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녹서는 왜 정경이 될 수 없는가: 성경과 대조한 중보·구원·부활과 그리스도의 신성
종말과 천사의 세계를 알고 싶다는 관심만으로 참된 가르침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이름과 예언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한 책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에녹서를 판단하려면 그 신비로운 이야기보다 성경과 무엇을 다르게 가르치는지부터 살펴야 한다. 판단의 기준은 킹제임스성경이며, 검토의 출발점은 인터넷의 소개가 아니라 에녹서의 구절을 직접 읽고 성경과 대조하는 일이다.
유다서가 에녹의 예언을 인용했다는 사실은 에녹서 전체의 영감을 인정할 근거가 되는가. 천사가 사람들을 위해 중보하고 영생과 관련된 회개를 관장한다는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중보자라는 말씀과 양립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은 죄인의 구원, 부활 이후의 결혼, 지옥에서 나오는 죽은 자들의 심판으로 이어진다. 지옥에서 나온다는 것은 곧 구원받는다는 뜻일까? 백보좌 심판과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나아갈 그리스도의 심판석은 어떻게 다른가? 두 본문의 차이는 이런 질문을 구체적으로 짚을 때 드러난다.
비판은 에녹서의 ‘이름을 받은 인자’와 노아의 기이한 출생 묘사에까지 이른다. 천사를 높이면서 영원부터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낮추는 영지주의적 가르침이 이 대목들에도 나타난다. 에녹서는 성경의 표현을 가져오면서도 그 핵심 가르침을 바꾼다. 중보와 구원, 부활과 그리스도의 신성을 다루는 본문들을 나란히 읽으면, 왜 에녹서를 성경에 더해서는 안 되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종말에 대한 관심과 에녹서의 성경 모방 문제
종말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자 하는 관심이 곧 올바른 분별력을 뜻하지는 않는다. 종말의 사건들을 연구하다가 에녹서에 깊이 빠지는 사람들이 많다. 마지막 날들에 마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아야 하지만, 이를 알아보려다가 오히려 미혹의 먹잇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를 경계해야 할 이유로 디모데전서 4장과 고린도후서 2장을 든다.
디모데전서 4:1 이제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시나니, 마지막 때에 어떤 자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들을 따르리라.
디모데전서는 마지막 때에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를 따를 것이라고 경고한다. 따라서 종말을 다룬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가르침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먼저 그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야 한다.
고린도후서 2:11 사탄이 우리에게서 유익을 취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략을 모르지 않음이라.
고린도후서에서 사탄의 계략을 언급하는 이유도 그에게 유익을 내주지 않기 위해서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과 마귀의 움직임을 알아야 하는 목적은 호기심을 채우는 데 있지 않다. 그 계략을 모르고 넘어가지 않는 데 있다. 종말에 대한 관심이 에녹서에 대한 맹신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에녹서는 이단적인 책이며 영지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복음서 가운데 하나다. 에녹서의 구절들을 성경과 대조하려는 목적도 그 안의 영지주의와 신비주의, 이단적 가르침을 드러내는 데 있다.
특히 두 문헌을 나란히 읽으면 에녹서가 성경을 모방했다는 점이 드러난다. 성경이 이미 완성된 뒤에 에녹서가 많은 구절을 가져온 것이다. 에녹서에 나오는 요한계시록 1장의 내용과 이사야서의 구절들이 그 예다. 이 구절들은 성경에 먼저 있었으므로 에녹서만의 내용처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성경 모방의 사례로는 조지프 스미스와 무함마드도 거론된다. 무함마드의 코란과 에녹서 역시 이런 점에서 함께 비교할 수 있다.
유다서의 에녹 인용과 에녹서 전체의 영감
에녹서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유다서의 인용이다. 유다가 에녹의 예언을 인용했으므로 에녹서가 영감을 받은 책이라는 논리다. 반박의 초점은 유다서에 인용된 예언을 근거로 에녹서 전체의 영감을 인정할 수 있는가에 있다.
유다서 1:14 아담의 칠 대 손 에녹도 이들에 대하여 예언하여 말하기를 “보라, 주께서 수만 성도들과 함께 오시나니
유다서 1:14은 아담의 칠 대 손 에녹의 예언을 소개하며, 주께서 수만 성도들과 함께 오신다고 말한다. 김진하 목사는 이 예언을 설명할 때 ‘이 천사들이 내려올 것’이라고 풀어 말한다. 성경 본문의 표현은 ‘수만 성도들’이다.
