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의미의 땅과 별들의 이름: 창세기 1장 9–25절의 창조 질서
창세기 1장에서는 이미 창조된 ‘땅’이 셋째 날에 다시 등장한다. 첫째 날부터 빛과 낮과 밤이 있었지만, 해와 달과 별은 넷째 날에 만들어진다. 식물은 태양보다 먼저 땅을 덮는다. 이 순서를 이해하려면 같은 단어가 문맥에 따라 무엇을 가리키는지, 서로 비슷해 보이는 창조 행위가 어떻게 구별되는지 살펴야 한다.
땅이 드러나고 식물이 자라며 하늘의 광명체와 생물들이 제자리를 얻는 과정에는 순서가 있다. 그 순서를 따라가면 ‘땅’의 두 의미뿐 아니라, 빛과 광명체의 차이, 씨와 종류에 따른 번식, 물에서 나오는 생명 사이의 관계도 드러난다.
창조된 세계와 물에 잠긴 세계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느니라.
창세기 1:2 땅은 형체가 없고 공허하며 어두움이 깊음의 표면에 있으며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에서 거니시더라.
성경 교사 김진하(Gene Kim) 목사가 따르는 창세기 간극 해석은 1절의 창조와 2절의 상태 사이에 심판이 있었다고 본다. 처음 창조된 땅에는 루시퍼와 타락한 천사들이 살았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물에 빠뜨려 멸하셨다. 이 해석에서 베드로후서 3장의 물에 의한 심판과 욥기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 사건과 연결된다. 하나님의 아들들을 타락한 천사들과 연결하고, 물과 어두움을 그들에게 내려진 심판의 요소로 이해하는 것이다.
일부 창조론자들이 이 홍수를 노아의 홍수처럼 지구 전체에 국한된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과 달리, 여기서 말하는 홍수는 우주 전체를 물로 덮은 심판이다. 2절의 형체 없고 공허한 땅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창조의 모습이 아니라 파괴된 상태이며, 물과 어두움도 단순한 창조 재료나 배경이 아니다.
집을 지었다는 말과 그 집이 비어 있고 물로 가득 찼다는 말은 같은 상태를 묘사하지 않는다. 집을 지은 뒤 침수나 배관 문제가 생겼다면 사람들은 들어가 사는 대신 물을 피해 밖으로 나온다. 마찬가지로 온전하게 창조된 하늘과 땅이 뒤이어 물과 어두움에 덮였다면, 그 사이에 파괴를 가져온 일이 있었다고 읽는다.
따라서 이후의 창조 순서에는 심판으로 뒤덮인 세계를 나누고 정리하는 일이 포함된다. 첫째 날에는 어두움에서 빛을 나누고, 둘째 날에는 물을 위아래로 나누며, 셋째 날에는 아래의 물을 모아 잠겨 있던 마른 땅을 드러내신다.
창공이 나눈 물과 위의 유리 바다
창세기 1:6 ○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물들 가운데 창공이 있으라. 창공으로 물들에서 물들을 나누게 하라.” 하시니라.
창세기 1:7 하나님께서 창공을 만드시고 창공 위에 있는 물들에서 창공 아래 있는 물들을 나누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세기 1:8 하나님께서 창공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과 아침이 되니 둘째 날이더라.
궁창, 곧 창공은 물과 물을 나누는 경계다. 아래의 물은 오늘날 세계의 대양과 바다에 해당하며, 위의 물은 하나님께서 유리를 놓으신 유리 바다와 연결된다. 궁창이라는 명칭도 그곳에 바위처럼 단단한 것이 있다는 이해와 이어진다.
이 우주관에서 궁창의 견고한 부분은 우주 위에 있으며 하나님께서 사시는 셋째 하늘의 바닥 부분을 이룬다. 그곳의 유리 바다와 아래의 바다는 서로 무관한 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고 부르셨으므로, 유리 바다의 물도 창세기 1장에서 나뉜 바로 그 물이다. 넷째 날에 해와 달과 별이 놓이는 곳 역시 하나님께서 하늘이라 부르신 창공이다.
김진하 목사는 우주를 피라미드 모양으로 나타내고 그 안에 지구를 배치하여 이 관계를 설명한다. 여기서 지구의 위치는 정확한 좌표가 아니라 물의 분리를 설명하기 위한 배치다. 위와 아래를 구분하는 출발점은 창세기 1장 2절의 하나님의 영이 물들의 표면에 계셨다는 말씀이다. 그 위치에서 아래를 향하면 물이 모인 바다와 드러난 육지가 놓인다.
행성 지구와 물에서 드러난 마른 육지
창세기 1:9 ○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 아래의 물들이 한 곳으로 함께 모이고 마른 곳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세기 1:10 하나님께서 마른 곳을 땅이라 부르시고 물들이 함께 모인 곳을 바다들이라 부르시니라. 하나님께서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
셋째 날에 모이는 것은 하늘 아래의 물이다. ‘드러나라’는 명령은 그전에 마른 곳이 물 아래에 잠겨 있었다는 뜻을 담고 있다. 하나님께서 물을 한곳으로 모으시자 그 아래의 육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대로 되니라.”는 그 명령이 실제로 이루어졌음을 나타낸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땅이라고 부르신 대상은 행성 전체가 아니라 마른 곳, 곧 육지다. 영어의 ‘earth’도 행성 지구뿐 아니라 땅이나 흙을 뜻한다. 흙 한 줌을 집어 들고 ‘earth’라고 부를 수 있듯이, 성경의 ‘땅’도 문맥에 따라 우리가 밟는 지면을 가리킨다.
