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거는 왜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가: 왕국의 연기와 교회시대
이 글은 김진하 목사(Dr. Gene Kim)의 왕국 연기와 교회시대에 관한 성경 강의 내용을 주제별로 정리하고 재구성한 성경 해설이다.
예수님께서는 왕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다. 그런데 약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그분이 땅에서 다스리시는 왕국은 세워지지 않았다. 가까이 왔던 왕국은 어떻게 되었으며, 휴거를 기다리는 오늘날의 교회는 그 약속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왕국 연기설은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메시아를 거부하면서 왕국의 실현이 미루어졌고, 그 사이에 이방인들이 구원에 참여하는 교회시대가 들어왔다는 가르침이다. 이 관점에서 긴 기다림은 오늘날 신자들이 무엇을 잘못해서 생긴 지연이 아니다. 이스라엘에게 왕국이 제시된 때부터 그 거부 이후의 전개까지 살펴야 이해할 수 있는 문제다.
핵심은 연기와 취소를 구분하는 것이다. 교회시대가 들어왔다고 해서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왕국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니엘의 70주, 침례인 요한의 사명, 십자가 이후 베드로와 스테판의 증언을 차례로 살펴보면, 이미 이루어진 예언과 앞으로 이루어질 약속 사이에서 오늘날 교회가 차지하는 자리가 드러난다.
먼저, 누구에게 주어진 말씀인가
성경을 읽을 때는 누구에게 주어진 말씀인지, 어느 시대에 적용되는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말씀을 올바로 나누는 기본 원리다. 모든 구절을 오늘날 자신에게 직접 적용되는 말씀으로 한데 합치면, 서로 다른 대상과 시대를 향한 내용을 뒤섞게 된다. 이런 혼동은 심각하게 잘못된 교리와 이단으로 이어질 수 있다. 왕국의 연기도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과 교회에 주어진 말씀을 구분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스라엘의 시간표에 들어온 괄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것은 메시아가 왕으로 다스리는 실제적인 왕국이었다. 유대인들은 그 왕과 왕국을 기다렸지만, 정작 메시아가 오셨을 때 그분을 거부했다. 왕국 연기설은 바로 이 거부로 왕국의 실현이 미루어졌으며, 그 사이에 교회시대가 들어왔다고 설명한다.
이를 시간표로 그리면 교회시대는 이스라엘의 시간표 사이에 들어온 괄호와 같다. 구약에서 이어지는 약속과 미래의 왕국 사이에 이방인들을 향한 구원의 기간이 놓인 것이다. 약 2천 년이라는 표현은 그 긴 간격을 가리키며, 남은 날짜를 계산하는 공식이 아니다. 우리의 달력은 정확하지 않으며, 남은 시간은 하나님께서 아시지만 우리는 알 수 없다.
괄호가 닫히면 이스라엘을 위한 시간표는 다시 이어진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을 다시 다루시고, 그들에게 하신 왕국의 약속을 이루신다. 교회시대는 그 약속을 지워 버린 시대가 아니라, 약속의 실현을 기다리는 사이에 들어온 시대다.

교회시대가 들어오지 않았을 경우를 생각하면 이 괄호의 의미가 더 선명해진다. 그런 경우 산호세 성경침례교회도, 오늘날 구원받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 없어야 합니다”라는 말은 이 가정을 두고 한 말이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긴 시간표 가운데 오늘날의 교회가 차지하는 자리는 그 사이에 삽입된 기간이라는 뜻이다.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왕을 거부한 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로 돌이키셨다. 이방인들이 들어오는 교회시대는 이처럼 “이방인의 때”가 되었다. 그러나 이 기간도 끝없이 계속되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을 향한 일을 마치신 뒤 다시 이스라엘에게로 돌아가신다.
이 대목에서 김진하 목사는 유대인들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하나님께 오래도록 잘못해 왔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팬데믹 당시의 상황을 두고 “우리가 참 잘하고 있죠, 그렇죠”라고 반어적으로 말하고, 미국인들을 향해서도 이제 이방인들의 때가 끝나고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로 돌아가실 때가 가까웠다고 경고한다. 이 비판의 결론 역시 이방인들을 향한 현재의 역사와 이스라엘을 향한 미래의 역사를 구분해야 한다는 데 있다.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과거에 성취된 예언과 미래에 성취될 예언 사이에도 이 간격이 놓인다. 오늘날의 신자들은 과거의 성취와 미래의 왕국 사이에 들어온 교회시대를 살아간다. 그렇다면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계획에 뒤늦게 포함된 사람들인가? 이 질문에는 십자가의 대상과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함께 살펴 답해야 한다.
온 세상을 위한 십자가와 하나님의 미리 아심
교회시대가 이스라엘의 시간표에 삽입되었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만을 위해 죽으셨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 이방인들에게 구원이 이른 경위와 십자가 죽음의 대상을 구분하면 두 사실은 모순되지 않는다.