에녹서 옹호론은 유다가 그 예언을 인용했다는 사실을 에녹서의 영감을 인정할 근거로 삼는다. 그러나 표현이 비슷하다는 사실만으로 어느 쪽이 다른 쪽을 가져왔는지 알 수는 없다. 에녹서는 요한계시록과 이사야를 비롯한 다른 성경 책들을 베꼈다. 그렇다면 유다서 역시 에녹서가 베낀 것은 아닐까? 유다서와의 관계에서도 이 가능성을 따져 보아야 한다.
에녹서를 받아들이는 근거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정말 에녹서를 직접 읽어 보았는가, 아니면 유튜브나 인터넷에서 관련 내용을 보기만 했는가. 호의적인 소개를 접하는 것과 책의 실제 내용을 읽고 판단하는 것은 다르다. 자신의 판단이 어디에 기대고 있는지 살피려면 에녹서의 구절들을 성경과 직접 대조해야 한다.
에녹서 40장의 네 존재와 천사의 중보
디모데전서 2장 5절과 에녹서 40장 1~10절을 대조할 때 먼저 살필 문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누가 중보하는가다.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시라.
디모데전서 2:5은 중보자가 한 분이며, 그분이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밝힌다. 반면 에녹서 40장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존재가 중보하는 장면이 나온다. 구절을 잘못 인용했다는 반론이 있지만, 전체 문맥을 읽으면 누가 중보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중보’라는 단어만 떼어 볼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는 존재가 누구인지부터 살펴보자.

하늘의 성도들이 땅으로 내려와 결혼한다는 에녹서 해석을 화살표로 정리한 판서.
디모데전서 2:5와 에녹서 40:1~10을 나란히 놓고 중보자가 누구인지 비교한다.
에녹서의 장면에는 먼저 영들의 주 앞에 선 셀 수 없는 무리가 등장한다.
그 후 나는 수천의 수천과 만의 만 배를 보았다. 나는 영들의 주 앞에 서 있는, 헤아릴 수도 셀 수도 없는 무리를 보았다.
이어서 영들의 주의 사방에 있는 네 존재가 묘사된다. 이들은 잠들지 않는 존재들과는 다른 존재들이다. 에녹과 동행하던 천사가 그들의 이름을 알려 주고 감추어진 모든 것을 보여 주었기 때문에, 에녹은 그 이름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 네 존재는 서로 다른 네 천사이며, 뒤이어 나오는 음성들은 각 천사의 활동을 나타낸다.
네 존재는 영광의 주 앞에서 찬양하는 음성을 낸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음성은 각각의 천사를 가리킨다. 먼저 소개되는 세 음성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
| 음성 | 에녹서 낭독에 나타난 활동 |
|---|---|
| 첫 번째 | 영들의 주를 영원무궁토록 송축한다. |
| 두 번째 | 선택받은 이와 영들의 주께 의지하는 선택받은 이들을 축복한다. |
| 세 번째 | 땅에 거하며 영들의 주의 이름으로 간구하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중보한다. |
두 번째 음성이 축복하는 대상에는 단수인 ‘선택받은 이’와 복수인 ‘선택받은 이들’이 함께 나온다. 세 번째 음성은 땅에 거하며 영들의 주의 이름으로 간구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중보한다. 중보자의 문제는 바로 이 세 번째 천사에게서 드러난다. 영들의 주 앞에 있는 네 천사의 활동을 서술하는 문맥이므로, 여기서 중보하는 존재를 예수 그리스도로 읽을 수 없다. 디모데전서가 중보자를 그리스도 한 분으로 명시하는 데 반해, 에녹서는 천사에게 그 역할을 맡긴다는 비판이다.
천사에게 맡겨진 중보와 회개
천사의 이름보다 중요한 것은 그 천사에게 어떤 역할을 맡기느냐는 점이다. 성도들을 위해 중보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알아야 할 기본이며, 그 역할은 다른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다. 에녹서 40장에서 지적하는 문제는 중보에 그치지 않는다. 천사에게 영생과 관련된 회개까지 맡긴다.

하늘의 성도들이 땅으로 내려와 결혼한다는 에녹서 해석을 화살표로 정리한 판서.
판서는 중보와 영생에 이르는 회개를 함께 적어 두 본문을 대조한다.
