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 그리스도인의 선택을 위한 네 가지 기준
영화와 음악을 즐기고, 직장에서 돈을 벌고, 가족과 휴가를 보내며, 새로운 기술을 사용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도 깊이 들어와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거부할 수는 없지만, 필요하거나 즐겁다는 이유만으로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도 없다. 문제는 얼마나 엄격하게 사느냐만이 아니라, 무엇을 근거로 받아들이고 거절하느냐에 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서 데려가 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셨다. 세상에 남아 있는 그들을 악에서 보호하시고 아버지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해 달라고 구하셨다. 세상과 접촉하는 것과 세상에 속하는 것은 다르다. 사람들의 문화를 이해하는 일이 죄에 타협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되듯, 거룩함을 지키려는 노력도 세상의 모든 것을 죄로 취급하는 태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 경계를 분별하려면 네 가지 기준을 함께 살펴야 한다. 죄악된 활동을 성경으로 분별하고, 판단이 어려운 영역에서는 더 성경적인 쪽을 택하며, 행동으로 세상과 같은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고, 형제들과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질문은 ‘이 일을 해도 되는가?’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 선택에서 하나님과 세상 중 무엇을 앞세우는지, 다른 사람에게 어떤 간증을 남기는지, 함께 믿는 형제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까지 물어야 한다.
세상의 것들을 얼마나 멀리해야 할까?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어떻게 반응하고, 세상의 것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세상에 죄가 가득하니 세상의 것들을 피하라는 말은 간단하지만, 실제 생활에서 어디까지 피해야 하는지를 정하기는 쉽지 않다. 무엇이든 세속적이라고 몰아붙이면 지나치게 영적인 모습을 추구하다가 오히려 기이한 생활 방식에 빠질 수 있다. 그렇다고 죄를 경계하는 일을 소홀히 할 수도 없다. 세상을 멀리한다는 것은 수도사들처럼 세상의 모든 것과 관계를 끊는 일일까?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에 살면서 거룩함을 지키는 기준이다.
교회에서도 서로 반대되는 모습이 나타난다. 어떤 교회는 지나칠 만큼 거룩해 보이려 하고, 어떤 교회는 너무나 세속적으로 보인다. 록 콘서트식 예배에 질린 사람들이 전통적인 예배를 찾아가는 경우가 그 사이의 어려움을 보여 준다. 성경을 믿는 교회로 향할 것 같지만, 이들 가운데는 정교회를 택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곳이 훨씬 ‘교회답고’ 거룩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진하 목사는 정교회를 “완전히 이교적”이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전통적이고 종교적인 분위기에 끌리는 것과 올바른 교회를 찾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세속적인 모습을 싫어한다고 해서 세상을 대하는 태도까지 저절로 바로잡히지는 않는다. 모든 것을 배척하거나 세속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양극단 사이에서, 단지 더 엄격하고 더 종교적으로 보이는 쪽을 고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세상의 것들을 어떻게 다루고 얼마나 삼가야 하는지, 그 안에서 어떻게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구체적인 생활 문제에서는 판단이 더욱 어려워진다. 교회는 세상을 비판하는 설교에서 특정 비디오게임과 영화, 음악과 옷차림을 죄악된 것으로 지적한다. 그러나 각각의 사례를 자세히 살펴보면 성경을 믿는 올바른 교회들 사이에서도 판단이 상당히 다르다. 세상의 죄를 경계해야 한다는 데는 동의하면서도,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답을 내놓는다.
문화를 이해하는 것과 죄에 타협하는 것은 다르다
여성이 바지를 입는 문제에서도 성경을 믿는 교회들의 판단은 갈린다. 복장에 관한 기준을 세우는 데는 타당한 이유가 있지만, 여성이 바지를 입어도 괜찮다고 보는 교회들도 있다. 이런 차이는 교회 사이의 큰 쟁점이 된다. 성경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근본주의적이고 율법주의적이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록 콘서트식 교회들에는 세속적이라는 비난이 따른다. 그러나 무엇을 금한다는 이유만으로 율법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또 어떤 모습 때문에 세속적이라고 판단하는 것일까? 어느 쪽을 향한 비난이든 옳고 그름을 가릴 기준이 있어야 한다.
잃어버린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려면 피해야 할 것을 정하는 데서 그칠 수 없다. 그들에게 다가가려면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체계를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세상적이라는 말이 반드시 악하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들이 익숙하게 여기는 문화와 생활방식을 가리킬 수도 있다. 나라마다 사정이 다르므로 말라위, 한국, 일본, 멕시코의 교회를 남부에서 교회를 운영하는 방식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서부나 북부의 운영 방식을 기준으로 삼아도 마찬가지다. 교회마다 처한 환경이 다르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려고 세상의 문화와 체계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타협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교회들도 있다. 문제는 단순히 다른 지역의 관습을 받아들이는 데 있지 않다. 사람들에게 다가가려다가 교회 자체가 육신적이고 죄악되며 세속적으로 변하는 것이 문제다. 사람들의 문화를 이해하는 일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죄에 타협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문화 이해와 죄악된 세속성의 구분
문화 이해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해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지역별 차이를 아는 일이다.
죄악된 타협은 그들에게 다가가는 과정에서 교회 자체가 육신적이고 죄악된 모습으로 변하는 일이다.
판단의 이유를 성경에서 알아야 한다
세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분별하려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뿐 아니라 그 이유도 성경에서 알아야 한다. 신앙을 처음 배우는 사람은 어떤 행동을 피해야 하는지, 다른 교회의 가르침이 왜 잘못되었는지, 자신이 다니는 교회는 왜 그렇게 가르치며 그 가르침이 왜 옳은지를 이해해야 한다. 이유도 모른 채 관행을 따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근거가 되는 성경 구절을 살피고, 그 가르침을 이해하며 옳다고 믿기 때문에 실천해야 한다. 그래야 무엇을 해야 하는지와 무엇이 잘못인지를 함께 분별할 수 있다.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에게도 이런 공부는 필요하다. 익숙한 주제에서도 기초로 돌아가 살펴야 할 부분이 있을 수 있다. 세상과의 관계를 생각하면서도 한 번도 고려하지 못한 문제나 성경의 대목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알고 있는 성경 지식을 실제 생활의 판단에 적용하려면, 자신의 선택이 어떤 말씀에 근거하는지 살펴야 한다.
요한복음 17장은 세상에 사는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 관해 기도하시며, 자신도 그들과 함께 세상에 계셨다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7:12 내가 그들과 함께 세상에 있었을 때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켰나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그들을 내가 지키었고 멸망의 아들 외에는 그들 중 아무도 잃어버리지 아니하였으니 이로써 성경이 이루어지게 한 것이옵니다.
여기서 먼저 주목할 표현은 “내가 그들과 함께 세상에 있었을 때는”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밖에서 따로 생활하지 않으셨다. 제자들과 함께 세상에 계시면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키셨다. 그러므로 세상에 있다는 사실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과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은 다르다
요한복음 17장 1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주신 사람들을 지키셨으며, 멸망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잃어버리지 않으심으로 성경이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셨다. 그들을 지키신 곳은 세상과 떨어진 별개의 장소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계시던 세상이었다.
요한복음 17:12 내가 그들과 함께 세상에 있었을 때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켰나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그들을 내가 지키었고 멸망의 아들 외에는 그들 중 아무도 잃어버리지 아니하였으니 이로써 성경이 이루어지게 한 것이옵니다.
그러나 같은 세상에서 산다고 해서 세상에 속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말씀을 주신 제자들을 세상은 미워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 것처럼 제자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디에 사는지와 어디에 속하는지는 서로 다른 문제였다.
