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제임스 성경

창세기 1장 1–8절: 최초의 창조와 간극, 빛과 창공

이 글은 성경 교사 김진하(Gene Kim) 목사의 창세기 1장 1–8절 강의 내용을 주제별로 정리하고 재구성한 성경 해설이다.

창세기의 첫 문장은 만물의 시작에 하나님을 놓는다. 시간과 공간과 물질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 그런데 창조된 하늘과 땅을 선언한 직후, 본문은 형체가 없고 공허하며 어두움과 물에 잠긴 세계를 보여 준다. 이미 창조된 세계가 왜 이러한 상태에 놓였는가? 해가 만들어지기 전에 있었던 빛은 무엇이며, 물들 사이에 놓인 창공은 어떤 하늘인가?

이 질문을 풀려면 최초의 창조, 죄에 대한 우주적 심판, 그리고 새로운 창조를 구별해야 한다. 창세기 1장 1절은 최초의 창조를, 2절은 파괴된 세계의 상태를, 3절부터는 다시 시작되는 엿새의 창조를 보여 준다. 이 간극은 진화론을 수용하기 위한 가설이 아니라 성경의 여러 본문을 함께 읽을 때 반드시 인정해야 하는 사실이라는 입장이다.

해석의 기본 원리는 성경을 성경과 비교하는 것이다. 단어와 문장을 세밀하게 읽고 관련 구절을 연결하면, 어렵게 느껴지던 본문도 그 뜻과 구조를 드러낸다. 이러한 읽기가 쌓일수록 독자는 다른 사람의 설명에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성경을 읽어 나갈 수 있다.

시작의 책에 담긴 역사와 모형

창세기의 저자는 모세다. 킹제임스성경의 책 제목도 창세기를 ‘창세기라 불리는 모세의 첫 번째 책’으로 소개한다.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를 모세오경(Pentateuch)이라고 하며, 창세기는 그 첫 책이다.

창세기는 50장, 1,534절로 이루어져 있고 영어 단어 수는 38,267개다. 히브리어 정경과 영어 성경의 책 목록에서 모두 첫머리에 놓인다. 세계와 인간, 그리고 성경의 주요 주제들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다루는 시작의 책이기 때문이다.

영어 이름 ‘제네시스(Genesis)’도 이러한 성격을 나타낸다. 세대를 뜻하는 ‘제너레이션스(generations)’와 연결되며, ‘젠’, 유전학을 뜻하는 ‘제네틱스(genetics)’, 유전자를 뜻하는 ‘진스(genes)’, 생성한다는 뜻의 ‘제너레이트(generate)’도 같은 맥락에서 떠올릴 수 있다. 과학 분야에서 제네시스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도 기원과 생성이라는 의미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럭크만 박사의 창세기 개론은 이 책이 하늘들과 땅, 인간, 죄, 구속, 인종들, 언약들의 시작을 기록한다고 정리한다. 창세기에는 아담과 이브, 노아와 에녹, 카인과 아벨, 롯과 아브라함, 이삭과 이스마엘, 에서와 야곱, 요셉과 유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창조뿐 아니라 이들의 삶을 통해서도 성경의 주요 주제가 드러난다.

같은 개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아담, 아벨, 어린양, 이삭, 방주, 유다, 실로, 요셉을 들고, 적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카인, 함, 님롯, 라반, 이스마엘, 에서, 파라오를 든다. 모형이란 어떤 인물이나 사물이 그리스도 또는 적그리스도를 미리 보여 주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모형은 사람에게만 한정되지 않으며, 어린양과 방주 같은 대상도 포함한다.

럭크만은 신구약의 모든 주요 교리가 창세기 처음 열두 장에 들어 있다고까지 평가한다. 또한 창세기는 요한계시록을 보완한다. 성경의 처음과 마지막이 서로 맞물려 끝없는 원을 이루듯, 두 책을 함께 읽을 때 드러나는 풍성함도 다함이 없다는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께서”와 창조의 다섯 요소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느니라.

모든 것의 시작을 다루는 책은 “태초에”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시작 바로 곁에 하나님이 계신다. 킹제임스성경의 “In the beginning God”은 기원의 문제를 제시하면서 동시에 그 기원의 주체를 밝힌다. 하늘과 땅보다 먼저 주목해야 할 분은 그것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다.

김진하 목사는 UC 버클리의 영어 수업에서 이 구절을 다룬 경험을 회고한다. 그 수업에서는 현대 성경 역본들을 비판하면서 킹제임스성경의 영어를 칭찬했다. 뜻밖의 평가에 자신이 대마초라도 피운 것처럼 느껴질 만큼 놀랐다는 농담을 덧붙일 정도였다. 그러나 그 시간이 영어 수업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평가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현대 역본들은 표현의 힘을 잃고 밋밋해졌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킹제임스성경의 첫 문장은 시작을 선언하기에 적절한 힘을 지녔다는 것이다.

그는 히브리어에서도 시작과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함께 놓는다고 설명하며, 현대 역본들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시작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이 평가에서 핵심은 시작과 하나님을 떼어 놓지 않는 표현이다.

첫 구절에는 시간·운동·에너지·공간·물질이라는 다섯 요소가 담겨 있다. 김진하 목사는 이 다섯 가지로 과학에 필요한 모든 요소가 갖추어진다고 설명한다.

  • 시간은 “태초에”에 나타난다.

  • 운동은 “창조하셨느니라”라는 행위에 나타난다.

  • 에너지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사실, 곧 창조의 주체와 그분의 행위에 연결된다.

  • 공간은 “하늘”에 해당한다.

  • 물질은 “땅”에 해당하며, 땅을 비롯한 모든 물리적 대상을 포함한다.

운동과 에너지는 같은 창조 행위를 서로 다른 측면에서 읽은 것이다. 운동에서는 행위 자체에, 에너지에서는 그 행위를 이루신 하나님과 그분의 능력에 주목한다. 이처럼 시간·운동·에너지·공간·물질이 한 문장 안에 함께 놓인다.

창세기 첫 문장에 함께 나타나는 시간·운동·에너지·공간·물질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느니라.