창세기 1장 1절의 땅은 이미 창조된 행성 지구이고, 9–10절의 땅은 물이 모이면서 드러난 마른 육지다. 셋째 날에 새 행성을 하나 더 만드신 것이 아니다. 이미 창조된 지구가 홍수에 잠겼다가 그 위의 육지가 다시 드러난 것이다.

창세기 1장 1절의 땅은 행성 지구를, 9–10절의 땅은 물에서 드러난 마른 육지를 가리킨다.
욥기 26:7 그는 북쪽을 빈 자리에 펼치시고 땅을 허공에 매다시는도다.
욥기 26장 7절의 땅은 허공에 매달린 행성 지구다. 한편 땅이 기둥 등에 걸려 있다고 말하는 다른 성경 표현에서는 마른 육지를 가리키는지 살펴야 한다. 같은 단어가 쓰였다고 해서 언제나 같은 범위의 대상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읽으면 창세기 1장은 행성의 창조와 그 위에 마련된 자연환경을 함께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는 마른 곳을 땅이라 부르고 물이 모인 곳을 바다들이라 부르셨으며, 그 구별을 좋게 보셨다.
씨를 가진 식물과 계속되는 번식
창세기 1:11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땅은 땅 위에 풀과 씨를 맺는 채소와 그 종류대로 열매 맺는 씨를 가진 과실수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세기 1:12 땅이 풀과 그 종류대로 씨를 맺는 채소와 그 종류대로 열매 맺는 씨를 가진 나무를 내더라. 하나님께서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
마른 땅이 드러난 바로 그날,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 풀과 씨를 맺는 채소와 씨를 가진 과실수가 나게 하셨다. “땅 위에”라는 표현의 땅은 앞서 드러난 육지다. 물에 잠겨 있던 마른 땅이 이제 식물로 덮인다.
씨가 식물 안에 있다는 것과 그 종류대로 번식한다는 것은 함께 읽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식물을 처음 만드시는 일뿐 아니라 그 뒤에 씨와 열매를 통해 계속 번식하는 질서도 마련하셨다. 씨를 가진 식물에서는 같은 종류의 식물이 자라며, 과실수는 자기 종류의 열매를 맺고 그 안에 씨를 가진다.
정원사와 식물을 기르는 사람이 씨를 받아 다시 심고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이 질서 때문이다. 11절의 명령은 12절에서 그대로 이루어지고, 하나님께서는 그 결과를 좋게 보신다.
창세기 1:13 저녁과 아침이 되니 셋째 날이더라.
셋째 날 역시 저녁과 아침으로 끝난다. 식물이 생겨나고 번식의 질서가 마련된 날은 긴 지질 시대가 아니라 저녁과 아침이 있는 하루다.

창세기 1:12 땅이 풀과 그 종류대로 씨를 맺는 채소와 그 종류대로 열매 맺는 씨를 가진 나무를 내더라. 하나님께서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
공통 조상인가, 공통 설계자인가
“그 종류대로”라는 말은 KJV의 ‘after his kind’에 해당한다. 이 해석은 그 표현을 모든 생물이 하나의 공통 조상에서 나왔다는 주장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말씀으로 읽는다. 각 생물은 자기 종류에서 나오며 자기 종류대로 번식한다.
김진하 목사는 진화론에 굴복한 과학자들이 사람을 원숭이에서, 원숭이를 또 다른 생물에서 비롯한 존재로 설명하고, 그 기원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 결국 지구 자체에 이르게 한다고 비판한다. 그는 진화론을 완전히 거짓이며 오류투성이라고 평가하고, 대진화를 부정한다.
리처드 도킨스에 대한 비판은 버클리에서 제시한 공통 조상 논증을 겨냥한다. 김진하 목사의 소개에 따르면, 도킨스는 공통 조상을 전제로 세운 생물 분류 체계와 DNA 가닥 연구 결과가 서로 일치한다는 점을 진화의 가장 강력한 증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김진하 목사는 그 유사성이 오히려 공통 설계자이자 공통 창조자를 입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 예술가의 여러 작품이나 한 설계자·발명가의 결과물에는 그 사람 특유의 손길이 남는다. 마찬가지로 공통된 아버지께서 만드신 창조물에는 그분의 솜씨를 알아볼 수 있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생물 분류와 DNA의 유사성은 공통 조상의 흔적이 아니라 공통 창조자의 흔적이다.
다양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개에게서 여러 품종의 개가 나올 수 있고, 고양이는 고양이를 낳는다. 그러나 개가 고양이를 낳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같은 종류 안의 다양성과 종류의 경계를 넘어 전혀 다른 생물이 된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한다.
스티븐 제이 굴드의 단속평형설에 대한 김진하 목사의 비판도 이 기준에서 출발한다. 그는 이론을 상세히 다루지는 않으면서, 조상과 다음 조상을 잇는 연결 고리를 찾지 못하고 간극이 너무 크고 많아지자 그 간극을 뛰어넘는 설명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가 비판을 위해 드는 과장된 장면은 공룡이 알을 낳았는데 그 안에서 갑자기 닭이 튀어나오는 모습이다. 자기 종류대로 번식하는 생물에게 난데없이 그런 변화가 생긴다는 것은 터무니없고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종류’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언어
김진하 목사가 비판하는 “그렇다면 종류란 무엇인가?”라는 반론에는 논쟁의 기준을 바꾸려는 전제가 있다. 성경의 말을 먼저 과학적 분류 체계로 바꾸게 한 뒤, 그렇게 제시한 정의를 공격한다는 것이다. 이 요구는 오히려 성경의 일상적인 말을 그대로 다루지 못하는 상대의 약점을 드러낸다.