여러 사람을 준비해 두는 계획을 생각하면 이 관계를 이해하기 쉽다. 어떤 일을 맡은 사람이 실패해도 다른 사람을 통해 일을 이어 갈 수 있듯이, 참여하는 사람이 달라졌다고 계획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일이 벌어진 뒤에야 대비책을 마련하시는 분이 아니다. 사람들의 반응을 이미 알고 계셨다는 점이 인간의 계획과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왕국을 제시하셨으면서도 그들이 거부할 것을 미리 아셨고, 이방인들도 구원에 참여하도록 계획하셨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왕국의 계획과 그들의 반응을 미리 아시는 것을 함께 생각해야 한다. 유대인들이 거부한 뒤에야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구원을 처음 생각하셨다는 뜻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받아들였다면 적그리스도 아래의 환난을 겪고 휴거되어 나온 뒤 천년왕국에 이르는 전개가 당시 진행되었을 것이다. 여기에는 언제나 “메시아를 받아들였다면”이라는 조건이 붙는다. 실제로 일어난 역사와, 받아들였을 경우에 진행되었을 일을 섞어 읽어서는 안 된다.
미리 아심과 강제는 다르다
가룟 유다의 경우를 보면 미리 아심과 강제의 차이가 선명해진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그분을 배반할 사람이 있을 것을 아셨다. 그렇다고 가룟 유다에게 반드시 그 배반자가 되도록 강요하셔야 했다는 뜻은 아니다. 유다에게는 그 나쁜 결정을 하지 않을 모든 선택권과 자유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선택을 강요하지 않으시면서도 유다가 배반하고 일을 그르칠 것을 미리 아셨다.
이스라엘의 거부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 반응을 미리 아셨다고 해서 거부하도록 강요하신 것은 아니다. 또한 사람들이 거부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계획이 중단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선택과 하나님의 미리 아심은 서로 다른 문제다.
왕국 연기설은 처음에는 황당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이해하면 경륜에 관한 수많은 질문이 풀리고 성경을 보는 시야도 달라진다. 그 설명을 성경 본문과 연결하려면, 먼저 이스라엘이 어떤 왕국을 기다렸는지부터 살펴야 한다.
이스라엘이 기다린 것은 어떤 왕국인가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의 세부적인 차이를 따지기 전에, 두 표현에 공통으로 담긴 뜻을 먼저 붙들어야 한다. 하나님이 왕이시며 그분이 통치하신다는 뜻이다. 여기서 살필 것은 각 표현의 차이 전체가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왕국의 성격과 그 왕국이 연기된 이유다.
여기서 천국(Kingdom of Heaven)은 사람이 죽어서 하늘로 가는 일을 뜻하지 않는다. 메시아가 지상의 왕으로 다스리는, 실제적이고 눈에 보이는 왕국이다. 유대인들이 기대한 것도 그런 왕과 왕국이었다.
마태복음 21:9 그 무리가 앞서 가고 뒤따르며 소리질러 말하기를 “다윗의 아들에게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이 있도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하더라.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지나가실 때 무리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이 있도다.”라고 외쳤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 싶어 했으며, 그런 움직임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무리가 예수님께 품은 기대는 단지 죽은 뒤에 갈 장소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 앞에 계신 메시아가 지상의 왕으로 다스리기를 원했다. 예수님께서 전파하신 천국을 이해하려면, 당시 사람들이 기다리던 왕과 왕국을 함께 보아야 한다.
마태복음 11:11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 가운데 침례인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었느니라. 그러나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이라도 그보다 더 크니라.
침례인 요한의 위대함을 말씀하신 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때부터 천국이 겪어 온 일을 이어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11:12 침례인 요한의 때로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폭력으로 탈취되고, 폭력을 쓰는 자들이 힘으로 그것을 차지하느니라.
천국이 폭력으로 탈취된다는 말씀은 이 왕국이 지상 왕국임을 보여 준다. 땅에 있는 사람들이 폭력으로 차지하려고 다투는 왕국이라면, 죽어서 가는 하늘과 같은 뜻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구약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다스리셨고, 지상에는 다윗과 그 뒤를 이은 왕들이 있었다. 유대인들이 기다린 것은 그 민족의 왕국이 다시 회복되는 일이었다.
사도행전 1:6 그러므로 그들이 함께 모였을 때에 주께 물어 말씀드리기를 “주여, 이 때에 이스라엘에 그 왕국을 다시 회복하시겠나이까?” 하니
제자들의 질문에서 중요한 말은 “다시 회복”이다. 그들은 이스라엘과 관계없는 다른 왕국이 아니라, 자기 민족에게 약속된 왕국이 돌아올 시점을 물었다.
사도행전 1:7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는 그 때나 시기를 알게 하신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자신의 권한에 두셨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지상 왕국을 기다리는 기대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고치지 않으셨다. 대신 그 때와 시기를 아버지께서 자신의 권한에 두셨다고 답하셨다. 왕국 자체를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그 실현의 시기를 제자들에게 알려 주지 않으신 것이다.
현재의 사역과 미래의 왕국
왕국 연기를 부정하는 견해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왕국을 영적인 왕국으로 읽고, 그 왕국이 지난 2천 년 동안 신자들과 함께 이 땅에 있었다고 설명한다. 왕국 연기설은 이스라엘에게 제시된 실제적인 왕국이 거부로 미루어졌으며, 그 실현은 미래에 남아 있다고 본다. 이 차이는 현재 교회의 사역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에도 영향을 준다.