창조주를 출발점에 두는 선언과 철학 비판

이 해석에서 창세기 1장 1절은 세상의 철학적 신념과 거짓 종교를 반박하는 선언이다. 여러 사상을 하나씩 논박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첫 문장이 그 출발점을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다신론은 여러 신을 전제하지만, 본문의 창조주는 여러 신이 아니라 단수인 하나님이다. 무신론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지만, 성경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계심을 전제한다. 무신론자가 첫 구절을 읽고 아주 신이 나겠다는 반어적 농담은 그만큼 성경의 첫 문장과 무신론의 충돌이 직접적이라는 뜻이다. 진화론에 대해서는 “창조하셨느니라”가 답이 된다. 하늘과 땅은 스스로 진화해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

실존주의와 이신론에 대한 비판에는 김진하 목사의 연구 경험이 배경으로 놓인다. 그는 석사 과정에서 철학과 심리학이 섞인 실존주의를 심리학 분야의 최종 보고서 주제로 삼았다. 가장 어려운 주제였지만 그만큼 흥미로웠으며, 좋은 성적을 얻은 것을 주님께서 주신 복으로 회고한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실존주의 전체에 동일한 신앙을 부여하는 설명이 아니다. 철학·심리학·신학이 만나는 이 분야의 일부 사람들이 하나님은 무언가를 창조하신 뒤 그대로 두셨고, 이후의 일은 인간에게 맡기셨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이제 인간이 스스로 일을 해 나간다는 생각에서 일부 이신론자들의 입장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의 역사적 평가에 따르면 미국은 하나님과 함께 시작했을 수 있지만, 동시에 이신론이라는 이교 철학 안에서 세워진 측면도 있다. 건국의 아버지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이신론을 믿었다는 점을 그 근거로 든다. 하나님을 처음에 놓는 것과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받아들이는 것은 같지 않다.

이에 대한 답은 창조의 중심에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하늘과 땅의 창조에 아무것도 기여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뒤 인간을 내버려 두신 분도 아니다. 따라서 창조를 인정하면서 그 이후에는 하나님이 물러나셨다고 보는 생각 역시 거부된다.

동양 종교에 대한 비판도 기원의 문제에 집중한다. 김진하 목사는 힌두교·불교·브라만교가 윤회와 깨달음을 거쳐 우주와 하나가 되거나 우주로 돌아가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는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설명에서는 우주가 만물의 기원이 되지만,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이 우주의 기원이다. 우주가 시작 자체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주를 존재하게 하셨다.

그는 무신론자와 진화론자들도 우주가 언제나 존재했다고 생각하는 점에서는 동양 종교와 어느 정도 일치한다고 비판한다. 또한 고등교육계가 성경의 첫 구절부터 성경을 싫어하는 까닭을, 이 구절이 그들의 철학적 전제들을 반박하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이 모든 비판을 관통하는 주장은 하나다. 만물의 출발점은 우주나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최초의 창조, 파괴된 세계, 새로운 시작

창세기 1:2 땅은 형체가 없고 공허하며 어두움이 깊음의 표면에 있으며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에서 거니시더라.

‘공허하다’에 해당하는 void는 비어 있다는 뜻이고, without form은 형체가 없다는 뜻이다. 2절의 땅은 형체도 없고 그 안을 채우는 것도 없으며, 깊음의 표면은 어두움에 덮여 있다.

많은 창조론자는 이를 아직 완성되지 않은 땅의 준비 단계로 설명한다. 그러나 1절은 하나님께서 땅을 준비하셨다고 하지 않고 창조하셨다고 한다. 특히 과거형 created는 이미 이루어진 창조를 가리킨다. 준비와 창조는 같은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땅은 형체를 갖추고 거주자가 있는 세계였으므로, 2절의 황량함은 최초 상태가 아니라 이미 창조된 세계에 일어난 사건의 결과다.

이것이 창세기 간극(Genesis gap)의 핵심이다. 여기서는 이를 단순한 ‘간극 이론’이 아니라 ‘간극의 사실’로 받아들인다. 사건의 순서는 분명하다.

  1. 창세기 1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 최초의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이는 아담과 뒤의 엿새 창조보다 앞선 일이다.

  2. 그 세계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인 천사들과 루시퍼가 거주했다.

  3. 그들이 창조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우주적 홍수로 심판하셨다. 물은 땅뿐 아니라 우주를 채웠고 그들의 문명을 쓸어버렸다.

  4. 창세기 1장 2절은 그 결과로 남은 물과 어두움, 혼돈과 무질서를 보여 준다.

  5. 3절부터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시며, 천사들보다 낮은 피조물인 인간에게 그 세계를 맡기신다.

루시퍼와 타락한 천사들이 인간을 미워하고 공격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신들보다 훨씬 약한 인간이 한때 자신들에게 주어졌던 자리와 문명을 넘겨받았기 때문이다.

최초의 창조와 물·어두움, 빛의 출현

최초의 창조 뒤에 물과 어두움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빛이 비친다.

거주하도록 조성된 땅과 아담 이전의 존재들

이사야 45:18 하늘들을 창조한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하나님은 스스로 땅을 조성하고 만들었으며, 그는 그것을 견고히 세우되 헛되이 창조하지 아니하셨으니 사람이 거주하도록 조성하였느니라. 나는 주라. 아무도 다른 이가 없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땅을 조성하고 만드셨으며 견고히 세우셨다. 중요한 것은 땅을 헛되이 창조하지 않으셨고 거주하도록 조성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 2절의 어두움과 공허함은 하나님께서 처음 만드신 그대로의 상태일 수 없다.

간극을 부정하면 거주하도록 조성하신 땅과 형체 없이 비어 있는 땅을 같은 최초 상태로 보아야 한다. 이 해석은 그것이 성경과 모순된다고 판단한다. 간극은 두 절 사이에 임의로 시간을 삽입하는 문제가 아니라, 거주하도록 창조된 세계와 심판으로 황량해진 세계를 구별하는 문제다.

그렇다면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는 누가 있었는가? 욥기 38장은 땅의 기초가 놓이던 때로 시선을 돌린다.