반론은 두 방향으로 나온다. 하나는 제시한 정의대로 동물을 세어 보면 노아의 방주에 모두 들어갈 수 없다는 주장이다. 다른 하나는 그 정의가 과학계의 ‘종’이나 다른 분류 용어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두 경우 모두 성경의 표현보다 과학적 정의를 먼저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 질문을 먼저 던진 쪽은 과학자들이다. 성경을 믿는 사람이 과학의 전문용어를 묻는 자리가 아니라, 과학자가 성경의 단어를 물으러 온 자리다. ‘종류’라는 말을 제시하신 분은 하나님이며, 과학자들 자신도 그것을 전문 분류 용어로 사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먼저 성경이 그 말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살펴야 한다. 성경의 ‘종류’를 곧바로 과학적 분류 단위인 ‘종’의 정의에 맞출 필요는 없다.
말은 고양이와 다른 종류의 동물이고, 까마귀는 물고기와 다른 종류의 동물이다. 어린아이도 알아들을 수 있는 차이다. 엄마가 아이에게 말과 소는 서로 다른 종류라고 설명할 때, 박사 학위를 가진 과학자가 끼어들어 세부 분류 용어부터 따지면 아이에게 부담을 주고 시간만 낭비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말씀하신 것을 불필요하게 복잡하게 만들 이유도 없다.
김진하 목사는 이 점을 들어, 하나님께서는 어떤 바보라도 알아들을 만큼 쉽게 말씀하셨는데 ‘똑똑한 박사 진화론자들’이 허황된 상상과 자기들만의 용어를 끼워 넣는다고 비판한다. 이를 가상의 응답으로 옮기면 “너희가 그 용어를 만드는 데 몇 년을 썼든, 나는 여기서 ‘종류’라고 부르겠다”라는 말이 된다. 용어를 정교하게 다듬는 데 들인 세월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쉬운 말을 대체할 권한을 주지는 않는다.
창조 이야기를 전문용어 교과서로 바꾸지 않기
창세기는 정의 500개를 외워야 하는 생물학 용어 교과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말씀하실 때 독자에게 골격을 이루는 뼈가 몇 개인지 묻지 않으신다. 사람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피조물이 어떻게 번식하는지 이야기하신다.
매번 “엄밀히 말하면 이 표현의 뜻은…”이라며 전문적인 설명을 끼워 넣으면, 정작 읽고 있던 이야기가 사라질 수 있다. 과학 용어를 논하는 수업과 창조 이야기를 읽는 자리는 같지 않다. 전문용어를 논하려면 그에 맞는 수업에서 다루면 된다. 창조 이야기를 읽는 내내 그런 설명으로 끼어들면 “그만 좀 하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일상에서도 사람은 전문용어와 평범한 말을 구별한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과 대학생들이 모인 술자리에서 누군가 탄산음료를 마신다고 하자. 옆 사람이 그 음료의 엄밀한 과학적 명칭과 성분 분류를 길게 설명하기 시작하면 대화의 맥락을 놓친 셈이다. 그 자리에서는 음료를 그냥 음료라고 부르면 된다. 이 예는 술자리를 권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지 않은 죄인들조차 일상에서 언제나 과학 전문용어로 말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보여 준다.
킹제임스성경의 언어를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도 여기에 연결된다. 김진하 목사는 KJV의 문장이 강력하고 극적이며 셰익스피어의 언어를 연상시킨다고 평가한다. 학자들도 그 힘을 부인할 수 없고, 단어를 함부로 바꾸지 말라고 하며 일부 현대 역본의 변경을 비판한다고 본다. 단어를 지키는 일은 그 말이 전달하는 이야기의 힘과 문체를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첫째 날의 빛은 넷째 날의 태양이 아니다
창세기 1:3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더라.
창세기 1:4 하나님께서 그 빛을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 하나님께서 그 빛을 어두움에서 나누시더라.
창세기 1:5 하나님께서 그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과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더라.
첫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직접 빛과 어두움을 나누시고 각각 낮과 밤이라고 부르셨다. 이때 해와 달과 별은 아직 없었다. 따라서 첫째 날의 낮과 밤을 오늘날처럼 해가 뜨고 달이 비치는 현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 해석에서 첫째 날의 빛과 낮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이심을 가리킨다. 그 빛에서 나뉜 어두움은 우주적 심판과 관련되며, 오늘날 올려다보는 우주 공간이 어두운 것도 그 어두움과 연결된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어두움을 처리하시고, 넷째 날에 광명체들에게 낮과 밤을 나누는 역할을 맡기셨다.
하나님 자신이 빛이시므로 그분께 속한 하늘에는 어두움이 없다. 반대로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 던져져 울고 통곡하며 이를 가는 바깥 흑암은 그 빛과 대조된다.
요한계시록 21:25 또 그곳의 성문들을 낮에는 결코 닫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곳에 밤이 없음이라.
요한계시록 22:5 거기에는 밤이 없겠고 그들에게는 촛불도 햇빛도 필요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주 하나님께서 그들을 비추시기 때문이라. 그들이 영원무궁토록 통치하리라.
낮을 태양이 떠 있는 시간으로만 정의하면, 태양 이전의 낮이나 하나님께서 직접 비추시는 밤 없는 세계를 설명할 수 없다. 빛과 어두움을 처음 나누신 일과 광명체들에게 그 구분을 맡기신 일은 구별해야 한다.
광명체의 역할과 인간의 달력
창세기 1:14 ○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낮과 밤을 나누기 위하여 하늘의 창공에 광명들이 있으라. 그것들로 하여금 징조와 계절과 날짜와 연도를 위해 있게 하라.
