크가 자신을 허위 고소했으며 그 배후에는 시카고의 유력한 주교 앤서니 오리건이 있었다. 자신의 권위에 도전한 치니케이에게 분노한 오리건 주교가 스핑크를 통해 보복하려 했다는 것이다. 분쟁은 일리노이주 어배너의 법정으로 넘어갔고, 당시 존경받는 변호사였던 링컨이 치니케이의 변호를 맡았다.

치니케이의 소송에서 링컨이 맡은 변호와 당시 치니케이에게 쏠린 대중의 관심.

세럽에 따르면, 링컨은 지역의 유력한 가톨릭 주민이었던 스핑크가 제기한 두 건의 소송에서 치니케이를 변호했다. 그중 하나는 링컨의 변호사 경력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은 명예훼손 사건이었다. 많은 사람이 법정으로 몰려들었지만, 방청객을 끌어들인 이름은 링컨이 아니라 ‘절주의 사도’로 불리던 치니케이였다. 링컨도 이미 저명하고 유능한 변호사였으나, 1856년 당시 대중에게 더 잘 알려진 사람은 치니케이였다. 훗날 대통령이 된 링컨의 명성을 떠올리면 놓치기 쉬운 당시 두 사람의 차이다. 그해 가을, 치니케이는 링컨의 도움으로 소송에서 승리했다.

1856년 재판의 승리와 암살 경고

찰스 치니케이는 자신을 상대로 한 소송의 배후에 시카고 주교가 있었고, 세계 각지의 주교들도 그 주교를 지지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에이브러햄 링컨은 치니케이가 가톨릭 교회 지도부로부터 부당하게 박해받고 있음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치니케이는 로마를 상대로 법정에서 승리하고도 안도할 수 없었다. 자신을 변호한 링컨에게까지 위험이 닥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치니케이는 1856년 어배너에서 재판이 끝났을 때 울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링컨이 기뻐해야 할 상황에서 왜 우느냐고 묻자, 그는 법정에서 본 열 명인가 열두 명의 예수회원을 이야기했다. 그들의 눈에서 링컨에게 내려진 사형 선고를 읽었다는 것이었다. 치니케이는 그 때문에 링컨에게 암살의 위험을 경고했다.

치니케이의 회고에 따르면, 링컨은 그 말을 듣고 한층 엄숙해졌다. 예수회원들이 결코 잊거나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고 답했지만, 죽음의 방식이나 장소보다 명예와 의무를 지키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치니케이는 링컨의 대답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그러나 사람은 명예와 의무를 지키는 자리에서 죽는다면, 어떻게, 어디서 죽는지는 개의치 않아야 합니다.

치니케이의 기록을 둘러싼 이견과 링컨의 태도

칙 출판사(Chick Publications)의 저자이자 연구자인 데이비드 대니얼스(David Daniels)는 치니케이가 기록한 문장이 자신이 아는 링컨의 말투와 매우 잘 맞는다고 평가했다. 읽을수록 링컨의 말이라고 느끼지 않기 어렵다며, 치니케이가 이 일에 관해 거짓말할 이유가 무엇이겠느냐고 반문했다.

치니케이와 링컨의 우정은 역사 기록에 남아 있으며, 두 사람은 링컨의 백악관 재임 중에도 알고 지냈다. 다만 인용문의 진위를 둘러싼 논쟁에서는 두 사람의 친분을 인정하는 것과 치니케이가 전한 말을 실제 링컨의 발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별개의 문제로 다뤄졌다. 인용문이 진짜가 아니라는 반론에 대해 한 응답자는 그런 말을 하는 이들이 아마 예수회원들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기록을 옹호하는 쪽은 문장들이 링컨의 인물됨과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잘 들어맞는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치니케이가 그 발언을 기록으로 남긴 탓에 매우 큰 대가를 치렀다는 점도 중요하게 보았다. 응답자는 자신이 조사하며 발견한 것은 치니케이의 말이 상당히 정확하다고 믿을 이유뿐이었다고 결론지었다.

‘링컨의 손과 얼굴, 1860년’이라는 설명표가 붙은 얼굴과 양손의 주형이다.

치니케이가 전한 링컨의 대답은 위험에 맞서는 용기에 대한 찬사로도 이어졌다. 문답의 참여자들은 명예와 의무를 지키는 자리에서 죽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 그의 태도에 주목했다. 많은 사람처럼 달아나 숨지 않고 위험의 한가운데 그대로 서 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사안에서 링컨을 어떻게 평가하든, 적어도 이 점에서는 진정한 사나이였다고 높이 평가했다.

남부연합 지도자들과 가톨릭의 관계

찰스 치니케이가 링컨에게 암살 위험을 경고한 것은 남북전쟁이 시작되기 수년 전이었다. 『미국의 예수회원들: 미국 예수회주의의 역사』는 전쟁이 시작되면서 남부연합과 바티칸, 미국 가톨릭 주교들의 이해관계가 맞물렸으며, 노예 소유주로 잘 알려진 예수회원들이 남부연합 편에 섰다고 서술한다. 그 근거 가운데 하나로 인용하는 치니케이의 『로마 교회에서 보낸 50년』 703쪽에는 에이브러햄 링컨의 말로 다음 내용이 실려 있다.

데이비스의 교육·종교적 배경과 교황청 승인을 구한 외교 관계.

“우리의 내전이 시작될 때부터 로마 교황과 제프 데이비스 사이에는 비밀 동맹이 아니라 공개적인 동맹이 있었다. 교황과 그의 예수회원들은 광적인 로마 가톨릭 신자 보리거드가 섬터 요새에서 첫 포를 쏜 때부터 지상에서 제프 데이비스에게 조언하고 그를 지원하며 지휘해 왔다.”

피에르 G. T. 보리거드(Pierre G. T. Beauregard, 1818–1893) 장군은 남부연합 편에서 전쟁에 참여한 여러 가톨릭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반면 남부연합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Jefferson Davis, 1808–1889)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 성공회 신자였다. 다만 켄터키주 스프링필드의 도미니코회 남학교에서 교육받았고, 어릴 때부터 로마 가톨릭 신자들에게 호의적이었다. 데이비스와 가톨릭 인사들의 가까운 관계에는 이러한 교육 배경과 개인적 호의가 있었다.

데이비스의 가장 가까운 고문 중 한 사람인 가톨릭 사제 존 배넌(John Bannon, 1829–1913) 신부는 훗날 예수회원이 되었다. 데이비스는 배넌 신부에게 남부연합을 대표하는 외교 사절단을 맡겼다. 사절단의 목적은 교황에게 남부연합의 공식 승인을 얻는 것이었다. 가톨릭 인사들과의 관계가 개인적 친분을 넘어 교황청의 승인을 구하는 외교 활동으로 발전한 것이다.

치니케이가 전한 링컨의 설명은 이와 별도로 뉴욕 대주교 존 휴스(John Hughes, 1797–1864)를 지목한다. 휴스 대주교가 북부를 지지하는 척하면서 로마로 건너가 교황에게 남부 공화국의 정통성을 인정하도록 권했다는 내용이다. 배넌 신부가 남부연합의 사절로 활동한 것과 달리, 휴스 대주교는 겉으로 내세운 북부 지지와 반대되는 일을 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비오 9세의 편지와 남부연합 승인 논쟁

『누가 에이브러햄 링컨을 죽였는가?』의 저자 폴 세럽(Paul Serup)은 노예제를 초석으로 삼은 남부연합을 인정한 세계 유일의 국가가 바티칸이었다고 단언한다. 그가 소개하는 치니케이의 근거는 1863년 교황 비오 9세가 제퍼슨 데이비스에게 보낸 편지다. 교황은 데이비스를 ‘아메리카 남부연합 대통령’이라고 불렀다. 치니케이가 주목한 것은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사실보다 ‘대통령’이라는 호칭이었다. 교황이 데이비스를 대통령으로 불렀다면, 그가 대표하는 남부연합도 하나의 정치체로 인정한 것이라고 보았다.

편지의 대통령 호칭을 남부연합 승인으로 해석한 논리.

치니케이는 백악관으로 링컨을 세 차례 찾아갔으며, 대통령과 이 편지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고 회고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링컨 역시 편지가 교황청의 남부연합 승인을 뜻한다는 데 동의했다. 세럽은 같은 판단이 1876년 《뉴욕타임스》에도 나타났다고 설명하면서, ‘교황은 어떻게 남부연합을 승인했는가: 제프 데이비스에게 보낸 편지’라는 제목의 기사를 함께 제시한다.

남부연합의 가톨릭 신자들과 링컨의 전쟁 인식

남부연합에서 활동한 가톨릭 신자들의 역사는 오늘날 뜻밖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기도 하지만, 당시 전쟁 당사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었다. Gracjan Kraszewski의 『남부연합의 가톨릭 신자들: 남북전쟁 당시 남부의 신앙과 의무』는 이들의 역할을 다룬 저술이다. 피어스 셰퍼드(Piers Shepherd)가 《가톨릭 월드 리포트》에 기고한 「잘 알려지지 않은, 종종 놀라움을 주는 남부연합 가톨릭 신자들의 역사」 역시 같은 주제를 다룬다.

치니케이의 기록에서 교황청과 남부연합의 관계는 외교적 승인에 그치지 않고, 링컨이 누구를 상대로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는지에까지 닿는다. 『로마 교회에서 보낸 50년』 696쪽에는 링컨이 남부와의 전쟁을 단순한 미국인들 사이의 내전으로만 여기지 않았다는 말이 실려 있다.

“나는 날이 갈수록 더욱 절실히 느낀다. 내가 싸우는 상대는 남부의 미국인들만이 아니다. 우리는 진정한 미국 개신교도들보다는 로마 교황과 그의 배신적인 예수회원들, 그리고 그들의 맹목적이고 피에 굶주린 노예들을 상대로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치니케이가 전한 이 말에서 링컨은 남부의 미국인들과 그 배후에서 움직인다고 지목한 교황·예수회원들을 나누고, 후자를 더 큰 위협으로 여긴다. 남북전쟁과 링컨 암살에 바티칸이 관여했다는 비판을 남긴 사람은 치니케이만이 아니었다. 북군 지휘관으로서 암살 사건의 조사와 재판에 참여한 토머스 M. 해리스(Thomas M. Harris)도 별도의 책에서 바티칸의 책임을 물었다.

해리스의 조사 참여와 서럿 모자에 대한 기록

토머스 M. 해리스(1817–1906)는 의사이자 북군 소장으로, 남북전쟁 중 웨스트버지니아 제10의용부대를 지휘했다. 그의 저서 『에이브러햄 링컨 암살에 대한 로마의 책임』 표제지에는 전 미국 의용군 준장 겸 명예 소장이라는 군 경력이 기재되어 있다. 전쟁 후에는 링컨 암살을 조사하고 공모자들을 재판하기 위한 위원회에 군 지휘관의 한 사람으로 임명되었다. 해리스는 이 직책 덕분에 사건 이후 몇 달 동안 암살 음모에 관한 직접적인 정보를 사실상 모두 확보할 수 있었다. 바티칸의 관여를 주장하는 근거로 그의 기록을 중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해리스가 주요 공모자로 기록한 인물 가운데는 메리 서럿과 아들 존 서럿이 있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메리의 하숙집은 범행을 계획하는 장소였고, 존은 전쟁 중 남부연합의 첩보원으로 활동했다. 두 사람은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이면서 남부연합에 충성했다. 해리스는 이들을 “교황의 열성적인 노예들”이라고 부르며, 남부연합에 대한 정치적 충성과 교황에 대한 종교적 충성을 함께 문제 삼았다.

인물생몰연도해리스의 암살 공모 서술에서 맡은 역할
메리 서럿(Mary Surratt)1823–1865범행을 계획할 장소로 하숙집을 제공한 인물
존 서럿(John Surratt)1844–1916메리의 아들이자 전쟁 중 남부연합 첩보원으로 활동한 인물
존 윌크스 부스(John Wilkes Booth)1838–1865암살 음모의 주모자로 지목된 인물

해리스는 서럿 모자를 음모의 주변 인물이 아니라 공모를 이끈 적극적인 참여자로 지목했다. 『에이브러햄 링컨 암살에 대한 로마의 책임』 24쪽에서는 위원회에 제출된 증거를 근거로 가담 정도를 단정했다.

“위원회에 제출된 증거로 이들이 이 음모의 주도적이고 적극적인 참여자였음이 명백히 입증되었다”

메리 서럿의 하숙집과 아들 존 서럿의 관계 및 활동을 나타낸 도해

메리와 존 서럿의 공모 가담에 관한 인용의 출처를 해리스의 저서 24쪽으로 표시한다.

부스의 개종과 가톨릭 메달에 관한 주장

해리스는 공모자 가운데 가장 악명 높은 존 윌크스 부스의 종교적 배경도 다뤘다. 부스가 개신교도로 태어나 자랐다는 사실은 인정했지만, 명목상의 개신교도에 불과했으며 함께 음모를 꾸민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 가톨릭으로 개종했다고 썼다. 개종을 타락으로 표현한 다음 대목에는 해리스의 강한 종교적 비판이 담겨 있다.

“주모자인 부스는 개신교도로 태어나 자랐다. 그러나 그는 명목상의 개신교도에 불과했다. 그는 음모를 꾸미며 어울린 자들의 영향을 받아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타락했다. 그가 조끼 안쪽, 심장 위에 가톨릭 메달을 달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부스가 심장 위에 달고 있었다는 메달은 해리스에게 단순한 종교적 소속의 표지가 아니었다. 그는 한 예수회원이 부스를 개종시켰을 뿐 아니라, 메달이 자신을 보호하고 거사를 성공시키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믿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교활한 예수회원은 그를 가톨릭으로 개종시켜 타락하게 했고, 그를 속여 그 메달이 자신의 안전과 거사의 성공에 도움이 되리라고 믿게 했다.”

해리스가 지목한 것은 개종 자체만이 아니라, 종교적 보호를 받는다는 믿음이 암살 실행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졌다는 점이었다. 공모자들과의 교류, 개종, 메달에 대한 믿음이 그의 기록에서 서로 연결된다.

폭군 살해 논리와 링컨 암살

찰스 치니케이는 부스가 예수회 사상에 철저히 세뇌되었다고 주장하며, 암살을 정당화하는 가르침에 주목했다. 그가 지목한 사상은 교황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지도자를 폭군으로 규탄하고, 그런 지도자는 죽여도 된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예수회원들』은 부스가 포드 극장의 무대로 뛰어내린 뒤 외친 “시크 셈페르 티라니스(sic semper tyrannis)”, 곧 “폭군은 언제나 이렇게 되리라”라는 말도 이 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남부연합의 비밀요원 제이컵 톰프슨(Jacob Thompson, 1810–1885)에 관한 해리스의 기록에도 폭군 살해를 정당화하는 논리가 등장한다. 미시시피 출신인 톰프슨은 미국 내무장관을 지냈으나 남부연합을 위해 일하려고 사임했고, 이후 캐나다에서 남부연합의 비밀요원으로 활동했다. 해리스 장군은 『에이브러햄 링컨 암살에 대한 로마의 책임』 45쪽에서 톰프슨이 사용한 논리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폭군을 죽이는 것은 살인이 아니라는 예수회식 논리를 사용했다. 따라서 링컨 대통령이 폭군이라고 가정한다면, 그를 제거하는 것은 영광스럽고 칭찬받을 일이 되는 것이다.”

살인을 영광스럽고 칭찬받을 일로 바꾸는 전제는 링컨이 폭군이라는 가정이다. 치니케이는 부스가 교황에게 불복하는 지도자를 죽여도 된다는 사상을 받아들였다고 보았고, 해리스는 톰프슨이 링컨을 폭군으로 간주해 그의 제거를 정당화했다고 기록했다. 두 사람이 지목한 암살 정당화의 방식은 대통령을 먼저 폭군으로 규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메리 서럿의 처형과 존 서럿의 도피

메리 서럿은 링컨 암살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고, 재판 뒤 다른 공모자들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케이트 클리퍼드 라슨(Kate Clifford Larson)의 『암살자의 공범: 메리 서럿과 에이브러햄 링컨 암살 음모』는 메리 서럿과 이 암살 계획을 다룬 저서다.

어머니와 달리 아들 존 서럿은 암살 당일 밤 도주했다. 『미국의 예수회원들』에 따르면, 그는 가톨릭 사제들의 도움으로 캐나다를 거쳐 은밀히 국외로 빠져나갔다. 당시 수배 전단 일부에는 서럿의 사진이 부스의 사진 옆에 실렸다. 아래 전단에도 두 사람과 해럴드의 사진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서럿과 부스의 사진이 나란히 실린 수배 전단.

얼마 뒤 서럿은 로마 인근에서 발견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왓슨이라는 가명으로 교황군 주아브 부대 제9중대에 입대해 있었다. 주아브 부대는 교황령 방어를 전담하는 교황군의 일부였다. 아래 사진은 그 부대의 군복을 입은 존 서럿의 모습으로 소개된다.

교황군 주아브 부대 군복을 입은 존 서럿으로 소개되는 사진.

교황군 주아브 부대 군복을 입은 존 서럿으로 소개되는 사진.

평결에 이르지 못한 재판과 석방

서럿은 발각된 뒤 체포되어 미국으로 송환되었고, 에이브러햄 링컨 살해와 살해 공모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미국의 예수회원들』은 역사가들의 설명을 인용해 배심원단의 공정성이 훼손되었다고 서술한다. 그의 유죄를 뒷받침하는 압도적인 증거가 있었는데도 배심원단은 끝내 평결에 합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서럿 재판의 평결 불성립과 이후 공소시효에 따른 혐의 취하·석방의 구분.

찰스 치니케이 목사는 가톨릭 배심원들이 증거에도 불구하고 서럿의 유죄를 인정하기를 거부했다고 비판했다. 여기에는 수년 전 치니케이 목사와 피터 스핑크 사이의 소송과 정반대의 대비가 놓인다. 당시에는 가톨릭 배심원 한 명이 치니케이 목사에게 무죄 평결을 내리기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서럿에게는 유죄를, 치니케이 목사에게는 무죄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두 사례를 들어, 종교적 충성이 배심원의 판단을 좌우했다는 비판을 편다.

1867년 서럿의 재판에서는 암살 음모가 얼마나 광범위했는지, 어머니 메리가 어떻게 가담했는지를 보여 주는 새로운 증거도 제시되었다. 라슨은 『암살자의 공범』에서 그 증거와 함께 배심원단의 남부 동조 성향을 지적하고, 평결 불성립 뒤 혐의 취하와 석방에 이른 경위를 서술한다.

훨씬 더 많은 증거가 제시되어 음모의 광범위한 규모뿐 아니라 메리의 가담에 관한 새로운 세부 사항도 드러났다. 그러나 새로운 증거에도 불구하고 존의 재판은 평결 불성립으로 끝났다. 민간인 배심원단에는 남부 동조자들이 가득했다. 이후 모든 혐의가 취하되었는데, 반역 혐의에 대한 2년의 공소시효가 지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1868년 2월 존은 석방되었다.

배심원단의 평결 불성립과 이후의 혐의 취하는 서로 다른 단계였다. 라슨이 서술한 석방 사유는 새로운 증거가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라 반역 혐의의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것이다. 존 H. 서럿의 생애와 재판을 다룬 문헌으로는 『공모자 존 H. 서럿의 생애, 재판과 모험』도 있다.

석방 이후의 삶과 장례 예우에 대한 비판

석방된 서럿은 메릴랜드의 한 가톨릭 학교에서 여러 해 동안 가르쳤다. 1916년 그가 사망했을 때는 볼티모어의 성 비오 가톨릭 교회에서 장엄 위령미사가 봉헌되었다. 한 인터뷰 참여자는 서럿에게 주어진 이 예우를 비판했다. 미국의 가장 위대한 대통령을 살해하려 공모한 혐의로 기소되어 무죄로 판명된 적이 없고, 자신의 변호사마저 적어도 대통령 납치 계획에 가담하려 공모한 죄는 있다고 말한 사람이 그런 예우를 받았다는 비판이다.

이 인터뷰 참여자의 설명에 따르면, 장엄 위령미사는 주교·사제·수녀의 장례식에 봉헌하며, 평신도에게 봉헌할 때는 교회에 대한 특별한 헌신이나 봉사에 감사하는 표시가 된다. 서럿의 장례를 문제 삼은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서럿은 교회를 위해 어떤 봉사를 했기에 그런 예우를 받았을까? 인터뷰 참여자는 구체적인 봉사를 지목하지 않은 채 이 질문을 남겼다.

남부연합 지원과 멕시코의 가톨릭 제국 구상

T. M. 해리스 장군은 링컨 암살을 미국을 겨냥한 로마의 더 큰 계획 가운데 일부로 보았다. 그가 지목한 계획은 미국 내부의 암살 음모뿐 아니라 국경 밖의 군사 개입까지 아우른다. 예수회와 가톨릭 지도부가 유럽 열강과 협력해 남부연합을 지원하려 했으며, 이를 위해 프랑스군으로 멕시코를 침공하고 장악하려 했다는 것이다.

멕시코의 군주정을 남부연합 지원 거점과 연결한 해리스 및 작품의 주장.

해리스 장군에 따르면, 멕시코에는 오스트리아 왕자 막시밀리안 1세를 군주로 하는 로마 가톨릭 제국을 세우려 했다. 교황 비오 9세와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가 이 계획을 함께 추진한 인물로 지목된다. 멕시코를 장악하는 일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남부연합을 지원할 거점을 마련하는 수단이었다.

계획의 요소해리스 장군의 주장에 담긴 역할
예수회·가톨릭 지도부와 유럽 열강의 협력남부연합 지원을 추진한다.
프랑스군의 멕시코 침공과 장악남부연합을 지원할 수단이 된다.
막시밀리안 1세를 군주로 세운 제국멕시코에 로마 가톨릭 제국을 수립한다.
교황 비오 9세와 나폴레옹 3세유럽 측 계획을 함께 꾸민 인물로 지목된다.

『로마 교회에서 보낸 50년』의 저자인 찰스 치니케이 목사도 후속 저서 『그리스도의 교회에서의 40년』에서 같은 주장을 폈다. 그가 짚은 것은 미국이 남북전쟁으로 분열되어 있던 시기였다.

남북전쟁 중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과 교황은 멕시코에 제국을 세울 좋은 기회가 왔다는 생각을 품었다.