이어지는 낭독에서 넷째 음성은 사탄들을 물리치고, 그들이 영들의 주 앞에 나아가 땅에 거하는 이들을 고발하지 못하게 한다. 여기서는 단수 ‘사탄’이 아니라 복수형 ‘사탄들’이 쓰였다. “아, 사탄들이라. 흥미롭네요.”라는 반응은 김진하 목사가 이 표현을 짚으며 덧붙인 말이다. 에녹서 40장 9절에서는 네 천사의 이름과 각각의 성격 또는 역할이 나온다.
| 순서 | 천사 | 낭독에서 제시된 성격 또는 역할 |
|---|---|---|
| 첫째 | 미카엘 | 자비롭고 오래 참음 |
| 둘째 | 라파엘 | 사람의 자녀들의 모든 질병과 모든 상처를 관장함 |
| 셋째 | 가브리엘 | 모든 권능을 관장함 |
| 넷째 | 파누엘 |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는 이들의 소망에 이르는 회개를 관장함 |
그중 파누엘을 소개하는 문구에 특히 주목한다.
넷째는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는 이들의 소망에 이르는 회개를 관장하며, 그 이름은 파누엘이다.
이 문구대로라면 천사는 중보할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회개까지 맡는다.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는 이들의 소망에 이르는 회개’를 관장한다는 말이 바로 그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중보와 영생에 관련된 회개를 천사에게 부여하는 것은 노골적인 이단 사상이다.

디모데전서 2:5와 에녹서 40:1~10을 연결해 중보 역할을 비교하는 판서.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보와 에녹서가 천사에게 맡기는 역할을 대조한 판서.
유일한 중보자와 천사에게 맡겨진 중보
이처럼 구절을 직접 읽고 대조하는 일은 에녹서를 소개하는 내용을 보기만 한 뒤 진리를 안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판단하려면 실제 구절을 읽고 공부해야 한다. 기준이 되는 디모데전서 2장 5절을 다시 보자.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시라.
이번에는 중보자가 한 분이라는 말씀에 힘을 싣는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보하는 분은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이며, 다른 존재가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 특히 영생에 이르는 회개와 관련된 중보를 천사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 판서에서도 디모데전서 2:5와 에녹서 40:1~10을 함께 묶고, 그 옆에 중보와 영생에 이르는 회개를 적어 비교한다.
에녹서 39장 5절에도 천사들이 성도들을 위해 중보하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서 내 눈은 그분의 의로운 천사들과 함께 있는 그들의 거처와 거룩한 자들과 함께 있는 그들의 안식처를 보았다. 그들은 사람의 자녀들을 위해 간구하고 중보하며 기도했고, 의가 그들 앞에서 물처럼 흘렀다.
이 구절은 거처와 안식처를 묘사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사람의 자녀들을 위한 간구와 중보와 기도가 이어지고, 의가 그들 앞에서 물처럼 흐른다고 서술한다. 천사들이 성도들을 위해 중보한다는 이 가르침은 천사를 그리스도의 자리에 놓는 것이다. 판서에도 에녹서 39장 5절 옆에 천사의 중보를 적어, 앞서 읽은 40장의 내용과 함께 비교한다.

하늘의 성도들이 땅으로 내려와 결혼한다는 에녹서 해석을 화살표로 정리한 판서.
에녹서 40장의 중보와 영생에 이르는 회개, 39장 5절의 천사 중보를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보와 대조한다.
그리스도께서 직접 중보하신 사례로는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셨다는 말씀이 제시된다.
누가복음 22:32 그러나 네 믿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으니, 네가 회심하게 되면 네 형제들을 굳게 하라.”고 하시더라.
베드로의 믿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그를 위해 기도하셨다고 말씀하신 분은 그리스도다. 천사를 그 자리에 높이는 에녹서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다. 에녹서를 직접 읽으면 천사 숭배가 뚜렷하게 드러나므로 이 책을 피해야 한다. ‘숭배’라고 부르지 않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천사를 지나치게 높여 그리스도께 속한 역할을 맡기기 때문이다.
천사 숭배와 사도 시대의 거짓 문서
천사를 중보와 회개의 담당자로 높이는 에녹서에 대한 비판은 사도 시대의 천사 숭배 문제와 맞닿아 있다. 초기 그리스도인 시대에 이미 영지주의자들은 천사를 떠받들고 천사 숭배를 내세웠다. 바울은 골로새서 2:18에서 바로 이런 사람들을 경고한다.
골로새서 2:18 아무도 자의적인 겸손과 천사들을 숭배함으로 너희의 상을 속여 빼앗지 못하게 하라. 그는 보지 않은 것을 억지로 주장하고 자기 육신의 생각으로 헛되이 과장하며,
천사를 높이는 가르침은 영적인 존재를 존중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성도들의 상을 속여 빼앗는 위험과 연결된다. 당시에도 이런 이단 사상이 퍼지고 거짓 성경 문서들이 작성되고 있었다. 따라서 에녹서에 천사와 영적인 존재가 많이 등장한다는 이유만으로 그 내용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그 책이 천사에게 어떤 지위를 부여하느냐는 점이다.