욥기 38:4 내가 땅의 기초들을 놓을 때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게 명철이 있다면 분명히 밝히라.

욥기 38:6 그 기초들은 무엇 위에다 고정시켰으며 모퉁잇돌은 누가 놓았느냐?

욥기 38:7 언제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했으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모두 기뻐서 소리쳤느냐?

4절의 질문은 인간인 욥이 그 자리에 없었다는 사실을 짚는다. 6절은 땅의 기초와 모퉁잇돌을 놓으신 분이 누구인지를 묻는다. 반면 7절에는 그 일을 보며 노래하고 기뻐한 존재들이 나온다. 땅의 기초가 놓일 때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미 존재했다.

이들은 아담 이전의 천사들이다. 그들이 기뻐한 이유는 당시의 땅이 자신들을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인류는 아직 없었지만 하나님의 아들들은 그곳에 있었다. 욥에게 던지신 질문과 천사들의 환호를 함께 읽으면, 인간 이전의 세계를 구별해야 하는 이유가 드러난다.

옛 세상의 물 심판과 현재 우주의 불 심판

베드로후서 3:4 말하기를 “그가 온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만물은 창조의 시작부터 그대로 있다.” 하리니

그리스도의 오심을 비웃는 이들은 만물이 변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때 시간의 기준은 노아 시대가 아니라 창조의 시작이다. 따라서 이어지는 물의 심판도 노아의 홍수가 아니라 창조의 시작과 관련된 다른 홍수로 읽어야 한다.

베드로후서 3:5 이는 그들이 이것을 고의로 잊으려 함이라.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하늘들이 옛적부터 있었다는 것과, 땅도 물에서 나왔고 물 안에 있었다는 것이니

베드로후서 3:6 이로써 이전에 있던 세상은 물이 범람해서 멸망하였느니라.

창세기 1장은 태초의 창조를 선언한 뒤 깊음과 물들을 보여 준다. 베드로후서도 창조의 시작을 언급한 뒤, 옛적부터 있던 하늘들과 물에서 나와 물 안에 있던 땅, 그리고 물의 범람으로 멸망한 세상을 말한다. 시작과 창조, 물, 멸망이라는 연결이 창세기 첫 두 절의 간극을 뒷받침한다.

이 홍수는 지구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5절은 복수형인 하늘들(heavens)과 땅을 함께 언급한다. 땅뿐 아니라 우주 전체가 거대한 물속에 잠긴 것이다.

홍수의 범위를 지구 전체로만 한정하려는 반론에는 7절이 답이 된다.

베드로후서 3:7 그러나 현재 있는 하늘들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보존되어 있으되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에 불사르려고 간수되어진 것이니라.

이전 세상의 물 심판과 현재 하늘들과 땅의 불 심판은 같은 문맥 안에 있다. 현재의 우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존되지만, 영원히 지금 모습으로 남도록 보존되는 것은 아니다. 경건치 않은 자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에 불살라지도록 간수되어 있다.

요한계시록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있지 아니하더라.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나는 사건은 우주 전체의 변화다. 베드로후서 3장 7절의 불 심판을 이 우주적 사건과 연결하면서, 바로 앞의 물 심판만 지구의 사건으로 좁힐 수는 없다. 앞뒤의 하늘들과 땅을 같은 범위로 읽어야 한다.

간극을 받아들이는 것이 불편하더라도 우선하는 것은 성경의 문맥이다. 개인의 선호나 기존 설명보다 성경이 이겨야 한다는 원칙이 이 논증의 중심에 있다.

이전 세상의 물 심판과 현재 하늘들과 땅의 장래 불 심판

베드로후서 3:6 이로써 이전에 있던 세상은 물이 범람해서 멸망하였느니라.

베드로후서 3:7 그러나 현재 있는 하늘들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보존되어 있으되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에 불사르려고 간수되어진 것이니라.

간극은 진화의 시간이 아니라 파괴의 사건이다

간극에 대한 첫 번째 반론은 진화론에 문을 열어 준다는 우려다. 최초의 창조와 엿새 창조를 구별하면 그 사이에 수백만 년을 넣고, 오래된 지구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다.

그러나 간극을 인정하는 것과 지구의 나이를 수백만 년으로 정하는 것은 다르다. 창세기의 해당 본문은 그런 연대를 말하지 않으며, 이 해석도 오래된 지구를 주장하기 위해 간극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선언 자체가 진화론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반박한다.

논점은 2절의 물이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있다. 간극을 반대하는 창조론자들은 물에 잠긴 땅을 이후 창조를 위한 준비 상태로 설명한다. 김진하 목사가 비판하는 진화론자들도 창세기의 첫 두 절을 가져와, 땅이 수문학적·수중 단계에 있다가 시간이 흐르며 생명이 형성되었다고 설명한다. 두 입장은 서로 다르지만, 물에 잠긴 상태를 생명이 나타나기 위한 단계로 읽는다는 점에서는 닮아 있다는 비판이다.

입장창세기 1장 2절의 물에 잠긴 상태이후 생명과의 관계
간극을 반대하는 창조론자의 설명창조를 위한 준비 단계뒤이은 창조를 준비하는 과정
이 해석이 비판하는 진화론적 설명수문학적·수중 단계시간이 지나 생명이 형성되는 출발 상태
창세기 간극 해석기존 세계가 파괴된 결과물 자체가 생명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 아님

간극 해석에서 물은 생명을 창조하는 물이 아니라 세계를 멸망시킨 물이다. 따라서 물속에서 시간이 흐르며 생명이 형성되었다는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창조론자들 자신도 물과 햇빛, 우주의 여러 요소만으로 생명이 형성될 수 없다고 논증한다. 그렇다면 진화론을 반박할 때는 생명 형성의 근거로 인정하지 않는 물을, 창세기 1장 2절에서는 왜 창조의 준비 단계로 삼는가? 김진하 목사는 이 모순을 지적하며 오히려 어느 쪽이 진화론에 굴복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기록의 생략과 다니엘서의 역사적 간극

또 다른 반론은 창세기 1장 1–2절에 너무 많은 사건을 넣는다는 것이다. 두 절에는 루시퍼와 하나님의 아들들이 직접 언급되지 않는다. 최초의 창조 뒤에 천사들의 죄와 우주적 파괴가 있었고, 3절부터 엿새 창조가 시작된다고 읽는 것은 짧은 본문에 지나치게 많은 내용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에 대한 답은 성경이 모든 사건과 그 사이의 시간을 한자리에서 빠짐없이 서술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과정을 생략하고 뒤의 사건으로 건너뛰시기도 한다. 사건이 그 자리에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과 그 사건이 없었다는 것은 다르다.