『미국의 예수회원들』은 이 제국 구상의 목표가 멕시코에 머물지 않았다고 서술한다. 멕시코의 제국은 북아메리카에서 강력한 로마 세력으로 자리 잡고, 미국 공화국이 무너진 자리에 들어설 노예제와 로마 가톨릭에 기반한 국가의 일부가 될 예정이었다는 것이다. 궁극적인 목표는 북아메리카 전체의 지배였다. 따라서 멕시코에 군주정을 세우는 일과 미국 남부의 전쟁은 미국 공화국을 무너뜨리려는 계획의 두 부분으로 묶인다.

남북전쟁의 배후에 관한 치니케이 목사의 기록

링컨도 남북전쟁의 책임을 로마에 돌렸다는 주장은 치니케이 목사의 회고에 근거한다. 치니케이 목사는 친구인 에이브러햄 링컨을 백악관에서 세 차례 만나 남북전쟁 등의 문제를 이야기했다고 기록했다. 『로마 교회에서 보낸 50년』 699쪽에는 링컨의 말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이 전쟁은 예수회원의 사악한 영향력이 없었다면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우리 땅이 가장 고귀한 아들들의 피로 붉게 물든 것은 교황주의 탓이다. 노예제 문제를 둘러싸고 남부와 북부 사이에 큰 견해차가 있었지만, 제프 데이비스나 남부연합의 지도자들 중 누구도 다음과 같은 예수회원들의 약속을 믿지 않았다면 감히 북부를 공격하지 못했을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가면 아래, 로마 가톨릭교도들의 자금과 무기뿐 아니라 프랑스의 무력까지도 우리를 공격하기만 하면 쓸 수 있게 해 주겠다는 약속이었다.”

치니케이 목사가 전한 링컨의 말은 노예제를 둘러싼 남북의 큰 견해차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남부 지도자들이 실제로 북부를 공격할 수 있었던 조건으로는 예수회원들이 약속했다는 외부 지원을 지목한다. 특히 프랑스의 무력까지 동원할 수 있다는 약속은, 남부연합이 기대한 지원과 프랑스의 멕시코 개입을 연결하는 핵심 대목이다.

프랑스의 멕시코 침공과 막시밀리안 1세

남북전쟁이 진행 중이던 1862년, 프랑스군은 멕시코를 침공했다. 『미국의 예수회원들』은 현대 역사가들이 남북전쟁과 같은 시기에 일어난 이 침공을 흔히 간과한다고 비판한다. 멕시코를 장악하려던 프랑스군은 1862년 5월 5일 푸에블라 전투에서 멕시코군에 패배해 진격을 저지당했다. 매년 신코 데 마요에 기념하는 승리가 바로 이 전투다.

푸에블라의 승리 이후에도 이어진 프랑스 점령과 막시밀리안 통치의 종말.

그러나 푸에블라의 승리로 프랑스의 점령 시도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군은 결국 멕시코 점령에 성공했고, 유럽의 군주인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1832–1867)를 통치자로 앉혔다. 그의 통치는 오래가지 않았다. 미국은 멕시코 전사들에게 원조를 보내 프랑스군을 무찌르도록 도왔고, 막시밀리안은 결국 폐위되어 멕시코 총살대에 의해 처형되었다.

1867년 외교 단절과 1984년 관계 복원

『미국의 예수회원들』은 미국과 바티칸의 외교 관계 단절도 로마의 정치적 개입 및 링컨 암살과 연결한다. 로마와 얽힌 여러 음모, 그리고 예수회가 링컨 암살의 배후에 있었다는 증거 때문에 미국이 1867년 바티칸과 외교 관계를 끊었다는 주장이다. 단절은 117년 동안 이어졌고, 레이건 행정부 시절인 1984년에 관계가 복원되었다.

미국과 바티칸의 117년 만의 외교 관계 복원을 알리는 신문 제목.

당시 신문은 미국과 바티칸이 117년 만에 완전한 외교 관계를 복원했다고 보도했다. 부제목에는 일부 미국인들이 반대한다는 사실도 함께 실려, 오랜 단절 끝에 이루어진 관계 회복을 미국 내에서 모두 환영한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조지 워싱턴의 덜 알려진 역할, 첩보망 지휘자

마운트버넌은 미국의 선조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라 할 만한 조지 워싱턴의 기억을 보존하는 곳이다. 전장에서 싸우고 밸리포지에서 겨울을 견딘 워싱턴의 모습은 익숙하지만, 미국 저항 세력의 첩보망을 지휘한 그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워싱턴을 기리는 마운트버넌 소개에 배치된 건물 외관.

마운트버넌 웹사이트의 「조지 워싱턴, 첩보 총책」은 한 영국 정보 장교의 말을 인용한다.

“워싱턴은 실제로 영국군을 전투에서 능가한 것이 아니라 단지 첩보전에서 우리를 능가했을 뿐입니다.”

워싱턴에게 전쟁 수행은 전장에서 병력을 지휘하는 일만이 아니었다. 저항 세력의 첩보망을 운영하며 상대보다 정보전에서 앞서는 일도 중요한 임무였다. 영국 정보 장교의 평가는 바로 그 능력에 주목한다.

선거로 바뀌지 않는 권력과 국가안보 기구

현대 미국의 첩보 활동에서는 정보를 누가 수집하는가뿐 아니라, 그 정보를 다루는 권력이 누구의 통제를 받는가가 문제가 된다. 국민이 선거로 지도자를 바꾸면 국가안보 정책을 움직이는 권력도 바뀔까? 『미국의 예수회원들: 미국 예수회주의의 역사』는 딥스테이트의 은밀한 활동을 현대 미국에서 어쩌면 가장 논란이 되는 주제로 지목한다. 작품이 묘사하는 딥스테이트는 미국 내 비밀 정부에 속한 배후 인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정체는 대체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각종 결정의 배후에서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하는 듯하며, 정책이 미국의 법이나 국민의 뜻에 반할 때조차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예수회원들』은 이러한 기만 때문에 많은 미국인이 진상을 조사하고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는지 묻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예수회와 딥스테이트의 활동을 연결하면서 던지는 질문은 폭정에 대한 우려를 담고 있다. 미국은 폭정의 시대로 향하고 있을까? 앞으로 종교재판이 벌어질까? 첫 번째 암흑기를 지배한 자들이 두 번째 암흑기도 초래하게 될까?

선거로 지도자를 교체해도 배후의 권력이 그대로 남는다는 문제의식은 조던 마이클 스미스가 2014년 보스턴글로브에 쓴 기사 제목에도 나타난다.

“마음껏 투표하라. 비밀 정부는 바뀌지 않는다.”

이 기사는 터프츠대학교 법학 교수 마이클 J. 글레넌(Michael J. Glennon)의 저서 『국가안보와 이중 정부』(National Security and Double Government)를 다룬다. 여러 의회 위원회와 국무부에서 법률 자문으로 일한 글레넌 교수는 이 책에서 국방 및 국가안보 기구가 사실상 스스로 운영되는 여러 방식을 열거한다. 기사가 소개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국방 및 국가안보 기구가 사실상 책임성과 투명성이 거의 없고, 어떠한 견제와 균형도 없이 스스로 운영된다.”

국가안보 기구의 활동에 책임을 묻거나 그 운영을 들여다보기 어렵고, 다른 권력도 이를 견제하지 못한다면 투표로 정치 지도자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선출된 지도자의 교체와 실제 국가안보 정책의 변화 사이에 간극이 생기기 때문이다.

글레넌의 이중 정부 설명과 연결되는 저서 표지.

『국가안보와 이중 정부』의 저자 후기 추가 수록판.

공개된 정치 제도와 실제 국가안보 결정권

글레넌 교수가 말하는 이중 정부는 국민에게 보이는 정치 제도와 실제 국가안보 정책을 관리하는 집단이 갈라진 상태다. 그는 2019년 3월 웰즐리 여자대학교에서 이를 설명하면서 자신의 분석 범위를 국가안보 영역으로 명확히 한정했다. 국민은 대통령과 의회, 법원이 정책을 운영하고 방향을 정하며 관리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수백 명의 관리자로 이루어진 네트워크가 배후에서 정책을 관리한다는 것이다.

공개된 정치 제도와 실제 국가안보 정책을 관리하는 네트워크를 구분한 이중 정부 모형.

공개된 대통령·의회·법원은 ‘매디슨식 제도’, 실질적인 결정권을 쥔 관리자 집단은 ‘트루먼 계열 네트워크’(Trumanite Network)라는 이름으로 구분된다. 두 체계를 가르는 기준은 국민에게 보이는 권한과 실제 정책 결정권이 어디에 있느냐이다.

구분구성국가안보 정책에서의 역할
매디슨식 제도대통령, 의회, 법원국민이 정책 운영과 결정권을 맡고 있다고 믿는 공개된 제도
트루먼 계열 네트워크수백 명의 관리자로 이루어진 집단배후에서 정책을 관리하고 실제 결정권을 행사하는 체계

트루먼 계열 네트워크의 기원은 대대적인 권력 이양이 시작된 트루먼 행정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가안보와 이중 정부』의 제2장도 이 네트워크를 주제로 삼는다. 『미국의 예수회원들』은 글레넌 교수의 설명을 인용하며 그 구성 기관으로 중앙정보국(CIA), 국가안보국(NSA), 연방수사국(FBI)을 꼽고, 국무부도 상대적으로 작은 비중으로 참여한다고 정리한다.

정보기관의 인력과 조지타운대학교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로 설계된 체제에서 국가안보 정책을 배후의 네트워크가 움직인다면, 그 네트워크는 누가 통제할까? 『미국의 예수회원들』은 워싱턴 D.C.의 예수회 교육기관인 조지타운대학교에 단서가 있을지 모른다고 제안한다. CIA 첩보원들이 이곳에서 훈련받는다고 전해진다는 점에 주목하며, 국가안보 인력을 교육하는 기관과 예수회의 관계를 묻는다. 글레넌 교수의 이중 정부 분석이 공개된 제도와 실제 결정권의 차이를 다룬다면, 『미국의 예수회원들』은 그 결정권을 행사하는 사람들의 교육 배경에서 배후의 영향력을 찾으려 한다.

미국의 대표적인 예수회 대학으로 소개되는 조지타운의 인맥은 정보기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트리니티 재단(The Trinity Foundation)의 연구자이자 라디오 진행자인 스티브 매슈스(Steve Matthews)는 이 대학에서 공부한 사람들 가운데 영향력 있는 유명 인사와 미국 정부의 고위직 인사가 많다고 설명한다. 그가 대표적으로 꼽는 인물은 빌 클린턴이다. 클린턴의 대학 시절 교육과 훗날 행정부를 구성한 인사들을 함께 살펴보면, 조지타운이 정치 지도자 개인과 정부의 인적 기반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가 드러난다.

클린턴에게 예수회 입회를 권한 오토 헨츠 신부

클린턴의 대학 시절을 다룬 자료로는 퓰리처상 수상자 데이비드 매러니스(David Maraniss)가 1996년에 펴낸 『동급생 중 으뜸』(First in His Class)이 소개된다. 부제는 『빌 클린턴 전기』(A Biography of Bill Clinton)다. 조지타운에서 클린턴과 예수회를 잇는 인물은 그에게 철학을 가르친 오토 헨츠(Otto Hentz) 신부였다.

헨츠의 수업에서 제시된 세 가지 사고방식을 같은 복잡한 대상에 적용한 비교.

칙 출판사(Chick Publications)의 저자이자 연구자인 데이비드 대니얼스(David Daniels)가 소개하는 일화에 따르면, 헨츠 신부는 아직 사제 서품을 받기 전부터 철학 입문 수업을 가르쳤고 클린턴은 그 수업을 들었다. 훗날 조지타운에서 40년 넘게 신학 교수로 재직한 헨츠 신부는 당시 수업에서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세 부류로 나누었다. 복잡한 문제를 만났을 때 명료함을 어디에서 찾느냐가 그 기준이었다.

사고방식문제를 바라보는 방식
흑백으로 보는 사람모든 것을 흑백으로 나누어 본다.
불명확하게 보는 사람모든 것을 불명확하게 본다.
유비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복잡성 속에서도 명료함을 본다.

세 번째인 유비적 사고(analogical thinking)는 모든 것을 흑백으로 나누거나 불명확하게 보는 두 극단 사이의 사고방식이었다. 헨츠 신부는 열여덟 살 클린턴이 쓴 글에서 복잡성 속에서도 명료함을 찾는 사고를 보았다. 대니얼스는 예수회원들이 자신들과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찾아 새 회원으로 받아들이려 한다고 설명한다. 헨츠 신부가 클린턴의 글에 보인 관심도 실제 입회 권유로 이어졌다.

어느 날 수업을 마친 뒤 헨츠 신부는 클린턴에게 저녁을 함께 먹자고 했다. 두 사람은 식당의 칸막이 좌석에 마주 앉았다. 헨츠 신부가 맥주를 홀짝이는 동안 클린턴은 햄버거를 먹어 치웠고, 그 자리에서 헨츠 신부는 예수회 입회를 권하기 시작했다. 예수회원들은 정치에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교황에게 특별 허가를 받았다는 설명과 함께, 평소 즐겨 하던 농담도 꺼냈다. 창조 이야기에서 빠진 구절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정치를 창조하시고, 정치가 좋다고 보셨다.

정치도 좋은 것으로 창조되었다는 농담으로 정치 참여를 긍정한 뒤, 헨츠 신부는 클린턴의 글을 칭찬하며 직접 입회를 권했다.

예수회원이 되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좋겠네. 자네가 쓴 글들이 인상 깊었네.

조지타운의 교육과 클린턴 행정부의 인적 기반

2015년 조지타운대학교에서 열린 「클린턴 강연: 목적(The Clinton Lectures: Purpose)」에서 헨츠 신부는 클린턴에게 조지타운에 다닌 것이 어떤 의미였는지 물었다.

클린턴은 매력적인 시대에 매력적인 사람들과 함께 학교에 다녔다고 회고하면서도,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선생님들이었다고 답했다. 조지타운에서 받은 교육의 의미는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삶에도 미쳤다.

제가 조지타운에 오지 않았다면 과연 대통령이 되었을지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클린턴 자신의 회고와 달리, 『미국의 예수회원들』의 인터뷰 응답자는 그의 정치적 부상을 세계주의자들과의 관계로 설명했다. 클린턴이 세계주의자들과 손잡았으며, 그들이 실제로 그를 그 자리에 올려놓았다는 주장이었다. 질문자가 클린턴이 세계주의로 들어간 경로를 예수회로 보는지 묻자, 응답자는 “물론입니다”라고 답했다. 이 관계를 뒷받침하는 자료로 제시한 것은 클린턴의 2000년 9월 26일 연설이었다.

응답자는 미국 정부인쇄국 웹사이트에서 이 연설 자료를 우연히 발견하고 기뻤다고 회고했다. 다만 인터뷰 당시에도 같은 방식으로 열람할 수 있는지는 모른다고 덧붙였다. 연설에서 클린턴은 참석한 교수진과 직원, 학생들, 자신의 행정부와 과거 행정부의 구성원들, 그리고 조지타운 시절의 친구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어 조지타운 로스쿨이 행정부에 제공한 인재의 규모를 다른 기관과 비교했다.

조지타운 로스쿨은 미국의 어느 단일 기관보다도 이 행정부에 많은 인재를 제공했습니다.

그 인재들은 비서실과 법률고문실뿐 아니라 예산·통상·공보 분야에도 자리하고 있었다. 클린턴은 몇 사람만 언급하면 다른 이들을 빠뜨릴 수 있다며 조심스러워할 만큼 긴 명단을 소개했다. 그가 조지타운 로스쿨 졸업생으로 지목한 인사들은 다음과 같다.

인물클린턴이 언급한 직책·경력
존 포데스타비서실장
베스 놀런백악관 법률고문
브루스 린지백악관 부법률고문
잭 퀸전 백악관 법률고문
잭 루예산국장
미키 캔터무역대표와 상무장관 역임
미셸 밸런타인비서실장 고문
스테퍼니 커터공보 부국장

이들 외에도 여러 대사와 임명직 인사가 조지타운 출신이었다. 클린턴은 학교가 얼마나 많은 인재를 보내 주었는지는 하나님만 아실 것이라는 표현으로 감사를 전했다. 베스 놀런의 보좌관 벤 애덤스와 자신의 개인 보좌관 더그 밴드도 백악관에서 전일제로 일하고 있다는 점을 흥미롭게 언급했다.

클린턴은 동문들의 공직 진출을 말하면서, 그들이 공직 봉사에 헌신하도록 이끈 교사에게도 공을 돌렸다. 특별히 지목한 사람은 신입생 시절 자신에게 철학을 가르치고 예수회 입회를 권했던 오토 헨츠 신부였다.

“또 한 분께도 공을 돌리고 싶습니다. 조지타운 학생들과 법률가들이 오랜 세월 공직 봉사에 놀라운 헌신을 보이도록 이끌어 주신, 제 신입생 시절 철학 선생님, 오토 헨츠 신부님입니다.”

『미국의 예수회원들』은 이 감사의 말을 클린턴이 예수회에 크게 빚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발언으로 받아들인다. 헨츠 신부에게 받은 교육과 행정부 곳곳에서 일한 조지타운 동문들을 함께 근거로 삼아, 예수회의 정치적 영향력이 지도자 개인의 형성과 정부 인력의 충원 양쪽에 미친다고 주장한다.

에드먼드 월시와 매카시의 반공 운동

클린턴 자신이 졸업한 곳은 조지타운 로스쿨이 아니라 월시 외교대학이다. 학교 이름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인 1919년에 이 대학을 설립한 예수회 사제 에드먼드 A. 월시(Edmund A. Walsh, 1885–1956) 신부에게서 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과 함께한 사진에서도 월시 신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월시가 더글러스 맥아더와 함께 있는 모습으로 소개되는 사진.

월시 신부는 반공주의자로도 알려져 있었다. 그의 저서 『전체 제국: 세계 공산주의의 뿌리와 발전』과 함께 거론되는 표현이 ‘조 매카시의 예수회원’이다. 《아메리칸 스펙테이터》에 실린 마크 저지의 글도 이 표현을 제목으로 삼았다. 『미국의 예수회원들: 미국 예수회주의의 역사』는 월시 신부가 미국 내 공산주의에 맞선 매카시의 운동을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전해진다며, 두 사람의 관계를 예수회의 정치적 영향력을 보여 주는 사례로 다룬다.

매카시는 마켓대학교에서 예수회 교육을 받았으며, 1950년 1월 워싱턴 D.C.의 콜로니 레스토랑에서 월시 신부와 만났다. 이 만남은 매카시즘의 출발점으로 전해진다. 널리 알려진 매카시의 ‘종교재판식’ 반공 활동 뒤에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예수회의 영향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반공주의자로 알려진 월시 신부가 매카시를 통해 실제로 무엇을 이루려 했는가라는 의문이 따른다.

반공 운동의 목적과 결과

『미국의 예수회원들: 미국 예수회주의의 역사』는 예수회원들이 19세기 공산주의 형성에 일조했다고 주장하면서, 월시 신부가 매카시를 통제된 반대 세력으로 이용했을 가능성을 묻는다. 겉으로는 공산주의에 맞서게 하면서 실제로는 반공 운동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역할을 맡긴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다. 반공 운동이 내세운 목적과 실제로 낳은 결과가 달랐다는 평가가 이 의문의 바탕에 놓여 있다.

반공 운동의 신뢰가 손상되었다는 평가와 이를 의도된 결과로 보는 작품의 가설.

매카시 운동이 반공에 끼친 해악을 지적한 저술가로는 보수 성향의 윌리엄 J. 베넷(William J. Bennett)이 인용된다. 베넷은 『미국: 마지막이자 최선의 희망』(America: The Last Best Hope) 제2권 318쪽에서 소련의 전복 활동에 맞서는 정당한 노력까지 매카시 때문에 불신을 받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무엇보다도 매카시는 반공이라는 명예로운 대의를 더럽혔다. 그는 미국의 제도들을 전복하려는 소련의 활동에 맞서는 정당한 노력을 불신하게 만들었다. 이후 국가에 충성하지 않는 개인이나 집단은 ‘매카시즘’이라고 외치기만 하면 실제 문제에서 대중의 관심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이 비판에서 문제는 매카시 개인의 평판만이 아니다. ‘매카시즘’이라는 말만으로 정당한 반공 활동까지 불신하게 만들 수 있다면, 소련의 전복 활동을 문제 삼는 사람도 그 활동의 실체를 논하기 전에 자신의 문제 제기가 정당함을 방어해야 한다. 『미국의 예수회원들: 미국 예수회주의의 역사』는 반공 운동이 오히려 맞서려던 세력에 유리한 결과를 낳았다는 베넷의 평가를 근거로 월시 신부의 목적을 묻는다. 베넷의 비판은 매카시가 반공 운동에 끼친 손상에 관한 것이며, 그 결과를 월시 신부가 의도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쪽은 『미국의 예수회원들』이다.

월시 외교대학과 클린턴의 세계관

월시 외교대학에서 지도자를 길러 내는 교육은 에드먼드 월시 신부에게서 빌 클린턴으로 이어지는 세계주의 전통과 맞닿아 있다. 국내 문제와 국제 문제를 따로 다루기 어렵다는 클린턴의 생각은 1993년 1월 20일 첫 대통령 취임 연설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세계 경제·환경·보건·군비 문제가 국경을 넘어 미국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관계.

이제 대외 문제와 국내 문제 사이에는 명확한 구분이 없습니다.

클린턴이 그 이유로 든 것은 세계 경제와 환경, 세계적인 에이즈 위기와 군비 경쟁이었다. 어느 것도 한 나라의 국경 안에서만 다룰 수 없으며, 모두 미국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였다. 그는 낡은 질서가 사라진 세계가 더 자유로워졌지만 덜 안정적이라고 보았다. 공산주의의 붕괴와 함께 오랜 적대감이 되살아나고 새로운 위험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국경을 넘는 문제와 냉전 이후의 불안정에 대응하려면 미국이 계속 세계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분명 미국은 우리가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한 세계를 계속 이끌어야 합니다.

트리니티 파운데이션 라디오(Trinity Foundation Radio)의 진행자 스티브 매슈스(Steve Matthews)는 클린턴을 비롯해 조지타운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졸업한 인물이 많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는 예수회 대학이 미국의 수도에 자리 잡은 것을 우연이 아닌 의도적인 선택으로 본다. 정치권력이 모인 수도 한복판에서 수많은 사람을 교육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학의 위치와 교육 활동 자체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기반이 된다는 것이다.