바울 시대의 문제는 천사 숭배만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키는 사람들도 있었다. 말씀 변개를 다루는 본문은 고린도후서 2:17이다.
고린도후서 2:17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킴으로써 이익을 취하는 여러 사람들과 같지 않고 오직 성실함으로써 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로서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바울은 말씀을 변개하여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과 자신을 구별하고,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말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사도들이 활동하던 때부터 이런 일이 있었다. 성경과 관계된 문서라는 외형이나 오래된 종교 문헌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권위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사도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편지 역시 주의해서 받아야 했다. 데살로니가후서에는 바울 일행에게서 왔다고 하는 편지 때문에 흔들리지 말라는 경고와, 바울 자신의 편지를 식별하는 표지가 나온다. 편지를 쓴 사람이 실제로 바울인지 분별해야 했던 것이다. 먼저 데살로니가후서 2:2은 그리스도의 날이 가까웠다는 말에 마음이 흔들리는 문제를 다룬다.
데살로니가후서 2:2 영으로나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고 하는 편지로나 그리스도의 날이 가까웠다고 마음이 쉽게 흔들리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될 것이라.
성도들을 동요하게 하는 것은 영이나 말뿐만이 아니다. 바울 일행에게서 받았다고 하는 편지도 그 통로가 될 수 있다. 편지가 사도의 이름으로 전해졌다는 이유만으로 두려움에 휩쓸리지 말라는 경고다. 한편 데살로니가후서 3:17에서 바울은 자신의 편지에 남기는 표지를 밝힌다.
데살로니가후서 3:17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라. 이는 편지마다 표가 되므로 이렇게 쓰노라.
바울에게서 왔다고 하는 편지를 경계하라는 말씀과 친필 문안을 편지마다의 표지로 삼는다는 말씀을 함께 놓으면, 사도의 이름과 권위를 내세우는 글을 무조건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진하 목사는 버클리에서 성경 수업을 들을 때도 초기 그리스도인 시대의 거짓 성경 문서들을 배웠다고 회고한다. 자신이 자유주의적인 학교로 여기는 그곳의 교수도 이 문제를 가르쳤다는 것이다. 신학적 입장이 다른 교육 현장에서도 다루는 문제인 만큼, 에녹서가 옳은 책이라고 무작정 믿어서는 안 된다.
죄인에게 구원이 없다는 선언과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
에녹서 5장 7c절과 6i~6j절에는 죄인들이 저주를 받아 구원이 없다는 가르침이 나온다.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와 맞지 않는 이단적 가르침이다. 먼저 불경건한 자들에게 저주를 선언한다.
불경건한 너희에게는 저주가 있으리라.
이어 그 저주가 무엇인지 묻고, 죄인들에게 구원이 없다고 명시한 문장을 제시한다.
죄인인 너희 모두에게는 구원이 없고, 너희 모두 위에는 저주가 머무르리라.
죄인이라는 이유로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면, 성경이 말하는 모든 사람의 처지는 어떻게 되는가? 로마서 3장 23절은 죄를 특정한 집단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문제로 밝힌다.
로마서 3:23 이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다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면, 죄인은 우리와 구별되는 별개의 집단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죄인이며, 예수님께서 구원하러 오신 대상도 바로 죄인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들을 회개에 이르게 하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의인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들을 회개에 이르게 하려고 왔노라.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과 함께 바울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기록되어 있다.
디모데전서 1:15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이 말씀은 신실하며,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합당하도다. 죄인들 중에서 내가 우두머리라.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말씀을 신실하고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합당하다고 기록하면서, 자신을 죄인들 중의 우두머리라고 부른다. ‘우두머리’는 죄인 가운데서도 가장 악한 죄인이라는 뜻이다. 에녹서의 말대로 죄인에게 구원이 전혀 없다면, 바울 역시 구원받지 못했다는 말인가? 죄인을 구원에서 배제하는 선언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의 목적과 정면으로 어긋난다.

에녹서의 천사 중보와 죄인에게 구원이 없다는 가르침을 성경과 대조하는 판서다.
에녹서 5장 7c절과 6i~6j절의 저주 선언을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과 비교한 판서.
앞서 다룬 중보자의 문제와 죄인의 구원 문제에서, 에녹서와 성경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 대조하는 내용 | 에녹서에서 비판하는 가르침 | 대조하는 성경의 말씀 |
|---|---|---|
| 중보를 맡는 존재 | 천사들이 성도들을 위해 중보하며, 영생에 이르는 회개와 관련된 역할을 맡는다 |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는 그리스도 예수 한 분이다. 디모데전서 2:5 |
| 죄인의 구원 | 죄인 모두에게 구원이 없고 저주가 머무른다 |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셨으며, 바울은 자신을 죄인들의 우두머리라고 부른다. 디모데전서 1:15 |
부활 이후의 결혼 문제에서도 차이가 드러난다. 이를 살피려면 마태복음 22장 30절과 에녹서 39장을 대조해야 한다.