창세기 1:15 그리고 광명들은 하늘의 창공에 빛이 되어 땅 위에 빛을 주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본문은 먼저 ‘광명들’이라는 표현으로 그 역할을 밝힌 뒤, 구체적으로 해와 달과 별을 설명한다. 이들은 낮과 밤을 나누고 땅을 비출 뿐 아니라 징조와 계절과 날짜와 연도를 위해 존재한다. 넷째 날 이전에도 낮과 밤은 있었지만, 해와 달과 별을 통해 계절과 연도를 구분하는 질서는 아직 없었다.
옛사람들은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을 살펴 앞으로 일어날 일을 가늠했다. 구름을 보고 날씨를 예상하는 일도 그와 비슷하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바깥 날씨의 징조를 분별할 줄 안다고 하신 말씀 역시, 하늘에 나타나는 현상을 읽는 익숙한 경험에 기대고 있다.
사계절과 하루하루의 구분도 광명체의 역할에 속한다. 사람은 날을 계산하여 한 해를 365일로 정하지만, 김진하 목사는 역사 속에서 인간의 달력이 뒤죽박죽이 되었으며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시간에 비하면 절반 정도밖에 정확하지 않다고 평가한다.
하나님께서 우주에 작은 격변을 일으키시거나 시간을 잠깐 멈추시기만 해도 인간의 계산은 어긋날 수 있다. 휴거 날짜를 정하려는 시도가 어려운 이유도 계산의 기준인 달력부터 어긋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을 통해 인간에게 교훈을 주신다. 사람이 만든 시간표를 하나님의 시간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창세기 1:17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늘의 창공에 두시고 땅 위를 비추게 하시며
창세기 1:18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두움을 나누게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
하나님께서는 광명체를 만드신 뒤 제자리에 두어 그 역할을 수행하게 하셨다. 땅을 비추고 낮과 밤을 주관하며 빛과 어두움을 나누는 질서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

창세기 1:14 ○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낮과 밤을 나누기 위하여 하늘의 창공에 광명들이 있으라. 그것들로 하여금 징조와 계절과 날짜와 연도를 위해 있게 하라.
창세기 1:15 그리고 광명들은 하늘의 창공에 빛이 되어 땅 위에 빛을 주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별들도 만드시니라”라는 짧은 선언
창세기 1:16 하나님께서 두 가지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은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은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별들도 만드시니라.
큰 광명인 해는 낮을 주관하고, 작은 광명인 달은 밤을 주관한다. 두 광명은 크기만 다른 것이 아니라 맡은 역할도 다르다. 본문은 그 역할을 설명한 뒤 “별들도 만드시니라.”라는 짧은 말로 별의 창조를 덧붙인다.
인간에게는 별의 수를 헤아리는 일조차 벅차지만, 하나님께서 그 모든 별을 만드신 일은 이렇게 간단히 기록된다. KJV에서 ‘또한’에 해당하는 말의 어감을 가상 대화로 풀면, 하나님께서 “하는 김에 별 몇 개도 넣어 보자”라고 말씀하시는 듯하다. 별이 적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감당하지 못하는 규모의 창조도 하나님께는 어렵지 않다는 뜻이다.
별과 천체는 수조 개, 어쩌면 수조에 수조 개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아직 모두 발견하지도 못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수를 이미 아신다. 과학자들은 별을 발견하고 이름 붙이는 데 수년씩 쓰며, 수가 늘어나면 놓치지 않으려고 컴퓨터와 메모에 의존한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보내도 창조된 별을 전부 찾아내지는 못한다.
그에 비해 창조자의 일을 “아, 참, 별들도 만들어 저기에 놓았지”라는 가상의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다는 대비가 이 짧은 구절의 놀라움이다. 인간이 기록 장치까지 동원해 조금씩 알아 가는 우주를 하나님께서는 직접 만드셨다.
별의 이름, 아기의 이름, 아담의 능력

시편 147:4 그가 별들의 수를 헤아리시고 그들을 모두 그들의 이름으로 부르시는도다.
하나님께서는 별의 수만 아시는 것이 아니라 모두 그 이름으로 부르신다. 별을 만든 뒤 뒤늦게 수를 세거나 이름을 정리하기 시작하신 것이 아니다. 이미 그 수와 이름을 아시며 하나하나를 아신다.
이름 짓기에 필요한 생각과 시간을 떠올리면 그 차이가 선명해진다. 부모는 아기 한 명의 이름을 정하려고 어떤 이름이 좋은지, 무엇이 인기 있는지 찾아보고 컴퓨터의 도움도 받는다. 과학자도 별 하나에 이름을 붙이는 데 시간을 들인다. 하나님께는 그 모든 이름을 짓는 일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담에게도 이름을 붙이는 능력이 있었다. 김진하 목사는 이름 하나를 찾느라 시간을 쏟고 컴퓨터에 의존하는 오늘날의 모습과 비교하면, 아담에게 초인적인 두뇌가 있었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평가한다. 익숙한 명명 행위에서도 인간이 당연하게 여기는 한계와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의 차이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누구를 신뢰하느냐에 있다. 인간은 잘못을 저지르고 오류에 빠지며, 가장 뛰어난 과학자도 자신이 실수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창조 세계를 다 알아내지 못한 과학자에게는 큰 신뢰를 보내면서, 그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은 신뢰하지 않으려 한다. 별의 수와 이름은 하나님의 지식에 대한 감탄을 넘어 신뢰의 대상을 묻게 한다.
문자적인 하루와 태양보다 먼저 나온 식물
창세기 1:19 저녁과 아침이 되니 넷째 날이더라.