조지타운의 첩보 인맥과 가톨릭 교계의 출발

조지타운이라는 지역에는 대학의 인맥과 별개로 정보기관 인사들의 거주 역사도 있다. 로버트 드바니(Robert Devaney)가 2019년 10월 24일 『더 조지타우너』(The Georgetowner)에 기고한 「우리 같은 스파이들: 조지타운의 첩보원들」(Spies Like Us: The Spooks of Georgetown)은 이 지역의 첩보 인맥을 다룬다. 많은 CIA 정보요원과 세계 각국 정부의 첩보원들이 이곳에 살았다는 점에서 조지타운은 ‘스파이의 도시’로 불린다.

조지타운 지역의 첩보 인맥과 대학·가톨릭 교계의 역사를 구분한 그림.

다큐멘터리는 조지타운대학교를 미국 예수회의 본부로 지목하며, 대학의 역사와 미국 가톨릭 교계의 출발을 함께 짚는다. 교내에는 예수회 창립자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의 동상이 있고, 그 근처에는 대학 설립자 존 캐럴의 동상도 있다. 로욜라가 수도회의 창립을, 캐럴이 미국 내 대학 설립을 대표한다면, 미국 가톨릭 교계의 첫 주교이기도 했던 캐럴은 대학과 교계의 역사를 잇는 인물이다.

캐럴 이전의 가톨릭 주교 입국 문제에 대해서는, 주교들이 개신교 국가들에서 전복 활동을 벌인 이력 때문에 미국 땅에 들어오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고 다큐멘터리는 설명한다. 가톨릭 교계의 권력이 세속 정부를 위협할 수 있다는 당시의 경계심을 살펴볼 문헌으로는 새뮤얼 애덤스의 1772년 저술 『식민지 주민의 권리』(The Rights of the Colonists)가 제시된다.

종교적 관용과 ‘국가 안의 국가’에 대한 경계

종교적 관용은 세속 정부를 전복하려는 교리까지 보호해야 할까? 새뮤얼 애덤스(Samuel Adams)는 「식민지 주민의 권리」에서 관용의 한계를 정부의 존립과 연결했다. 1772년 11월 20일 통신위원회가 보스턴 타운 미팅에 제출한 이 보고서는 『Old South Leaflets』 제173호에 실려 있다. 애덤스는 존 로크의 관용에 관한 가르침을 검토하면서, 사회를 전복하지 않는 교리에는 관용을 베풀되 자신이 속한 정부를 무너뜨리는 교리까지 용인할 수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세속 정부 내부에 경쟁하는 별도의 지배권이 생긴다는 애덤스의 우려.

“사회를 전복하지 않는 교리를 가진 모든 이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의 세속 정부를 전복하는 교리를 가르치는 이들은 그러한 관용에서 제외된다. 로마 가톨릭 신자, 곧 교황주의자들이 제외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교리 때문이다. 파문된 군주는 폐위해도 되며, 그들이 이단자라고 부르는 이들은 무자비하게 없애도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교황을 그토록 절대적으로 인정하여 국가 안의 국가를 도입함으로써 정부를 전복하고 곧바로 최악의 무정부 상태와 혼란, 내분, 전쟁과 유혈 사태를 초래한다.”

애덤스가 경계한 것은 종교적 차이 자체보다 교황의 권위가 군주의 지위와 사람의 생사를 결정하는 권력으로 행사되는 상황이었다. 교황에 대한 절대적 복종이 군주를 폐위하거나 이단으로 지목된 사람을 제거할 권리로 이어진다면, 세속 정부 안에 그 정부와 경쟁하는 또 하나의 지배권이 생긴다는 우려였다. 임페리움 인 임페리오(imperium in imperio)는 이를 압축한 라틴어 표현으로, 뜻은 ‘국가 안의 국가’이다. 여기서는 기존 정부 내부에서 활동하는 숨은 정부를 가리킨다. 애덤스는 두 권위의 충돌이 정부 전복을 넘어 혼란과 내분, 전쟁과 유혈 사태를 초래한다고 경고했다. 함께 제시된 ‘대전의 배후에 있는 로마’라는 표제 역시 로마의 권력을 전쟁의 배후로 지목한다.

미국의 개신교적 출발과 가톨릭 이주 제한

애덤스는 미국의 독립에 정치적 개신교의 출발이라는 의미도 부여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기 전의 선언으로 소개된 다음 말에는 1776년 8월 1일이라는 날짜가 붙어 있다.

“오늘 정치적 개신교의 통치가 시작되리라 믿는다.”

『미국의 탈개신교화』(The De-Protestantizing of America)의 저자 로널드 쿡(Ronald Cooke) 박사도 미국이 개신교 국가로 세워졌다고 본다. 그 근거로 독립선언서 서명 당시 그 자리에 로마 가톨릭 신자가 단 한 명뿐이었다는 점과, 초기 미국 인구의 약 99%가 개신교도였다는 수치를 든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유대인과 로마 가톨릭 신자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으며, 초기 식민지들은 실제로 로마 가톨릭 신자들의 유입을 막으려 했다.

이러한 이주 제한을 두고 후대의 평가는 갈렸다. 쿡 박사는 텔레비전에서 오도널이라는 인물이 초기 미국의 가톨릭 배제를 맹렬히 비난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회고한다. 오도널은 초창기부터 가톨릭 신자들이 미국에 들어오는 것조차 막으려 했다는 데 분개했다. 반면 쿡 박사는 그 비판을 들어, 초기 식민지들이 가톨릭의 유입을 제한했다는 자신의 설명을 뒷받침했다.

초기 이주민의 신앙과 믿음을 지킬 책임

쿡 박사는 초기 미국에서 예수회원들의 유입을 막으려던 시도가 결국 실패한 이유를 공동체의 신앙적 변화에서 찾는다. 지금의 매사추세츠 지역에 정착한 초기 이주민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그리스도인이었으며, 이름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실제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주민이 계속 늘어나면서 같은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도 들어왔고, 모두가 그리스도인이던 공동체의 성격도 달라졌다.

믿음을 지킬 책임이 종교 지도자뿐 아니라 평범한 신자들에게도 있다는 설명.

공동체의 신앙을 지키는 일을 종교 지도자나 전문 교육자에게만 맡길 수는 없다. 유다서는 믿음을 전해 받은 사람들과 그 믿음을 위해 싸워야 할 사람들을 함께 가리킨다.

유다서 1:3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함께 나누어 받은 구원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글을 쓰려는 마음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들에게 단번에 전해 주신 믿음을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를 써서 권고해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성도들에게 단번에 전해 주신 믿음에서 ‘성도들’은 교수나 목사, 교사라는 특정 집단에 한정되지 않는다. 쿡 박사는 여기에 일상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그리스도인도 포함되므로, 참된 신자라면 누구나 믿음을 위해 힘써 싸워야 한다고 풀이한다. 무언가를 진정으로 믿는다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 나서게 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실제로는 그것을 그만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에게 믿음을 지키지 않는 태도는 단순히 소극적인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진정으로 믿느냐의 문제였다. 초기 공동체에서 신앙을 지키려던 태도가 약해진 과정도 같은 기준으로 평가했다.

조지타운대학교와 국가안보 기관의 인력 연결

앨런 매클라우드는 「조지타운에서 랭글리로: 명문대학과 CIA 사이의 논란의 관계」에서 미국의 첩보원들이 어디에서 오는지 묻고, 그 답이 아마도 조지타운대학교 월시 외교대학일 것이라고 쓴다. 이 학교가 중앙정보국(CIA)뿐 아니라 국방부와 국무부, 그 밖의 국가안보 기구들에도 중추 인력을 공급한다는 것이다.

조지타운대학교 졸업생의 국가안보 기관 진출과 전직 CIA 관계자의 교육 참여

매클라우드가 비판하는 것은 졸업생의 진출만이 아니다. 그의 기사에 따르면 교수진에는 전직 CIA 관계자가 24명 넘게 있으며, 교육과정도 국가안보 분야에서 활동할 다음 세대를 양성하도록 짜여 있다. 그는 그 교육이 누구를 길러 내는지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이 학교는 차세대 분석가와 암살자, 쿠데타 기획자, 경제적 청부업자를 양성하도록 교육과정을 구성한다.

전직 CIA 관계자의 교육 참여와 조지타운 졸업생의 국가안보 기관 진출을 나타낸 인력 연결도

분석가와 함께 암살자, 쿠데타 기획자, 경제적 청부업자를 열거한 데서 드러나듯, 매클라우드는 이를 단순한 전문직 교육으로 보지 않는다. 기사 작성 당시에도 국가안보 기구에는 조지타운 졸업생들이 가득하며, 이 학교 출신 전직 CIA 국장만 적어도 다섯 명이라고 쓴다. 전직 정보기관 관계자들이 대학에서 후속 세대를 가르치고, 졸업생들은 다시 국가안보 기관으로 진출하는 긴밀한 인적 관계가 그의 비판 대상이다.

사제직과 예수회 소속은 어떻게 다른가

『미국의 예수회원들』은 예수회의 영향력을 살피면서, 그 활동 범위를 겉으로 성직자임을 드러내는 사람들에게만 한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예수회원이 모두 사제인 것은 아니며, 많은 회원이 소속을 감춘 채 다양한 직업에 종사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예수회 소속과 사제직의 차이가 중요해진다. 사제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예수회와 무관하다고 판단할 수 없다는 경고다.

사제직, 보좌회원의 역할, 교육에 따른 자기 인식을 구분한 그림.

칙 출판사(Chick Publications)의 저자이자 연구자인 데이비드 W. 대니얼스(David W. Daniels)는 사제가 되기까지 여러 선별 과정을 거치며, 예수회원 가운데 일부만 사제가 된다고 설명한다. 많은 회원은 보좌회원, 곧 정식 보좌회원으로 분류된다. 인터뷰에서는 보좌회원을 두 번째 유형 또는 두 번째 계층으로 소개하고, 수행하는 일에 따라 영적 보좌회원과 현세적 보좌회원으로 나눈다.

구분인터뷰에서 설명한 역할과 범위
영적 보좌회원고해를 들을 수 있지만, 그 밖에 수행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다. 일부 일은 할 수 있어도 대부분은 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현세적 보좌회원청소 관리인, 사서, 대학교수, 홍보 담당자 등 여러 직업으로 활동하며, 사제는 아니지만 정식 예수회원이라고 설명한다.

현세적 보좌회원에 관한 경고는 외부에서 소속을 알아보기 어렵다는 데 집중된다. 이름에 예수회 소속을 나타내는 SJ 표기가 없고, 실제로 예수회원임을 알려 주는 다른 표시도 없이 여러 분야에서 일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청소 관리인이나 사서, 대학교수, 홍보 담당자처럼 일상에서 접하는 직업만으로는 그 소속을 알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정식 회원의 직분과는 별도로, 예수회에서 교육받은 사람이 자신을 어느 정도 ‘평신도 예수회원’으로 여길 수도 있겠다는 추측도 나온다. 한 인터뷰 응답자는 어떤 남성에게서 자기 어머니가 평신도 예수회원이었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으며, 그 남성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사실을 언급했다고 전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든 비유는 교회의 평신도다. 성직자가 아니어도 교회의 일원일 수 있듯이, 사제가 아닌 구성원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여기서 말하는 평신도 예수회원은 앞서 다룬 정식 보좌회원의 역할 분류와 달리, 교육받은 사람의 자기 인식에 관한 추측과 편지에 담긴 개인적 증언을 통해 소개된다.

일상적인 신분으로 활동하는 예수회원에 대한 경고

19세기 목회자 윌리엄 캐스카트(William Cathcart) 목사는 1872년에 처음 출간된 『교황제 체계』(The Papal System)에서 교황제의 역사와 예수회를 다뤘다. 부제에 밝힌 책의 범위는 로마 교회의 기원부터 당시까지 모든 교리와 주장, 관행을 살피는 역사적 개요다. 캐스카트 목사는 예수회의 비밀 첩자와 공작원들이 성직자의 모습으로만 활동하지 않으며, 종교계와 정치권은 물론 가정 안에서도 다양한 신분으로 활동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예수회원은 유력한 개신교도나 저명한 정치인, 각료의 아내, 어느 가정의 하인일 수도 있다. 어디서든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그들은 온갖 모습으로 어디에나 있다.

그가 경계한 활동 범위는 유력한 개신교도와 정치인에 그치지 않고 각료의 아내와 가정의 하인까지 아우른다. 사회적 지위의 높고 낮음이나 겉으로 드러난 종교, 직업만으로는 예수회 소속을 알아볼 수 없다는 경고였다.

이보다 앞서 존 애덤스도 1816년 5월 6일 토머스 제퍼슨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수회의 복원을 경계했다. 러시아에 있는 예수회 총장이 미국 내 회원들과 서신을 주고받고 있으며, 회원 수도 사람들이 아는 것보다 많다는 것이 그의 우려였다.

나는 최근 예수회가 부활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지금 러시아에 총장이 있으며, 그는 미국의 예수회원들과 서신을 주고받고 있다. 그들의 수는 사람들이 아는 것보다 많다. 인쇄업자, 편집자, 작가, 교사 등의 모습으로 그들이 이곳에 떼 지어 몰려오지 않겠는가? 어떤 인간 집단이 지상과 지옥에서 영원한 멸망을 받아 마땅하다면, 바로 이 로욜라의 단체일 것이다.

애덤스가 인쇄업자, 편집자, 작가, 교사를 구체적으로 거론한 데에는 글을 만들고 유통하며 사람을 교육하는 직업을 통해 예수회가 영향력을 넓힐 수 있다는 걱정이 담겨 있다. 공개적인 종교 활동뿐 아니라 일상적인 직업을 통한 진출도 경계한 것이다. 로욜라의 단체를 영원한 멸망의 대상으로 지목한 마지막 문장은 그 적대감의 강도를 드러낸다.

19세기 가톨릭 사제 출신으로 『로마 교회에서 보낸 50년』과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보낸 40년』을 쓴 찰스 치니케이 목사는 미국 가톨릭 주교들의 정치적 목적을 직접 겨냥했다. 다양한 신분으로 활동하는 회원들의 확산을 넘어, 주교들이 은밀한 방법으로 미국 정부를 장악할 계획을 세웠다는 주장이었다.

가톨릭 유권자의 결집과 정치권력 장악 계획

『누가 에이브러햄 링컨을 죽였는가?』의 저자 폴 세럽은 치니케이 목사가 남긴 1852년의 사제 모임 이야기를 소개한다. 치니케이 목사는 뉴욕주 버펄로에서 열린 대규모 사제 모임에 초대받았으며, 그곳에서 로마 가톨릭 신자들을 미국의 대도시에 집중시켜 나라의 정치권력을 장악하려는 계획을 들었다고 전했다. 대도시에 모인 가톨릭 유권자의 표로 의회와 대통령 선출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군대의 인력과 지휘권, 국가 재정까지 손에 넣겠다는 계획이었다.

1852년 사제 모임에서 들었다고 전해진 인구 집중과 정치권력 확보 계획.

“상원의원이든 하원의원이든 우리의 거룩한 아버지인 교황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단 한 명도 선출되지 않고, 가톨릭 신자들이 대통령을 선출할 뿐 아니라 육군을 채우고 지휘하며, 해군의 인력을 충원하고 국고의 열쇠를 쥐게 될 것입니다.”

이 기록은 작품 제작 당시의 미국 정치와도 연결된다.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 핵심 권력 직책 전부 또는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으며, 정치인들에게도 반드시 지지를 확보해야 할 유권자 집단이 되어 가고 있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선거 영향력의 사례로 인용하는 가톨릭 잡지 『더 태블릿』은 2003년 미국의 가톨릭 신자들을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유동적 유권자 집단으로 지목했다. 특정 정당에 고정되지 않은 이들의 표심이 정치인들에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같은 작품은 버락 오바마가 2008년 로마 가톨릭 신자인 조 바이든 상원의원을 부통령 후보로 선택한 데에도 바이든과 가톨릭 유권자들의 유대관계가 일부 작용했다고 설명한다. 작품 제작 당시 바이든은 이미 대통령직에 올라 있었다. 부통령 후보 선정에 작용한 선거상의 계산과 이후의 대통령 취임은 치니케이 목사가 전한 1852년의 계획을 현대 미국의 가톨릭 정치 영향력과 연결하는 사례로 제시된다.

루스벨트 직속 첩보망과 윌리엄 도너번

교황청과 예수회가 미국의 딥스테이트, 곧 공개된 정부 뒤에서 작동하는 권력망에서 우위를 확보했다는 주장의 배경에는 CIA의 기원이 있다. 그 전신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설립한 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 OSS)으로, 미국 정부 최초의 공식 정보기관으로 소개되는 조직이다.

루스벨트와 도너번의 OSS 지휘관계 및 가너가 주장한 교범 작성 배경.

루스벨트는 새 기관의 단독 책임자로 컬럼비아 로스쿨 시절 동창인 윌리엄 J. 도너번(William J. Donovan, 1883–1959)을 선택했다. 아일랜드계 가톨릭 신자였던 도너번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활약으로 ‘와일드 빌’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루스벨트는 자신이 구상한 새로운 첩보망의 전권을 도너번에게 맡겼다. 도너번은 정보망 전체를 지휘하면서 대통령 외에는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전직 특수부대원 디노 가너(Dino Garner)는 SOFREP 기사 「OSS가 현대전에 관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에서 도너번을 다룬 책들이 그를 영웅적인 전사이자 OSS의 설계자, 조직을 움직인 원동력으로 묘사하면서도 다른 일면은 밝히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가너의 주장에 따르면 도너번은 단순한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 잘 훈련된 아일랜드인 예수회원이었으며, 거의 매번 비열한 수단을 사용했다.

가너는 도너번의 전술과 전략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이유도 예수회의 전쟁 방식에서 찾는다. 예수회원들이 적과 싸울 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도너번 개인의 전술뿐 아니라 요원들이 따르는 지침에도 예수회가 관여했다며, 도너번의 야전교범을 작성한 사람들 역시 전쟁 기술을 훈련받은 고위 예수회원들이었다고 주장한다.

도너번의 첩보망에 참여한 대중문화 인사들

OSS는 논란을 불러일으킨 조직이었지만, 그 첩보망에는 미국 대중에게 친숙한 인물들도 참여했다. 활기찬 요리 프로그램으로 유명해진 줄리아 차일드(Julia Child)가 그중 하나다. 시청자 대부분은 그녀가 전쟁 중 도너번과 OSS를 위해 첩보원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미국의 상징적인 배우 존 웨인과 수많은 작품을 함께 만든 가톨릭 영화감독 존 포드(John Ford)도 OSS에서 활동했다.

서로 다른 대중문화·스포츠·학술 분야 인물들이 참여한 OSS의 인적 구성.

배우 스털링 헤이든, 시카고 화이트삭스 선수 모 버그, 역사가 아서 슐레진저 주니어, 링링 브라더스 서커스로 유명한 헨리 링링 노스 역시 저명한 요원으로 꼽힌다. 도너번의 첩보망에는 이처럼 요리 방송과 영화, 스포츠, 역사학, 서커스 등 서로 다른 분야로 알려진 사람들이 함께 참여했다.

훈련 영화에서 대본 개입까지

존 포드는 OSS 요원으로 활동하면서 도너번을 위한 훈련 영화도 제작했다. 1943년 작품 『위장 잠입』(Undercover)은 그중 하나로, 포드 자신도 OSS 장교 역으로 출연했다. 영화는 임무에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익히지 않고 자신의 경험만 믿는 요원이 어떻게 실수할 수 있는지 보여 준다.

지역 정보를 충분히 숙지하라는 지시가 나오는 OSS 훈련 영화 장면.

극중 장교는 파견 지역에 관한 정보를 모두 제공하겠다며, 자료를 읽는 데 그치지 말고 완전히 숙지하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요원은 이미 그곳을 훤히 알고 있어 추가 학습은 시간 낭비라고 여긴다. 그 지역을 책처럼 잘 안다는 자신감에 장교는 이렇게 답한다.

자네가 떠난 뒤 적이 그 책에 몇 장을 더 써넣었을지도 모르지.

요원은 그제야 “알겠습니다.”라고 답한다. 익숙했던 지역이라도 떠나 있는 동안 적이 상황을 바꾸었을 수 있다. 과거의 경험만으로 현재의 임무를 수행할 수는 없으므로 새로 제공되는 정보를 익혀야 한다. 짧은 문답이 가르치는 것은 지역에 대한 익숙함과 현재 상황에 대한 숙지는 다르다는 점이다.

『위장 잠입』은 포드가 OSS를 위해 제작한 수많은 작품 가운데 하나였다. 영화 제작 기술을 전시 정보기관의 요원 교육에 활용한 사례다. 도너번 시절에 형성된 정보기관과 영화·연예 산업의 협력은 이후 CIA와 할리우드 사이에서도 이어졌으며, 수많은 영화의 내용에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쟁의 극장: 국방부와 CIA는 어떻게 할리우드를 장악했는가』(Theaters of War: How the Pentagon and CIA Took Hollywood)는 그 개입이 제작 과정의 어느 단계까지 미쳤는지 다룬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매슈 앨퍼드(Matthew Alford)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알아낸 것은 수천에 수천을 더하고, 또 수천을 더할 만큼 많은 제작물이 영향을 받았으며, 미국의 국가안보 기구에 의해 대본 단계에서 다시 쓰이는 경우도 많다는 것입니다.”

앨퍼드 박사가 지목하는 것은 완성된 영화를 국가안보 기구가 활용하는 수준을 넘어선 대본 단계의 수정이다. 요원 교육용 영화를 함께 만드는 것과 대중에게 공개될 작품의 이야기를 고치는 것은 관여하는 대상과 방식이 다르다. 후자의 경우 정보기관은 영화가 관객에게 무엇을 전달할지 결정하는 과정에 직접 참여한다.

예수회 연극에서 할리우드 영화로

할리우드 영화는 과거 예수회 연극의 현대판으로 해석된다. 예수회가 극적인 이야기로 사상을 전달했듯이, 영화도 대중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수단이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회의 연극은 교육과 종교 선전을 함께 수행했으며, 그 전통을 다루는 저서로 예수회원 윌리엄 H. 매케이브(William H. McCabe)의 『예수회 연극 입문』이 소개된다.