에녹서 39장과 부활 이후의 결혼
에녹서 39장 1절은 하늘에 있는 성도들이 땅으로 내려와 결혼한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이는 죽어서 하늘에 간 뒤에도 결혼하게 된다는 뜻으로, 몰몬교와 무함마드의 천국 가르침에 견줄 만한 이단적 내용이다. 문제 삼는 것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일 자체가 아니라, 거룩한 자들이 사람들과 섞이고 후손을 이루는 일이다. 에녹서 39장 1절로 소개하며 읽는 대목은 다음과 같다.
“그날들에 이런 일이 있으리니, 선택받은 거룩한 자녀들이 높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들의 후손이 사람의 자녀들과 하나가 되리라. 그날들에 에녹은 열심과 진노의 책들과 불안과 추방의 책들을 받았다.”
여기서 ‘선택받은 거룩한 자녀들’은 하늘에 있는 성도들로, 그 후손이 사람의 자녀들과 하나가 된다는 말은 땅에서의 결혼으로 풀이된다. 판서에서도 에녹서 39장 1절 옆에 하늘의 성도들을 적고, 땅과 결혼을 가리키는 문구로 화살표를 연결한다.

하늘의 성도들이 땅으로 내려와 결혼한다는 에녹서 해석을 화살표로 정리한 판서.
에녹서 39장 1절을 하늘의 성도들이 땅으로 내려와 결혼한다는 내용으로 풀이한 판서.
먼저 거룩한 성도와 타락한 천사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성경에서 땅으로 내려와 사람들과 뒤섞이는 존재는 선한 자들이 아니라 악한 자들, 곧 타락한 천사들인데, 에녹서는 그 일을 거룩한 자녀들에게 돌려 의인과 악인을 뒤섞는다. 서로 다른 존재를 이처럼 혼동하는 책을 성경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결혼 자체에 대해서는 부활 이후의 상태를 밝히신 예수님의 말씀을 제시한다.
마태복음 22:30 부활 때에는 그들은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아니하고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천사들과 같으니라.
마태복음 22장 30절은 사람이 죽어서 하늘에 간 뒤에도 결혼한다는 가르침과 맞지 않는다. 부활한 사람들이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천사들과 같다는 말씀은 결혼하지 않는다는 근거가 된다. 반면 땅으로 내려와 사람들과 섞인 타락한 천사들의 행동은 하늘의 천사들과 구분해야 한다.
| 비교 대상 | 결혼과 부활에 관한 내용 |
|---|---|
| 에녹서 39장 1절 | 거룩한 자녀들의 하강과 후손의 결합을 성도들의 지상 결혼으로 풀이한다. |
| 마태복음 22장 30절 | 부활 때에는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고 하늘의 천사들과 같다. |
| 땅에 내려와 사람들과 섞이는 존재 | 거룩한 성도가 아니라 타락한 천사다. |
문맥을 이해하려면 마태복음 22장 24절부터 함께 읽어야 한다. 한 여자의 배우자가 누구인지를 묻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부활 때에는 시집가지 않는다고 답하셨다. 이 답변에 비추어 보면 에녹서의 결혼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없다. 에녹서는 성경에 넣을 만한 책이 아니며 정경에서 제외해야 한다.
에녹서 51장: 땅과 스올과 지옥이 돌려주는 죽은 자들
부활 이후의 결혼만큼 중요한 문제는 죽은 자들이 돌아오는 목적이다. 에녹서 51장 1~2절을 요한계시록 20장과 대조하며, 죽은 자들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만이 아니라 나온 뒤 무엇을 받는지에 주목한다. 먼저 읽는 에녹서의 문장은 땅이 자신에게 맡겨진 것을 돌려준다는 말로 시작한다.
“그날들에 땅도 자신에게 맡겨진 것을 돌려주리라.”
땅이 그 안에 있던 죽은 자들을 내놓는다는 뜻이다. 이어지는 낭독에서는 스올과 지옥도 자신이 받은 것을 돌려준다.
“스올도 자신이 받은 것을 돌려주고, 지옥도 자신이 갚아야 할 것을 돌려주리라.”
땅과 스올과 지옥이 각각 죽은 자들을 내놓은 뒤, 에녹서 51장 2절에는 그들 가운데 의롭고 거룩한 자들을 택한다는 말이 이어진다.