다니엘서 1장은 이러한 기록 방식을 보여 주는 사례다.

다니엘 1:1 유다의 여호야킴왕 치리 제삼년에, 바빌론의 느부캇넷살왕이 예루살렘에 와서 그 성을 포위하였더라.

다니엘 1:2 주께서 유다의 여호야킴왕을 하나님의 집 기명 일부와 더불어 그의 손에 주셨더니, 그가 그것을 시날 땅 자기 신의 집으로 가져와, 그 기명들을 그의 신의 보물창고로 옮겼더라.

예루살렘의 포위에서 왕과 성전 기명의 인도, 시날 땅으로의 이동, 신의 보물창고에 기명을 옮기는 일까지 여러 과정이 두 절 안에 담겨 있다. 이어지는 본문은 왕궁에서 교육할 소년들의 선발로 넘어간다.

다니엘 1:3 ○ 왕이 그의 내시 장관 아스페나스에게 이스라엘 자손들과 왕의 씨들과 고관들 중에서 몇 사람을 데려오라고 일렀더니,

다니엘 1:4 곧 흠 없고 잘생겼으며 모든 지혜에 능숙하고 지식에 뛰어나며 과학을 이해하며 그들 안에 왕궁에서 설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그러한 소년들로서, 그들에게 칼데아인들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치기 위함이더라.

아스페나스는 이스라엘 자손들과 왕의 씨들과 고관들 가운데 왕궁에서 섬길 능력을 갖춘 소년들을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는다. 흠이 없고 잘생겼으며 지혜·지식·과학을 이해하는 능력을 갖춘 이들에게 칼데아인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치려는 것이다. 다니엘과 다른 이스라엘 소년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여호야킴왕 치리 제삼년이라는 출발점에서 다니엘의 역사를 따라가면 긴 시간이 흐른다. 그러나 포위와 이동, 선발과 교육에 이르는 모든 정보가 연속된 구절 안에 상세히 기록되지는 않는다.

김진하 목사는 다니엘서의 연대 논쟁을 설명하면서 주요 포로 사건을 세 차례로 구분한다. 기원전 606년은 여호야킴 때, 기원전 598년은 여호야킨 때, 기원전 586년은 시드키야 때의 사건이며, 마지막에는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구분이다. 포위와 포로 사건을 한 번의 일로 묶으면 시간이 크게 건너뛰거나 연대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다.

다니엘서에서도 성경이 사건과 시간을 생략하며 기록한다는 원리를 볼 수 있다. 구절이 연속되어 있다고 해서 그 사이의 모든 사건과 시간이 연속적으로 서술된 것은 아니다. 창세기에서도 최초의 창조와 파괴된 상태를 구별하고, 생략된 사건들은 관련된 다른 성경 본문과 함께 읽어야 한다.

죽음, 떠나간 영들, 지옥의 준비

창세기 1장 2절의 세계에는 죽음이 가득하다. 우주적 홍수의 영향을 받은 타락한 천사들 가운데 일부는 영이 떠나 지옥으로 내려갔다. 죽음은 기본적으로 영이 떠나는 것이며, 떠난 영을 어떻게 다루실지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

전도서 12:7 그때에 흙은 예전에 있던 대로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셨던 하나님께로 돌아가리라.

흙은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하나님께서는 영들을 원하시는 대로 다루신다. 죄를 지은 천사들에게 내려진 처분에서도 그 권한이 드러난다.

베드로후서 2:4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천사들조차 아끼지 않으시고 지옥에 던져서 흑암의 사슬에 내어주어 심판 때까지 가두어 두셨으며

이 해석은 흑암의 사슬을 창세기 1장 2절의 어두움과 연결한다. 하나님께서 그 어두움을 준비하셨을 때 죄를 지은 천사들을 지옥에 던져 심판 때까지 가두셨다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3:19 그가 성령으로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가서 전파하셨으니

감옥에 있는 영들은 하나님의 아들들, 곧 타락한 천사들이다. 베드로후서는 그들이 받은 심판을 설명하고, 베드로전서는 갇힌 이들을 영들이라고 부른다. 우주적 재앙과 영들의 이탈, 지옥의 감금이 하나의 사건 흐름으로 연결된다.

지옥이 누구를 위해 준비되었는지도 중요하다.

마태복음 25:41 그때에 왕이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도 말하기를 ‘너희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영원한 불은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준비되었다. 간극을 없애면 창세기에서 지옥의 기원이 들어갈 자리를 설명하기 어렵지만, 간극을 인정하면 그 시점을 창세기 1장 2절의 어두움과 연결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적 대재앙 가운데 지옥을 준비하시고 타락한 천사들을 흑암의 사슬 아래 두셨다.

이 재앙에는 물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불과 물과 어두움이 함께 있었고, 세계는 완전한 혼돈에 놓였다. 김진하 목사는 노아의 홍수에서도 화산이 분출하고 지옥에서 솟아 나오는 것들이 있었으며, 위에서는 물이 쏟아져 전 세계를 덮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노아 시대의 전 세계적 홍수조차 앞선 우주적 홍수에 비하면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노아의 홍수는 앞선 심판과 무관한 사건이 아니라 같은 패턴이 반복되는 사건이다. 이 반복되는 주기도 창세기의 간극을 실제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근거가 된다.

생명을 주시는 영과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창조

죽음이 가득한 물 위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신다. 떠나간 영들과 물들의 표면에서 거니시는 성령의 대비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향하는 새로운 시작을 보여 준다.