숀 윌콕(Shaun Willcock)의 『예수회 할리우드』는 이러한 공연 활동의 배경을 반종교개혁에서 찾는다. 마르틴 루터의 영향을 받은 반교황주의 연극이 등장하자 예수회도 연극으로 그 내용에 반박했다. 윌콕은 책 11쪽에서 예수회가 대중을 향한 종교 선전 계획에서 연극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부여했다고 서술한다. 공연은 보조적인 교육 수단에 머물지 않았다. 예수회는 전 세계의 학교와 선교 현장에 연극뿐 아니라 무용과 오페라까지 도입했다.

『예수회 할리우드』의 부제에는 교황권과 예수회원들이 수십 년 동안 할리우드를 통제했고 그 이후에도 계속 영향을 미쳐 왔다는 주장이 담겨 있다. 윌콕이 다루는 범위는 옛 공연의 역사에 한정되지 않는다. 학교와 선교 현장에서 공연으로 사상을 전달했던 예수회의 활동을 20세기 영화의 내용과 제작 기준에 관여한 활동까지 이어서 살핀다.

영화의 도덕적 경계를 정한 제작 규정

예수회가 20세기 영화계에 관여한 구체적인 사례로는 할리우드의 공식 제작 규정이 제시된다. 영화와 유성영화의 제작을 규율한 이 문서에는 규정을 뒷받침하는 근거와 통일된 해석을 위한 결의도 포함되었다. 윌리엄 H. 헤이스(William H. Hays)의 이름을 따 헤이스 규정이라고도 불렸으며, 헤이스는 의원으로 소개된다. 규정의 본래 목적은 부도덕한 행위가 영화를 통해 전달되는 것을 막는 데 있었다.

헤이스 규정의 명칭·작성·집행을 맡은 인물과 영화 관객에게 이르는 영향 경로.

규정에 이름을 남긴 사람과 실제로 작성하고 집행한 사람은 서로 달랐다. 가톨릭 출판인 마틴 J. 퀴글리(Martin J. Quigley)는 예수회 사제 대니얼 A. 로드(Daniel A. Lord) 신부와 함께 규정을 마련했다. 퀴글리의 활동을 다루는 자료로는 1915~1965년을 대상으로 한 『마틴 J. 퀴글리와 미국 영화의 전성기』가 제시된다. 이후 약 20년 동안 규정을 집행한 사람은 예수회 교육을 받은 가톨릭 신자 조지프 I. 브린(Joseph I. Breen)이었다.

인물제작 규정과의 관계소개된 신분·배경제시된 생몰연도
윌리엄 H. 헤이스‘헤이스 규정’이라는 명칭의 유래의원으로 소개됨1879~1954년
마틴 J. 퀴글리대니얼 로드 신부와 함께 규정 작성가톨릭 출판인—
대니얼 A. 로드 신부마틴 퀴글리와 함께 규정 작성예수회 사제1888~1955년
조지프 I. 브린약 20년간 규정 집행예수회 교육을 받은 가톨릭 신자1888~1965년

브린은 영화계에 어떤 도덕적 한계를 부과할지 결정하는 중심인물이 되었다. 할리우드 영화의 내용을 좌우할 막대한 권한 때문에, 한때는 세계 여론에 미치는 영향력이 히틀러나 무솔리니, 스탈린보다 크다는 말까지 들었다. 공직이나 군사력이 아니라 수많은 관객에게 전달될 영화의 내용을 결정하는 권한을 두고 나온 비교였다.

제작 규정 폐지 뒤의 영향력과 ‘컴퍼니’라는 별칭

제작 규정이 폐지된 뒤에도 로마의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았고, 미국의 딥스테이트를 통해 계속되었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딥스테이트란 정보기관을 비롯해 공식 정치의 이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권력망을 뜻한다. 공개된 규정으로 영화의 내용을 제한하던 방식이 끝났더라도, 그 내용에 관여할 통로까지 없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정보기관이 할리우드 영화에 어떤 은밀한 선전을 주입해 왔으며 지금도 무엇을 주입하고 있는지가 연구자들의 추적 대상이 된다.

CIA에 대한 예수회의 영향력을 추적하는 단서에는 두 조직의 이름도 있다. 예수회는 원래 컴퍼니 오브 지저스(Company of Jesus)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고, CIA 역시 컴퍼니(The Company)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이 명칭의 유사성도 두 조직의 관계를 보여 주는 일련의 단서에 포함된다.

CIA를 ‘컴퍼니’라고 부르는 용례는 전직 CIA 공작 담당자이자 내부고발자인 필립 에이지(Philip Agee)의 『조직 내부에서: CIA 일기』에서도 찾는다. 원제 『Inside the Company: CIA Diary』에서 ‘컴퍼니’는 CIA를 가리킨다.

CIA의 가톨릭 인맥과 도너번의 교황청 훈장

CIA 내부의 가톨릭 인맥을 보여 주는 사례로는 필립 에이지(Philip Agee, 1935–2008)의 회고가 있다. 에이지는 『조직 내부에서』(Inside the Company) 서문 5쪽에서 자신이 “예수회에서 4년, 노터데임에서 4년을 보낸 뒤” CIA에 입사했다고 밝혔다. 로버트 와가스(Robert Wargas)도 『가톨릭 헤럴드』에 실린 「가톨릭 신자들이 CIA에서 성공하는 이유」에서 CIA와 가톨릭의 관계를 다뤘다.

CIA가 흔히 ‘가톨릭 정보국’이라고 불리는 배경에는 전략사무국(OSS) 창설자 윌리엄 도너번이 있다. 『미국의 예수회원들』에 따르면, 관련 자료 대부분은 이 별칭의 배경으로 도너번의 영향력을 꼽는다. 그는 현대 미국 정보 수집의 아버지이자 CIA의 비공식 창설자로 여겨지며, 작품 제작 당시에도 CIA 본부의 OSS 기념물에는 그의 동상이 서 있었다.

도너번과 교황청의 관계는 앤서니 케이브 브라운(Anthony Cave Brown)의 『마지막 영웅: 와일드 빌 도너번』(The Last Hero: Wild Bill Donovan)에 실린 흑백 사진에서도 드러난다. 사진 속 도너번은 바티칸에서 교황의 스위스 근위병들 옆에 서 있다. 이 사진은 도너번의 성 실베스터 훈장 수훈 방문 때 촬영된 것으로 소개된다. 또한 이 훈장을 가톨릭 교회에 평생 공개적으로, 또 비밀리에 봉사한 공로를 기리는 바티칸 최고의 훈장이라고 설명하며, 도너번의 수훈을 CIA와 로마의 교회국가를 잇는 중요한 연결 고리로 제시한다.

도너번의 바티칸 방문과 성 실베스터 훈장 수훈을 설명하며 제시되는 책 속 사진.

트리니티 재단 라디오(Trinity Foundation Radio)의 진행자 스티브 매슈스(Steve Matthews)도 ‘와일드 빌’ 도너번이 말년에 교황에게서 매우 높은 훈장인 실베스터 훈장을 받았다고 말한다. 매슈스는 교황이 도너번의 평생의 노력을 이 영예로운 훈장으로 기릴 만하다고 판단했다는 데 주목한다.

『마더 존스』의 몰타 기사단과 전범 도피 보도

도너번과 바티칸의 관계를 다룬 또 다른 자료는 진보 성향 잡지 『마더 존스』(Mother Jones)의 1983년 7월호다. 이 호에는 마틴 A. 리(Martin A. Lee)의 「그들의 뜻이 이루어지리라」(Their Will Be Done)가 실렸으며, “CIA가 그의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는가?”라는 문구도 등장한다. 기사에 실린 고해실 삽화에는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로마 가톨릭 사제가 말하고 미국 정치인이 듣는 모습이 담겨 있다. 이는 정치인이 사제에게 지시를 받는 장면이며, 사제들이 정치인을 은밀하게 통제한다는 명백한 암시라는 해석이다.

사제의 정치인 통제를 암시한다고 해석되는 『마더 존스』 기사의 고해실 삽화.

이 보도에서 도너번과 바티칸을 잇는 인맥은 몰타 기사단의 활동으로 넓어진다. 오랜 역사와 자선 활동으로 알려진 기사단의 단원 상당수가 CIA 소속이며, 기사단의 활동에는 나치 전범 약 5만 명의 대규모 도피와 밀입국 지원도 포함되었다는 것이 보도의 주장이다. 전범들은 국제적십자의 도움으로 가짜 바티칸 여권을 받았고, 일부는 성직자 복장까지 제공받아 남아메리카로 밀입국했다고 한다. 기사단에 제기된 의혹은 개인적인 친분을 넘어, 여행 문서와 신분을 위장할 수단을 마련해 전범들의 이동을 도왔다는 것이다.

많은 나치가 밀입국한 목적지로는 아르헨티나가 지목된다. 아르헨티나는 수 세기 동안 가톨릭 교회의 거점이었던 나라로 소개되며, 훗날 교황 프란치스코가 된 베르고글리오 추기경 역시 아르헨티나 출신 예수회원이라는 사실이 함께 언급된다.

에드몽 파리가 제기한 바티칸의 전쟁 책임

프랑스 저술가 에드몽 파리(Edmond Paris, 1894–1970)는 『예수회의 비밀 역사』(The Secret History of the Jesuits)에서 예수회와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 사이의 관계를 다루며, 바티칸이 두 차례 세계대전의 배후에 있었다고 단언했다. 그는 바티칸과 예수회가 전쟁 중 어떤 외교 정책을 폈는지만 묻지 않았다. 전쟁을 일으킨 데 막대한 책임이 있으며, 거대한 재정을 바탕으로 여러 영역에 행사한 영향력이 그 책임을 대중에게 가리는 데에도 작용했다고 비판했다. 책 12쪽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두 차례 세계대전의 발발에 대해 바티칸과 그 예수회가 지고 있는 막대한 책임을 대중은 사실상 알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은 부분적으로 바티칸과 그 예수회가 운용할 수 있는 거대한 재정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 재정이 그들에게 수많은 영역에서 권력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집권 과정에서 파리가 지목한 정치적 통로는 독일의 가톨릭 정당인 중앙당이었다. 교황이 중앙당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중앙당이 히틀러에게 절대 권력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파리는 프랑스 언론의 보도를 인용해 히틀러가 권력을 얻은 데에는 합법적인 절차보다 교황의 영향력이 더 결정적이었다고 서술했다. 『예수회의 비밀 역사』 13쪽에 실린 인용은 그 책임을 교황 비오 12세에게 돌린다.

“교황 비오 12세가 히틀러를 만들어 냈다. 히틀러의 집권은 합법적인 수단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교황이 영향력을 행사한 결과였다. 그 대상은 독일 가톨릭 정당인 중앙당이었다.”

따라서 파리가 바티칸에 물은 책임은 이미 들어선 나치 정권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히틀러가 권력을 확보하는 과정 자체에 개입했고, 그 과정에서 중앙당을 통해 교황의 영향력을 독일 정치에 행사했다는 비판이다.

1933년 정교협약과 나치 정부의 공신력

비오 12세는 교황이 되기 전 파첼리 추기경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바티칸과 나치 독일 사이의 정치적 협정을 성사시키기 위해 수년 동안 활동했으며, 1933년 7월 20일 로마에서 히틀러의 제3제국과 바티칸 사이의 독일 제국 정교협약에 서명했다. 정교협약은 교회와 국가 사이의 합의다. 파리는 이 합의가 나치 정부에 국제적 인정을 안겨 주었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정교협약이 나치 정부의 공신력을 높였다는 비판과 당시 탄압의 병존.

중앙당이 히틀러의 국내 권력 확보를 도왔다면, 바티칸과의 공식 협약은 그렇게 들어선 정권의 대외적 위상을 높여 주었다는 것이다. 파리가 인용한 프랑스 언론은 당시 찬탈자들의 정부로 여겨지던 나치 정권이 오랜 국제적 권위를 지닌 바티칸과 합의함으로써 얻은 효과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해당 문구의 출처는 『독일의 정치적 가톨릭주의』(Le Catholicisme Politique en Allemagne, 1956) 231쪽이다.

“국가사회주의 정부는 거의 모든 곳에서 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찬탈자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졌다. 정교협약은 이 정부에 가장 오래된 국제 권력인 바티칸과 합의했다는 인장을 부여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국제적 공신력을 인정하는 증서와 같았다.”

‘국제적 공신력을 인정하는 증서’라는 표현은 협약이 단순히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나치 정부를 국제사회가 존중할 만한 상대로 인정해 주었다는 비판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 정부가 권력을 장악한 방식은 별개의 문제였다. 1948년 다큐멘터리 『뉘른베르크: 오늘날에 주는 교훈』(Nuremberg: Its Lesson for Today)은 나치의 집권이 사기와 기만, 위협과 강압에 기반했으며, 그 과정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 헌법과 독일 국민의 자유가 사라졌다고 서술한다. 자유를 파괴하며 권력을 장악한 정부가 바티칸과의 합의를 통해 공신력을 얻었다는 데 비판의 무게가 놓인다.

정교협약에는 로마 가톨릭 주교들이 나치 정부에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는 조건도 있었다고 파리는 지적했다. 주교들의 맹세는 나치 정부에 더 큰 신뢰를 부여했으며, 그때는 이미 강제수용소가 가동되고 있었다. 『예수회의 비밀 역사』 12~13쪽은 협약 체결과 나치의 탄압을 함께 짚으면서, 히틀러의 급부상과 다른 전쟁 지도자들의 배후에 바티칸과 예수회가 있었다는 비판으로 나아간다.

“1933년 7월, 정교협약으로 주교들이 나치 정부에 충성을 맹세해야 했을 때, 강제수용소는 이미 문을 연 상태였다. 바티칸은 히틀러가 급부상하게 한 주된 배후 세력이었다. 히틀러는 무솔리니, 프랑코와 함께 그저 바티칸과 그 예수회가 조종하는 전쟁의 말에 불과했다.”

파리가 히틀러와 무솔리니, 프랑코를 함께 지목한 까닭은 이들을 바티칸과 단순히 협력한 지도자들이 아니라, 바티칸과 예수회가 움직이는 전쟁의 도구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미 강제수용소가 문을 연 상황에서 체결된 협약과 주교들의 충성 맹세도 나치의 탄압과 분리할 수 없는 책임으로 다뤘다.

파첼리의 미국 방문과 ‘평화의 사도’라는 호칭

1936년 파첼리 추기경은 미국을 방문해 예수회가 운영하는 포덤대학교에서 명예학위를 받았고, 이어 조지타운에서도 예수회원들에게 명예학위를 받았다. 예수회는 그를 ‘평화의 사도’라고 불렀다. 1936년 11월 2일자 신문은 포덤의 학위 수여를 보도하며, 7천 명이 참석한 교내 행사에서 파첼리가 그 호칭으로 칭송받았다고 전했다.

포덤의 파첼리 학위 수여와 ‘평화의 사도’ 호칭을 전하는 신문 기사.

이 찬사는 교육과 시민의 의무에 관한 그의 발언과 함께 보도되었다. 기사의 다른 제목과 부제에는 파첼리가 가톨릭 학교들을 찬양하고, 교황 국무장관으로서 신앙이 시민의 자질에 필수적이라고 말했으며, 평화주의자들을 비판했다는 내용도 실렸다. ‘평화의 사도’로 칭송받은 인물이 동시에 평화주의자들을 비판한 대목도 이 보도에 담겨 있다.

파첼리는 1939년 3월 교황으로 즉위했고, 그로부터 6개월도 지나지 않아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파리는 ‘평화의 사도’라는 명성과 뒤이은 전쟁을 대비시키며 로마의 정치적 역할을 비판했다. 『유럽에 맞선 바티칸』(The Vatican against Europe)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책임을 로마의 정치적 책략에 돌렸다.

제2차 세계대전의 책임을 논하는 대목에서 소개된 에드몽 파리의 저서.

제2차 세계대전의 책임을 논하는 대목에서 소개된 에드몽 파리의 저서.

에드몽 파리의 연구와 칙 출판사의 출판 경위

에드몽 파리는 가톨릭 신자인 부모 밑에서 자랐으며, 파리의 대표적인 대학인 소르본에서 교육받았다. 교황청과 유럽 지도자들의 정치적 관계를 추적한 그의 연구는 전쟁 중 벌어진 집단학살까지 다루었다. 전시 집단학살에 관한 저술은 워싱턴 D.C.의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박물관에도 보존되어 있다. 세 저서에서 다룬 주제를 나란히 보면, 정치적 배후 세력과 전쟁 책임에 대한 비판이 구체적인 박해와 학살의 기록으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알 수 있다.

파리의 아내를 통해 연구 자료와 출판 권리가 칙 출판사에 전달되었다는 경위.

저서다루는 내용
『예수회의 비밀 역사』히틀러의 급부상과 바티칸·예수회의 역할, 1933년 정교협약과 주교들의 충성 맹세
『유럽에 맞선 바티칸』로마의 정치적 책략에 제2차 세계대전의 책임을 돌리는 주장
『위성국 크로아티아의 집단학살, 1941~1945년』크로아티아의 인종적·종교적 박해와 학살, 우스타샤의 범죄

이 연구가 칙 출판사(Chick Publications)에 전달되는 데에는 파리의 아내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파리와 잭 칙(Jack Chick)이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는지를 묻는 질문에, 자료 입수 경위를 설명한 응답자는 파리를 ‘구원받지 않은 연구자’로, 그의 아내를 그리스도인으로 소개했다. 아내는 칙 출판사 및 잭 칙과 연락하며 지냈고, 남편이 가톨릭 교회와 예수회를 연구하는 일을 깊이 신뢰했다. 『예수회의 비밀 역사』 같은 연구를 출판할 수 있도록 자료의 권리를 넘겨주면서 잭 칙에게 “이것을 출판해 주세요”라고 요청했다. 응답자는 그 과정을 통해 자신들이 자료를 얻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파리가 죽기 직전에 회심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졌다. 다만 응답자는 그 일을 물어볼 사람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자신이 입증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그는 『예수회의 비밀 역사』가 크게 기여한 책이라고 평가하며, 파리가 실제로 회심했기를 바란다는 마음을 덧붙였다.

파리는 히틀러뿐 아니라 크로아티아의 나치 동맹인 우스타샤에도 로마가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보았다. 우스타샤의 지도자는 『미국의 예수회원들』이 악명 높은 전범으로 규정하는 안테 파벨리치(Ante Pavelić, 1889~1959)다. 파리는 『위성국 크로아티아의 집단학살, 1941~1945년』(Genocide in Satellite Croatia, 1941–1945)에 우스타샤의 범죄를 기록했다. 부제가 ‘인종적·종교적 박해와 학살의 기록’인 이 책은 로이스 퍼킨스(Lois Perkins)가 프랑스어 원문을 영어로 번역했다.

우스타샤의 세르비아인 박해와 세 갈래 제거 정책

파벨리치가 1941년 아돌프 히틀러와 만난 장면은 크로아티아 우스타샤 정권과 나치 독일의 관계를 보여 준다. 『미국의 예수회원들』은 우스타샤를 로마 가톨릭교도와 보스니아 무슬림의 연합으로 소개한다. 이들은 정교회 신자인 세르비아인들을 적으로 여겼다. 작품은 우스타샤가 역사상 가장 끔찍한 집단학살자 집단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고 평가하며, 그 참혹한 살육이 동맹인 나치마저 충격에 빠뜨렸다고 전한다.

세르비아인을 추방·강제 개종·말살로 나누어 다룬 박해 정책의 세 갈래.

저자이자 역사 연구자인 폴 세럽(Paul Serup)은 박해의 대상이 유대인만은 아니었다는 점을 짚으며, 로널드 H. 베일리가 집필한 타임라이프의 제2차 세계대전 관련 도서 『파르티잔과 게릴라』를 인용한다. 이 책에 따르면 나치는 유고슬라비아를 장악한 뒤 파벨리치를 권좌에 세웠다. 책이 “잔혹한 토착 파시스트”로 묘사하는 파벨리치는 오랫동안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지지했으며, 친가톨릭 테러 조직인 우스타샤를 창설했다. 우스타샤라는 이름은 여기서 ‘반란군’으로 풀이된다.

히틀러의 꼭두각시가 된 파벨리치는 자신이 ‘이질적 요소’라고 부른 세르비아인과 유대인, 집시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세르비아인은 당시 크로아티아 국가 인구의 약 30%를 차지했고, 거의 모두 동방 정교회 신자였다. 세럽이 인용한 책은 이들을 겨냥한 파벨리치의 정책을 국외 추방, 가톨릭 개종, 말살이라는 세 갈래로 설명한다.

대상예정된 처분
세르비아인의 3분의 1세르비아로 추방
세르비아인의 3분의 1가톨릭으로 개종
세르비아인의 3분의 1말살

가톨릭으로의 개종은 개인이 자발적으로 신앙을 선택하는 일이 아니라, 추방과 말살을 병행하는 집단 박해 정책의 일부였다. 세럽이 인용한 기록에 따르면 학살은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살육이 끝났을 때 우스타샤에 희생된 세르비아인은 35만 명에서 75만 명까지 다양하게 추산되었다. 살육을 다룬 자료에는 ‘세르비아인 절단 칼’이라는 뜻의 “Serb Cutter”라는 명칭도 등장한다.

스테피나츠 대주교와 교황청의 우스타샤 지원 문제

우스타샤 정권과 가톨릭 지도부의 관계에서 중요한 인물은 알로이시우스 스테피나츠 대주교(1898–1960)다. 『미국의 예수회원들』은 그를 예수회 교육을 받은 사제이자 우스타샤 군의 최고 교황대리로 소개하고, 전쟁기의 가장 논란 많은 인물 가운데 하나로 지목한다. 스테피나츠 대주교가 파벨리치와 만나는 장면을 제시하면서, 파벨리치 정부를 크로아티아에서 나치 독일에 상응하는 정권으로 묘사한다.

이 작품은 스테피나츠 대주교가 세르비아인들을 가톨릭 교회를 등진 배교자로 규정했으며, 그와 바티칸이 전쟁 중뿐 아니라 전쟁이 끝난 뒤에도 우스타샤 운동을 지원했다고 주장한다. 발칸 역사상 전례 없는 공포정치로 묘사되는 우스타샤의 통치를 두고, 파벨리치와 직접 살육에 가담한 조직만이 아니라 정교회 신자들을 배교자로 규정한 종교 지도부와 우스타샤를 전후에 걸쳐 지원한 교황청에도 책임을 묻는다.