셋째 날과 넷째 날에 반복되는 저녁과 아침은 각각 문자적인 24시간을 가리킨다. 태양이 만들어지는 데 수십억 년이 걸렸다는 뜻이 아니라, 해와 달과 별이 넷째 날이라는 하루 안에 창조되었다는 뜻이다. 김진하 목사는 시간뿐 아니라 창세기 1장의 거의 모든 구절이 진화론의 개념과 충돌한다고 주장한다.
그중 뚜렷한 예가 식물과 태양의 순서다. 식물은 셋째 날에, 태양은 넷째 날에 만들어졌다. 태양이 먼저 생기고 식물이 나중에 나타나야 한다는 진화론의 설명과 반대되는 순서다.

식물은 태양보다 먼저, 물속 생물과 새는 육상 동물보다 먼저 창조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식물을 먼저 만드셨다고 해서 실수하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손톱을 물어뜯으며 “아이고, 식물부터 만들었는데 햇빛을 깜빡했구나. 큰일 났네”라고 당황하셨다고 상상하면, 창조자를 인간의 한계 안에 가두는 생각의 우스움이 드러난다.
나무가 “버클리의 아무개 박사님은 제게 물과 햇빛이 필요하다고 하셨는데요?”라고 항의하는 가상 장면도 마찬가지다. “상관없다. 내가 너를 창조하겠다”라는 응답의 요점은, 무에서 모든 것을 만드시는 분이 자신의 능력으로 식물의 생명을 유지하실 수 있다는 데 있다. 식물에 필요한 조건이 창조자의 능력까지 제한하지는 않는다.
문자적인 창조일을 따르면 식물은 창조된 뒤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햇빛을 받았다. 반대로 하루를 수천 년, 수백만 년, 수십억 년의 시대로 바꾸면 식물이 태양 없이 그 긴 기간을 견뎌야 한다. 김진하 목사는 이 견해를 향해 “이봐, 멍청아”라는 거친 말까지 사용하며, 태양 없이 식물이 그렇게 오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반문한다.
하나님께서 “순서를 바꿔 보겠어”라고 하시고, 이유를 묻자 “그냥 재미로, 그렇게 해 보고 어떻게 되는지 보자”라고 답하시는 또 다른 가상 대화도 같은 점을 겨냥한다. 실제 성경 대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이 당연하게 여기는 발생 순서에 매이실 이유가 없다는 농담이다.
물에서 생명이 나온다는 말의 의미
창세기 1:20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물들은 생명이 있는 동물들과 땅 위 하늘의 넓은 창공에 나는 새를 풍성히 내라.” 하시며,
다섯째 날에도 창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한다. 땅에 식물을 내게 하셨던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물을 향해 생명이 있는 동물들과 새를 풍성히 내라고 명하신다.
‘내다’는 생물들이 나오고 번식하는 것을, ‘풍성히’는 함께 넘쳐날 만큼 많아지는 것을 뜻한다. 물에서 나오는 존재들은 움직이고 활동하는 생물들이다. 그런 생물이 풍성하게 나오려면 많은 양의 물도 필요하다.
그러나 물이 있다는 것과 생명이 형성될 조건이 갖추어졌다는 것은 다르다. 김진하 목사는 생명이 어떤 액체에서 형성되었다는 과학자와 진화론자의 설명에 대해, 단백질과 DNA를 비롯한 요소들이 어떻게 생겨났고 어떻게 함께 작동하게 되었는지 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물과 관련된 과정을 단순하게 다루면 생명을 만들기는커녕 죽일 수도 있다. 살아 있는 기능이 이루어지려면 필요한 조건들이 알맞게 함께 갖추어져야 한다. 생존 조건이 없는 생명이 긴 세월을 기다릴 수는 없으며, 시간만 늘린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물에서 생명이 형성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는 실험 이야기 역시 성경을 믿는 사람에게 그 자체로 난제가 되지는 않는다. 창세기는 이미 하나님께서 물에서 생명이 나오도록 명하셨다고 기록한다. 핵심은 생명이 물에서 나왔느냐가 아니라, 그 생명에 필요한 조건을 누가 어떻게 마련했느냐다.
실험을 설계한 지성과 생명의 조건
디모데전서 6:20 오 디모데야, 네게 맡겨진 것을 지키고, 비속하고 허황된 말장난과 거짓되이 일컬어지는 과학의 반론을 피하라.
김진하 목사는 진화를 입증한다고 내세우는 과학을 비판할 때 “거짓되이 일컬어지는 과학”이라는 표현을 적용한다. 물에서 생명을 내신 하나님의 명령과, 물만 두고 오랜 시간이 흐르면 생명이 저절로 형성된다는 주장은 같지 않다는 것이다.
뛰어난 과학자가 실험실에서 모든 조건을 정확히 갖추고 필요한 것들을 순간적으로 결합하여 생명이 생겨나게 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 일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보세요, 제가 진화를 입증했어요”라고 말한다면, 실험을 성립시킨 자신의 역할을 놓친 셈이다. 조건을 선택하고 배치하며 결과를 얻도록 조작한 지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논증에서 그 실험이 보여 주는 것은 지적 설계다. 김진하 목사가 가상의 과학자에게 “참 바보 같군요”라고 거듭 질책하는 이유는, 자신이 조건을 설계해 놓고 그 결과를 진화의 증거라고 부르는 모순에 있다. 진화를 입증하려고 실험할 때마다 오히려 지적 설계를 입증해 주니 고맙다고 응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창조주를 인정하는 편이 더 이치에 맞다는 결론도 여기서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물을 사용하시면서 생명이 살아서 기능하고 활동하는 데 필요한 조건들을 함께 마련하고, 그 일을 단번에 이루셨다.