요한복음 17:14 내가 그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더니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나이다.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것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세상과 분명히 달라야 한다. 그러나 세상과 다르게 사는 것을 세상의 모든 것과 관계를 끊는 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구하신 것은 세상에서 벗어나는 일이 아니라, 그 안에서 악으로부터 보호받는 일이었다.
요한복음 17:15 내가 기도하옵는 것은 아버지께서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는 것이 아니옵고 그들을 악에서 보호해 주시라는 것이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서 데려가 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셨다. 12절에서 말씀하셨듯이 예수님 자신도 제자들과 함께 세상에 계셨다. 따라서 세상과의 분리를 모든 접촉을 끊는 극단적인 분리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세상에 살면서 세상의 모든 것과 떨어져 지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살아가는 동안 어떤 것들은 마주하며 함께 살아가야 하고, 직접 다루거나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 가운데는 그리스도인도 소유하고 사용하는 것들이 있다.

‘세상적’이라는 말의 두 가지 의미
세상적(worldly)이라는 말은 대체로 부정적인 뜻을 띠며, 성경에서도 대부분 좋지 않은 의미로 쓰인다. 그러나 세상의 것들을 사용하는 문제에서는 이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구별해야 한다. 죄악된 세속성을 뜻할 때도 있지만, 단순히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용한다는 뜻일 때도 있다. 세상의 것을 소유하거나 사용한다는 사실만으로 곧 죄가 되는 것은 아니므로, 어느 의미로 쓰였는지는 문맥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 ‘세상적’이라는 말의 용법 | 뜻 |
|---|---|
| 죄를 가리키는 부정적인 용법 | 죄악된 세속성을 뜻한다. |
| 세상의 것들을 사용하는 용법 | 세상에 있는 것을 소유하거나 사용한다는 뜻으로, 그 표현 자체가 곧 죄를 뜻하지는 않는다. |
요한복음 17장 15절에서도 예수님께서 구하신 것은 제자들을 세상에서 데려가는 일이 아니라 악에서 보호하는 일이었다. 세상에 남아 살아간다고 해서 세상에 속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16절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속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한다.
요한복음 17: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것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사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속하지 않지만, 세상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세상과 분리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면서도,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져 살 수는 없다는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멀리해야 할 것들은 피하되, 살아가면서 접하고 다루어야 할 것들까지 모두 거부할 수는 없다. 필요한 것은 이 둘을 구별하여 세상에 살면서도 악을 피하는 일이다.
기술의 나쁜 열매와 피할 수 없는 사용
비디오게임, 영화, 인터넷, 챗GPT(ChatGPT), 인공지능(AI), 구글(Google) 같은 기술과 매체에는 나쁜 열매가 있다. 그 안에는 악이 너무나 많고, 사람을 더 게으르게 만드는 요소도 있다. 생활을 이어 가는 데 이런 도구를 의존하다 보면 정작 자신은 열심히 노력하지 않게 된다. 기술을 비판하는 이유는 단순히 낯선 도구가 싫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사람의 생활과 태도에 이런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기술의 확산을 막거나 사용을 완전히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쁜 열매가 있어도 좋든 싫든 사용해야 하는 현실이 있다. 특히 AI를 둘러싼 상황은 앞으로 더 나빠질 것이며, 몇 년만 더 지나면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AI를 상대해야 할 것이다. 직접 사용하는 사람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통해 도움을 받는 사람도 그 영향을 피하기 어렵다. AI를 직접 다루지 않는 조부모라도 손주에게 연락해 대신 일을 처리하거나 AI를 써 달라고 부탁할 수 있다. 자신의 손으로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기술과 관계없이 사는 것은 아니다.
기술의 해로운 영향을 인정하는 것과 기술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모든 접촉을 끊겠다는 결심만으로는 세상에 살면서 악을 피해야 하는 과제를 해결할 수 없다. 필요한 것은 무엇을 사용하고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 판단할 기준이다.

악을 피하고 정결함을 지키는 기준
요한복음 17:15 내가 기도하옵는 것은 아버지께서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는 것이 아니옵고 그들을 악에서 보호해 주시라는 것이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구하신 보호는 세상과의 모든 접촉을 막는 보호가 아니었다. 피해야 할 대상은 악이다. 기술을 비롯한 세상의 것들을 사용해야 한다고 해서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괜찮아지지는 않는다. 실제로 악하고 죄악된 것들은 피해야 한다.
요한복음 17:17 아버지의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부할지 판단하며 세상으로부터 정결함을 지키게 하는 유일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거룩하게 해 달라고 구하실 때 그 수단으로 말씀하신 진리는 아버지의 말씀이었다. 따라서 무엇이든 배척하거나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양극단을 피하려면 삶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한다. 말씀은 금지할 대상을 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정결함을 지키도록 실제적인 도움을 준다.
교회와 가정에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것
그리스도인의 분리는 남보다 거룩한 체하며 세상의 것은 단 하나도 사용할 수 없다고 하는 극단적인 분리가 아니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면 모두 수도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것들 가운데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고 허용하시는 것도 있다. 그리스도인이 자유롭게 즐길 수 있으며, 심지어 교회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문제는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모든 것을 사용해도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교회에서는 세상의 것 가운데 무엇을 사용해서는 안 되는지 분명한 경계선을 그어야 한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교회 안에서만 조심할 것이 아니라, 집에서도 잘못된 것이어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판단해야 한다.
김진하 목사는 오늘날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경계를 세우려 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오히려 경계를 지키려는 사람을 남보다 거룩한 체하는 금욕적인 수도사처럼 취급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만 반복한다는 것이다.
“이걸 교회에서 쓰는 게 뭐가 잘못됐죠? 저걸 쓰는 게 뭐가 잘못됐죠? 아무 문제 없어요. 저는 저걸 써도 돼요.”
그러나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에게도 답해야 할 질문이 있다. 교회 안에 있어서는 안 되는 세상적인 것은 무엇일까? 잘못된 것이어서 집에서도 사용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 자신에게도 실제로 피해야 할 것들의 목록이 있을까? 다른 사람이 그런 목록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비난하면서 자신은 아무 목록도 갖고 있지 않다면, 무엇을 거부해야 하는지조차 정하지 않은 것이다. 극단적인 금욕을 반대한다고 해서 악을 피해야 할 책임까지 없어지지는 않는다.
요한복음 17: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것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사옵니다.
그 경계를 세울 근거는 어떤 사람의 말에 동의하느냐가 아니라 요한복음 17장의 말씀에 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남아 살아갈 제자들에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하셨다. 살아가는 데 세상의 것들이 필요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일지 판단하는 기준까지 세상에 맡길 수는 없다. 교회와 가정에서 일부를 사용하면서도 반드시 피해야 할 것을 가려내야 하는 이유다.
세상과의 접촉과 악의 수용은 다르다 세상의 것을 사용한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죄악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허용하셔서 자유롭게 즐기고 교회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세상의 것을 사용해야 한다는 이유로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것도 아니다. 악을 피하고 정결함을 지키는 경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단해야 한다.
첫 번째 기준: 죄악된 활동을 성경으로 분별한다
세상에서 완전히 벗어나 살 수는 없지만, 그 안에서 피해야 할 활동은 있다. 필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단절이 아니라,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하나씩 분별하는 일이다. 요한복음 17장은 세상에 남아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악을 피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보여 준다.