우스타샤의 학살과 1941년 강제 개종법

다미르 미르코비치(Damir Mirkovic)의 「우스타샤 집단학살과 크로아티아인·세르비아인 간 내전의 역사적 연관성」을 인용한 집계에 따르면, 우스타샤는 4년 동안 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죽였다. 희생자는 주로 크로아티아에 살던 세르비아인들이었으며, 유대인과 로마인들도 포함되었다. 정교회 세르비아인들은 학살의 위협 속에서 로마 가톨릭으로의 강제 개종에도 직면했다.

정교회 학자들은 스테피나츠 대주교가 정교회 세르비아인들에게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할 의무를 부과한 1941년 5월 3일 종교 개종법을 환영했다고 주장한다.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박물관의 자료 번호 90163으로 소개된 사진에는 우스타샤 정권에 의해 가톨릭으로 강제 개종당하는 세르비아 민간인들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박물관 자료 번호 90163으로 제시된 강제 개종 사진.

성직자들을 향한 정교회 역사가들의 비판은 개종법 지지에 그치지 않는다. 블라디미르 바실리크(Vladimir Vasilik) 수석부제의 「세르비아인 집단학살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역할」과 함께 제시된 비판은 가톨릭 사제와 수도사, 수녀들이 정교회 세르비아인 집단학살에 가장 적극적으로 가담했다고 지목한다. 구체적인 사례로는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들이 드라쿨리치와 사르고바츠 마을에서 집단 처형을 자행해 세르비아인 약 2천 명을 학살했다는 기록이 거론된다. 우스타샤 지도자 안테 파벨리치가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들에게 둘러싸인 사진에서도, 함께 있는 수도사들은 집단학살 당시 가장 잔혹한 살인자들 가운데 일부로 소개된다.

야세노바츠의 경비 책임자 미로슬라브 필리포비치

『미국의 예수회원들』이 성직자 가담 사례 가운데 가장 악랄한 인물로 지목하는 사람은 프란치스코회 수도사 미로슬라브 필리포비치(Miroslav Filipovic, 1915–1946)다. 나란히 놓인 두 사진은 왼쪽에 우스타샤 군복을 입은 모습, 오른쪽에 수도복을 입은 모습을 보여 준다.

미로슬라브 필리포비치의 군복과 수도복 차림을 대조한 인물 소개.

필리포비치는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의 경비 책임자가 되었으며, 직접 최소 100명의 수감자를 살해했다고 자백한 인물로 소개된다. 범죄의 사악함과 잔혹함 때문에 ‘형제 사탄’이라는 뜻의 ‘프라 사타나(Fra Satana)’라는 별명을 얻었고, 전쟁이 끝난 뒤 자신의 범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최소 100명은 그가 직접 살해했다고 자백한 수감자 수다. 앞서 언급한 4년간 50만 명 이상의 희생자 집계는 우스타샤의 학살 전체를 가리킨다.

롭 매코믹(Rob McCormick)의 『안테 파벨리치 치하의 크로아티아: 미국, 우스타샤와 크로아티아의 집단학살』은 처형뿐 아니라 희생자의 신체를 훼손하고 고통을 가한 방식까지 기록한다. 106쪽의 인용문은 살해 과정에서 자행된 고문을 구체적으로 전한다.

“우스타샤는 살육의 욕망에 도취되어 희생자의 가죽을 벗기거나 산 채로 불태우는 등 갖가지 고문을 가했다. 성기 훼손이 널리 자행되었고, 특히 악랄한 자들이 이를 즐겨 행했다. 일부 세르비아인들은 몸이 토막 나고 코와 귀와 혀가 잘려 나갔다.”

파벨리치와 비오 12세의 만남, 교황청의 보고망

『미국의 예수회원들』의 한 인터뷰 출연자는 이탈리아 특파원의 이야기를 인용해 파벨리치의 잔혹 행위를 전한다. 그 특파원에 따르면, 파벨리치는 우스타샤가 희생자들에게서 도려낸 안구 40파운드가 담긴 고리버들 바구니를 자기 책상 위에 놓은 적이 있었다. 출연자는 자신의 책에서도 교황 비오 12세의 책임을 논평했다고 밝히며, 전쟁 중 파벨리치를 만난 교황이 유고슬라비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교계의 정기 보고와 교황 개인 대표를 통해 상황을 알았다는 맨해튼의 주장.

책임을 묻는 이유는 교황이 참상을 알았다는 데만 있지 않다. 파벨리치가 교황의 말을 들을 사람이었다면, 교황은 그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인터뷰 응답자는 관할 지역을 완전히 가톨릭화하려는 시도 속에서 살인과 강제 개종이 함께 벌어졌는데도 왜 교황이 범죄를 멈추라고 명령하지 않았는지 묻는다. 이어 그런 일이 교황권과 교회에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질문자와 응답자가 이때 명시적으로 가리킨 ‘교회’는 로마 가톨릭 교회다.

야세노바츠는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악명 높은 강제수용소로 소개된다. 수십만 명이 그곳에서 고문과 성폭행을 당하고 살해되었다는 설명에는 한 저자가 붙인 ‘우스타샤 정권의 가장 암울한 역사’라는 표현이 함께 인용된다. 이 참상을 교황청이 어떻게 알 수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20세기 저술가 애브로 맨해튼(Avro Manhattan, 1914–1990)의 『바티칸의 홀로코스트』가 제시된다. 로마와 연결된 우스타샤의 범죄를 다룬 이 책은 ‘20세기 가장 끔찍한 종교적 학살에 관한 충격적인 기록’으로 소개되며, 104쪽은 교황청에 소식이 전해지는 경로를 지목한다.

“바티칸은 우스타샤 치하 크로아티아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을 잘 알고 있었다. 이는 가톨릭 교계가 교황에게 정기적으로 보고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교황이 그곳에 자신의 개인 대표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맨해튼이 지목한 것은 가톨릭 교계의 정기 보고와 교황 개인 대표의 현지 체류라는 두 경로다. 비오 12세의 개인 대표로 소개되는 주세페 마르코네 몬시뇰(1882–1952)은 안테 파벨리치와 함께 있는 사진, 스테피나츠 대주교 옆에 앉아 있는 사진에도 등장한다. 맨해튼은 교계의 보고망에 더해 교황 자신의 대표까지 현지에 있었다는 점을 들어, 교황청이 우스타샤 치하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야세노바츠의 희생자를 기억하는 추모 표지

야세노바츠의 참극은 흔히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잔혹하고 야만적인 역사로 일컬어진다. 『미국의 예수회원들』은 세르비아 공화국 사람들이 추모 시설을 유지하며 70만 명이 넘는 희생자를 기린다고 전하고, 야세노바츠 추모비와 도냐 그라디나 추모 단지를 보여 준다.

중앙 추모 표지에는 ‘700 000’이 크게 적혀 있고, 주변에는 로마인 4만 명, 유대인 3만 3천 명, 어린이 2만 명을 기리는 표지가 따로 놓여 있다. 전체 희생자를 기리는 숫자 곁에 민족별 희생자와 어린이를 위한 표지가 자리한다.

히틀러가 유대인에게 자행한 홀로코스트가 가장 큰 주목을 받은 가운데, 애브로 맨해튼과 에드몽 파리의 저술은 우스타샤의 범죄와 교황청의 역할을 후대에 경고하려는 작업으로 소개된다. 교황청을 향한 비판은 전시의 학살을 알고도 막지 않았다는 책임에서 전후의 범죄자 보호 문제로 확대된다. 『미국의 예수회원들』은 전쟁이 끝나갈 무렵 바티칸이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책임을 피하도록 도울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두 차례 세계대전을 유럽 지배 계획으로 보는 주장

『예수회: 교황권의 비밀 군대』의 저자 숀 윌콕(Shaun Willcock)은 바티칸이 두 차례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일부 다른 강대국들을 지원한 목적이 유럽과 세계를 지배하는 데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가 보기에 이는 새로운 야망이 아니라 과거의 지배를 되찾으려는 시도였다. 교황청은 이전에도 여러 차례 유럽과 세계를 장악하려 했고, 유럽에서는 실제로 성공한 적이 있었으므로, 다시 그 지배를 이루기 위해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던 독일을 이용하려 했다는 것이다.

윌콕은 바티칸과 예수회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목적을 이루지 못하자 제2차 세계대전을 준비하는 쪽으로 나아갔다고 설명한다. 로마 가톨릭 체제는 두 전쟁에 모두 깊숙이 관여했으며, 특히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예수회의 영향력을 더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입장이다. 히틀러의 종교적 배경도 그 근거로 든다. 오늘날에는 잘 부각되지 않지만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로마 가톨릭교도였고, 오스트리아는 독일 민족권에서도 예수회의 색채가 매우 강한 지역이었으므로 히틀러 역시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본다.

여기에 『미국의 예수회원들』의 해설은 히틀러가 게슈타포를 거의 예수회 방식을 본떠 조직했다는 주장을 더한다. 히틀러 개인의 종교적 배경뿐 아니라 그가 구축한 조직의 운영 방식에서도 예수회의 영향력을 찾는 것으로, 게슈타포는 그 여러 사례 가운데 하나로 제시된다.

윌콕이 또 하나의 사례로 지목하는 곳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크로아티아다. 가톨릭교도가 대다수였지만 정교회 신자들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던 이 나라를 그는 사실상 예수회 국가라고 부른다. 파벨리치의 정예 경비대로 소개되는 우스타샤에 관한 당시 상황 설명에는 잔혹 행위뿐 아니라 조직 내부의 부패와 평판의 추락도 등장한다. 구성원들의 부패가 심해지고 독일인들 사이에서조차 악명이 높아지면서 조직이 붕괴하고 있었다는 내용이다.

『미국의 예수회원들』은 나치 국가였던 크로아티아가 때로는 독일 나치들이 유치원생처럼 보일 만큼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고 비판하며, 슬로바키아와 마찬가지로 크로아티아도 예수회원이 통치했다고 주장한다. 윌콕은 독일과 크로아티아를 아우르는 이러한 사례들을 들어, 두 차례 세계대전에서 바티칸 전반의 영향력, 특히 예수회의 영향력이 막대했다고 결론짓는다.

에드몽 파리의 저술과 프랑스의 전쟁 경험

나치의 프랑스 침공은 제2차 세계대전의 가장 극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였다. 프랑스 시민이었던 에드몽 파리(Edmond Paris)에게도 삶을 좌우할 만큼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며, 그는 조국이 완전히 해방될 때까지 나치의 폭정에 용감히 맞서 싸운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활동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파리의 저술은 이러한 전쟁 경험을 배경으로 나치즘을 뒷받침한 세력이 누구였는지 묻는다.

파리의 책에 실린 인용문 상당수는 전쟁 중이나 전쟁 직후에 나온 프랑스 출판물에서 가져왔다. 당시의 비밀 활동과 나치 방첩 조직, 열강의 역사를 다룬 다음 책들도 함께 소개된다.

저자제시된 저서표지에 나타난 범위와 정보
발터 하겐(Walter Hagen)『비밀 전선』(Le Front Secret)알베르 튀만(Albert Thumann)이 독일어 원문을 번역한 프랑스어판
발터 셸렌베르크(Walter Schellenberg)『나치 방첩 책임자가 말하다』(Le Chef du contre-espionnage nazi parle)1933~1945년을 다룬다는 표기
막심 무랭(Maxime Mourin)『열강의 역사』(Histoire des Grandes Puissances)1918~1958년의 프랑스·독일·영국·이탈리아·소련·미국·중국·일본

군사적 해방 뒤에도 나치즘을 뒷받침한 권력을 밝히려 했다는 점에서, 파리의 저술은 나치즘에 대한 저항을 계속한 작업으로 볼 수도 있다. 로마의 개입을 비판한 저자는 파리만이 아니었다. 작가 H. G. 웰스(H. G. Wells, 1866~1946) 역시 교황이 히틀러를 지지하다가 나치가 책임을 피하도록 돕고 싶어지자 비로소 평화를 설교하기 시작했다고 비난했다.

전범을 보호하는 평화와 용서에 대한 웰스의 비판

웰스가 문제 삼은 것은 평화와 용서 자체가 아니라, 그 호소로 누가 보호받으며 무엇을 할 수 있게 되느냐였다. 그는 『손잡이 달린 십자가: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고발』(Crux Ansata: an Indictment of the Roman Catholic Church)에서 교황의 호소를 전범들의 도피와 재공격을 돕는 행위로 규정했다.

“그가 지금 평화와 용서를 호소하는 것은 명백히 이 범죄자들의 도피를 도우려는 것이다. 그들이 머지않아 인류의 모든 선한 것에 새로운 공격을 가할 수 있도록 말이다.”

웰스에게 전쟁 책임을 묻지 않고 범죄자들을 놓아주는 일은 평화를 지키는 길이 아니었다. 당장의 전쟁을 끝내자는 호소라도 그 뒤에 다시 공격할 여지를 남긴다면 위험은 사라지지 않는다. 위험한 적이 제안하는 거짓 평화를 받아들이지 말라는 경고는 성경 여러 곳에서도 나타난다.

평화의 선언과 실제 안전은 다르다

평화를 약속하는 말이 백성을 안심시키더라도, 그들이 처한 위험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에스겔서에서 하나님께서는 헛된 것을 말하고 거짓을 본 자들을 대적하신다. 그들이 책망받는 이유는 실제로 화평이 없는데도 화평을 선포하여 백성을 현혹했기 때문이다.

회반죽으로 덮은 담을 통해 평화의 선언과 실제 안전의 차이를 설명한 그림.

에스겔 13:8 그러므로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너희가 헛된 것을 말하였고 거짓을 보았으니 그러므로, 보라, 내가 너희를 대적하노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에스겔 13:10 ○ 그들이 내 백성을 현혹하였으므로, 말하기를 “화평이라.” 하였으나 화평은 없었도다. 누군가가 담을 쌓으니, 보라, 다른 사람들이 잘 이겨지지 않은 회반죽을 바르는도다.

문제는 평화에 대한 기대가 단순히 빗나간 데 있지 않다. “화평이라.”라는 선언으로 위험한 현실을 가리고 백성을 안심시킨 데 있다. 따라서 평화의 약속을 판단할 때는 그 말이 주는 안도감보다 실제로 화평이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온다고 경고한다. 에스겔서가 거짓된 평화의 선언으로 백성을 현혹한 일을 책망한다면, 이 구절은 사람들이 평안과 안전을 말하는 바로 그때 닥칠 멸망에 주목한다.

데살로니가전서 5:2 이는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오리라는 것을 너희 자신이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3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말할 때에, 아이 밴 여인에게 진통이 오듯 갑작스런 멸망이 그들에게 임하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아이 밴 여인에게 닥치는 진통은 멸망이 갑작스럽고 피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안전하다는 확신과 실제 안전은 다르다. 평화를 보장한다고 믿었던 유럽의 협정과 그 뒤에 벌어진 전쟁도 이러한 성경의 경고에 비추어 볼 수 있다.

체임벌린의 평화 협정과 처칠의 항전

네빌 체임벌린은 아돌프 히틀러와 협상한 뒤 총통이 서명한 평화 조약을 가지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가 내세운 것은 두 지도자의 서명이 함께 담긴 문서였다. 체임벌린은 새로 체결한 협정과 영독 해군 협정이 양국 국민의 의지, 곧 다시는 서로 전쟁하지 않겠다는 뜻을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평화 협정에 대한 기대에서 전쟁 발발과 영국의 항전으로 바뀐 상황.

독일 총리 히틀러 씨와 다시 회담을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 이 문서에는 제 서명과 그의 서명이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어젯밤 체결한 협정과 영독 해군 협정이 우리 두 나라 국민이 다시는 서로 전쟁하지 않으려는 의지를 상징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히틀러와의 협정은 깨졌다. 두 지도자가 서명한 문서는 전쟁을 막지 못했다. 체임벌린이 물러나고 윈스턴 처칠이 그 자리를 대신했을 때, 영국이 마주한 과제는 평화의 약속을 믿고 안심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 맞서 나라를 지키는 일이었다.

처칠의 타협하지 않는 결의는 전쟁 중 연합군을 이끄는 힘이 되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섬을 지키겠다는 그의 선언은 해변과 상륙장에서 들판, 거리, 언덕에 이르기까지 항전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의 섬을 지킬 것입니다. 우리는 해변과 상륙장에서, 들판과 거리와 언덕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처칠의 영국관과 로마의 영향력

처칠의 신관에는 논쟁이 있다. 그러나 처칠이 개신교 영국을 로마주의라는 악당에 맞서 싸우는 역사적 자유의 수호자로 보았다는 점은 분명하다는 해석이다. 이와 함께 제시된 존 참리의 『가톨릭 헤럴드』 기사 제목도 「처칠은 가톨릭 신자들을 역사의 악인들로 보았다」이다. 처칠에게 영국의 항전은 이러한 종교적·역사적 대립과도 맞닿아 있었다.

로마가 히틀러와 나치 독일에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는 부인할 수 없어 보인다는 평가다. 그 근거로는 헤르만 라우슈닝의 『히틀러가 말하다』가 제시된다. 라우슈닝은 이 책에서 히틀러와 나눈 사적인 대화를 전한다. 책 표지에는 그가 『독일의 파괴 혁명』의 저자라는 소개도 붙어 있다.

히틀러가 예수회에서 배웠다는 라우슈닝의 증언

헤르만 라우슈닝(Hermann Rauschning, 1887–1982)은 나치 운동에 참여했다가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탈당하고 독일을 떠났다. 1939년에 처음 출판된 『히틀러가 말하다』는 그가 히틀러와 나누었다는 사적인 대화를 담고 있다. 나치 내부를 경험한 라우슈닝은 이 책에서 히틀러가 예수회와 가톨릭 교회의 조직을 자신의 당을 만드는 본보기로 삼았다고 전한다. 256쪽에 실린 발언은 다음과 같다.

“나는 무엇보다 예수회에서 배웠다. 레닌도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랬다. 세상에 가톨릭 교회의 위계적 조직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없었다. 나는 그 조직의 많은 요소를 내 당의 조직에 도입했다. 거의 2천 년 동안 부침을 겪으면서도 존속했다는 것은 대단한 업적이다.”

히틀러가 높이 평가한 것은 가톨릭 교회의 위계적 조직과 장기간의 존속 능력이었다. 거의 2천 년 동안 부침을 겪으면서도 살아남은 조직의 여러 요소를 당 운영에 도입했다는 것이다. 다만 레닌도 예수회에서 배웠다는 대목에는 “내 기억이 맞는다면”이라는 조건이 붙는다. 자신이 무엇을 본보기로 삼았는지 밝히는 말과 레닌에 대한 기억은 같은 확신으로 진술되지 않았다.

라우슈닝은 조직에 대한 히틀러의 찬탄을 기록했지만, 나치 운동의 미래는 파괴적으로 전망했다. 같은 책 9쪽에서는 히틀러와 그의 운동을 세계를 멸망시킬 묵시록적 기수들이라고 경고했다.

SS의 조직 원칙과 예수회 총장의 지위

나치 정보망의 최고위급 인사 중 한 명이었던 발터 셸렌베르크(Walter Schellenberg, 1910–1952)는 SS 최고지도자 하인리히 히믈러가 예수회를 본떠 조직을 발전시켰다고 서술했다. 당 조직 전반을 언급한 라우슈닝의 기록과 달리, 셸렌베르크의 증언은 SS의 운영 규칙과 훈련 방식, 지도자의 지위를 구체적으로 짚는다. 에드몽 파리는 자신의 저술 164쪽에서, 1957년 르네 쥘리아르에서 출판된 셸렌베르크의 『나치 방첩 책임자가 말하다』를 다음과 같이 재인용했다.

“히믈러는 SS 조직을 예수회의 원칙에 따라 구성했다. 예수회의 규칙과 이그나티우스 로욜라가 정한 영성 훈련은 히믈러가 그대로 모방하려 했던 본보기였다. SS 최고지도자인 히믈러의 직함, SS 전국지도자는 예수회 총장에 상응하는 직위가 될 것이었다.”

셸렌베르크가 지목한 모방은 지휘계통을 갖추는 데 그치지 않는다. 구성원에게 적용하는 규칙과 영성 훈련을 비롯해, 조직의 정점에 선 히믈러의 직위까지 예수회에 대응시킨다.

셸렌베르크가 지목한 예수회의 요소히믈러의 SS에서 대응하는 요소
예수회의 조직 원칙과 규칙SS를 구성하고 운영하는 본보기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의 영성 훈련히믈러가 그대로 모방하려 한 훈련 방식
예수회 총장SS 최고지도자인 SS 전국지도자의 지위

히믈러를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에 빗댄 말은 히틀러의 담화에도 등장한다. H. R. 트레버로퍼가 편집한 『히틀러의 식탁 담화, 1941–1944』 130쪽에는 다음 발언이 실려 있다.

“나는 히믈러에게서 우리의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를 본다”

라우슈닝의 기록에서 히틀러가 당의 본보기로 삼았다고 말한 대상은 가톨릭 교회의 조직이었다. 셸렌베르크는 그보다 구체적으로 SS의 규칙과 훈련을 예수회에 연결했고, 이 담화에서는 히믈러 개인이 로욜라에 비유된다. 조직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뿐 아니라 누가 그 조직을 이끌 것인가도 비교의 대상이 된 것이다.

히틀러와 바티칸 사이의 논란이 된 정교협약을 감독한 프란츠 폰 파펜(Franz von Papen)은 제3제국과 교황권의 관계를 한층 더 직접적으로 표현했다. 로베르 다르쿠르의 「프란츠 폰 파펜, 온갖 일을 하는 사람」은 파펜의 발언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제3제국은 교황권의 고귀한 원칙을 인정할 뿐 아니라 실천하기도 하는 최초의 세계 강국이다.”

이 글은 1946년 10월 3일자 『로브』에 실렸으며, 에드몽 파리가 『예수회의 비밀 역사』 165쪽에서 재인용했다. 파펜은 제3제국을 단지 교회의 조직을 본뜬 국가가 아니라, 교황권의 원칙을 인정하고 실제로 실행하는 세계 강국으로 평가했다.

람바흐 수도원의 스와스티카와 하근의 문장

『미국의 예수회원들』은 나치의 대표 상징인 스와스티카를 히틀러의 로마 가톨릭 교육과 연결하며, 그 기원을 이 교육에서 찾는 데 대체로 의견이 일치한다고 서술한다. 그 근거로 드는 것은 히틀러가 다닌 람바흐의 학교와 같은 이름의 수도원에 남아 있던 문장이다. 문장의 주인인 수도원장 테오데리히 하근(Theoderich Hagn, 1816–1872)은 19세기 사제로, 히틀러가 그곳에서 교육받기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히틀러가 스와스티카를 접한 계기로 지목되는 것은 하근과의 만남이 아니라 수도원에 남아 있던 그의 문장이다.