학위보다 성경의 기록을 앞세우는 이유
김진하 목사는 과학자의 지성과 지능이 높아질수록 학계에서 오히려 더 많은 어리석음이 드러난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그는 학계와 고등교육계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명시하며, 그 이유로 그들이 세상의 눈을 가렸다는 점을 든다.
생명 기원 연구에 대한 그의 질책에는 구체적인 시간 비교가 들어간다. 박사 학위에 5년, 학사 학위에 또 5년을 들이고, 석사 학위에는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 시간을 쓰며 교수들의 비위를 맞추고 엄청난 연구에 매달릴 필요가 있었느냐는 것이다. 물에서 생명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은 창세기 1장의 절반만 읽어도 5분 안에 알 수 있었는데, 긴 학업과 연구로 스스로 스트레스만 받았다는 평가다.
그는 학문적 권위를 이토록 거침없이 비판하니 온라인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버클리 졸업 이력을 의심할 만하다고 농담한다. “이제 내가 오늘날 세상에서 사랑받지 못하는 이유를 알겠느냐”라는 자조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자신의 인기가 없다는 점을 웃음거리로 삼을 뿐, 학계에 대한 부정적 평가 자체를 농담으로 거두지는 않는다.
이 비판의 기준은 학위를 얻는 데 걸린 시간이나 사회적 명성이 아니라, 성경에 이미 기록된 내용을 어떤 권위 아래에서 읽느냐에 있다.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두 출생
요한복음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시더라.
요한복음 3:4 니코데모가 주께 말씀드리기를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태어날 수 있나이까? 사람이 자기 어머니의 태에 두 번째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 있나이까?”라고 하니
물과 생명의 관계는 요한복음 3장의 거듭남을 이해하는 데도 연결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영적 출생이지만, 니코데모는 자신이 아는 육체적 출생을 생각했다. 그래서 늙은 사람이 어머니의 태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나야 하느냐고 물었다.
거듭남은 첫 번째 출생을 반복하는 일이 아니다. 이미 육체로 태어난 사람이 구원받아 영적으로 태어나는 두 번째 출생이다. 한 번 육체로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는 없다.
요한복음 3:5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6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 또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
이 해석에서 물로 태어나는 것은 첫 번째인 육체적 출생이고,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은 두 번째인 영적 출생이다. 출산 때 양수가 터졌다고 말하는 일상적인 경험은 물과 육체적 출생의 관계를 이해하게 한다. 사람은 물에서 육체의 생명을 얻어 태어나지만, 성령으로 나는 출생은 그와 다르다.
수많은 교회가 5절의 물을 물침례로 이해하여 구원의 조건으로 삼지만,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침례를 받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6절은 육신으로 난 것과 성령으로 난 것을 구별한다. 물을 침례로 바꾸어 읽으면 이어지는 육체적 출생의 설명을 놓친다.
따라서 물침례가 구원에 필요하다는 주장을 이 본문으로 제시한다면, 니코데모와의 대화를 3절부터 6절까지 함께 읽어야 한다. 물과 성령을 따로 떼지 않고 두 출생의 대비 안에서 읽는 것이 핵심이다.

요한복음 3:6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 또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
여섯 날과 약 6천 년의 역사적 대응
하나님께서 여섯 날 동안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는 창조하지 않고 쉬신 데에는 목적이 있다. 여섯과 일곱은 아무렇게나 선택된 수가 아니다.
이 해석은 아담과 이브부터 이어지는 구약의 약 4천 년과 신약의 약 2천 년을 합한 약 6천 년을 창조의 여섯 날에 대응시킨다. 김진하 목사는 이 대응 자체를 진화론에 반하는 증거로 받아들인다. 창조일과 인류 역사를 겹쳐 읽는 근거는 베드로후서 3장 8절이다.
베드로후서 3: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하나님께서 시간을 보시는 방식은 인간과 다르다. 그러나 이 말씀을 적용한다고 해서 창세기의 하루가 실제로 천 년이나 수백만 년이었다는 뜻이 되지는 않는다. 창조일은 문자적인 24시간이고, 여섯 날과 약 6천 년의 관계는 역사적 예표다. 창조에 걸린 시간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날수와 순서에 담긴 의미를 살피는 것이다.
일곱째 날의 쉼도 이 대응에서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여섯 날 동안 일하신 뒤 일곱째 날에는 창조하지 않으셨다. 여섯 날의 활동뿐 아니라 그 뒤에 쉼을 두신 이유까지 함께 생각해야 한다.
특히 처음 나흘이 끝난 뒤 다섯째 날에 물에서 생명이 나오는 순서가 중요하다. 창세기 1장 20절의 “생명이 있는 동물들”과 그 등장 시점을 약 6천 년의 역사에 대응시키면, 처음 4천 년이 지난 뒤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인류에게 생명을 주시는 때와 연결된다. 이 예표에서 다섯째 날의 생명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영생으로 이어진다.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와 영구적인 영생
사람은 육체로 태어났어도 죄들 가운데 죽어 있다. 따라서 물로 태어나는 첫 번째 출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성령께서 생명을 주셔야 하며, 성령으로 태어날 때 영생을 얻는다.
요한복음 3:16 ○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니코데모에게 하신 거듭남의 말씀은 같은 대화에서 독생자를 믿는 사람이 얻는 영생으로 이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아들을 주셨고,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 중요한 것은 단순한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라는 점이다.
다섯째 날의 생명을 그리스도의 오심과 연결하는 예표도 여기에 초점을 둔다. 약 4천 년이 지난 뒤 하나님의 아들이 내려오셔서 주시는 것은 단순히 움직이고 활동하는 생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배롭고 지극히 거룩한 붉은 피를 통한 영생이다.