영은 생명과 연결되며, 프뉴마(pneuma), 곧 호흡의 개념으로도 설명된다. 영이 떠나는 것은 죽음이고, 성령께서 오시는 것은 생명을 창조하실 새 출발이다. 또한 호흡과 말씀의 관계를 생각하면, 물 위에서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무언가를 존재하게 하실 일을 앞선다.

창세기 1:3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더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빛이 존재했다. 그분의 말씀은 무엇이 생기기를 바라는 희망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게 하는 명령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며, 그 말씀을 무산시킬 장애는 없다.

김진하 목사는 일부 물리학자와 구원받지 못한 무신론자·불가지론자 과학자들이 우주의 기원을 진동에서 찾는다고 소개한다. 이 과학자들의 생각에 관한 자신의 이해가 틀릴 수도 있다는 단서를 붙이면서도, 그들이 찾는 진동을 하나님의 음성과 연결한다. 그가 이 과학자들에게 던지는 반박은 거칠고 직접적이다. “이봐, 바보야, 그건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말씀이지.” 우주를 존재하게 한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그 말씀이 누구신지 밝힌다.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느니라.

요한복음 1:2 그 말씀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느니라.

요한복음 1:3 만물은 그에 의하여 지은 바 되었으며, 이미 지음받은 것 가운데 그가 없이 지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더라.

말씀은 창조 후에 등장한 무엇이 아니다.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하나님이셨다. 만물은 그분에 의해 지어졌고, 그분 없이 지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창세기의 창조 명령은 이 말씀의 능력을 보여 준다.

이 새로운 창조에서 인간의 창조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김진하 목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다음으로 위대한 사건이 인간의 창조라고 평가한다. 그것은 곧 우리 자신이 태어나게 된 이야기다. 우리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는 이야기 자체가 없었을 것이며, 성경도 지금과는 훨씬 달랐을 것이다.

해보다 먼저 있었던 빛의 근원

창세기 1:4 하나님께서 그 빛을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 하나님께서 그 빛을 어두움에서 나누시더라.

하나님께서는 빛을 보시고 좋다고 하셨으며, 그 빛을 어두움에서 나누셨다. 빛이 존재하게 된 것과 빛이 어두움에서 분리된 것은 모두 실제 사건이다.

빛과 어두움의 분리를 이해하기 위해 종이를 반으로 나누고, 한쪽을 밝게 다른 쪽을 어둡게 그린다고 생각해 보자. 그 종이에 나무를 한쪽에 그려 넣었다고 해서 모든 나무가 실제로 어두움 속에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이러한 배치는 두 상태를 구별하기 위한 비유다. 하나님께서 빛을 나누셨다는 사건 자체를 비유로 보는 것은 아니다.

이 빛은 해와 달보다 먼저 있었다. 따라서 그 근원을 태양에서 찾을 수 없다. 요한복음은 만물을 창조하신 말씀 안에 생명이 있으며, 그 생명이 빛이라고 밝힌다.

요한복음 1: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한복음 1:5 그 빛이 어두움 속에 비치어도 어두움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더라.

요한복음 1:6 ○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요한복음 1:7 그가 증인으로 왔으니, 빛에 관하여 증거하려 함이며, 모든 사람이 그를 통하여 믿게 하려 함이더라.

요한은 빛 자체가 아니라 빛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왔다. 그가 증거한 빛은 예수 그리스도다. 창세기의 첫째 날 빛도 그 근원을 여기서 찾는다. 그 빛은 하나님이시다.

일부 창조론자는 첫째 날의 빛을 반드시 과학적으로 설명하려 한다. 우주 안에 있던 어떤 종류의 빛이라고 보거나, 이미 있던 빛이 어두움에 가려져 있었다고 설명한다. 후자의 경우에는 넷째 날의 햇빛을 그 이전 빛과 다른 종류로 구분한다. 김진하 목사는 이런 설명을 과학 앞에 굴복한 것으로 비판하며, 자신의 기억으로는 라킨과 스코필드도 여기에 포함된다고 덧붙인다.

디모데전서 6:20 오 디모데야, 네게 맡겨진 것을 지키고, 비속하고 허황된 말장난과 거짓되이 일컬어지는 과학의 반론을 피하라.

그는 이 구절의 ‘거짓되이 일컬어지는 과학’을 이른바 진화론과 연결한다. 첫째 날의 빛을 자연적 광원에 맞추기 위해 여러 설명을 덧붙이기보다, 성경이 밝히는 하나님에게서 답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버클리의 유명한 표장에 ‘빛이 있으라’라는 문구가 있다는 경험도 같은 맥락에 놓인다. 김진하 목사는 그곳 사람들을 자신이 만날 수 있는 가장 좌파적이고 무신론적인 집단으로 강하게 평가하면서, 바로 그런 학교가 하나님의 창조 명령을 표장에 새겼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한다. 그는 성경이 그 일부만으로도 살아 있고 강력하기 때문에, 가장 극단적인 진보 성향의 무신론적 학교조차 그 문구를 새겨 놓아야 한다고 평가한다.

첫째 날의 빛과 넷째 날의 해·달·별의 구별

창세기 1:3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더라.

창세기 1:16 하나님께서 두 가지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은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은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별들도 만드시니라.

어두움과 악은 창조에 필요한 두 번째 원리가 아니다

창세기 1장 2절에는 이미 어두움이 있다. 이어 하나님께서는 빛을 존재하게 하시고 그 빛을 좋다고 하신다. 그러나 이 새로운 창조의 시작에서 어두움을 창조하거나 좋다고 평가하지는 않으신다. 이미 있던 어두움과 새로 나타나 좋다고 하신 빛의 차이도 간극을 뒷받침한다.

어두움은 정상적인 창조의 필수 재료가 아니라 혼돈의 징표다. 이 문맥에서 어두움은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상태를 나타내며, 빛은 선하고 긍정적이며 하나님과 연결된다. 우주에 악이 꼭 필요했기 때문에 어두움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악한 자들이 있었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하시며 우주를 파괴하셔야 했기 때문이다.