수도원장으로 소개되는 테오데리히 하근의 이름과 생몰연도를 표시한다.

에드몽 파리의 『예수회의 비밀 역사』 176쪽은 M. 무랭의 1958년 저술 『열강의 역사』를 인용해, 히틀러가 학교에 다니며 수도원 성가대에서 노래하던 시기에 이 상징을 접했다고 전한다.

“아돌프 히틀러는 롬바흐의 학교에 다녔고 같은 이름의 수도원에서 소년 성가대원들과 함께 노래했다. 그는 그곳에서 스와스티카를 발견했다. 그것은 수도원 관리자 하근 신부의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하근의 문장에 관한 설명은 『예수회의 비밀 역사』가 다른 저술을 인용한 형태로 제시된다.

어린 히틀러를 매료시켰다고 전해지는 이 문장의 중앙에는 갈고리 십자 형태의 상징이 있고, 그 위에는 주교관이 왕관처럼 놓여 있다. 상징을 둘러싼 T·H·A·L은 하근의 이름과 람바흐 수도원을 뜻하며, 아래에는 1869라는 연도가 새겨져 있다.

하근의 문장에 있는 주교관과 문자들을 설명하는 자료.

하근의 문장에 있는 주교관과 문자들을 설명하는 자료.

히믈러의 삼촌과 슈템플레의 예수회 연관설

나치와 로마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에는 나치 인사들과 가까운 사람들의 예수회 소속 여부도 포함된다. 에드몽 파리는 하인리히 히믈러의 삼촌이 예수회원이면서 SS의 주요 인사였다고 서술했다. 다만 그 삼촌의 이력에 관한 기록은 찾기 어려웠다는 한정도 함께 제시된다.

가톨릭 사제 베른하르트 슈템플레(Bernhard Stempfle, 1882–1934)의 경우에는 『나의 투쟁』 집필에 관여했다는 증언과 예수회 소속이라는 주장이 겹친다. 전직 나치 인사 오토 슈트라서는 슈템플레가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대필했다고 전했다. 그를 예수회원이라고 서술한 사람은 에드몽 파리다. 그러나 슈템플레는 다른 수도회 소속의 사제였으므로, 파리의 설명이 맞다면 예수회 소속은 비밀이었을 것이라는 조건부 추론이 뒤따른다.

슈템플레가 히틀러와 함께 찍힌 사진으로 소개된다.

슈템플레가 아돌프 히틀러와 함께 찍힌 사진으로 소개된다.

문화투쟁과 “우리는 카노사로 가지 않겠다”

『미국 내 예수회의 문화투쟁』의 저자 로널드 쿡(Ronald Cooke) 박사는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19세기 예수회가 개신교 지도자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1898)에 맞서 벌인 투쟁과 연결한다. 그 배경에는 19세기 중엽 비스마르크의 독일에서 시작된 문화투쟁(Kulturkampf)이 있다. 로마에 맞섰던 비스마르크는 1872년 예수회를 독일에서 추방했다.

비스마르크가 교황권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거론한 사건은 카노사의 굴욕이었다. 서기 1077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자신을 파문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용서를 구하려고 이탈리아 북부의 카노사 성 요새를 찾아갔다. 하인리히는 눈 속에 맨발로 서서 사흘을 기다린 뒤에야 용서를 받았다. 쿡 박사는 교황이 자신을 찾아온 하인리히 왕의 목을 발로 밟고 스스로를 일종의 세계 통치자로 선언한 사건으로 이를 묘사한다.

비스마르크는 하인리히처럼 굴욕을 감수하며 교황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겠다는 뜻을 1872년 5월 14일 제국의회에서 밝혔다.

우리는 카노사로 가지 않겠다.

교황권에 복종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풀이되는 비스마르크의 말.

비스마르크를 기리는 기념물에도 이 말이 독일어로 새겨졌다. “NACH CANOSSA GEHEN WIR NICHT”는 특정 장소에 가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라, 교황에게 굴복하기를 거부한다는 선언이었다.

문화투쟁과 『나의 투쟁』의 편집

쿡 박사는 예수회가 독일에서 자신들의 문화투쟁을 이끌었다는 점과 히틀러가 『나의 투쟁』을 썼다는 점을 나란히 놓는다. 독일어 제목 『마인 캄프(Mein Kampf)』는 ‘나의 투쟁’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두 투쟁을 연결한 데 이어 살펴볼 인물은 히틀러의 원고를 다듬은 슈템플레 신부다.

오토 슈트라서(Otto Strasser)는 1940년에 출판한 『히틀러와 나(Hitler and I)』에서 슈템플레가 『나의 투쟁』의 전체 원고를 두 차례 수정했다고 기록했다. 소개된 영어판은 그웬다 데이비드(Gwenda David)와 에릭 모스배커(Eric Mosbacher)가 번역했다. 슈트라서는 슈템플레의 작업을 단순한 교정 이상으로 묘사하며, 원고를 고치면서 히틀러의 약점을 깊이 알게 된 것이 결국 그의 죽음을 초래했다고 주장한다. 1940년판 57쪽에는 그 작업과 살해 경위가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학식이 풍부하고 미스바흐의 한 신문 편집자였던 선량한 슈템플레 신부는 수개월 동안 『나의 투쟁』을 다시 쓰고 편집했다. 그는 특히 명백한 오류와 지나치게 유치한 상투어를 제거했다. 히틀러는 자신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알게 된 슈템플레 신부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그는 특별 처형대를 시켜 슈템플레를 살해했다. 그날 밤은 6월 30일, 1934년이었다.”

슈트라서가 살해 날짜로 제시한 1934년 6월 30일은 히틀러가 나치당 내부의 경쟁자들을 제거한 악명 높은 ‘장검의 밤’이다. 슈트라서는 슈템플레의 죽음을 이 숙청과 연결하면서, 그가 표적이 된 이유를 원고 편집 과정에서 알게 된 히틀러의 약점에서 찾는다.

레두호프스키와 무솔리니, 교황의 세속 권력 회복

제2차 세계대전의 배후를 추적한 일부 연구자들은 예수회 총장 블라디미르 레두호프스키(Wladimir Ledochowski, 1866–1942)가 전쟁을 주도했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레두호프스키는 ‘히틀러의 검은 교황’이라 부를 수도 있다. ‘검은 교황’은 예수회 총장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레두호프스키와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를 잇는 인물로 지목되는 사람은 예수회 사제 타키 벤투리(Tacchi Venturi, 1861–1956)다. 레두호프스키가 무솔리니에게 배치했다는 벤투리는 ‘무솔리니의 예수회원’으로 소개되며, 1929년 라테라노 조약의 설계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이 조약은 바티칸 시국을 주권 국가로 인정하여 교황의 세속 권력을 회복시켰다. 1933년 바티칸과 독일이 정교협약을 맺기 전에, 이탈리아에서는 이미 무솔리니와 교황청 사이에 이러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최초의 독재자’로 불린 무솔리니는 현대 파시즘의 창시자로서 아돌프 히틀러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탈리아의 검은 셔츠단은 히틀러의 갈색 셔츠단에 영감을 주었으며, 무솔리니의 칭호 ‘일 두체’는 ‘지도자’를 뜻하는 말로 히틀러의 칭호 ‘총통’의 본보기가 되었다.

두 정권의 협력은 유고슬라비아 침공에서도 나타난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함께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고, 예수회 교육을 받은 스테피나츠 대주교의 감독 아래 안테 파벨리치가 이끄는 우스타샤를 세웠다는 주장이다. 또한 무솔리니 곁에 벤투리가 있었다면, 히틀러와 직접 연결된 예수회원은 총장 레두호프스키 자신이었다고 본다.

예수회와 독일 정보기관의 관계를 다룬 저술로는 독일 저자 발터 하겐(Walter Hagen)의 『비밀 전선』이 있다. 프랑스어판 제목은 『Le Front Secret』이며, 알베르트 투만(Albert Thumann)이 독일어 원문을 번역했다. 하겐은 레두호프스키가 예수회를 독일 정보기관과 연합시켰다고 썼다. 에드몽 파리는 『예수회의 비밀 역사』 인쇄본 238쪽에서 그 연합의 결과 많은 가톨릭 사제들이 나치 SS의 검은 제복을 입기 시작했다고 서술한다. 조직 간 협력이 사제들의 SS 참여로까지 이어졌다는 주장이다.

범게르만 연방 구상과 히틀러의 임무

미국 저자 F. 터퍼 소시(F. Tupper Saussy)는 예수회의 역사를 다룬 『악의 지배자들: 통치 기구에 관한 유용한 지식』 71쪽에서 레두호프스키가 구상한 유럽의 모습을 설명한다. 소시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가톨릭 행동의 정치적 중심에는 ‘검은 교황’으로 불린 레두호프스키의 전략이 있었다. 중부·동부 유럽의 가톨릭 국가들을 범게르만 연방으로 묶고, 그 연방을 이끌 지도자를 세워 주변의 적대 세력을 제압하려는 계획이었다. 소시가 제시한 지도자의 임무는 동쪽의 공산주의 세력과 서쪽의 개신교 국가들, 공화정 프랑스를 제압하는 것이었다.

방향제압 대상으로 지목한 국가소시가 부각한 종교·정치적 성격
동쪽소련공산주의
서쪽프로이센개신교
서쪽영국개신교
서쪽프랑스공화정

이 계획에는 여러 나라의 사람들을 이끌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가 필요했다. 소시는 레두호프스키가 가톨릭 군국주의자 아돌프 히틀러를 그 인물로 선택했다고 쓴다. 히틀러에게 맡겨졌다는 역할은 독일 내부의 권력을 장악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가톨릭 국가들을 결집한 연방의 지도자로서 유럽의 종교·정치 질서를 재편하는 일이었다.

소시는 같은 책 71쪽에서 레두호프스키의 범게르만 선언이 출판물로 나타난 형태가 히틀러의 자서전 『마인 캄프(Mein Kampf)』, 곧 『나의 투쟁』이었다고 서술한다. 베른하르트 슈템플레를 예수회 신부로 지칭하며 그가 이 책을 대필했다고 썼고, 『나의 투쟁』이 독일 교회의 제단에서 성경 옆에 놓였다고도 기록했다. 소시는 이 책을 히틀러 개인의 자서전이면서 동시에 범게르만 연방 계획을 담은 정치적 선언문으로 본 것이다. 슈템플레를 예수회원으로 지목한 점에서는 소시와 에드몽 파리의 견해가 같았다.

파리는 『예수회의 비밀 역사』 128쪽에서 히틀러가 추진한 계획의 후원자로 교황청을 지목했다.

“사실 총통은 시대적 필요에 맞게 조정한 레두호프스키의 계획을 교황청의 후원 아래 실현하려 했다.”

파리에게 히틀러는 레두호프스키의 계획을 단순히 되풀이한 인물이 아니었다. 기존 구상을 당시의 필요에 맞게 조정하고, 교황청의 후원을 받아 실행하려 한 인물이었다.

히틀러 지원을 고발한 『바티칸과 나치즘』

전쟁 당시 로마의 히틀러 지원을 비판한 문헌 가운데 하나는 런던의 개신교 진리 협회(Protestant Truth Society)가 출판한 『바티칸과 나치즘』이다. 이 책은 히틀러의 집권뿐 아니라 이후의 정복을 도운 조직으로도 로마 가톨릭 교회를 직접 지목한다. 23쪽에는 그 책임과 증거에 대한 확신이 함께 담겨 있다.

“히틀러를 권좌에 올려놓고 그의 정복을 도운 바로 그 조직은 로마의 바티칸에 본부를 둔 로마 가톨릭 교회다. 우리는 그 증거가 압도적이라고 믿는다.”

레오 H. 레만이 지목한 나치 파시즘의 기원과 목적

가톨릭 사제였다가 개신교로 개종한 레오 H. 레만(Leo H. Lehmann, 1895–1950)은 『독재자들의 배후』에서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로마의 권력 세력과 맺은 관계를 다뤘다. 부제는 ‘나치 파시즘과 로마 가톨릭주의의 관계에 대한 사실적 분석’이다. 『바티칸과 나치즘』이 히틀러를 지원한 가톨릭 교회의 책임을 물었다면, 레만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나치 파시즘의 기원과 목적 자체를 예수회에 연결했다. 그는 책 3쪽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예수회는 가톨릭 행동의 지도자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더 나아가 나치 파시즘이 예수회에서 기원했으며, 과거 파시즘과 유사했던 다른 운동들과 마찬가지로,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의 제자들이 추구한 전통적인 목적에 봉사하도록 계획되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나치 파시즘의 예수회 기원설과 전통적 목적의 관계를 길과 행렬로 나타낸 개념도

레만이 지목한 예수회의 역할은 이미 등장한 독재자들을 외부에서 돕는 정도가 아니었다. 나치 파시즘은 로욜라의 제자들이 오랫동안 추구해 온 목적에 봉사하도록 계획된 운동이며, 과거의 유사한 운동들 역시 같은 목적을 위해 움직였다는 주장이었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지키려면 눈앞의 독재 정권만이 아니라 그 배후에서 목적과 방향을 정했다고 본 조직에도 맞서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같은 책 4쪽의 문장은 그 대상을 분명히 한다.

“민주주의 이념의 옹호자들은 자신들의 진정한 적인 ‘검은 십자군의 기사들’에 공개적으로 맞서기 전에는 승리하지 못할 것이다.”

레만이 여기서 ‘검은 십자군의 기사들’이라고 부른 조직은 예수회다.

사전과 속담에 남은 예수회 비판

예수회를 향한 비판은 정치적 역할을 다룬 저술뿐 아니라, 그 이름에 붙은 부정적인 뜻과 속담에도 남아 있다. 『미국 내 예수회의 문화투쟁』의 저자 로널드 쿡 박사는 전직 예수회 사제 말라키 마틴(1921–1999)의 글을 인용하며, 20세기 이전부터 예수회원을 묘사해 온 비판의 언어를 소개한다. 인용문에 등장하는 『웹스터 제3판 국제사전』은 예수회원을 해당 수도회의 구성원으로 정의하는 한편, 다음과 같은 뜻도 싣는다.

“음모를 꾸미거나 모호한 말로 둘러대는 사람, 교활한 사람.”

함께 인용된 다른 사전에는 기만과 불성실을 뜻하는 표현들이 더 길게 나열되어 있다.

“표리부동한, 거짓된, 음흉한, 본심을 숨기는, 배신하는, 진실하지 않은, 불명예스러운, 부정직한, 거짓말하는.”

수도회의 구성원을 가리키는 이름이 음모를 꾸미거나 본심을 감추는 사람을 뜻하는 말로도 쓰였다는 것이다. 쿡 박사가 소개한 프랑스 속담에는 예수회를 향한 적대감이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예수회원 둘이 모이는 곳에는 언제나 악마까지 셋이 된다.”

이러한 비판의 언어와 함께 다뤄지는 문제가 유대인 박해와 반유대주의 선전이다. 암흑시대에 유대인 게토를 세우고 유대인들에게 수치의 노란 표지를 강제로 달게 한 주체로는 로마가 지목된다. 또한 20세기 예수회가 반유대주의를 훨씬 더 극단으로 몰고 갔다고 주장하며, 과거의 격리와 낙인을 나치 시대의 극단적인 반유대주의에 연결한다.

레두호프스키와 유대인을 공산주의에 연결한 선전

‘검은 교황’으로 불린 예수회 총장 레두호프스키와 예수회가 유대인에 대한 정치적 증오를 조장하고, 유대인을 인종적으로 공산주의와 연결하도록 요구했다는 주장이다. 주요 근거로 인용하는 책은 퓰리처상 수상 작가 데이비드 I. 커처(David I. Kertzer)의 『교황과 무솔리니: 비오 11세의 비밀 역사와 유럽 파시즘의 부상』이다. 커처는 레두호프스키를 극렬한 반유대주의자이자 파시즘에 호의적인 인물로 묘사하며, 무솔리니가 그에게 도움을 구했다고 서술한다.

서로 다른 정치체제를 유대인 음모로 묶고 반공 비판을 민족적 적대감으로 바꾸는 선전 방식.

커처의 책에 따르면, 예수회 잡지 『라 치빌타 카톨리카』(La Civiltà Cattolica, ‘가톨릭 문명’)는 유대인을 위험한 음모를 꾸미는 악의 세력으로 몰았다. 유대인이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모두 뒤에서 지배하고, 두 체제를 움직여 기독교인을 노예로 만들려 한다는 음모론이었다. 서로 다른 두 체제의 배후에 같은 적이 있다고 내세움으로써, 정치체제에 대한 반대를 유대인 전체에 대한 적대감으로 돌리는 선전이었다. 레두호프스키는 이 주장을 퍼뜨린 가장 영향력 있는 바티칸 인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교황 비오 11세 시대에는 이런 반유대주의 선전의 토대가 마련되고 있었으며, 비오 11세가 레두호프스키의 압력으로 공산주의를 규탄해야 했다는 설명이다. 교황의 반공 성명에 유대인을 끌어들이려 한 과정은 커처의 책 266쪽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성명에 유대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데 불만을 품은 레두호프스키는 유대인을 공산주의의 위험과 연결하는 문구를 추가하도록 교황을 계속 압박했다.”

레두호프스키가 요구한 수정은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높이는 데 그치지 않았다. 원래 성명에 없던 유대인 관련 문구를 넣어, 공산주의의 위험을 특정 민족과 결부하려 했다.

1890년의 ‘유대인 문제’와 나치 이전의 반유대주의

예수회의 반유대주의 선전이 19세기부터 출판물을 통해 전개되었다는 주장의 근거로는 『라 치빌타 카톨리카』의 1890년 출판물이 등장한다. ‘유럽의 유대인 문제’라는 제목 아래 내용은 ‘원인’, ‘결과’, ‘대책’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출처에는 제7권 제14호, 1890년 10·11·12월로 표기되어 있으며, 영어 번역 연도는 1998년이다.

1890년 표기는 나치 집권 이전의 반유대주의 출판물을 논하는 연대 비교에 사용된다.

세 부분 가운데 주목할 표현은 마지막에 붙은 ‘대책’, 곧 ‘해결책’이다. 유대인의 존재를 해결해야 할 문제로 다룬 이 표현이 훗날 홀로코스트를 초래한 히틀러의 ‘최종 해결’ 계획을 예고하는 듯하다는 것이다. 잡지는 유대인이 금융을 지배한다고 주장했으며, 『아리아인과 유대교 사이의 필사적인 투쟁』이라는 책도 언급했다. 이 책 제목은 아리아인과 유대교를 서로 맞서 싸우는 두 진영으로 놓아, 둘 사이의 관계를 필사적인 투쟁으로 그렸다.

작품이 반유대주의 선전의 사례로 언급하는 서명과 잡지 출처를 제시한다.

『아리아인과 유대교 사이의 필사적인 투쟁』을 소개하는 출처에는 『라 치빌타 카톨리카』 제7권, 1890년 10·11·12월과 영어 번역 연도인 1998년이 표기되어 있다.

이 출판물의 연대를 히틀러의 생애와 나란히 놓으면 예수회를 나치 사상의 선행 주체로 지목하는 이유가 분명해진다. 아돌프 히틀러는 1889년에 태어났으므로, 출판물이 나온 1890년에는 겨우 한 살이었다. 나치 운동을 움직인 사상은 히틀러 집권 거의 반세기 전에 이미 예수회에 의해 발전되었다는 주장이다. ‘해결책’이라는 말이 훗날의 ‘최종 해결’을 예고하는 듯하다는 연결에는 여지를 두지만, 반유대주의 사상을 먼저 발전시킨 주체로는 예수회를 분명하게 지목한다.

진주만 공격과 평화 협상의 이면

나치의 전격전이 유럽의 여러 나라를 압도하던 가운데,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은 미국을 전쟁으로 끌어들이며 전세를 뒤집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미국은 일본과 평화 상태였고, 일본의 요청에 따라 일본 정부 및 천황과 태평양의 평화 유지를 위한 협의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일본 제국의 해군과 항공 전력이 미국을 갑작스럽고 고의적으로 공격했다. 공격 당시의 미국 측 연설에는 이날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1941년 12월 7일, 치욕의 날로 영원히 기억될 날입니다.

일본 외교관들이 헐 국무장관과 평화 방안을 협의하는 바로 그때, 일본 항공기들은 진주만으로 급강하하고 있었다. 공격을 담은 영상 기록에는 미국 측 촬영분뿐 아니라 일본군이 해군기지와 휠러 비행장, 민가와 학교에 폭탄을 투하하며 촬영한 영상도 포함되어 있다.

『미국의 예수회원들: 미국 예수회주의의 역사』는 일본의 공격을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평화조약을 맺고도 영국을 배신한 일과 나란히 놓는다. 공격하는 순간까지 평화를 논의한 일본의 행동에 다윗이 기록한 시편 55:21을 적용한다.

시편 55:21 그의 입의 말은 버터보다도 매끄러웠으나 그의 마음속에는 전쟁이 있었도다. 그의 말들은 기름보다도 부드러웠으나 그것들은 뽑힌 칼이었도다.

여기서 주목하는 표현은 매끄러운 입의 말과 전쟁을 품은 마음의 대조다. 평화를 위한 대화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공격은 준비되고 실행되었다. 외교적 언어가 전쟁 의도를 감추는 수단으로 쓰였다는 비판이다.

일본은 진주만 공격보다 한 해 앞선 1940년 삼국동맹에 참여했다. 『미국의 예수회원들』은 이를 추축국의 세계 지배 계획에 가담한 것으로 설명한다. 함께 제시된 기록물은 그 계획을 추축국의 지배를 위해 세계의 대륙들을 나누는 것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까지 참전하면서 추축국의 거창한 세계주의적 계획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미국의 참전을 막으려 한 선전과 찰스 코글린 신부

에드몽 파리는 미국의 참전이 예수회 총장 레두호프스키가 두려워하던 사태였다고 서술한다. ‘검은 교황’으로 불린 총장이 아무리 거대한 전쟁 구상을 세웠더라도, 미국이 전쟁에 뛰어든 이상 히틀러와 추축국의 패배는 시간문제였다는 것이다. 미국의 승리 결의를 밝힌 연설은 군대에 대한 신뢰와 국민의 의지를 함께 내세웠다.