요한복음 17:15 내가 기도하옵는 것은 아버지께서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는 것이 아니옵고 그들을 악에서 보호해 주시라는 것이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서 데려가 달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곳에 남아 있는 제자들을 악에서 보호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따라서 분별의 첫 번째 기준은 세상 활동 가운데 실제로 죄악된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모든 활동을 처음부터 허용한다면,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 살필 이유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7:17 아버지의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무엇이 악하고 무엇이 거룩한지를 가르는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제자들을 거룩하게 하는 진리가 아버지의 말씀이므로, 어떤 활동을 피해야 하는지 알아갈 때도 그 말씀을 따라야 한다. 악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말씀을 통해 구체적으로 분별하고 거룩함을 구해야 한다.
판단하기 어려운 활동에도 선택의 책임이 따른다
죄악된 활동이 존재한다는 원칙을 인정하는 것과 특정 활동을 곧바로 죄라고 판정하는 것은 다르다. 이 원칙만으로 어떤 사람의 옷차림이나 듣는 음악, 보는 영화를 이미 정죄한 것은 아니다. 입에 무언가를 물고 연기를 내뿜는 행위도 아직 개별적으로 판단한 것이 아니다. 먼저 모든 활동이 무조건 허용되지는 않는다는 데서 출발한 뒤, 각각의 활동을 살펴야 한다.
개별 사례로 들어가면 판단이 간단하지 않을 수 있다. 마리화나를 예로 들면, 누군가는 “마리화나가 뭐가 잘못인데요? 저는 의료 목적으로 필요해요.”라고 반문할 수 있다. 의료 목적이라는 사정까지 고려하면 무엇이 죄악되고 무엇이 거룩한지 쉽게 말하기 어려운 영역이 생긴다.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일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일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일부 활동을 판단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옳고 그름 자체를 알 수 없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 수 없으니 원하는 것은 뭐든 쓰고 남을 판단하지 맙시다.”라는 태도는 자유주의적 상대주의에 빠지는 길이다. 판단이 어렵더라도 자신의 선택이 거룩한지 아닌지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분별하는 법을 보여 준다면 그 말씀을 따라야 한다.
판단의 어려움과 선택의 책임 어떤 활동이 죄인지 쉽게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 활동을 무제한으로 허용하지는 않는다. 분명한 성경 구절을 기준으로 삼아 불분명한 영역을 분별하며, 그 선택에 대해서는 하나님 앞에 책임을 진다.
록 음악을 판단하려면 무엇을 살펴야 할까?
록 음악은 성경에 직접 이름이 나오지 않는 활동을 어떻게 판단할지 보여 주는 사례다. 많은 영적인 사람에게는 록 음악이 죄악되고 잘못되었다는 점이 명백하더라도, 그렇게 선언하는 것만으로 성경적 근거를 제시한 것은 아니다. 록 음악 자체를 직접 지목하는 명확한 성경 구절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먼저 성경이 분명하게 잘못이라고 하는 것들을 확인하고, 그 기준에 따라 록 음악을 살펴야 한다.
죄와 음행, 정욕, 폭력처럼 성경이 잘못이라고 경고하는 것들이 있다. 이런 문제를 다루는 분명한 구절에서 출발하여 록 음악 안에 그 요소들이 있는지를 대조하면, 무엇을 근거로 잘못이라고 판단하는지 설명할 수 있다. 단순히 활동의 이름을 놓고 허용과 금지를 다투는 대신, 성경이 밝힌 잘못이 그 활동에 들어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이처럼 명확한 말씀은 회색지대를 외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무엇이 괜찮고 무엇이 잘못인지 분별하도록 돕는다.

자녀에게 경계를 세울 때도 감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김진하 목사는 죄악된 세상 활동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태도에 대해, 동성애는 무엇이 잘못이냐고 반문한다. 동성애를 잘못된 활동의 사례로 들며, 어떤 행동을 잘못이라고 말하려면 먼저 세상에 죄악된 활동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을 짚는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차례로 빠르게 만나 데이트하는 일 역시 경계의 필요성을 생각하게 하는 사례다.
자녀가 온라인에서 상대를 빠르게 만나고 있는데, 부모는 그 상대가 여자인지 남자인지조차 모르고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다고 해 보자. 부모는 자녀가 어떻게 행동하기를 바랄까? 자녀가 “그게 뭐가 잘못인데요? 명확한 성경적 근거를 대 보세요. 혼자 거룩한 척하시네요.”라고 반응한다고 해서 무엇이든 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명확히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더라도 경계선은 세워야 한다. 잘못된 것이 있다고 여겨지는 상황에는 주의를 주어야 하며, 불분명하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행동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경계가 필요하다고 해서 부모의 모든 판단이 옳아지는 것은 아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어떤 행동이 잘못이라고 말하려면, 자신의 감정이나 개인적인 신념만을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 자녀가 부모와 똑같이 믿고 느낀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은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으며, 다른 사람도 당연히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할 것이라는 기대만으로는 서로 다른 판단을 해결할 수 없다.
온라인에서 이성과 빠르게 데이트하는 경우를 일단 그렇다 치더라도, 자녀가 부모가 알지 못하는 다양한 성별의 상대와 만나면서 그것을 전혀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까? 부모가 “아니, 그건 잘못이야.”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판단의 기준은 부모가 얼마나 불편하게 느끼고 얼마나 강하게 반대하는지가 아니라 명확한 성경적 근거여야 한다. 동시에 부모가 그 행동을 잘못이라고 말한다면, 세상의 활동 가운데 잘못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이미 자기 입으로 인정한 것이다.
경계의 필요성과 판단의 근거 회색지대가 있다는 사실은 무엇이든 허용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경계를 세워야 한다는 사실은 개인의 감정이나 신념만으로 옳고 그름을 정해도 된다는 뜻도 아니다.
김진하 목사는 누구와 사귀는지를 개인의 생활방식으로만 보고, 어떤 성별의 사람들이 서로 사귀든 상관없다고 여기는 세상의 태도를 비판한다. 동성애와 LGBTQ+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선택하고 실험할 수 있다고 여기는 세상적인 생활방식으로 다루며, 그에 대한 제지를 거부하는 태도를 다음과 같은 가상 반론으로 드러낸다.
“당신들 그리스도인이 뭔데 나한테 하지 말라는 거죠? 혼자 거룩한 척하는 금욕주의 수도승 같으니라고.”
이 반응은 행동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제지하는 사람을 거룩한 척하는 금욕주의자로 몰아붙인다. 김진하 목사의 비판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향한다. 자유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인의 제지를 이런 식으로 거부하듯, 그리스도인도 자신이 원하는 활동에 경계가 제시되면 상대를 거룩한 척하는 사람으로 몰아붙일 수 있다. 자유주의자가 그리스도인을 비판하고, 현대 그리스도인이 이른바 근본주의 그리스도인을 비판하는 사이에서도 판단의 근거는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상대의 태도를 공격하는 것만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답할 수는 없다.
죄라고 판단하는 사람에게는 성경으로 뒷받침할 책임이 있다
성경적 근거를 요구하는 일은 필요하다. 다만 그 요구가 회색지대에서는 어떤 경계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태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활동이 무조건 허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원칙을 인정한다고 해서, 개별 행동에 관한 김진하 목사의 판단에 모두 동의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특정 활동을 어떻게 평가할지는 여전히 의견이 다를 수 있다. 죄악된 활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뒤, 성경의 단서들을 따라 무엇이 죄인지 구체적으로 살펴야 한다.
반대로 어떤 활동을 죄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그 판단을 성경으로 뒷받침할 책임이 있다. 단지 자신이 잘못이라고 생각한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해서는 안 된다. 성경적 근거 없이 죄라고 단정한다면, 그런 태도를 지적하는 자유주의자들의 비판이 옳다. 죄악된 활동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요구와 특정 활동이 죄라는 판단을 입증해야 한다는 요구는 함께 적용된다.