김진하 목사는 동양 종교가 빛과 어두움, 선과 악의 대비를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가 마귀의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이들조차 이 대비를 알고 있었지만, 이를 빛과 어두움, 선과 악, 음과 양이 모두 있어야 우주가 존재한다는 원리로 바꾸었다는 비판이다.

그는 이런 이원적 필요성의 주장을 헛소리라고 일축한다. 요한계시록 21장이 보여 주는 마지막 세계에서는 모든 악이 지옥에 던져진 뒤에도 하나님께 아무 문제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악이 함께 있어야만 창조하고 다스리실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이 비판에 따르면 동양 종교가 지닌 것은 창세기에서 가져온 부분적인 지식이다. 처음에 악과 선이 함께 나타난다는 사실은 붙잡았지만, 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과 하나님께서 빛을 두신 사건을 우주에 반드시 필요한 두 요소의 공존으로 바꾸었다. 악이 있었다는 것과 악이 필요하다는 것은 전혀 다르다.

그리스 이교 철학에 대한 평가도 이와 이어진다. 김진하 목사는 그리스 이교 철학자들이 동양인들에게서 이러한 생각을 받아들였으며, 영어로 ‘혼돈(chaos)’이라고 부를 만한 신을 믿었다고 설명한다. 혼돈이 먼저 있어야 신들이 우주와 세상을 창조할 수 있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의 비판은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여러 요소를 가져와 다른 종교적 체계로 바꾸었다는 데 있다.

낮과 밤, 그리고 셋째 하늘의 빛

창세기 1:5 하나님께서 그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과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더라.

하나님께서는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부르셨다. 빛과 낮, 어두움과 밤이라는 대응은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세계와 창세기를 연결한다.

요한계시록 21:25 또 그곳의 성문들을 낮에는 결코 닫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곳에 밤이 없음이라.

성문이 닫히지 않는 까닭은 그곳에 밤이 없기 때문이다. 단순히 밤에도 문을 열어 둔다는 뜻이 아니라 문을 닫아야 할 밤 자체가 없다.

요한계시록 22:5 거기에는 밤이 없겠고 그들에게는 촛불도 햇빛도 필요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주 하나님께서 그들을 비추시기 때문이라. 그들이 영원무궁토록 통치하리라.

밤이 없고 촛불이나 햇빛도 필요하지 않은 이유는 주 하나님께서 직접 비추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빛은 반드시 태양이나 다른 자연적 광원에 의존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창세기에서 빛을 낮이라 부르신 말씀과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께서 비추시는 낮을 함께 읽으면, 첫째 날의 빛도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결론에 이른다.

요한계시록 21:23 그 도성은 해나 달이 그 안에서 비칠 필요가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곳을 비추고 어린양이 그곳의 빛이 됨이라.

도성을 비추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며, 그곳의 빛은 어린양이다. 이 빛이 있는 곳은 하나님께서 계신 위의 하늘이다.

창세기 1장 4절의 빛과 어두움의 분리는 셋째 하늘과 그 아래의 우주 전체 및 땅 사이의 구분으로 설명된다. 하나님이 계신 위의 하늘에는 빛이 있고, 나뉜 아래의 우주와 땅에는 어두움이 내려앉는다. 하늘의 낮과 아래 우주의 밤을 구별한 뒤, 하나님께서는 물들 사이에도 구분을 두신다.

성경을 성경과 비교하지 않으면 이 관계를 놓치기 쉽다. 첫째 날의 빛을 자연 현상으로 설명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빛과 어두움을 무엇이라 부르셨는지, 다른 본문에서 빛의 근원을 누구라고 밝히는지를 먼저 읽어야 한다.

하나님의 빛과 자연의 빛

빛의 근원은 하나님이다. 그렇다면 자연에서 관찰하고 측정하는 빛도 하나님의 빛에서 나온 일부일 수 있을까?

김진하 목사는 과학자들이 가장 빠른 것을 논하거나 여러 대상을 측정할 때 빛에 크게 의존하는 태도를, 빛을 신처럼 취급하는 것으로 비판한다. 아인슈타인도 그렇게 했다고 지적하며, “빛이 하나님이기 때문”이라는 강한 표현으로 빛의 궁극적 근원을 강조한다.

그가 생각하는 가능성은 자연에 있는 빛의 요소가 하나님의 빛에서 나온 일부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붙잡아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빛이 사실은 하나님의 빛에서 비롯된 일부일 수도 있다. 그는 이 관계를 단정하지 않고 가능성을 열어 둔다.

자연의 빛이 하나님의 빛과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를 맺는지는 이러한 가능성으로 남아 있지만, 그 빛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묻는 출발점은 변하지 않는다. 창조론자든 과학자든 진화론자든 빛을 그 자체로 성립하는 자연적 대상으로만 설명하면 그 궁극적 기원을 놓친다.

저녁과 아침으로 이루어진 문자적인 하루

첫째 날에는 아직 해와 달을 이용해 시간을 표시하는 체계가 마련되지 않았다. 먼저 빛과 어두움, 하늘의 낮과 아래 우주의 밤이 나뉘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상태에 저녁과 아침이라는 시간을 두셨다. 해와 달과 별은 넷째 날에 나타나며, 큰 광명과 작은 광명이 낮과 밤을 주관한다.

따라서 첫째 날의 길이를 판단하는 기준은 당시 태양이 있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날을 어떻게 표현하셨느냐이다. 창세기 1장 5절은 저녁과 아침이 첫째 날을 이루었다고 말한다. 창조의 하루는 저녁과 아침으로 이루어진 24시간이며, 엿새도 문자 그대로의 엿새다. 하루를 수천 년이나 긴 시대의 상징으로 바꿀 수 없다.

유신론적 진화론은 하나님께서 진화 과정을 이용해 우주를 존재하게 하셨다고 보는 견해다. 그 가운데 창조의 날들을 오랜 시대로 읽는 입장은 수십억 년의 과정을 엿새에 대응시킨다. 이때 하루를 긴 시간으로 해석하기 위해 다음 구절을 사용하기도 한다.