구약 사람들이 받은 생명과 신약 신자들의 영생도 구별해야 한다. 구약의 생명은 조건적이었으므로 율법이 필요했고 계명들을 따라야 했다. 반면 신약의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영구적인 영생을 얻으며, 성령께서 생명을 주신다.
따라서 구약 시대의 경륜, 곧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다루신 방식은 신약의 신자들을 다루시는 방식과 아주 다르다. 구약의 조건적인 생명을 신약 신자의 영구적인 영생과 동일하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
생수의 강들과 성령의 움직이심
요한복음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이 말씀한 것과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흐르리라.”고 하시니
요한복음 7:39 (이것은 주께서 자기를 믿는 사람들이 받게 될 성령을 말씀하신 것이라. 이는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셨기 때문에 그들에게 아직 성령을 주지 아니하셨음이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서 흐르는 생수의 강들은 그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킨다. 당시에는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셨으므로 그들에게 성령을 주지 않으셨다. 이 말씀은 믿는 사람에게 주어질 성령과 그분의 역사에 관한 약속이다.
물이 생물들을 풍성하게 내는 창조의 모습은 신자 안에서 생명을 주시고 역사하시는 성령과 영적으로 연결된다. 많은 물이 흐르고 일렁이듯, 성령으로 충만한 부흥 집회에서는 성령의 움직이심을 느낄 수 있다는 적용이다.
김진하 목사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보고 화를 내거나 흥분하며 신자들을 근본주의자라고 부르고 혐오 발언을 한다고 비난하는 이유를, 신자에게는 그들에게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장례식에서 예수님과 하늘의 소망을 말할 때 무신론자가 분노하는 경우도 같은 방식으로 해석한다. 슬픔에 잠긴 사람에게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말을 전하는데도 반발하는 것은 신자 안의 성령의 역사와 관련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물과 생물을 창조하실 때부터 훗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어날 일을 염두에 두셨다. 생물을 풍성하게 내는 물과 신자 안에서 흐르는 생수의 강들은 창조와 성령의 생명 사역을 연결한다.
큰 고래와 요나를 삼킨 생물
창세기 1:21 하나님께서 큰 고래들과 물들에서 풍성하게 나온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들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
큰 고래들, 물에서 풍성하게 나온 움직이는 생물들, 날개 있는 모든 새는 각각 그 종류대로 창조되었다. 새에게 날개가 있다는 익숙한 특징을 그대로 말하면서, 본문은 또다시 “그 종류대로”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김진하 목사는 이를 두고 박사 학위를 가진 과학자가 현미경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다 그 문구를 놓칠까 봐, 하나님께서 친절하게 다시 말씀해 주신 셈이라고 농담한다. 관찰에 몰두하느라 본문에 반복해서 적힌 말을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큰 고래라는 명칭은 요나를 삼킨 생물에 관한 표현과도 연결된다.
요나 1:17 ○ 그때 주께서는 요나를 삼킬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으니 요나가 그 물고기 배에서 삼 일 낮과 삼 일 밤을 있었더라.
마태복음 12:40 요나가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고래 뱃속에 있었듯이, 인자도 그처럼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땅의 심장 속에 있을 것이라.
요나서는 큰 물고기라고 하고, 예수님께서는 고래라고 말씀하셨다. 이 설명은 하나님께서 요나를 삼킬 큰 물고기를 창조하여 예비하셨고, 예수님께서 그 생물을 고래라고 부르셨다는 데 초점을 둔다.
여기에 고래는 물고기가 아니라 포유류라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분류를 근거로 예수님의 표현이 틀렸다고 하면, 주님이자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박사 학위가 없어서 자신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도 모르셨다는 우스운 결론에 이른다. 과학자의 분류 권위를 예수님의 말씀보다 위에 놓으면 이런 결론까지 받아들여야 한다.
창조자의 명명 권한과 저작권 비유
사람은 일상 대화에서 언제나 엄밀한 전문 분류를 따라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성경에만 그 기준을 강제한다면, 평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언어를 하나님께는 허용하지 않는 셈이다. 김진하 목사는 이를 지적인 비판이 아니라 어리석은 트집이라고 평가한다.
생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는 그것을 부르고 표현하실 권한이 있다. 저작권에 빗대면 창조물의 권리자는 하나님이다. 과학자가 창조물을 가져다가 자기 방식으로 이름 붙이는 권리를 독점하려 한다면, 오히려 창조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 아니냐는 농담이 가능하다.
김진하 목사는 이 비유를 유튜브에 대한 수사적 항의로 확장한다. 자신에게 저작권 침해 경고를 주겠다면 무엇을 잘못했느냐고 묻고, 그 논리대로라면 주님이자 구주의 창조물을 자기 용어로만 부르려는 과학자들이야말로 모두 소송을 당해야 한다고 받아친다. 창조자의 명명 권한을 인간의 분류 권한보다 아래에 놓는 태도를 뒤집는 농담이다.
그렇다고 인간이 용어나 개념을 만드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언어를 주셨고, 사람은 필요한 말과 개념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문제는 자신은 그 자유를 누리면서 하나님께 “안 됩니다. 저처럼 말씀하셔야 합니다”라고 요구하는 데 있다.
하나님께 인간의 말투를 강요하는 일을 비판하는 과장에는 더 거친 대조도 들어간다. 하나님께서 인간처럼 말씀하셨다면 모두 지옥으로 내던져지고 우주의 종말이 왔을 것이며, KJV도 인간의 말투에 맞추었다면 지루한 책이 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흉내 내지 않고 자신의 방식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오히려 감사할 일이다.