그렇다고 성경에 오늘날의 모든 활동과 기술이 이름 그대로 등장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1세기에 기록된 사도 요한의 글이 AI 사용을 직접 거론하며 그것이 죄악되고 잘못이라고 말해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현대 기술을 성경과 무관하게 판단할 수는 없다. 구체적인 명칭이 등장하지 않는 활동도 명확한 성경 구절을 기준으로 살펴야 한다.
회색지대에서는 더 성경적인 쪽을 택한다
특정 활동을 죄라고 단정하려면 성경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옳고 그름을 간단히 판단하기 어려운 회색지대에서도 실제로 어느 쪽을 택할지는 결정해야 한다. 이때 필요한 두 번째 기준은 육신적이고 죄악된 쪽보다 더 성경적인 쪽을 택하는 것이다. 명백한 잘못인지를 묻는 데서 멈추지 않고, 가능한 선택 가운데 어느 쪽이 말씀에 더 가까운지를 살펴야 한다.
죄의 판단과 회색지대의 선택 특정 활동을 죄라고 판단하려면 그에 해당하는 성경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 판단이 단순하지 않은 영역에서는 육신적·죄악된 방향보다 더 성경적인 방향을 택한다.
더 성경적인 쪽을 택해야 하는 이유는 정결함과 거룩함을 어디서 얻는지에 있다. 세상의 기준에 잘 맞는다고 해서 사람이 거룩해지는 것은 아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거룩하게 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분명히 밝히셨다.
요한복음 17:17 아버지의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거룩하게 하는 진리가 아버지의 말씀이므로, 정결하게 되려는 사람은 말씀에 가까이 가야 한다. 회색지대에서 더 성경적인 쪽을 택하라는 것은 개인의 취향을 더 엄격한 규칙으로 만들라는 요구가 아니다. 거룩함을 얻으려는 목적에 맞게 선택의 방향도 말씀에 가까워야 한다는 뜻이다.
요한복음 17:14 내가 그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더니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나이다.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것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옵니다.
요한복음 17:15 내가 기도하옵는 것은 아버지께서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는 것이 아니옵고 그들을 악에서 보호해 주시라는 것이옵니다.
14절과 15절에는 말씀을 받은 제자들이 세상에서 어떤 처지에 놓이는지가 나타난다. 세상은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제자들을 미워하며, 제자들은 그 안에서 악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 세상이 정결함을 얻기에 가장 좋은 곳이 아닌 이유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서 데려가 달라고 구하신 것은 아니다. 세상에 있는 동안 악에서 지켜 달라고 기도하셨다. 세상에 살되 세상의 기준을 따르지는 않는 삶이 필요하다.
판단이 어려워도 선택의 방향은 있다
어떤 활동에 잘못이 없다거나 그것이 옳다고 판단할 때는 무엇을 기준으로 삼았는지부터 살펴야 한다. 세상의 통념이나 현대인의 생각, 주변 사람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정도가 기준일까, 아니면 성경이 기준일까?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해서 성경적으로도 옳은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말씀에 비추어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그렇게 살펴도 결론이 쉽게 나지 않는 활동이 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아도, 성경을 통해 판단하려 해도 분명히 옳다거나 그르다고 말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판단이 어렵다는 이유로 상대주의자처럼 두 손을 들고 무엇을 하든 상관없다고 할 수는 없다. 옳고 그름을 단정하기 어려운 것과 모든 선택을 똑같이 취급하는 것은 다르다. 그런 때에도 성경에 더 가깝고 세상에서 더 먼 쪽을 따라야 한다.
요한복음 17:17 아버지의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회색지대에서도 말씀에 가까운 쪽을 택해야 한다는 원칙을 거부한다면, 말씀으로 거룩하게 된다는 가르침을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성경은 명백한 금지 사항을 찾아내는 데만 쓰이는 책이 아니다. 무엇이 금지되어 있는지 분명히 가려내기 어려울 때에도, 거룩함을 향해 어느 쪽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알려 준다.
요한복음 17:14 내가 그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더니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나이다.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것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옵니다.
요한복음 17:15 내가 기도하옵는 것은 아버지께서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는 것이 아니옵고 그들을 악에서 보호해 주시라는 것이옵니다.
세상에서 악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세상에 더 가까운 선택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없다. 세상에는 악으로 기우는 경향이 더 크기 때문이다. 성경보다 세상 쪽으로 더 기울어진 선택에는 누구를 우선하는지가 드러난다. 따라서 회색지대에서도 명백한 잘못을 피했는지만 살필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세상 가운데 어느 쪽을 더 따르려 하는지 살펴야 한다.
활동 자체와 그것을 사랑하는 마음은 다르다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라고 해서 모두 그 자체로 죄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허용되는 활동이라도 그것을 사랑하는 마음에서는 성경이 죄라고 지적하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같은 일을 죄가 아니라고 했다가 다시 죄라고 하는 모순이 아니다. 활동 자체의 허용 여부와 그 활동을 향한 사랑은 서로 다른 문제다. 무엇에 참여하는지만 아니라, 하나님과 세상 가운데 무엇을 더 사랑하는지도 살펴야 한다.
요한일서 2:15 세상도, 세상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를 사랑함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요한일서 2장 15절은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아버지를 사랑하는 문제와 직접 연결한다. 따라서 어떤 활동을 해도 되는지 알아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허용되는 일이라는 답을 얻었더라도, 그것을 선택하는 마음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앞서는지 물어야 한다.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는 우선순위는 그대로 남는다.
핵심 구분: 활동의 허용 여부와 사랑의 우선순위
세상의 활동이라고 해서 모두 그 자체로 죄인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 활동을 향한 사랑까지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지가 판단에 포함된다.
그렇다면 자신이 무엇을 더 사랑하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좋아하는 활동의 이름이나 겉모습만으로는 답하기 어렵다. 그 활동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좇는지 살펴야 한다.
요한일서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생의 자랑이요, 아버지께 속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라.
16절이 밝히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생의 자랑은 모두 아버지가 아니라 세상에 속한다. 어떤 활동에 명백한 금지 사항이 없더라도, 그 안에서 좇는 것이 이런 욕망이라면 마음이 어디로 기울어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세상의 즐거움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운다
즐거움을 누린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한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즐거움과 하나님의 뜻 가운데 어느 쪽을 앞세우느냐다. 요한일서 2장 15~17절을 함께 읽으면, 세상에 속한 욕망이 무엇인지뿐 아니라 그것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드러난다.
요한일서 2:15 세상도, 세상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를 사랑함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요한일서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생의 자랑이요, 아버지께 속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라.
요한일서 2:17 세상도, 세상의 정욕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17절은 사라지는 세상과 그 정욕을 영원히 거하는 사람의 삶과 대조한다. 그러므로 당장 얼마나 즐거운지만으로 선택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세상의 즐거움보다 하나님의 뜻을 우선하는가를 살펴야 한다. 하나님보다 세상의 즐거움을 앞세운다면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이며, 요한일서 2장 15~17절의 말씀을 어기는 것이다.
아주 기본적인 원칙처럼 들리지만, 판단이 복잡해질수록 이런 기초로 돌아가야 한다. 철학자들이 깊고 복잡한 개념을 다루면서도 기초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도 같다. 어떤 개념을 받아들이는 근거부터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깊이 분석해야 자신이 왜 그것을 믿는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식의 근거를 살피는 인식론(epistemology)도 이 문제와 연결된다.