우리 군대에 대한 신뢰와 우리 국민의 끝없는 결의로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기를 바랍니다.

파리에 따르면, 예수회는 나치의 승리를 돕기 위해 선전으로 미국을 전쟁 밖에 묶어 두려 했다. 그 역할을 맡은 인물로 지목된 사람이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가톨릭 사제 찰스 코글린(Charles Coughlin, 1891–1979) 신부다. 파리는 코글린 신부를 예수회 요원으로 묘사한다. 라디오 방송으로 엄청난 추종자를 확보한 코글린 신부는 반유대주의적 언사로 알려졌으며,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지지했다. 1936년에는 『사회 정의(Social Justice)』라는 간행물을 창간했다.

파리가 지목한 코글린 신부의 임무는 미국인들이 제2차 세계대전 참전에 반대하도록 설득하는 일이었다. 미국의 불개입이 나치의 승리를 보장하는 데 기여하리라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파리의 서술에서 미국은 코글린 신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국을 지키기 위해 참전했고, 레두호프스키가 기대한 결과는 실현되지 않았다.

영국의 항복을 기대한 구상과 전쟁의 반전

파리의 『예수회의 비밀 역사』는 레두호프스키가 영국의 항복 뒤 로마에서 개최할 예수회 총회를 이미 거만하게 논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영국의 패배를 예상한 인물은 그만이 아니었다. 찰스 A. 린드버그(Charles A. Lindbergh)는 연설에서 영국의 전황을 이렇게 평가했다.

영국의 항복을 기대한 구상을 뒤집은 세 가지 전쟁 전개.

지난 몇 달 동안의 선전과 혼란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영국이 전쟁에서 패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합니다.

그러나 영국은 적에 맞서 싸울 결의를 다졌고, 미국은 참전했으며, 러시아 원정은 나치에게 재앙이 되었다. 파리는 “하늘의 결정은 달랐다”는 말로 예상과 달라진 전쟁의 전개를 표현한다. 영국의 항복을 전제로 한 계획과 나치의 승리에 대한 기대는 이 세 가지 전개 속에서 무너졌다.

기대하거나 추진한 일그 기대를 뒤집은 전개
영국의 항복 이후 로마에서 예수회 총회를 개최한다는 구상영국이 적에 맞서 저항할 결의를 다졌다.
선전을 통해 미국을 전쟁 밖에 묶어 두려는 노력미국이 참전했다.
나치의 승리에 대한 기대러시아 원정이 나치에게 재앙이 되었다.

『예수회의 비밀 역사』 180–181쪽에서 파리는 이 반전을 레두호프스키의 거대한 꿈이 붕괴한 사건으로 묘사한다. 총장의 건강도 그 재앙을 견디지 못해 결국 사망에 이르렀다고 서술한다. ‘검은 교황’으로 불린 블라디미르 레두호프스키 총장은 미국이 일본과 독일을 비롯한 추축국에 선전포고한 지 1년 조금 넘게 지난 1942년 12월에 사망했다.

전후 나치 전범의 도피와 바티칸 랫라인

『미국의 예수회원들』은 전쟁이 끝난 뒤 바티칸이 영국과 미국의 충실한 협력자들에게 나치 인사들이 재판과 처벌을 피하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다고 주장한다. 그 중심에 지목된 조직은 윌리엄 도너번이 이끈 전략사무국(OSS)이다. OSS가 이른바 바티칸 랫라인, 곧 전범들의 도피 경로를 구축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으며, 그 경로를 통해 수천 명의 나치 전범이 책임을 피했다는 것이다. 도피한 인물로는 클라우스 바르비, 요제프 멩겔레 박사, 아돌프 아이히만, 그리고 히틀러의 우스타샤 지도자가 열거된다.

바티칸의 요청과 OSS의 도움으로 전범들이 처벌을 피했다는 작품의 주장.

프란치스코의 국경·재산관을 둘러싼 비판

『미국의 예수회원들』은 제작 당시 교황이었던 프란치스코를 현대 예수회의 대표적 인물로 지목하며, 부의 분배와 국경 개방에 관한 그의 요구를 비판한다. 부를 다른 사람들과 더 많이 나누고 국경을 열라는 요구에는 전 세계 사람들이 미국의 모든 것을 누릴 권리가 있으므로 미국이 그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부를 공동 재산으로 취급한다는 점에서 이를 마르크스주의적 재산관으로 규정한다.

저자이자 연구자이며 전 로마 가톨릭 신자인 티머시 F. 카우프먼(Timothy F. Kauffman)은 바티칸의 성벽과 미국 남부 국경의 장벽을 대비한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바티칸에 있는 교황이 미국의 국경 장벽 건설은 잘못이라고 말하는 상황을 대단히 아이러니하게 느꼈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에는 국경을 열라고 요구하면서 자신은 성벽 안에 있다는 모순을 지적한 비판이다.

망치와 낫을 결합한 십자가상과 마르크스주의와의 대화

가톨릭과 공산주의의 관계를 직접 다룬 글로는 예수회 잡지 『아메리카(America)』가 2019년에 게재한 딘 데틀로프(Dean Dettloff)의 「공산주의를 옹호하는 가톨릭의 논거」가 있다. 기사에는 볼리비아 대통령이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십자가상을 건네는 사진이 실렸다. 그 십자가상은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적 상징인 망치와 낫을 결합한 형태였다.

망치와 낫 형태의 십자가상은 에스피날의 디자인과 교회·마르크스주의의 대화에 관한 설명에 대응한다.

이 디자인을 만든 루이스 에스피날(Luis Espinal, 1932–1980) 신부는 예수회 사제이자 영화 제작자, 활동가였다. 그는 1980년 정부 암살조에 살해되었다고 전해진다. 동료 예수회원 알보는 훗날 에스피날이 교회와 마르크스주의 사이의 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 이 디자인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 발언은 2015년 7월 9일자 NBC4 워싱턴 보도에 소개되었다.

『미국의 예수회원들』은 교황청과 마르크스주의의 대화가 최근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고 단언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을 세계 무대에서 마르크스주의를 가장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인물 중 하나이자 자본주의 체제를 비난받아 마땅한 것으로 여기는 인물로 묘사하며, 그보다 앞선 사례로 피델 카스트로를 지목한다.

카스트로를 ‘마지막 가톨릭 왕’으로 보는 이유

『미국의 예수회원들』이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공산주의자 중 하나로 소개하는 카스트로는 예수회 교육기관 세 곳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전 예수회 총장 페드로 아루페(Pedro Arrupe, 1907–1991)는 예수회가 카스트로를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카스트로가 공산주의자가 되기 전에 어디서 공부했느냐만이 아니다. 아르헨티나의 언론인이자 정치인인 노르마 모란디니(Norma Morandini)는 「피델 카스트로, 마지막 가톨릭 군주」에서 예수회 교육으로 얻은 종교적·도덕적 틀이 그의 공산주의 통치에도 남아 있었다고 서술한다.

종교적 공동체의 충성과 배제 구조가 카스트로 통치에 남았다는 해석.

“피델 카스트로는 예수회원이기를 그친 적이 없다. 오히려 이 가톨릭 수도회의 종교적·도덕적 틀을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맞게 적용하여 소련 측에 끝없는 혼란을 안겨 주었다.”

‘예수회원이기를 그친 적이 없다’는 표현이 가리키는 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받아들인 뒤에도 유지된 종교적·도덕적 틀이다. 카스트로의 통치를 이해하려면 공산주의 이념뿐 아니라 그가 물려받은 가톨릭적 권위와 공동체의 형태도 살펴야 한다는 뜻이다. 이탈리아 역사가이자 볼로냐대학교 교수인 로리스 차나타(Loris Zanatta)의 『피델 카스트로, 마지막 가톨릭 왕』도 이 이론을 바탕으로 한다.

이탈리아 테아트로 그란데(Teatro Grande) 웹사이트에 실린 역사 강의 소개문은 ‘반란자들’과 ‘마지막 가톨릭 왕 피델 카스트로’를 주제로 삼아, 카스트로의 정치권력이 종교적 공동체의 권위와 어떻게 결합하는지 설명한다.

“그는 가톨릭 왕들처럼 정치와 종교를 융합하며 정치적 종교, 곧 신앙 공동체를 구상하게 된다. 충실한 이들에게는 포용적이지만 이단자들에게는 가차 없다. 또한 그의 적은 가톨릭 스페인의 적과 같다. 바로 개신교 문명과 계몽주의로, 이제는 자본주의와 자유주의로 이름이 바뀌었다.”

‘마지막 가톨릭 왕’이라는 명칭에서 중요한 것은 통치자가 공동체에 대한 충성과 반대를 어떻게 다루느냐이다. 충실한 사람은 포용하지만 반대자는 이단자처럼 취급하는 통치 방식에는 정치와 종교를 융합한 신앙 공동체의 모습이 남아 있다. 적대 대상에서도 연속성을 찾는다. 가톨릭 스페인이 맞섰던 개신교 문명과 계몽주의가 현대에는 자본주의와 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카스트로의 적이 되었다는 설명이다.

『미국의 예수회원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차나타가 말하는 ‘자본주의’가 개신교적 정부 형태를 가리키는 예수회의 암호라는 주장을 하는 듯하다고 풀이한다. 이는 차나타의 소개문을 바탕으로 작품이 덧붙인 해석이다.

진리의 권위와 정치체제: 법이 왕인가, 왕이 법인가

진리의 최종 기준을 한 사람에게 두는가, 내용을 명시한 문서에 두는가. 『미국의 예수회원들: 미국 예수회주의의 역사』의 인터뷰는 종교적 권위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정치와 경제체제에 대한 선호에도 영향을 준다고 본다. 저자이자 연구자이며 전 로마 가톨릭 신자인 티머시 F. 카우프먼(Timothy F. Kauffman)은 로마 가톨릭의 권위 구조를, 한 사람이 무엇이 법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선언하면 나머지는 그에게 복종해야 하는 방식으로 비판한다. 진리가 궁극적으로 한 사람의 입과 말과 행동에 달려 있다고 믿으면, 정부와 경제에서도 한 사람에게 권한을 집중시키는 독재적 형태에 끌리게 된다는 것이다.

통치자도 법을 따르는 구조와 통치자의 판단이 법이 되는 구조의 차이.

온두라스와 베네수엘라는 로마 가톨릭 국가들이 마르크스주의적·사회주의적·독재적 정권으로 기우는 경향의 사례로 거론된다. 여기서 종교와 정치를 잇는 것은 복종의 기준이다. 종교 안에서 한 사람에게 진리를 결정할 권위를 맡기는 태도가 정부와 경제를 운영하는 권력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비판이다. 그 반대편에 놓이는 개신교의 근본 원칙은 무엇을 따라야 하는지 정확히 명시한 문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선언에 복종하는 대신, 문서에 적힌 내용을 권위의 기준으로 삼는다.

사람들이 함께 무엇을 할지, 어떤 원칙에 동의할지를 문서로 정하고 그 합의를 따르는 정치 형태가 입헌공화국이다. 개신교 국가들이 이러한 체제로 발전하는 경향이 있다는 설명의 중심에는 “법이 왕이다”라는 원칙이 있다. 반대로 독재적 공화국이나 군주국에서는 “왕이 곧 법이다”라는 원리가 작동한다.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도 법 아래 놓이는가, 아니면 그 사람 자신이 법의 기준이 되는가가 두 체제를 가르는 차이다.

이 비교에서 중요한 종교적 차이는 인식론, 곧 무엇을 진리로 받아들이며 그 판단의 권위를 어디에서 찾느냐에 있다. 인터뷰 응답자는 교황이 무오하며 진리가 성경이 아니라 교회에서 온다고 받아들이면, 정치와 경제에서도 한 사람이나 조직이 무엇이 참인지를 결정하는 체제로 기울게 된다고 설명한다. 반면 문서에 명시되고 사람들이 동의한 내용을 따르는 입헌공화국은 통치자의 선언보다 성문 헌법을 앞세운다. 성경과 교회 가운데 어디에 진리의 권위를 두느냐가 정치에서는 성문 헌법과 인물 중심 통치 사이의 선택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비교할 점법이 왕인 체제왕이 법인 체제
권위를 두는 곳문서에 명시되고 합의된 원칙한 사람이나 조직의 판단
연결되는 정치 형태입헌공화국독재적 공화국이나 군주국
인터뷰에서 제시한 종교적 경향개신교 신자들의 성문 헌법 선호가톨릭 신자들이 마르크스주의 독재 정권으로 기우는 경향

그러나 인터뷰 응답자는 입헌공화국도 실패할 수 있고 군주정도 좋은 체제일 수 있다고 인정한다. 입헌공화국이라는 이름이 좋은 통치를 보장하지 않으며, 군주정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쁜 통치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개신교 신자들이 성문 헌법을 선호하고 가톨릭 신자들이 마르크스주의 독재 정권으로 기우는 경향에는, 진리를 판단하고 권위에 복종하는 서로 다른 종교적 출발점이 작용한다고 본다.

사회정의의 기원과 부의 재분배

재산을 누구에게서 가져와 누구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가를 판단할 때에도 권위의 문제가 생긴다. 『미국의 예수회원들』은 예수회와 공산주의의 관계를 살피면서, 그 사상적 배경으로 19세기 예수회 사제 루이지 타파렐리(Luigi Taparelli, 1793–1862)를 지목한다.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을 출판한 해는 1848년이다. 이와 함께 두 사람의 전 2권짜리 『선집』 가운데 제1권이 소개된다. 타파렐리는 『공산당 선언』보다 불과 5년 앞선 1843년, 『사실에 기초한 자연권의 이론적 논고』에서 ‘사회정의’라는 말을 만들었다.

아퀴나스에 대한 타파렐리의 사상적 의존과 1843년·1848년 출판 시점의 차이.

타파렐리는 자신의 사상이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의 옛 가르침을 되살리려는 열망에 기초했다고 인정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회학자인 아퀴나스는 오늘날의 예수회원들도 사상적 근거를 찾기 위해 돌아가는 인물로 소개된다. 『미국의 예수회원들』은 그의 가르침을 ‘정당화될 수 있는 절도’라는 말로 비판한다. 좋은 이유로 훔친다면 이웃에게서 훔쳐도 괜찮다는 생각이며, 타파렐리가 이를 사회정의에 관한 가르침 속에 교묘하게 엮어 넣었다는 주장이다.

트리니티 재단(Trinity Foundation)의 연구자이자 라디오 진행자인 스티브 매슈스(Steve Matthews)는 사회정의의 주요 개념 가운데 하나로 재분배, 특히 부의 재분배를 꼽는다. 재분배는 복지국가뿐 아니라 ‘모든 재화의 보편적 목적’이라는 개념과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어떤 사람이 많은 재화를 소유하고 있을 때, 다른 사람에게 필요하다는 이유로 그 재화를 ‘잉여’라고 부르는 상황을 생각할 수 있다. 소유자에게 남는 재화라고 판단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정부를 동원해 가져다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이를 사회정의라고 부른다는 비판이다. 쟁점은 재화를 나누는 일 자체보다 타인의 필요가 소유자의 권리를 넘어설 근거가 되는가에 있다.

극도의 필요와 소유권의 변화

아퀴나스에게 귀속되는 ‘정당화될 수 있는 절도’의 논리는 이웃의 재산을 가져오는 일이 어떤 경우에는 죄가 되지 않는다는 데서 출발한다. 존 W. 로빈스의 『교회의 과대망상』 32쪽을 통해 소개되는 다음 글에서 그 조건은 극도의 필요다.

극도의 필요가 있을 때 자신이나 이웃을 위해 가져온 재화의 소유권이 바뀐다는 논리.

남의 재산을 몰래 가져다 쓰는 것은 극도의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엄밀히 말해 절도가 아니다. 생명 유지를 위해 가져온 것이 그 필요로 인해 자신의 재산이 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또한 곤궁한 이웃을 돕기 위해 남의 재산을 몰래 가져올 수 있다.

이 글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가져오는 경우와 같은 곤궁에 처한 이웃을 돕기 위해 가져오는 경우를 모두 허용한다. 어느 쪽이든 극도의 필요가 있어야 한다. 특히 중요한 것은 생명 유지를 위해 가져온 물건이 그 필요 때문에 가져온 사람의 재산이 된다는 문장이다. 절박한 사정을 고려해 절도의 책임을 줄이는 데 그치지 않고, 필요를 소유권이 바뀌는 근거로 삼는다. 『미국의 예수회원들』은 타인의 필요를 이유로 재산을 재분배하는 사상의 출발점을 여기서 찾는다.

불신자의 소유권과 교황에 대한 복종

생존의 필요와는 별개로, 재산을 가진 사람이 애초에 그것을 소유할 권리가 있느냐는 문제도 제기된다. 『미국의 예수회원들』은 아퀴나스가 불신자에게는 재산을 소유할 권리가 전혀 없다고 가르쳤다고 서술하며, 『신학대전』 제8항에 귀속한 다음 대목을 인용한다. 인용문 안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이 포함되어 있다.

소유자의 권리 부정에서 재산 몰수로 이어지는 작품의 인용·해석 구조.

그런데 불신자들이 가진 것들은 그들의 것이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정당하게 소유하지 않은 것들을 너희 것이라고 거짓되게 부른다. 또한 지상의 왕들의 법에 따라 너희는 그것들을 몰수당하도록 명령받는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의 재산을 빼앗는 것은 적법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는 곤궁한 사람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보다 현재 소유자의 권리가 정당한지가 판단의 기준이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귀속된 말은 소유의 정당성을 부정하면서 지상의 왕들의 법에 따른 몰수를 언급한다. 이를 근거로 인용문은 불신자의 재산을 빼앗는 것이 적법해 보인다는 결론에 이른다.

『미국의 예수회원들』은 교황권의 맥락에서 ‘불신자’를 교황에게 복종하지 않는 누구나로 풀이한다. 따라서 이 작품이 문제 삼는 소유권의 부정은 종교가 없는 사람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교황에게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재산을 빼앗길 수 있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다.

재화의 보편적 목적과 정부의 재분배

사유재산을 가져갈 수 있다는 논리는 불신자의 소유권 문제에만 머물지 않는다. 인터뷰 응답자는 재화의 보편적 목적, 또는 ‘모든 재화의 보편적 목적’을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공식 교리로 소개한다. 이를 사유재산과 타인의 필요가 충돌할 때 소유권을 제한하는 원리로 풀이한다.

개인 소유 인정에서 타인의 필요 판단과 정부 재분배로 이어지는 응답자의 설명.

그의 설명에서 로마는 사유재산을 전면 부정하지 않는다. 개인의 소유를 일정한 범위까지 용인하지만, 사유재산을 실정법, 곧 사람이 만든 법과 관례에 속한 것으로 취급한다. 따라서 개인이 합법적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언제나 마지막 판단 기준이 되지는 않는다. 누군가에게 그 재산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그에게는 기존 소유자로부터 재산을 가져갈 권리가 생기며, 소유자가 자발적으로 내놓지 않을 때에는 정부를 동원할 수 있다는 비판이다.

정부의 재분배가 정당화되는 과정에 대한 응답자의 설명은 세 단계로 정리할 수 있다.

  1. 개인의 소유를 일정 범위까지 인정한다. 다만 사유재산은 사람이 정한 법과 관례에 속한다.

  2. 타인의 필요를 소유권보다 앞세운다. 누군가에게 재화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기존 소유자에게서 그것을 가져갈 권리가 생긴다.

  3. 소유자가 거부하면 정부를 동원한다. 자발적으로 재산을 넘기지 않을 경우 정부가 가져가도록 할 수 있다.

응답자는 재화의 보편적 목적이 없다면 절도를 정당화할 수도 없다고 단언한다. 남의 재산을 가져오는 일을 정당하다고 하려면, 다른 사람의 필요가 기존 소유권보다 우선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재화의 보편적 목적은 ‘정당화될 수 있는 절도’를 떠받치는 기초가 된다.

타파렐리의 제자였던 빈첸초 페치(1810~1903)는 훗날 교황 레오 13세가 되었다. 레오 13세는 1891년 노동계급의 처지에 관한 회칙 『레룸 노바룸』을 발표했다.

『레룸 노바룸』과 마르크스주의 경제 비판

교황 레오 13세의 『레룸 노바룸』(Rerum Novarum)은 현대 가톨릭 사회교리의 대헌장으로 불려 왔다. 존 W. 로빈스(John W. Robbins) 박사는 『교회의 과대망상: 로마 가톨릭 교회의 경제 및 정치 사상』(Ecclesiastical Megalomania: The Economic and Political Thought of the Roman Catholic Church)에서 자신이 ‘로마 교회국가’라고 부른 체제의 경제적·정치적 세계관을 검토하며, 이 회칙을 마르크스주의와 강하게 연결했다. 그 근거 가운데 하나로 가톨릭 저술가의 평가를 인용했다.

“이 회칙의 마르크스주의는 너무나 노골적이어서 한 로마 가톨릭 저술가는 이렇게 선언했다. ‘이 회칙의 상당 부분은 마르크스가 10년 전에 했던 말을 더 정통적인 언어로 반복한 것에 불과해 보였다.’”

『미국의 예수회원들』은 마르크스가 교황의 회칙보다 10년 먼저 『자본론』을 출판했다고 설명하며, 두 저술이 경제 문제를 다루는 언어에 주목한다. 작품 속 인터뷰에서도 로빈스의 평가를 소개하면서, 회칙에 『공산당 선언』에서 통째로 가져왔다고 해도 될 만한 문단들이 있다고 전한다. 비판의 초점은 두 저술이 모두 노동자의 처지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데 있지 않다. 임금과 자본주의를 규정하는 표현이 서로 닮았다는 데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임금 노예제라는 표현이다. 인터뷰 응답자는 레오 13세가 임금을 일종의 노예제로 이야기했으며, 이런 언어를 사용한 교황이 그만은 아니었다고 설명한다. 공산주의 문헌 역시 자본주의를 임금 노예제 체제로 비판한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와 교황들이 자본주의에 대한 이 평가에 동의한다고 본다. 로마가 공산주의의 일부 요소를 좋아한다는 그의 결론은 이 공통점에 근거한다. 여기서 말하는 동의의 범위는 공산주의 전체가 아니라 임금과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특정 요소다.