박사 학위나 그리스어·히브리어 지식도 성경 표현 위에 군림할 권한을 주지 않는다. 원어를 내세워 이 단어는 이런 뜻이고 저 단어는 저런 뜻이라며 똑똑한 체하는 태도를 향한 요구는 단호하다.
그냥 입 다물고 그 구절을 그대로 두십시오. 쓰인 그대로 읽으십시오.
다산하고 번식하여 처음으로 채우는 세계
창세기 1:22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다산하고 번식하여 바다의 물들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생물들을 창조하고 좋게 보신 데서 그치지 않고, 자손을 낳아 늘어나며 자신들이 살아갈 공간을 채우는 복을 주셨다. 물속 생물은 바다의 물들에 충만하고, 새들은 땅에 번성해야 했다.
‘다산하고’에 해당하는 ‘fruitful’은 열매를 뜻하는 ‘fruit’와 연결된다. 식물이 열매를 맺듯 생물도 자손을 낳는다. 열매라는 말은 식물에만 한정되지 않으며, 태에서 자녀를 낳는 일에도 적용할 수 있다.
‘번식하여’에 해당하는 ‘multiply’는 한 번 자손을 낳는 데서 끝나지 않고 계속 수가 늘어나는 것을 뜻한다. 그렇게 늘어난 생물은 ‘fill’, 곧 충만하라는 명령에 따라 바다의 모든 물을 채운다. 새에게도 자손을 낳고 널리 퍼져 번성하는 복이 주어지지만, 그 번성의 공간은 땅이다.
번성과 충만을 가리키는 영어 단어도 서로 구별된다. 22절은 ‘fruitful’, ‘multiply’, ‘fill’을 사용하며, ‘reproduce’나 ‘replenish’처럼 ‘re-’가 붙은 말을 쓰지 않는다. 이 생물들이 번성하여 해당 공간을 채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바로 그 때문에 ‘다시’라는 뜻의 접두어가 붙은 표현과 구별해서 읽는다.
창세기 1:23 저녁과 아침이 되니 다섯째 날이더라.
생물을 창조하고 번성의 복을 주신 다섯째 날도 저녁과 아침으로 끝난다. 이 하루 역시 긴 시대가 아니라 24시간이다.

창세기 1:22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다산하고 번식하여 바다의 물들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마른 땅에서 나온 가축과 기어다니는 것과 짐승
창세기 1:24 ○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어다니는 것과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여섯째 날에는 앞서 마련된 마른 땅에서 살아갈 생물들이 나온다. 본문은 가축, 기어다니는 것, 땅의 짐승을 열거한다. 기어다니는 것에는 온갖 곤충이 포함되고, 땅의 짐승은 땅 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짐승들이다.
이들은 모두 자기 종류대로 나온다. 이 해석에서 그 말은 서로 다른 종류의 동물이 하나의 공통 조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각 생물이 자기 종류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자기 종류 안의 번식과 종류 밖의 다른 동물과 공통 조상을 두는 관계를 구별한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자 그대로 이루어졌다. 성경은 동물을 세부 분류에 넣기 위해 방대한 용어 설명을 늘어놓지 않는다. 김진하 목사는 여러 동물의 명칭과 분류 체계, 과학자들의 작업, 수십억 년에 걸친 계산을 대비시키며 하나님께서는 그런 방식으로 하지 않으신다고 비판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창조물을 엿새의 창조 안에 두신다.
창세기 1:25 하나님께서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라. 하나님께서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
25절은 명령의 성취를 기록한다. 짐승, 가축, 기어다니는 모든 것을 열거할 때마다 “그 종류대로”가 반복된다. 무엇을 만드셨는지만 아니라 어떻게 창조하셨는지를 읽는 기준이 이 표현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좋게 보셨다.
인간도 여섯째 날에 창조되지만, 1장 25절까지의 초점은 육상 동물의 창조에 있다.
바퀴벌레와 낙타와 개와 고양이가 나온 같은 날
여섯째 날에 창조된 곤충에는 바퀴벌레도 포함된다. 누구나 반가워할 만한 생물은 아니지만, 김진하 목사의 짓궂은 표현대로라면 ‘모두가 좋아하는’ 바퀴벌레다. 그 바퀴벌레도 낙타, 개, 고양이와 같은 날에 창조되었다.
생김새가 크게 다르다고 해서 창조 시점이 수십억 년씩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김진하 목사는 과학자들이 곤충을 오늘날의 개와 고양이와 원숭이보다 수십억 년 먼저 나타난 생물로 생각한다고 비판한다. 그와 달리 창세기는 이 육상 생물들을 같은 날에 놓는다.
이 순서를 받아들이면, 짧은 성경 본문을 읽는 것만으로도 오랜 학위와 연구 경력이 놓친 사실을 안 셈이 된다. 김진하 목사가 성경을 읽은 사람이 박사 학위를 가진 과학자보다 더 많이 알게 되었다고 맞받아치는 이유다. 창조의 시점과 순서를 판단하는 기준은 학위와 복잡한 분류가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다.
여러 육상 생물을 하루에 만드시는 일도 하나님의 능력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을 모아 육지를 드러내고, 태양보다 먼저 식물을 내며, 셀 수 없는 별을 만드시고, 물과 땅에서 생물이 나오게 하신 분께는 그 일이 어렵지 않다. 창세기 1장 9–25절은 그 창조의 질서를 “그대로 되니라”, “그 종류대로”, “하나님께서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라는 말씀으로 기록한다.
이 글은 성경 교사 김진하(Gene Kim) 목사의 창세기 1장 9–25절 강의 내용을 주제별로 정리하고 재구성한 성경 해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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