오늘날 성경을 안다고 하는 신학자들이 철학에 크게 몰두하는 것 역시 기초로 돌아가 깊은 개념을 검토하려는 접근과 관련된다. 주요 신학계와 학계에서도 이러한 작업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도 옳고 그름을 가리기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먼저 판단의 기초를 분명히 해야 한다. 무엇을 더 사랑하고 누구의 뜻을 앞세울 것인지는 복잡한 선택 앞에서도 놓쳐서는 안 될 기본 원칙이다.
직장과 투자, 휴가에서 무엇을 우선하는가
자기 직장을 사랑하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다. 그러나 돈을 벌고 생계를 유지하게 해 준다는 이유로 하나님보다 직장을 더 사랑한다면,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 생계에 필요한 일이라도 하나님보다 앞세울 수는 없다. 돈도 그 자체로 죄는 아니지만, 돈을 벌고 쓰는 구체적인 선택에는 무엇을 더 사랑하는지가 드러난다.
활동 자체와 사랑의 우선순위 직장을 사랑하는 것과 돈 자체가 곧 죄는 아니다. 그러나 생계와 수입을 이유로 직장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다면,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
주식 투자, 초과 근무, 휴가 여행을 위한 저축처럼 구체적인 문제에 부딪히면 판단이 복잡해진다. 자유롭게 해도 되는 일이 있는가 하면, 옳고 그름을 분명히 가리기 어려운 회색지대도 있다. 이 모두를 한꺼번에 금지하거나 허용할 수는 없다. 어떤 활동인지만 볼 것이 아니라, 왜 그 일을 하려는지, 삶에서 얼마나 큰 자리를 차지하는지 살펴야 한다. 그 선택에서 하나님보다 세상의 즐거움을 앞세우고 있지는 않은지가 중요하다.
가족 휴가를 위해 돈을 모으고 아내와 자녀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일이 반드시 하나님보다 세상을 앞세우는 것은 아니다. 휴가는 쉬면서 가족과 유대를 다지는 시간이 될 수 있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더 나은 아버지와 남편이 되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릴 수 있다. 가족과 좋은 시간을 보내려는 목적을 빼놓고 여행이나 즐거움 자체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휴가 중에 돈을 내고 먹는 음식과 여행, 찾아가서 보는 경치도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가 된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마음에 두면 세상의 즐거움을 누리면서도 하나님을 우선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즐거움을 전혀 누리지 않는 데 있지 않고, 그것을 어떤 마음과 목적으로 누리느냐에 있다.
그러나 같은 돈을 쓰더라도 목적은 다를 수 있다. 아주 비싼데도 단지 나를 즐겁게 해 준다는 이유로 지출하려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한다. 육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 기분이 좋아지는 데만 마음이 쏠릴 수 있기 때문이다. 육신은 즐거움을 원하지만 고난과 어려움을 겪거나 주를 위해 힘써 일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따라서 휴가나 소비를 판단할 때는 즐거움을 얻는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 즐거움을 좇으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수고는 피하려 하는지도 살펴야 한다.
주식 투자에서도 물어야 할 것은 같다. 투자하면서 하나님보다 돈에 더 집착하게 되지는 않을까? 이처럼 동기와 우선순위를 묻는 질문은 일상의 선택을 판단하는 데 실제적인 도움이 된다. 세상의 즐거움을 하나님보다 우선한다면 성경을 어긴 것이다.
| 살펴볼 선택 | 동기와 우선순위를 드러내는 질문 |
|---|---|
| 가족과 보내는 휴가 | 쉬면서 가족과 유대를 다지고, 더 나은 아버지와 남편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하는가? |
| 음식·여행·경치에 쓰는 돈 | 누리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가, 아니면 비싸더라도 육신을 즐겁게 하는 데만 마음이 쏠리는가? |
| 즐거움과 주를 위한 수고 | 즐거움은 원하면서 고난과 어려움, 주를 위해 힘써 일하는 것은 피하려 하는가? |
| 주식 투자 | 하나님보다 돈에 더 집착하게 되는가? |

하나님을 우선하는 선택은 성경에 가까워야 한다
회색지대에서 육신적이고 죄악된 쪽보다 가장 성경적인 쪽을 택해야 하는 이유는, 그 선택에 사랑의 우선순위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느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지 살피면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우선하려 하면서 그분의 말씀보다 세상을 앞세울 수는 없다.
김진하 목사는 오늘날 현대 기독교의 가장 큰 약점으로 성경은 약하게 강조하고 세상은 더 강조하는 태도를 지적한다. 성경보다 세상에 무게를 두는 것은 성경적이지도, 옳지도 않다. 그러므로 선택을 앞두고 물어야 할 것은 ‘이것이 더 성경적인가?’이다.
이 기준에 동의하기 어렵다면 하나님께서는 성경과 세상 중 어느 쪽을 더 우선하실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어느 쪽을 가까이하는 삶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드러나고, 그분께서 역사하시며 그 사람을 사용하시기에 더 적합할까? 또 어느 쪽이 하나님의 이름에 큰 영광과 존귀를 돌리는 데 더 적합할까?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말씀에 가까운 선택을 하는 것은 단지 규칙을 지키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우선하는 문제다.
이름을 들었을 때 무엇이 떠오르는가
무엇을 우선하는지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드러낸다. 세상을 앞세우는 선택도 단순히 어떤 활동을 좋아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 사람의 정체성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다른 사람이 한 그리스도인의 이름을 들었을 때 세상이 떠오를까, 성경이 떠오를까? 하나님의 말씀이 그분 자신의 이름과 정체성에 연결되어 있듯이, 그리스도인이 가까이하는 것도 그 사람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나타낸다.
이것은 누구나 동의하고 가르치거나 설교할 만한 영적인 기초다. 그러나 그 기초를 안다고 해서 실제 선택에서도 반드시 붙드는 것은 아니다. 옳고 그름을 명확히 가리기 어려운 회색지대나 구체적인 세상 활동을 마주하면, 그 일을 해도 되는지에만 몰두하기 쉽다. 그러다 자신이 하나님과 세상 중 어느 쪽을 더 가까이하고 있는지는 놓친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을 제자들에게도 적용하셨다.
요한복음 17: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것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사옵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세상과 완전히 분리되어 계신 예수님의 정체성과 연결된다. 그러므로 생활의 선택에서도 세상과 얼마나 가까워질 수 있는지를 찾기보다, 하나님께 더 가까운 방향을 찾아야 한다. 그 방향을 성경에서 찾는 까닭은 말씀과 하나님을 떼어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느니라.
요한복음 1장 1절은 말씀을 단지 하나님에 관한 정보를 전하는 것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하나님이셨다. 말씀과 하나님의 정체성은 떼어 놓을 수 없다. 그리스도와 하나 된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그분의 말씀을 가까이해야 한다. 가장 성경적인 방향을 택하는 것은 이처럼 세상보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하는 선택이다.
이중 정체성이 가져오는 압박
말씀과 하나님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리스도와 하나 된 사람으로 살아가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세상과 온전히 같은 편이 되기도 어렵다. 그리스도인 대다수가 이런 이중 정체성으로 살아간다. 양쪽을 함께 붙들면 평안을 얻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혼란에 빠지고 평안을 잃으며 쓴 마음을 품게 된다.
그 쓴 마음은 세상 사람들과 그리스도인의 교회 양쪽을 향한다. 양쪽 모두가 그 사람의 이중적인 생활을 비판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도 교회에서도 비판받으니 어느 쪽에도 마음을 두지 못한다. 차라리 세상적으로 살든지, 그리스도인으로 살든지 하라는 강한 촉구는 이렇게 양쪽 사이에서 계속 당겨지는 생활을 겨냥한다. 이중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은 때로 구원받지 않은 세상 사람보다 훨씬 큰 압박을 받는다.