“그가 그들 가운데서 의롭고 거룩한 자들을 택하리니, 그들이 구원받을 날이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을 돌려주는 장면 바로 뒤에 그들이 구원받을 날이 가까워졌다는 말이 나온다. 이 순서대로 읽으면 땅과 스올과 지옥에서 나온 죽은 자들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앞서 에녹서 39장에서는 하늘에 있던 자들이 땅으로 내려와 결혼한다는 가르침을 비판했다면, 여기서는 죽은 자들이 돌아온 뒤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을 비판한다.

중보와 죄인의 구원, 천사와 결혼에 관한 비교 아래에 에녹서 51장 1~2절의 ‘지옥의 죽은 자들’ 항목이 놓여 있다.
지옥의 죽은 자에게 구원의 기회가 있다는 가르침
지옥에 있는 죽은 자들의 혼에게도 구원의 기회가 있다는 에녹서의 가르침은 이단이다. 반박의 초점은 죽은 자들이 지옥에서 나온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지옥에서 나오는 것과 구원받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그들이 나온 뒤 어떤 일을 겪는지를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에녹서 51장 1~2절과 ‘지옥의 죽은 자들’을 연결한 판서는 사후 구원의 기회에 관한 비판을 정리한다.
사후 심판에 관한 또 다른 비판 대상으로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를 든다. 김진하 목사는 재림교가 혼이 불못에서 영원토록 불타는 것을 믿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다만 교리를 계속 바꾸기 때문에 현재 어느 정도까지 그렇게 믿는지는 자신도 확실하지 않다고 덧붙인다. 이어 엘렌 G. 화이트(Ellen G. White)가 최후 심판 때 사탄이 속죄염소가 되어 모든 죄를 짊어진다고 가르쳤다고 비판한다. 이 가르침의 순서는 이렇다. 사탄에게 모든 죄가 지워지고, 죽은 자들에게는 그 죄가 지워지지 않으므로, 그들이 지옥에서 영원히 불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은 요한계시록 20장과 모순된다. 에녹서와 이 같은 교리들이 성경의 심판 장면을 상당 부분 베끼면서도 자신들이 가르치고 싶은 내용을 덧붙였다는 비판이다. 죽은 자와 심판이 등장한다는 공통점만으로 성경과 같은 가르침이라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요한계시록에서 죽은 자들이 지옥을 나온 뒤 맞는 결과까지 살펴야 한다.
백보좌 앞에 나오는 목적은 구원이 아니라 심판이다
요한계시록 20:11 또 내가 큰 백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니, 그의 면전에서 땅과 하늘이 사라졌고 그들의 설 자리도 보이지 않더라.
요한계시록 20:12 또 내가 죽은 자들을 보니, 작은 자나 큰 자나 하나님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져 있으며 또 다른 책도 펴져 있는데 그것은 생명의 책이라. 죽은 자들은 자기들의 행위에 따라 그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더라.
요한계시록 20장 11~12절에서는 큰 백보좌에 앉으신 분의 면전에서 땅과 하늘이 사라지고 그들의 설 자리도 보이지 않는다. 작은 자나 큰 자나 죽은 자들이 하나님 앞에 서며, 그 앞에는 책들과 생명의 책이 펼쳐진다. 이들은 자기들의 행위에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받는다. 죽은 자들이 다시 등장하는 장면이지만, 하나님 앞에 서는 목적은 구원이 아니라 심판이다.
요한계시록 20:13 바다도 그 안에 있던 죽은 자들을 넘겨주고 또 사망과 지옥도 그들 안에 있던 죽은 자들을 넘겨주니 그들이 각자 자기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으며
13절에서는 바다가 그 안의 죽은 자들을 넘겨주고, 사망과 지옥도 그들 안에 있던 죽은 자들을 넘겨준다. 에녹서와 마찬가지로 죽은 자들을 내놓는 장면이 나오지만, 요한계시록은 곧이어 그들이 각자 자기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받는다고 말한다. 따라서 지옥에서 나왔다는 표현을 곧바로 구원받았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그 뒤에 이어지는 결과를 보아야 한다.
요한계시록 20:14 사망과 지옥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요한계시록 20:15 누구든지 생명의 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사망과 지옥은 불못에 던져지며, 이것이 둘째 사망이다. 생명의 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도 불못에 던져진다. 생명의 책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이 맞는 결과는 불못이다.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라는 강조는 이 분명한 차이를 짚는다. 지옥이 죽은 자들을 내어 주는 것은 새로운 구원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심판을 받게 하기 위해서라는 결론이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는 다른 심판이 적용된다. 그들은 백보좌 심판에 가지 않는다. 그들이 나아갈 곳은 고린도후서 5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심판석이다.