비스마르크가 제기한 마르크스와 예수회 총장의 협력 의혹

경제사상의 유사성을 넘어, 마르크스와 예수회 지도부가 실제로 협력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1879년 독일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카를 마르크스가 당시 예수회 총장과 함께 일하고 있다는 자신의 생각을 신문에 싣기 시작했다. 그가 지목한 인물은 벨기에 출신의 피터 얀 벡스(Peter Jan Beckx, 1795–1887)였다. 벡스는 예수회 총장을 가리키는 비공식 호칭인 ‘검은 교황’으로 30년 넘게 재임한 인물이었다.

마르크스는 1879년 1월 5일 일요일 자 『시카고 트리뷴』 인터뷰에서 비스마르크가 자신과 벡스에게 제기한 혐의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두 달 동안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노스 저먼 가제트 지면에서 내가 예수회 운동의 지도자 벡 신부와 결탁하여, 우리가 사회주의 운동을 자신이 손쓸 수 없는 상태로 유지하고 있다고 불평했다.”

비스마르크가 두 사람에게 제기한 혐의는 단순히 경제적 견해가 비슷하다는 것이 아니었다. 마르크스와 예수회 지도자가 손을 잡고 사회주의 운동을 독일 정부의 통제 밖에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예수회원들』은 마르크스가 이 생각을 재미있어하면서도 부인하지는 않았다고 서술하며, 그 반응을 예수회와 사회주의의 관계가 사상적 유사성보다 깊다는 주장의 근거로 삼는다.

비스마르크와 예수회의 대립은 이 인터뷰보다 오래되었다. 그는 1872년 예수회를 독일에서 추방했으며, 평생 예수회와 사회주의 모두에 끈질기게 맞섰다. 1879년의 협력 의혹은 그가 오랫동안 반대해 온 두 세력이 서로 결탁했다는 혐의로, 양쪽을 함께 겨냥한 것이었다.

19세기 개신교 저술가들이 경고한 공산주의와 교황권의 관계

20세기의 마르크스주의 혁명들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일부 개신교 저술가들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위험을 교황권의 역사와 연결했다. 이들의 경고는 서로 다른 문제를 겨냥했다. 교황권의 지배가 공산주의를 낳았다는 비판이 있는가 하면, 로마가 사회주의 세력과 손잡으리라는 전망도 있었다. 예수회가 소수의 지도자를 통해 더 큰 운동을 통제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개신교 역사가이자 『교황권』의 저자인 J. A. 와일리(J. A. Wylie) 목사는 1868년 『일곱째 대접, 또는 교황 지배 아래 유럽의 과거와 현재』를 썼다. 저자의 법학박사 직함이 실린 이 책의 표제는 유럽의 과거와 현재를 요한계시록에 비추어 살피려는 목적을 밝힌다. 와일리 목사는 공산주의를 교황주의와 무관하게 생겨난 반종교 운동으로 보지 않았다. 『일곱째 대접』 256~257쪽에서는 교황주의의 미신과 폭정이 무신론과 무법을 낳았다며 강한 비유로 비판했다.

하늘이 진노하여 모든 악이 있는 곳에서 죄 많은 인류를 징벌하려고 악의의 화신을 보낸 적이 있다면, 그것은 공산주의다. 그러나 그것이 나온 지옥은 로마다. 공산주의는 교황주의의 악취 나는 자궁에서 태어났다. 교황주의의 미신은 무신론으로 변했고, 그 폭정은 무법을 낳았다.

와일리 목사가 문제 삼은 것은 두 세력의 일시적인 협력이 아니라 공산주의가 생겨난 원인이었다. 공산주의가 겉으로 교황권에 반대하더라도, 그 반항을 낳은 책임은 교황권의 지배에 있다는 비판이다.

로마의 사회주의 제휴 가능성과 소수 지도자의 통제

교황권을 비판한 『두 바빌론』으로 알려진 알렉산더 히슬롭(Alexander Hislop, 1807~1865) 목사는 그보다 앞선 1849년 『붉은 공화국, 또는 요한계시록의 주홍빛 짐승』에서 로마가 사회주의를 어떻게 대할지 전망했다. 공산주의의 발생 원인을 추적한 와일리 목사와 달리, 히슬롭 목사는 로마가 자신의 필요와 이익에 따라 사회주의 세력에 접근할 가능성에 주목했다. 『붉은 공화국』 144쪽에는 그 조건과 예상되는 행동이 함께 담겨 있다.

모든 참여자가 같은 소속이 아니어도 소수 지도자가 운동을 통제할 수 있다는 딥딘의 주장.

사회주의의 이 새로운 국면은 로마의 예리한 눈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로마가 붉은 공화국 사람들의 환심을 사는 것이 필요하거나 자신에게 이롭다고 판단한다면, 어떻게 할지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교황주의는 처음에는 세례받은 이교였다. 마지막에는 세례받은 무신론으로 나타날 운명인 듯하다.

히슬롭 목사의 경고에서 로마가 행동에 나서는 조건은 사회주의자들의 환심을 사는 일이 필요하거나 유익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런 판단이 서면 주저하지 않으리라고 보았다. “세례받은 이교”와 “세례받은 무신론”이라는 대비에는 교황주의가 서로 다른 사상을 종교적 외형 안에 받아들일 수 있다는 비판이 담겨 있다. 그러나 마지막에 어떤 모습이 될지에 대해서는 “운명인 듯하다”라는 표현으로 전망을 제시했다.

로버트 윌리엄 딥딘(Robert William Dibdin, 1805~1887) 목사는 1851년 출판한 『영국에 대한 경고와 조언』에서 사회주의 저술의 배후를 예수회와 연결했다. 그가 경계한 것은 개별 저술에 나타나는 사악한 생각이나 미혹, 광신만이 아니었다. 사회주의 저술에 상당 부분 들어 있는 반기독교적 체계의 기원을 예수회에서 찾았다.

나는 사회주의자들의 저술에는 단순한 사악함 이상의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단순한 미혹 이상의 것, 단순한 광신 이상의 것이 있다. 반기독교적 체계가 상당 부분 들어 있으며, 나는 그 기원을 예수회에서 찾는다.

같은 책 82~85쪽에서 딥딘 목사는 사회주의자들의 소속과 운동을 통제하는 사람들의 영향력을 구분했다. 모든 참여자가 예수회원이어야만 예수회가 운동을 이끌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논리였다.

물론 사회주의자 모두가 예수회원은 아니다. 하지만 두세 명의 책략가만으로도 나머지 모두를 통제하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딥딘 목사의 경고는 사회주의자 모두를 예수회원으로 분류하는 데 있지 않았다. 운동에 참여하는 다수와 그들을 통제하는 소수를 나누어 보고, 두세 명의 책략가만으로도 나머지 사람들을 이끌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붉은 공화국과 요한계시록의 주홍빛 짐승

히슬롭 목사에게 19세기 공산주의의 부상은 정치적 변화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요한계시록의 주홍빛 짐승에 관한 예언적 경고가 실현되기 시작한 사건이었다. 그는 붉은 공화국과 주홍빛 짐승을 같은 존재로 이해했으며, 그 짐승 위에 여자가 앉아 있는 장면에 주목했다.

요한계시록 17:3 그가 나를 영 안에서 광야로 이끌어가니라. 또 내가 보니, 한 여자가 주홍빛 짐승 위에 앉아 있는데, 그 짐승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로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졌더라.

히슬롭 목사가 중요하게 본 것은 짐승의 색깔만이 아니라 여자와 짐승의 관계였다. 붉은 공화국을 짐승으로, 그 짐승을 타거나 통제하는 창녀를 궁극적으로 로마로 보았다. 그렇게 보면 공산주의의 성장과 로마의 영향력 확대는 서로 배제되지 않는다. 로마는 성장하는 공산주의 세력 위에 올라타 그것을 통제할 수 있다. 로마가 필요와 이익에 따라 사회주의자들의 환심을 사려 하리라는 앞선 경고에는 이러한 예언 해석이 담겨 있었다.

프랑스혁명의 붉은 깃발과 잉골슈타트의 예수회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사용하는 붉은 깃발의 기원은 프랑스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전해진다. 붉은 깃발이 이어 온 혁명 전통은 예수회의 교육 활동과도 연결된다. 프랑스혁명에 영감을 준 사상들이 흔히 바이에른의 잉골슈타트대학교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겨지며, 그 대학은 예수회의 거점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는 것이다. 프랑스혁명을 선동한 책임자로 가장 흔히 지목되는 인물로는 아담 바이스하우프트(Adam Weishaupt)를 든다. 그를 훈련하고 교육한 사람들이 바로 잉골슈타트의 예수회 사제들이었다고 설명한다.

『미국의 예수회원들』은 이러한 교육적 배경에 주목하면서 붉은 깃발의 계승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프랑스혁명 세력의 붉은 깃발이 다음 세기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깃발이 된 것은 그저 우연일까?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붉은 깃발이 오늘날까지 하나님과 법치에 대한 반역의 상징으로 남아 있는 것도 우연일까? 여기서 붉은 깃발은 여러 정치운동이 공유한 색채를 넘어, 하나님과 기존 질서에 맞서는 혁명이 계속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워치맨과 쿠삭이 전한 예수회 내부의 폭로

1916년에는 워치맨(Watchman)이라는 필명을 사용한 익명 저자가 『로마와 전쟁, 그리고 영국에 다가올 사건들』에서 예수회와 사회주의의 관계를 경고했다. 속표지는 그를 『로마와 독일』의 저자로도 소개한다. 워치맨은 독일의 전직 예수회원 폰 호엔스브뢰흐가 밝힌 내부 사정을 근거로 두 세력의 관계가 입증되었다고 주장했다.

워치맨이라는 필명과 저서명을 보여 주는 속표지.

파울 폰 호엔스브뢰흐(Paul von Hoensbroech, 1852–1923) 백작은 독일 귀족 가문 출신의 저명한 가톨릭 신자로, 청년기에 예수회에 입회했다. 수도회를 떠난 뒤에는 『예수회원으로 보낸 14년』을 출판했으며, 제1권에는 ‘개인적 경험의 기록과 비판’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워치맨은 자신의 책 76쪽에서 호엔스브뢰흐가 예수회를 떠난 이유를 독일 사회주의와 연결했다. 독일의 예수회원들이 그 나라 사회주의의 주요 지도자이자 선동자라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에 탈퇴했다는 것이다.

폰 호엔스브뢰흐의 예수회 탈퇴와 집필, 쿠삭과 워치맨의 저술로 이어지는 인용 관계

전직 수녀 M. F. 쿠삭(Cusack)도 호엔스브뢰흐의 글에 주목했다. 『혁명과 전쟁: 영국 내 예수회의 비밀 음모』 119쪽에서는 탈퇴 연도를 1889년으로 밝히고, 이후의 저술 활동과 그가 느꼈다는 신변의 위협을 함께 전한다.

“폰 호엔스브뢰흐는 1889년에 예수회를 탈퇴했다. 독일의 예수회원들이 사회주의를 조장하고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주제에 관해 여러 소책자를 썼으며, 그 결과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하며 숨어 지내야 한다고 전해진다.”

워치맨은 예수회원들이 독일에서 사회주의를 조장했다는 폭로를 넘어, 사회주의 운동 자체가 예수회의 국제적 혁명 수단이라고 보았다. 『로마와 전쟁, 그리고 영국에 다가올 사건들』 80쪽에서 자신이 글을 쓰던 당시의 사회주의를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오늘날의 사회주의는 주로 예수회가 모든 나라에서 일으키려는 대혁명을 선동하기 위한 예수회 조직이다.”

독일 내 일부 예수회원의 활동이 아니라 각국에서 대혁명을 일으키려는 조직적 목적을 지목한 것이다. 워치맨에게 호엔스브뢰흐의 탈퇴와 폭로는 그 목적을 드러내는 내부자의 증언이었다. 호엔스브뢰흐 자신의 경험 기록, 쿠삭이 전한 탈퇴 이후의 행적, 워치맨의 정치적 비판은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저자와 저술해당 대목의 역할
파울 폰 호엔스브뢰흐, 『예수회원으로 보낸 14년』 제1권예수회 입회와 탈퇴를 경험한 인물의 개인적 기록과 비판
워치맨, 『로마와 전쟁, 그리고 영국에 다가올 사건들』 76쪽호엔스브뢰흐의 폭로를 예수회와 독일 사회주의의 관계를 입증하는 근거로 제시
M. F. 쿠삭, 『혁명과 전쟁: 영국 내 예수회의 비밀 음모』 119쪽1889년 탈퇴, 사회주의 관련 소책자 집필, 신변의 위협을 두려워해 숨어 지낸다는 전언
워치맨, 같은 책 80쪽당시 사회주의를 각국의 대혁명을 선동하기 위한 예수회 조직으로 규정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를 결합하려는 해방신학

『미국의 예수회원들』은 해방신학을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또 다른 갈래로 분류하며, 토마스 아퀴나스와 루이지 타파렐리의 저술이 그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고 설명한다. 그 중심에는 예수회 교육을 받은 도미니코회 사제 구스타보 구티에레스(Gustavo Gutiérrez)가 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를 결합하려 했으며, ‘해방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의 저서 『해방신학』에는 ‘역사, 정치, 구원’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해방신학의 발전을 설명하며 소개되는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워치맨과 쿠삭이 예수회와 사회주의 운동의 관계를 비판했다면, 해방신학을 둘러싼 비판은 마르크스주의가 기독교 안으로 들어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는 방식까지 바꾸는 문제에 집중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혁명가로 이해하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을 기독교의 메시지와 결합한다는 것이다.

지상 왕국을 세우려는 목표와 혁명의 수단

『미국 내 예수회의 문화투쟁』의 저자 로널드 쿡 박사는 해방신학의 출발점에 예수회가 있다고 본다. 그는 구티에레스를 페루의 예수회원으로 소개하며, 구티에레스가 해방신학에 관한 최초의 본격적인 표준 저술을 썼고 나중에는 미국 노터데임대학교의 교수로 임용되었다고 설명한다. 또한 말라키 마틴도 사실상 예수회를 해방신학의 창시자로 제시한다고 지적한다.

쿡이 비판한 지상 왕국 목표의 설득에서 강압과 제거로 이어지는 가정적 과정.

쿡 박사는 해방신학이 여러 사람을 끌어들인 중요한 이유로 혁명을 꼽는다. 혁명을 중심으로 신학을 설명하면서 예수님은 어느새 ‘최초의 혁명가’가 되었고, 그러한 생각이 복음주의 전반으로 퍼졌다는 것이다. 그는 이 사상이 널리 확산되었어도 그 근원은 기본적으로 예수회에 있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쿡 박사가 비판하는 해방신학에서 투쟁과 혁명은 출발점이 아니라 마지막 단계다. 먼저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운다는 목표를 내세우고,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이도록 가르치고 설득한다. 따라서 해방신학을 무장투쟁이나 혁명만으로 이해하면, 그에 앞서 종교적 메시지로 사람을 설득하고 움직이는 과정을 놓치게 된다. 쿡 박사는 예수회 교사나 설교자의 입장을 가정하여, 목표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다음과 같이 바뀐다고 비판한다.

  1. 설득: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는 목표를 받아들이도록 가르치고 권한다.

  2. 강압: 설득으로 동의를 얻지 못하면 상대를 강제로 따르게 하려 한다.

  3. 제거: 강압으로도 굴복시키지 못하면 상대를 제거하려 한다.

베스트팔렌 평화와 국가 주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프랑스 지도자 샤를 드골과 윈스턴 처칠은 각자의 나라가 ‘제2의 30년 전쟁’의 끝에 이르렀다고 선언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앞선 유럽의 종교전쟁에 빗댄 표현이다. 첫 30년 전쟁은 1618년부터 1648년까지 이어졌으며, 약 8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각 국가가 영토와 내정을 스스로 통제한다는 국가 주권의 설명.

첫 30년 전쟁은 예수회와 가톨릭 동맹이 유럽 전역의 개신교 운동을 말살하려 했던 전쟁으로 설명된다. 개신교 측이 결국 승리하면서 1648년 베스트팔렌 평화가 체결되었다는 것이다. 전쟁을 끝내는 일과 함께 중요한 것은 각 나라가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스스로 통치할 수 있느냐는 문제였다.

트리니티 재단의 라디오 진행자 스티브 매슈스는 베스트팔렌 평화를 30년에 걸친 전쟁을 끝낸 조약이자 현대 국제관계 체제의 토대로 설명한다. 그 중심에는 국가 주권이 있다. 개별 국민국가는 자국의 영토와 내정을 통제하고, 스스로 원하는 방식으로 나라를 운영할 권한을 가진다. 매슈스가 짚는 종교적·정치적 의미는 로마의 간섭을 제한한다는 데 있다. 로마가 개별 국가의 내정에 개입하여 어떤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2의 30년 전쟁 이후에는 로마와 예수회 사제들이 그 질서를 뒤집으려 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해석이다. 개별 국가의 주권을 인정하는 대신 지상의 모든 나라에서 그 주권을 무너뜨리고, 베스트팔렌 질서를 대체할 새로운 세계 질서를 세우려 한다는 비판이다.

국경 개방과 인구를 통한 정치적 장악

『미국의 예수회원들』은 이 새로운 세계 질서를 구상하는 로마의 움직임 가운데 하나로 국경 개방을 지목하고, 이를 반종교개혁의 전술과 연결한다. 군사력으로 국경을 넘는 대신 인구를 이동시켜 정치적 지배력을 얻는다는 것이다. 『미국 내 예수회의 문화투쟁』의 저자 로널드 쿡(Ronald Cooke) 박사는 이탈리아어에서 온 이레덴티즘(irredentism)이라는 말로 그 방식을 설명한다. 그가 이 말로 지칭하는 것은 군사 충돌이 아니라 인구를 통제하여 외국을 장악하는 일종의 ‘이민 전쟁’이다.

쿡 박사는 이레덴티즘을 오늘날 로마 가톨릭주의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꼽으며 얼스터를 사례로 든다. 아일랜드 남부에서 사람들이 대거 올라오면서 정치적 힘의 균형이 달라졌다는 설명이다. 이와 함께 페이즐리가 늘 했다는 말을 인용한다.

“총탄으로 통치하지 말고 투표로 통치합시다.”

쿡 박사는 총탄 대신 투표로 통치하자는 말에서 인구 이동이 정치권력을 바꾸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역설을 짚는다. 자신을 지지할 사람들이 한 지역에 충분히 들어와 표를 준다면, 무력 없이도 선거에서 이기고 숫자의 힘으로 정부의 모든 부문을 장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설명하는 과정은 세 단계다.

  1. 특정 지역으로 사람들이 대거 유입되어 인구 구성이 달라진다.

  2. 유입된 사람들이 자신들이 지지하는 후보에게 투표하여 선거 결과를 바꾼다.

  3. 선거로 정부 각 부문을 장악하면서 무력에 의존할 필요가 줄어든다.

쿡 박사는 이러한 인구 이동과 선거를 통한 장악을 로마의 또 다른 술책이라고 비판하며, 이레덴티즘이 세계 장악을 위한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에 속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힌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종교 사이의 경계

국경 개방에 대한 비판은 종교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문제로 이어진다. 『미국의 예수회원들』은 로마가 국가의 국경뿐 아니라 세계 종교들의 경계도 열었으며, 특히 예수회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기독교와 세계의 이교 종교들 사이에 있던 교리적 경계를 없앴다고 비판한다.

그 근거로 인용하는 문헌은 1964년 11월 21일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인류의 빛」 제16항이다. 헌장·교령·선언으로 이루어진 공의회의 기본 문헌 16편을 소개하는 문헌집과 함께 이슬람에 관한 다음 문구를 제시한다.

“구원 계획에는 창조주를 인정하는 이들도 포함되며, 그 가운데 첫째는 무슬림들이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한 분이신 자비로운 하나님을 경배한다.”

「인류의 빛」 제16항이 서술하는 구원 계획 안의 가톨릭 신자와 무슬림

비판이 집중되는 부분은 무슬림도 구원 계획에 포함되며 가톨릭 신자들과 같은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대목이다. 이를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에 대한 완전한 배반으로 보는 이유는 단순히 다른 종교와 교류하기 때문이 아니다. 서로 다른 종교를 하나의 구원 계획 안에 포괄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양립할 수 있느냐가 쟁점이다.

다른 복음에 대한 경고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해답

종교통합을 판단하는 기준은 갈라디아서 1장에 나오는 바울의 경고다. 여기서 저주의 대상은 단순히 복음을 전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전해진 복음 대신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다.

사도나 천사도 예외 없이 이미 전해진 복음의 내용에 따라 판단된다는 기준.

갈라디아서 1:8 그러나 우리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것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으리라.

갈라디아서 1:9 우리가 전에도 말한 것같이 지금도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으리라.

같은 경고가 두 번 반복되는 것은 성령께서 그 뜻을 분명히 알게 하시기 위한 강조다. 바울은 이 기준을 다른 사람에게만 적용하지 않는다. ‘우리뿐만 아니라’라는 말로 자신도 그 아래 두며, 하늘에서 온 천사조차 예외로 삼지 않는다. 누가 전하느냐보다 무엇을 전하느냐가 중요하다. 사도 자신이나 천사라도 이미 전해진 복음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같은 저주를 받는다.

이 경고에 비추어 종교통합의 결과를 묻게 된다. 종교통합이라는 거짓 복음이 미국과 세계에 저주를 가져오고 있는 것일까? 해답은 종교들을 포괄하는 새로운 구원 설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게 있다. 요한복음 14:6에서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나아가는 길을 밝히신다.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아무도 없느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을 여러 길 가운데 하나로 제시하지 않으신다. 그분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사람이 없다는 말씀은 서로 다른 종교를 함께 포괄하는 구원 설명과 정면으로 대조된다. 아버지께 나아가는 길이 누구인지를 밝힌 이 말씀에 더해, 요한복음 17:3은 영생이 무엇인지를 가르친다.

요한복음 17:3 영생은 이것이니, 곧 사람들이 유일하시고 참 하나님이신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옵니다.

영생은 유일하시고 참되신 하나님과 그분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따라서 해답은 종교 사이의 교리적 차이를 없애는 데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에 있다. 이는 구원에 관한 문제에만 머물지 않는다. 사회의 병폐와 문제, 정치와 교육에 대한 유일한 해답 역시 그분의 복음 안에 있는 주 예수 그리스도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이 이러한 병폐를 다스리는 해독제다.

PRIVATE MESSAGE

운영자에게 메시지

이 메시지는 공개되지 않으며 운영자만 확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