이런 생활에서 벗어나려면 끝없이 세부 규정을 늘리기보다 성경 구절들을 함께 이해해야 한다. 서로 맞물리는 조각처럼 각 구절이 생활을 판단할 단서를 밝혀 준다. 요한복음 17장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정체성과 요한복음 1장의 하나님과 말씀의 관계를 함께 붙들면, 구체적인 선택에서도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지 알 수 있다.
복장도 마찬가지다. 옷차림 하나하나의 옳고 그름을 정하려고 성경 구절 2만 개를 제시할 필요는 없다. 먼저 말씀과 자신의 정체성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경우를 일일이 적은 복장 규정집을 주실 필요가 없는 까닭도 알 수 있다. 로마서 12장은 이러한 기초가 몸으로 살아가는 생활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보여 준다.

말씀을 읽는 데서 생활에 적용하는 데로
하나님께서 이미 기록해 주신 말씀을 이해하려면 시간을 들여야 한다. 읽고 분석하는 데서 멈추지 말고, 온 마음으로 읽으며 묵상하고 기도해야 한다. 한 구절이라도 삶의 모든 활동에 적용해 보아야 한다. 이해되지 않거나 생활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연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다시 그 말씀으로 돌아가 기도하며 묵상하고 살펴야 한다. 그때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다.
죄악된 세상적 활동을 분별하고, 육신적이거나 죄악된 것보다 가장 성경적인 것을 선택한다는 두 기준은 단 세 구절에서 나온다. 그 정도의 말씀만으로도 실제 생활을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된다. 기준을 알아 두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근거가 되는 구절로 돌아가 자신의 선택을 살펴야 한다. 특히 하나님과 세상 중 무엇을 우선하는가라는 질문을 놓치지 않아야 성경적인 선택과 육신적인 선택을 가릴 수 있다.
로마서 12장 1절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몸을 드리는 일과 연결한다.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에게 권고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가 드릴 합당한 예배니라.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한다면, 거룩함은 성경을 읽는 시간에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몸으로 살아가는 일상의 방식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생활을 거룩하게 하는 기준은 어디에 있을까? 요한복음 17장 17절은 그 기준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게 한다.
요한복음 17:17 아버지의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로마서 12장 1절이 몸을 거룩하게 드리라고 권고한다면, 요한복음 17장 17절은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진리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밝혀 준다. 거룩한 생활은 성경에 근거한 생활이다. 따라서 일상의 선택을 말씀에 비추어 살피는 일은 거룩함과 별개인 훈련이 아니라, 몸을 하나님께 드리며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일이다.

해도 되는 일인가와 세상처럼 보이는가는 다르다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상과 일치하지 말고 너희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생활에는 마음의 변화가 따른다. 로마서 12장 2절은 세상과 일치하지 말라는 명령과 마음을 새롭게 하라는 명령을 함께 준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따라 사는 대신 새로워진 마음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입증해야 한다. 생활을 판단하는 세 번째 기준은 여기서 나온다. 행동으로 세상과 같은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
성경적인 것을 육신적이거나 죄악된 것보다 우선한다면,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사람으로 비치게 하는지도 살펴야 한다. 명백히 해서는 안 되는 일에만 해당하는 기준이 아니다. 해도 괜찮은 활동이라도, 사람들이 그 행동을 보고 그리스도인을 세상과 다르지 않은 사람으로 여기게 되는지는 별도로 생각해야 한다.
| 판단할 문제 | 살펴야 할 질문 |
|---|---|
| 활동 자체의 허용 여부 | 이 일은 해도 괜찮은 일인가? |
| 행동이 드러내는 정체성 | 사람들이 이 행동을 보고 나를 세상과 동일시하게 되는가? |
독주에 관한 다음 반론을 생각해 보면 두 질문의 차이가 분명해진다.
“독주를 마시는 게 뭐가 잘못됐나요? 성경에서도 어떤 대목에서는 허용하잖아요.”
여기서 반드시 독주를 허용한다는 각 대목의 해석부터 논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의 말대로 허용되는 경우가 있다고 일단 가정하더라도, 그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보여 주는지는 따져 볼 수 있다. 술집에 가서 독주를 마시는 사람이 ‘예수님은 구원하십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구원받지 않은 사람에게 전도지를 건넨다면 상대는 어떻게 반응할까?
이 가정은 술집 출입이나 독주를 마시는 일을 승인한다는 뜻이 아니다. 허용 여부에 관한 반론을 그대로 받아들여도 간증의 문제까지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인가’만이 아니라, 그 행동 때문에 세상과 같은 사람으로 인식되는가도 중요하다.

말보다 생활에서 드러나는 정체성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한 뒤 그 자리에 있던 사람에게 전도지를 건넨다고 생각해 보자. 양심이 떳떳할까, 아니면 부끄러울까? 부끄럽다면 자신의 행동에서 예수님보다 세상이 더 뚜렷하게 드러났다는 사실을 이미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구원하십니다’라는 티셔츠를 입었어도 생활이 그 문구와 어긋난다면, 상대는 말과 행동의 차이를 보게 된다. 실제로 누구에게 속한 사람처럼 행동하느냐가 간증에 영향을 준다. 하나님과 세상 가운데 무엇을 우선하는지도 그런 선택에서 드러난다.
김진하 목사가 전한 조(Joe) 형제와 재러드(Jared) 형제의 간증에는 생활의 변화가 한 사람에게 미친 영향이 담겨 있다. 무신론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던 조 형제는 재러드 형제가 더 이상 세상과 함께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도박을 그만두고 예수님을 섬기는 모습을 보았다. 재러드 형제에게서 세상보다 예수님이 더 뚜렷하게 드러났고, 그 변화는 조 형제의 마음에 심긴 씨앗이 되었다. 주님께서 조 형제에게 역사하셨으며, 김진하 목사는 조 형제가 구원받은 일을 재러드 형제의 간증과 연결했다.
반대로 재러드 형제가 도박을 계속할 이유를 찾았다고 가정해 보자. 여러 성경 구절을 끌어오면서 도박이 무엇이 잘못인지, 그것을 금하는 구절이 어디 있는지 거듭 따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도박이 유일한 생계 수단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계속 도박했다면 조 형제에게는 도박을 그만두고 예수님을 섬기기로 했을 때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비쳤을 것이다. 자기 행동을 방어할 논리를 찾는 일과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일은 같지 않다.
김진하 목사는 사람들과 함께 도박하면서 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려는 방식을 ‘문화적이고 세상적인 전도’라고 비판한다. 함께 어울린다는 이유만으로 좋은 전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함께 도박하는 사람으로 남는 것과 도박을 떠나 예수님을 섬기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상대에게 서로 다른 간증을 남긴다.
행동의 허용 여부와 간증 어떤 행동이 잘못인지 성경적 근거를 묻는 것만으로 판단을 끝내지 않는다. 그 행동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세상과 예수님 중 어느 쪽이 더 뚜렷하게 드러나는지도 살펴야 한다.
일상의 이런 문제를 깊이 생각하지 못하는 까닭은 관련된 성경 말씀을 진지하게 숙고하고 묵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씀을 생활에 적용하려면 행동을 허용할 근거만 찾을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을 통해 자신이 누구에게 속한 사람으로 드러나는지까지 생각해야 한다.