고린도후서 5:10 `이는 우리 모두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아가서 선이든지 악이든지 각자 자기가 행한 것에 따라, 자기 몸으로 행한 것들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
고린도후서 5장 10절은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각 사람이 선이든 악이든 자기 몸으로 행한 것에 따라 받는 일을 말한다. 이 심판석은 요한계시록 20장의 백보좌 심판과 다르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도 심판을 받지만, 그 사실이 지옥의 죽은 자들에게 구원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나중에야 이름을 받았는가
에녹서 48장 1~3절과 6절대로라면 하나님의 아들에게 본래 이름이 없었고, 영원 동안 이름 없이 계시다가 하나님께서 이름을 지어 주신 뒤에야 이름을 갖게 된다. 예수님이 아주 한참 뒤에야 이름을 받으셨다는 말인가? 이 이단적 가르침을 살펴보려면 먼저 요한복음 1:1을 읽어야 한다.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느니라.
태초에 이미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하나님이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중에야 이름을 얻었다는 설명과 맞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언제부터 존재하셨으며 자신의 이름을 언제부터 지니셨는지가 두 본문을 대조하는 핵심이다.
영원부터 계신 그리스도와 에녹서의 ‘이름을 받은 인자’
요한복음 1:1~3에서 태초에 계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다. 1절에 이어 2~3절까지 읽으면,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그분이 만물을 지으셨다는 사실도 드러난다.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느니라.
요한복음 1:2 그 말씀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느니라.
요한복음 1:3 만물은 그에 의하여 지은 바 되었으며, 이미 지음받은 것 가운데 그가 없이 지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더라.
지음받은 것 가운데 그리스도 없이 생겨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스도는 영원 자체이시며 언제나 존재하신다. 에녹서에 등장하는 인자가 이러한 그리스도의 영원성과 맞는지를 따지기 위해, 앞서 지목한 에녹서 48장 1~3절과 6절을 살펴본다. 낭독은 지혜의 샘과 그 물을 마시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 주위에는 많은 지혜의 샘이 있었고, 목마른 모든 이가 그 샘물을 마시고 지혜로 충만해졌으며, 그들의 거처는 의롭고 거룩하고 선택받은 이들과 함께 있었다.
이어 나오는 ‘그때 그 인자’에서 주목할 말은 인자라는 칭호다. 예수께서 지니신 이 칭호는 구약에는 나타나지 않았고 신약 이후에야 나타났다. 에녹서가 이 칭호를 사용한 것도 성경을 모방했기 때문이다. 성경이 완성된 뒤에 에녹서가 그 표현을 가져왔다는 점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다시 이어지는 낭독에는 인자가 이름을 받는 시점과 장소가 나온다.
그때 그 인자는 영들의 주 앞에서 이름을 받았고, 그의 이름은 날들의 머리이신 분 앞에서 불렸다. 참으로 해와 표징들이 창조되기 전에, 하늘의 별들이 만들어지기 전에 그의 이름은 영들의 주 앞에서 불렸다.
여기에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영원토록 그분 앞에서 선택되어 감추어졌다는 구절이 이어진다. 중요한 것은 이름을 받은 때가 세상 창조보다 앞서느냐 뒤서느냐가 아니다. 해와 표징들과 별들이 만들어지기 전이라 하더라도, 그리스도가 어느 때에 이르러 이름을 받았다는 설명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존재하셨고, 자신의 이름도 영원부터 지니셨다. 나중에 이름을 얻은 존재가 아니다.
이때 대조하는 말씀은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라.”이다. 같은 표현이 담긴 요한계시록 21:6을 그리스도의 영원성을 설명하는 말씀과 함께 놓는다.
요한계시록 21:6 또 내게 말씀하시기를 “다 이루었노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라. 내가 목마른 자에게 생명수의 샘을 값없이 주리라.
| 비교 항목 | 에녹서 48장의 내용 | 반박 |
|---|---|---|
| 이름 | 인자가 영들의 주 앞에서 이름을 받는다. | 그리스도는 영원부터 자신의 이름을 지니셨다. |
| 창조 이전 | 해와 표징들과 별들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름이 불리고, 세상 창조 이전부터 선택되어 감추어진다. |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며 만물을 지으신 분이다. |
| 인자라는 칭호 | 에녹서가 ‘인자’라는 칭호를 사용한다. | 이 칭호의 사용을 완성된 성경을 모방한 증거로 삼는다. |
그리스도의 이름을 다루는 이 내용에서도 영지주의자들이 그분의 신성을 낮추는 가르침이 드러난다. 천사에게 큰 역할을 부여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천사를 높이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천사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내려 둘을 동등하게 놓는다. 에녹서를 실제로 읽어 보았는가? 직접 읽고 대조하면 이러한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노아의 출생 묘사와 ‘레이저 광선’이라는 풍자
에녹서 106장의 노아 출생 이야기에도 천사를 높이는 가르침이 나타난다. 내용은 터무니없는 희극을 떠올리게 할 만큼 기이하다. 김진하 목사는 이전 성경 공부에서도 외경의 우스운 이야기 몇 가지를 다뤘다고 회고하며, 외경 몇 권을 직접 읽어 보면 이런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고 권한다.