베드로후서 3: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그러나 창조의 날을 직접 설명하는 본문에는 이미 저녁과 아침이라는 기준이 있다. 다른 문맥의 시간 표현을 가져와 창세기가 규정한 하루를 긴 시대로 바꿔서는 안 된다. 김진하 목사는 이런 해석을 헛소리이자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그의 비판은 학문적 능력과 본문 읽기 사이의 불균형에도 향한다. 박사 학위를 가진 교수들은 연구의 한계를 찾고, 연구 방법을 비평하며, 회귀 분석과 피어슨 상관관계 같은 통계 기법을 다룬다. 그러나 그렇게 복잡한 연구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정작 창세기 1장 5절의 저녁과 아침을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을 ‘바보들’이라고 부른 뒤, 그런 말을 하고 나니 자신이 몹시 똑똑해진 기분이라는 농담을 덧붙인 것도 같은 풍자다. 전문지식의 복잡함이 명백한 본문을 무시할 이유가 될 수 없다는 비판이다.

물들 가운데 놓인 창공

창세기 1:6 ○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물들 가운데 창공이 있으라. 창공으로 물들에서 물들을 나누게 하라.” 하시니라.

창공을 이해할 때 먼저 주목할 것은 물들 가운데라는 위치다. 사방에 물이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물 한가운데 창공을 두신다. 창공은 물과 다른 물질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물을 다른 물과 나눈다.

창세기 1:7 하나님께서 창공을 만드시고 창공 위에 있는 물들에서 창공 아래 있는 물들을 나누시니 그대로 되니라.

위와 아래를 판단하는 기준은 창공이다. 창공 위에 물들이 있고, 창공 아래에도 물들이 있다. 창공은 그 두 물 사이에 놓인다. 설명을 위해 창공을 선으로 표시할 수 있지만, 선 하나가 그 모양과 모든 성질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물들 사이에 구분이 생겼다는 사실이다.

창세기 1:8 하나님께서 창공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과 아침이 되니 둘째 날이더라.

하나님께서는 이 창공을 하늘이라 부르셨다. 그 공간을 마련하고 위아래 물을 나누신 날은 둘째 날이다. 둘째 날도 저녁과 아침으로 이루어지므로 긴 시대가 아니라 24시간이다.

이때 해와 달과 별은 아직 없으며 넷째 날에 만들어진다. 둘째 날의 공간과 나중에 그 공간에 놓이는 천체를 구별해야 한다.

위의 물과 아래의 물 사이에 놓인 창공

위의 물과 아래의 물 사이에 창공이 펼쳐진다.

둘째 날에 ‘좋았다’는 평가가 없는 이유

창세기 1장 7절의 “그대로 되니라”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물이 나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명령이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그것이 좋다는 평가는 다르다. 다른 창조의 날들에는 좋다는 평가가 나오지만, 둘째 날에는 그 말이 없다.

영어의 ‘And it was so’와 ‘so-so’를 대비하는 말장난도 이 차이를 드러낸다. ‘그대로 되었다’의 ‘so’를 일상적인 ‘그저 그렇다’라는 ‘so-so’와 연결하면, 일이 이루어졌다는 말이 곧 ‘좋다’는 말은 아니라는 점이 선명해진다. 이는 성경 문장을 ‘그저 그랬다’로 바꾸는 번역이 아니라, 평가의 부재를 설명하는 비유다.

이 해석은 둘째 날에 좋다는 평가가 없는 이유를 그곳의 어두움에서 찾는다. 그 어두움은 선한 것이 아니라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한 부정적인 처분과 연결된다. 죄를 지은 천사들이 흑암의 사슬에 갇혔다는 베드로후서의 말씀에 유다서가 더해진다.

유다서 1:6 또 자기들의 처음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신들의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주께서 영원한 사슬로 묶어 큰 날의 심판 때까지 흑암 속에 가두어 두셨느니라.

천사들은 처음 지위를 지키지 않고 자기 처소를 떠났으며, 영원한 사슬에 묶여 큰 날의 심판까지 흑암 속에 갇혔다. 이 어두움과 심판의 관계가 둘째 날을 이해하는 배경이다.

처음 그곳에는 어두움과 물이 함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고, 이제 창공을 통해 물을 나누신다. 두 분리는 같은 사건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 아니다. 첫째 날의 빛과 어두움의 구분에 이어, 둘째 날에는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이라는 별도의 구분이 이루어진다.

세 하늘과 천체들이 놓이는 둘째 하늘

창세기 1장 1절에는 이미 하늘이 등장한다. 그런데 둘째 날에는 창공을 만드시고 다시 하늘이라 부르신다. 두 대목을 읽을 때 하늘을 모두 하나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둘째 날의 창공은 둘째 하늘이다.

하늘이 하나뿐이라는 반론에는 바울이 말한 셋째 하늘이 답이 된다.

고린도후서 12:2 내가 십사 년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한 사람을 알았는데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나는 말할 수 없고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말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시느니라.) 그 사람이 셋째 하늘로 끌려 올라갔느니라.

바울은 자신이 셋째 하늘에 이른 경험을 말하면서,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는 자신이 말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아신다고 한다. 몸의 상태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지만, 그곳의 이름까지 유보하지는 않는다. 본문이 셋째 하늘을 말하므로 성경에는 세 하늘이 있다.

둘째 하늘이 어떤 공간인지는 그곳에 무엇이 놓이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창세기 1:16 하나님께서 두 가지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은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은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별들도 만드시니라.

창세기 1:17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늘의 창공에 두시고 땅 위를 비추게 하시며

큰 광명과 작은 광명은 해와 달이며, 하나님께서는 별들도 만드셨다. 그 천체들을 하늘의 창공에 두셨으므로, 창공은 지구 밖으로 펼쳐진 우주 공간이다.

여기서 장소와 시점을 구별해야 한다. 창공이 마련된 것은 둘째 날이고, 해와 달과 별이 만들어져 그곳에 놓인 것은 넷째 날이다. 16–17절은 창공의 성격을 밝히지만, 둘째 날에 이미 천체들이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견고한 창공과 넓게 펼쳐진 공간

창공을 우주 공간으로 설명하면, 히브리어 라키아가 강하고 견고하며 단단한 것을 뜻한다는 반론이 제기된다. 빈 공간과 견고한 구조는 반대이므로 창공을 공간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며, 킹제임스성경에도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다.