선한 것을 붙잡되 악의 모양을 피한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1~22절은 옳고 그름을 쉽게 가르기 어려운 문제에서도 판단의 기준을 준다. 김진하 목사는 자신도 명확하게 선을 긋기 어렵고, 사람들이 오해하거나 상처받을 수 있는 모호한 문제로 깊이 상담할 때마다 이 말씀을 찾는다고 한다. 성경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이 구절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었다. 특히 도움을 구하고도 결국 조언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이 말씀을 받아들여 그에 따라 살기를 원하지 않는 태도를 보았다고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5:21 모든 일을 시험하여 보고 선한 것을 붙잡으라.
세상에서 접하는 모든 것을 무조건 버릴 필요는 없다. 삶에는 시험해 보고 선하다고 판단하여 붙들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다만 무엇이든 받아들여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시험하여 선한 것을 붙잡으라는 명령에는 받아들일 것을 분별하는 과정이 먼저 담겨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5:22 악은 어떤 형태이든지 피하라.
악을 피하라는 명령에서는 KJV의 ‘appearance of evil’이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 단순히 ‘모든 악을 피하라’ 또는 ‘모든 종류의 악을 피하라’는 뜻으로만 읽으면, ‘appearance’가 가리키는 모양을 놓치게 된다. 어떤 행동이 실제로 악한지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지도 살펴야 한다.
명백히 잘못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회색지대에서도 간증의 문제는 남는다. 자신에게는 그 행동을 허용할 이유가 있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세상과 더 강하게 연결된 모습으로 보인다면 가볍게 넘길 수 없다. 선한 것을 시험하여 붙잡는 일과 악의 모양을 피하는 일은 함께 가야 한다. 그래야 무엇이든 배척하지도 않고, 자기 행동을 변호하는 데만 몰두하지도 않는다.
행동 자체가 악하지 않아도 간증을 해칠 수 있다
간증은 자신의 경험을 말로 전하는 것만이 아니라, 생활과 행동을 통해 다른 사람 앞에 드러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어떤 활동이 그 자체로 악하지 않다는 사실만으로 판단을 끝낼 수는 없다. 자신에게는 문제가 없어 보여도 다른 사람에게 악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주의해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5:22 악은 어떤 형태이든지 피하라.
말 한마디도 누구에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른 뜻을 전한다. 김진하 목사는 한국에서 전혀 모르는 어르신을 만나 그분의 이름을 그냥 부르며 “잘 지내?”라고 인사하는 상황을 예로 든다. 랜들에게 같은 말로 편하게 인사하는 것 자체는 악하지 않다. 그러나 한국의 어르신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어른을 존중하지 않는 무례한 행동이 된다. 사용한 표현만 따져서는 그 말이 상대에게 무엇을 전했는지 충분히 판단할 수 없다.
이때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저 멋지고 편하게 대하는 법을 모르시는 거죠.”라고 대답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친근하게 대하려 했다는 자기 의도를 내세워, 무례함을 느낀 상대를 오히려 깐깐한 사람으로 몰아붙이는 말이기 때문이다. 김진하 목사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우린 그냥 멋지게 대하는 거예요. 너무 깐깐하시네요.”라는 식으로 자기 행동을 옹호하는 태도를 비판한다. 다른 사람 앞에서 어떤 간증을 남기는지보다 자신이 원하는 말투와 행동을 지키는 일을 앞세우기 때문이다.
행동의 허용 여부와 간증
행동 자체가 악한지 묻는 것과, 그 행동이 상대에게 무엇을 나타내는지 묻는 것은 다르다.
자신에게 편한 표현이라도 상대에게 무례함을 나타낸다면, 자기 의도만을 내세워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삶이다.

목회자와 성도 모두 성경의 기준을 따라야 한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자기 자신보다 간증을 우선하는 태도는 교회생활에도 필요하다. 목회자와 교회가 자기 기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만을 품으면서, 교회가 자신을 용납하고 지금 모습 그대로 사랑해 주기만을 기대할 수 있다. 김진하 목사는 교회가 자신에게 맞춰 주어야 한다는 이런 기대를 오늘날 교회에서 나타나는 나쁜 열매로 지적한다. 교회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대우만을 판단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성도의 취향 대신 목회자의 개인적인 기준을 따라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목회자도 자기 기준이 아니라 성경을 따라야 한다. 목회자는 성경의 기준에 따라 책임을 지며, 교회와 성도 역시 같은 기준을 따라야 한다. 다른 사람을 손가락질하며 그들에게만 기준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목회자와 성도 모두 먼저 자신에게 그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성경적인 것을 육신적이고 죄악된 것보다 앞세우고, 하나님과 세상 가운데 무엇을 우선하는지 살피며, 행동으로 세상과 같은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는 일은 일상의 선택에서 함께 요구된다. 원하는 활동을 할 수 있는지만 따져서는 충분하지 않다. 그 활동을 선택하면서 누구를 앞세우고, 다른 사람에게 누구에게 속한 모습을 드러내는지도 살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
어떤 행동을 두고 “그건 잘못이 아니잖아요.”라고 말할 때, 실제로 그 행동 자체에는 잘못이 없을 수 있다. 그러나 해도 괜찮은 행동이라는 사실만으로 마음의 우선순위까지 올바르다고 할 수는 없다. 그 행동을 끝까지 고집하는 마음에는 주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태도가 담겨 있지 않을까? 간증을 해치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놓지 않으려 한다면, 행동의 허용 여부뿐 아니라 무엇을 더 사랑하는지도 살펴야 한다.
“저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는 말만으로 이 질문에 답할 수는 없다. 하나님과 세상을 함께 사랑하며, 다른 사람들 앞에서 간증을 망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그런 행동까지 인정하신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으로 요한일서의 가르침을 외면할 수는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함께 믿는 형제들도 사랑해야 한다.
요한일서 2장이 다루는 세상에 대한 사랑은 3장의 형제 사랑과 함께 살펴야 한다. 자신이 즐기는 활동을 변호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활동을 선택하고 고집하는 태도가 형제들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는지까지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은 형제를 실제로 사랑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요한일서 3:10 여기에서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드러나느니라.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요한일서 3:11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말씀이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라.
요한일서 3장 10절은 의를 행하는 일과 형제를 사랑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드러난다고 가르친다. 11절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처음부터 들은 말씀이다. 형제 사랑은 신앙생활에 나중에 덧붙이는 요구가 아니다. 그러므로 간증을 지키는 일도 단순히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자기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나타내는지 살피고, 자신의 취향만 고집하지 않으며, 함께 믿는 형제를 사랑하는 일이다.
형제를 사랑하는 일은 세상의 인정보다 앞선다
세상에서 인정받으려는 마음과 형제를 사랑하는 일이 부딪힐 때에도 이 기준은 달라지지 않는다. 요한일서 3장 10절이 의를 행하는 것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함께 다루는 까닭은,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드러나는 데 형제 사랑이 부수적인 덕목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한일서 3:10 여기에서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드러나느니라.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요한일서 3:11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말씀이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라.
하나님께 속한 삶을 산다고 하면서 형제들을 대하는 태도는 별개의 문제로 돌릴 수 없다. 처음부터 주어진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세상의 활동을 선택할 때에도 적용된다. 자기 취향에 맞는지,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지만 살필 것이 아니라, 그 선택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일에 어긋나지 않는지도 물어야 한다.