노아의 출생 장면을 소개하며 거듭 강조하는 말은 ‘노아의 눈에서 레이저 광선이 나왔다’는 것이다. “목사님, 과장하시네요.”라는 반응이 나올 만하지만, 뒤이어 나오는 내용을 읽어 보자. 노아의 눈에서 빛이 나와 아버지가 집 밖으로 달아났고,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아보려고 에녹을 찾아 먼 길을 가야 했다고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때 레이저 광선은 눈에서 나오는 빛을 풍자한 표현이다. 뒤이어 읽는 에녹서의 문구는 아기가 눈을 뜨자 집 안이 태양처럼 밝아졌다는 묘사다.
직접 살펴볼 본문으로 지목한 에녹서 106장 2~3절은 갓 태어난 노아의 외모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의 몸은 눈처럼 희고 활짝 핀 장미처럼 붉었으며, 그의 머리카락과 길게 늘어진 머리채는 양털처럼 희었고, 그의 눈은 아름다웠다.
이어 노아가 눈을 뜨자 온 집이 태양처럼 밝아지고, 아기가 산파의 손에서 일어나 입을 열어 의의 주와 대화한다. ‘레이저 광선이 나오는 눈’이라는 풍자는 갓난아기가 집 전체를 빛으로 채우는 이 장면을 가리킨다. “목사님, 지금 과장하시네요.”라는 반론에 답하려면 4~6절까지 읽어야 한다. 이 이야기는 아기의 아름다움이나 특별함을 나타내는 비유가 아니라 문자적인 사건 묘사다.
그 근거로 주목하는 것은 아버지 라멕의 반응이다. 라멕은 아기를 두려워하여 달아나 자기 아버지 므두셀라를 찾아가고, 자신이 본 아기의 모습을 이렇게 전한다.
그가 아버지에게 말했다. ‘저는 사람과 다르고 사람을 닮지 않았으며 하늘의 하나님의 아들들을 닮은 이상한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기가 ‘하늘의 하나님의 아들들’을 닮았다는 표현에도 천사를 높이는 가르침이 다시 나타난다.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은 명백한 영지주의다. 이어지는 라멕의 말에는 아기의 본성이 자신들과 다르다는 진술과 함께, 자기에게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천사들에게서 난 것 같다는 생각까지 담겨 있다.
그의 본성은 다르며 우리와 같지 않습니다. 그의 눈은 태양 광선과 같으며 그의 얼굴은 영광스럽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가 제게서 난 것이 아니라 천사들에게서 난 것 같습니다.
태양 광선 같은 눈과 영광스러운 얼굴은 라멕이 실제로 겁을 먹고 달아났다는 앞선 행동과 연결된다. 눈에서 나온 빛이 태양처럼 온 집을 밝히고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사건을 서술하고 있으므로, 단순히 아기의 외모를 칭찬하는 비유로 읽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낭독 전후에 거듭 “문자 그대로”라고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에녹서 106:2~3과 4~6은 노아의 눈에서 나온 빛과 라멕의 두려움을 이어 보여 준다. ‘레이저 광선이 나오는 눈’은 이 기이한 출생 장면을 풍자한 표현이다.
에녹서를 정경에서 배제하고 킹제임스성경을 지켜야 한다는 결론
노아의 출생 묘사에서도 확인했듯이, 에녹서는 천사를 높이는 영지주의적 가르침을 담고 있다. 분명한 이단을 성경에 포함할 수는 없다. 에녹서는 단순히 흥미로운 옛이야기를 담은 책이 아니라 정경에서 배제해야 할 책이다.
그렇다면 어떤 책들을 올바른 성경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답은 이미 손에 있는 킹제임스성경이다.
여러분 손에 있는 그 책, 킹제임스성경에는 더하거나 뺄 것이 없습니다.
에녹서는 “명백한 영지주의 이단”이다. 이미 손에 있는 킹제임스성경을 그대로 지켜야 하며, 에녹서를 추가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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