이에 대한 답은 견고한 상부와 그 아래의 공간을 함께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진하 목사는 자신이 창공을 단순히 둥근 천장 구조나 빈 공간이라고 설명해 오해를 낳은 점을 인정하고 사과한다. 단단한 부분을 부정하려던 것이 아니라, 그 부분과 넓은 내부 공간을 함께 설명해야 했다는 뜻이다.

그는 사전적 의미에서도 창공에 ‘두드려서 펼친 공간’과 ‘둥근 천장 구조(vault)’라는 뜻이 있다고 설명한다. 둥근 천장 구조에는 견고한 천장과 그 아래 넓게 펼쳐진 공간이 함께 있다. 천장이 단단하다는 이유로 내부 공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펼친다’는 말에서도 공간의 의미를 놓쳐서는 안 된다. 어떤 것이 넓게 펼쳐지려면 그것이 펼쳐질 공간이 있어야 한다. 창공에는 빈 공간인 부분이 있고, 훨씬 위에는 바위처럼 단단하고 견고한 부분이 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없앨 필요가 없다.

창공의 견고함은 사람이 공중으로 뛰어올랐다가 곧바로 머리를 부딪치는 낮은 천장을 뜻하지 않는다. 뛰어올라 ‘아야, 단단한 것에 부딪쳤으니 이것이 창공인가 보다’라고 할 만큼 가까운 구조가 아니라는 비유다. 창공은 훨씬 높은 곳까지 이어지며, 위쪽의 단단한 부분은 하늘의 바닥을 이루고 위의 물과 연결된다.

창공 안의 천체와 우주의 지붕

해와 달과 별들이 창공에 있다는 말씀은 창공의 상부가 견고하다는 설명과 모순되지 않는다. 둥근 천장 구조 안에서 파리가 날아다니거나 불빛이 보이는 경우를 생각하면 된다. 파리나 불빛이 그 구조 안에 있다고 해서 단단한 천장에 박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천장 아래의 내부 공간에 있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천체들을 창공에 두셨다는 것은 창공의 내부 공간에 두셨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안에 있다’는 말을 견고한 상부에만 한정할 이유가 없다.

둥근 천장 구조에는 단단한 부분보다 훨씬 길고 넓게 뻗은 내부 공간이 있다. 거대한 빈 공간을 지나 위로 올라가야 견고한 부분에 이르며, 그 상부는 내부 공간에 비하면 작거나 얇다. 창공을 공간으로 설명하면서도 견고한 상부를 인정할 수 있는 이유다.

그 상부는 말하자면 우주의 지붕이다. 구조의 꼭대기이며 위의 하늘에 해당한다. 김진하 목사는 이 구조를 하늘과 관련된 시온산, 그리고 성경이 우주의 모양을 삼각형에 비유한다는 자신의 설명과도 연결한다. 하늘이 그 위의 지붕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세부적인 우주의 형상보다 견고한 상부와 넓은 내부 공간이 함께 존재한다는 관계다.

따라서 둥근 천장이라는 비유도 내부가 꽉 찬 덩어리를 뜻하지 않는다. 공간 위를 덮는 견고한 지붕과 그 아래의 광대한 영역을 함께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창공에 관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아시며, 견고함과 공간은 서로를 취소하지 않는다.

천장과 실내의 비유로 보는 창공의 견고한 상부와 넓은 내부 공간

창세기 1:17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늘의 창공에 두시고 땅 위를 비추게 하시며

아래의 바다들과 위의 유리 바다

창공이 우주 공간이라면 그 위의 물은 우주 위에 있다. 하나님이 계신 하늘도 우주 위에 있으므로, 이 물은 하늘의 발판이자 바닥과 연결된다. 그 모습은 요한계시록의 보좌 앞에서 나타난다.

요한계시록 4:6 보좌 앞에는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그 보좌 가운데와 그 보좌 주위에는 앞뒤로 눈이 가득한 네 짐승이 있더라.

보좌는 하늘에 있으며, 그 앞에는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다. 이 해석에서 유리 바다는 하늘의 바닥이며, 그 기원은 창세기에서 창공 위로 나뉜 물이다. ‘유리’라는 말은 그 바다가 단단하고 견고한 상부라는 설명과 맞물린다.

아래의 물이 어디로 갔는지는 창세기를 계속 읽으면 알 수 있다.

창세기 1:9 ○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 아래의 물들이 한 곳으로 함께 모이고 마른 곳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세기 1:10 하나님께서 마른 곳을 땅이라 부르시고 물들이 함께 모인 곳을 바다들이라 부르시니라. 하나님께서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

하늘 아래의 물들이 한 곳으로 모이자 마른 곳이 드러났다. 하나님께서는 마른 곳을 땅이라 부르시고 물들이 모인 곳을 바다들이라 부르셨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바다는 이 아래쪽 물에서 비롯되었다.

위와 아래의 물은 창공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자리를 갖는다. 아래의 물은 지상의 바다들이 되고, 위의 물은 보좌 앞의 유리 바다이자 하늘의 견고한 바닥을 이룬다. 그 사이에는 나중에 해와 달과 별이 놓이는 둘째 하늘의 광대한 공간이 펼쳐진다.

이 연결은 창공의 공간성과 견고함을 함께 설명한다. 창공 안에 빈 공간이 있다는 사실은 그 위에 견고한 상부가 있다는 사실과 충돌하지 않는다. 답이 없는 것이 아니라 관련된 말씀을 끝까지 함께 읽지 않을 때 관계를 놓치게 된다는 것이다.

창세기의 최초 창조와 심판, 빛과 어두움, 위와 아래의 물은 서로 떨어진 주제가 아니다. 창세기에서 시작된 설명이 욥기와 베드로서신,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에서 이어지며 하나의 구조를 이룬다. 성경은 성경으로 스스로를 설명하고, 그 안에서 제기되는 모순을 해결한다. 이 말씀의 정확성과 연결 속에서 성경의 놀라움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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