요한일서 3:13 나의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형제들을 사랑하는 일을 세상보다 앞세우면, 세상은 자신을 사랑하기보다 오히려 미워할 수 있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거나 판단할까 봐 걱정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미움을 피하려고 하나님의 자녀들, 곧 그분의 교회를 사랑하는 일을 뒤로 미룰 수는 없다. 세상이 좋아하는 선택과 형제들을 사랑하는 선택이 갈릴 때에는 누구를 더 사랑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요한일서 3장 13절은 바로 그런 미움을 뜻밖의 일로 여기지 말라고 한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는 까닭은 두 사랑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마음속 감정이나 말에만 머물지 않는다. 형제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이 있을 때, 그 필요를 알고도 외면하는지 아니면 마음을 열고 돕는지에서 드러난다.
요한일서 3:17 누가 세상의 재물을 가졌는데 자기 형제의 궁핍한 것을 알면서도 그를 동정하는 마음을 닫으면 어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거하겠느냐?
여기서 문제는 재물을 가졌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세상의 재물이 있고 형제의 궁핍도 알면서 그를 동정하는 마음을 닫는 태도다. 형제의 필요를 아는 사람에게는 그 필요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가 사랑의 문제가 된다. 형제에게 마음을 닫은 채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 안에 거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요한일서 4:20 어떤 사람이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라. 눈으로 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본 적이 없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느냐?
요한일서 4장 20절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과 형제를 미워하는 태도가 함께 있을 때, 그 말이 거짓임을 분명히 밝힌다. 눈으로 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지 못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형제를 대하는 태도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무관한 별도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랑의 고백이 참된지를 드러낸다.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은 서로 떨어질 수 없다.

네 번째 기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덕을 세운다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은 일상의 선택에도 드러나야 한다. 자기 행동이 세상과 같은 정체성을 드러내는지 살피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행동이 형제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도 생각해야 한다. 네 번째 기준은 가장 덕을 세우는 것을 택하는 것이다. 곧 형제들과 교회에 유익을 주고, 그들을 넘어지게 하지 않는 쪽을 선택해야 한다.
이로써 세상의 활동을 판단할 때 살펴야 할 네 가지 기준이 갖추어진다.
| 기준 | 살펴야 할 점 |
|---|---|
| ① 죄악된 세상적 활동을 분별함 | 그 활동이 죄악된 것인가? |
| ② 가장 성경적인 것을 선택함 | 육신적·죄악된 것보다 성경적인 것을 택하는가? 하나님과 세상 중 무엇을 우선하는가? |
| ③ 세상과 동일시되지 않음 | 세상과 같은 정체성을 드러내는 선택인가? |
| ④ 가장 덕을 세우는 것을 선택함 | 형제들과 교회를 세워 주는가? 그들을 넘어지게 하지 않는가? |
교회의 유익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까닭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교회와 그리스도가 그렇게 가까운 관계라는 데 동의하기 어렵더라도, 성경은 둘을 떼어 놓지 않는다.
골로새서 1:24 이제 내가 너희를 위하여 받는 나의 고난들을 기뻐하고 또 그리스도가 고통받으신 이후에 있는 것을 그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에 채우노라.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교회를 가리키는 표현은 “그의 몸”이다. 따라서 형제들에게 유익을 주는 일은 그리스도와 무관한 사람들의 취향을 맞추는 일이 아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예수님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에베소서는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이 되는 관계를 통해 그 친밀함을 설명한다.
에베소서 5:31 이런 까닭에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결합하여 그 둘이서 한 몸이 될지니라.
에베소서 5:32 이것은 위대한 신비라.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그 교회에 관하여 말하노라.
에베소서 5장 32절은 앞서 말한 한 몸의 관계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것임을 밝힌다. 그러므로 교회를 사랑하고 세우는 일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과 별개일 수 없다. 그분과 하나인 교회에 무엇이 유익한가를 묻는 것만으로도 일상의 선택에는 높은 기준이 주어진다.
록 음악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입는 옷과 보는 영화, 즐기는 게임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판단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입에 넣는 것들과 참여하는 활동 하나하나에 대해 매번 20쪽짜리 백과사전을 쓰듯 반박할 수 없는 근거를 모두 나열해야만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이 가장 성경적인지, 하나님을 우선하는지, 세상과 같은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는지, 형제들의 덕을 세우는지를 살피면 개별 활동을 판단할 방향이 분명해진다.

일상의 필요와 간증이 충돌할 때
주식 투자나 의료 목적의 마리화나처럼 판단이 쉽지 않은 회색지대에서도, 자신에게 필요하다는 이유만으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죄악된 요소가 있는지, 성경에 가까운 선택인지, 세상에 어떤 정체성을 드러내는지, 형제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함께 살펴야 한다.
| 기준 | 살펴야 할 점 |
|---|---|
| 죄악된 세상적 활동 | 그 활동에 죄악된 요소가 있는가? |
| 가장 성경적인 선택 | 육신적이거나 죄악된 방향보다 성경에 가까운 쪽을 택하는가? 하나님과 세상 중 무엇을 우선하는가? |
| 세상과 동일시되지 않는 정체성 | 그 선택으로 자신이 세상과 같은 사람으로 드러나는가? |
| 형제들과 교회의 덕을 세우는 선택 | 다른 성도들과 교회를 가장 잘 세워 주는가? |
이 기준을 따르다 보면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과 간증이 충돌할 수 있다. 사람들은 어떤 활동이 이미 자기 생활의 일부이며, 때로는 건강에도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의료 목적으로 마리화나를 피워야 한다는 말이 그런 사례다. 건강에 필요하다는 사정은 가볍게 다룰 수 없고 답변에도 신중함이 필요하다. 그러나 필요성만으로 판단을 끝낼 수는 없다. 간증은 자신에게 편리한 범위 안에서만 지키는 부수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보다 귀한 간증
간증을 지키기 위해 어디까지 감수할 수 있을까? 요한계시록 12장 11절에는 죽음 앞에서도 간증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 나온다.
요한계시록 12:11 그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거한 말로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사랑하지 아니하였도다.
이들은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거한 말로 이겼으며, 그 증거를 지키는 데 자기 생명을 한계로 삼지 않았다. 간증은 자기 생명보다도 귀하며, 그것을 지키기 위해 죽음까지 감수할 가치가 있다. 살아가는 데 여유가 있을 때만 간증을 지키겠다는 태도로는 이 말씀의 무게를 받아들일 수 없다.
세상의 어떤 것을 멀리하면 자기 삶이 없어지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반론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생활을 유지하는 일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으면, 그것을 잃지 않기 위해 간증을 뒤로 미루게 된다. 그러나 간증을 위해 생명까지 내어놓을 가치가 있다면, 일상에 꼭 필요하다고 여기는 활동도 간증보다 앞설 수 없다. 익숙한 생활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느냐보다 간증을 지킬 수 있느냐를 먼저 묻는 데에는 그만큼 무거운 신앙적 결단이 따른다.
이 우선순위가 분명해야 개별 활동에 관한 질문도 제대로 다룰 수 있다. 도박은 무엇이 잘못인지, 주식 투자는 어떤지, 록·팝·랩 음악은 왜 문제가 되는지, 어떤 옷차림이 잘못인지, 여성이 바지를 입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는 모두 구체적인 판단을 요구한다. AI 기술이나 ChatGPT를 사용해도 되는지 묻는 사람 역시 자신에게는 그것이 꼭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무엇을 써야 한다는 필요성과 그것을 어떤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는지는 같은 문제가 아니다.
더 복잡한 회색지대는 세부 사항까지 검토해야 한다. 그렇더라도 기초 원칙만으로 상당수의 질문에는 답의 방향이 드러난다. 하고 싶은지, 생활에 필요한지만 묻지 않고 성경에 가까운 선택인지, 하나님을 우선하는지, 세상과 동일시되지 않는 간증을 지키는지, 형제들과 교회를 세워 주는지를 살필 때 구체적인 선택의 기준이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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