김진하 목사는 현재 왕국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피로 얼룩진 교회 역사에 비추어 강하게 비판한다. 칼빈주의자들과 ‘칼빈주의 정신’을 직접 거론하며, 하늘과 땅에 있는 자신들의 왕국을 제대로 운영하지도 못했다고 반박한다. 그렇게 피로 얼룩진 역사를 겪고도 지금 영적 왕국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으면서, 경륜적으로 구분되는 미래는 부정하느냐고 질책한다.
가톨릭과 무슬림을 향한 비판도 같은 이유에서 나온다. 김진하 목사는 이들 역시 자신들이 왕국을 세우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바로 그 때문에 수백만 명을 살해했다고 말한다. 왕국을 세운다는 생각이 살육으로 이어졌다는 비판이다. 따라서 지금 왕국을 세우고 있다는 생각은 터무니없으며, 왕국은 연기되었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다.
왕국은 연기되었으며, 지금 교회가 하는 일은 지상에 그 왕국을 건설하는 일이 아니다. 현재의 사역은 영적인 일이다. 그러나 현재의 사역이 영적이라는 사실과 예수님께서 당시 어떤 왕국을 선포하셨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예수님께서도 모든 사람을 위한 영적 왕국만 선포하셨다고 한다면, 마태복음 10장에서 사도들의 전도 대상을 이스라엘로 제한하신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마태복음 10:5 예수께서 이 열둘을 보내시면서 그들에게 명령하여 말씀하시기를 “이방인들의 길로도 가지 말고, 또 사마리아인의 성읍에도 들어가지 말고,
마태복음 10:6 다만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태복음 10:7 가서 전할 때,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하고,
예수님은 열두 사도를 보내시면서 이방인들의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성읍에도 들어가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사도들이 찾아가야 할 대상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었고, 그들에게 전할 소식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이었다. 누구에게 무엇을 전하라고 하셨는가를 함께 읽으면 선포의 성격이 분명해진다. 모든 사람에게 구별 없이 전하는 영적 왕국의 소식이 아니라, 유대인에게 그들을 위한 지상 왕국이 바로 가까이 왔다고 알리는 명령이었다.
김진하 목사는 이 명령을 근거로,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한 영적 왕국만 전하셨다는 주장을 “칼빈주의 헛소리”라고까지 비판한다. 논점은 분명하다. 이방인과 사마리아인을 제외하고 이스라엘에게 가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전하라는 명령에서, 전도의 대상과 선포의 내용을 함께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왕국의 선포에는 왜 치유 표적이 따랐는가
왕국 선포의 대상이 이스라엘이었다는 사실은 당시 치유 표적이 필요했던 이유와 오늘날에는 왜 더 이상 그런 표적이 없는지도 설명해 준다. 표적은 유대인을 위한 것이었다. 사도들은 왕국 복음을 전하면서 자신들이 전하는 소식이 참되다는 것을 입증할 표적을 지녀야 했다. 마태복음 10장에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전하라는 명령 바로 다음에 치유와 이적에 관한 명령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마태복음 10:8 병든 자들을 고쳐 주고, 문둥병자들을 깨끗게 하며, 죽은 자들을 살리고, 마귀들을 내어쫓으라. 너희가 값없이 받았으니 값없이 주라.
병든 자들을 고치고, 문둥병자들을 깨끗하게 하며, 죽은 자들을 살리고, 마귀들을 내어쫓는 능력은 왕국을 전하는 사명에 붙어 있었다. “값없이 받았으니 값없이 주라”는 명령도 함께 주어졌다. 이스라엘은 왕국이 가까이 왔다는 소식과 함께 그 소식을 입증하는 표적을 보게 되었다.
예수님의 사역도 같은 맥락에 놓인다. 마태복음 4장은 왕국 복음의 선포와 질병의 치유를 함께 기록한다.
마태복음 4:23 ○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또 왕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가운데 모든 질병과 모든 허약함을 고쳐 주시더라.
마태복음 4:24 그의 명성이 온 시리아로 퍼져 모든 병든 자, 즉 갖가지 질병과 통증으로 고통받는 자들, 마귀들에게 사로잡힌 자들, 정신병자들, 중풍병자들을 그에게 데려오니, 그들을 고쳐 주시니라.
당시 전파된 왕국 복음의 내용은 유대인들을 위한 지상 왕국이 가까이 왔다는 소식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부활하셨다는 복음과 그대로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왕국의 임박성을 선포했기에 그 선포를 입증하는 표적이 뒤따랐다는 관계를 보아야 한다.
이스라엘이 왕국을 거부한 뒤 사역의 대상이 이방인으로 바뀌면서 표적도 사라져 갔다. 오늘날의 교회는 땅에 그 왕국을 건설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사역을 한다. 눈에 보이는 치유 표적을 먼저 확인해야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늘날 믿음의 근거
고린도후서 5: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라.)
말씀을 믿는 사람에게 치유 장면을 직접 보아야만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반면 이스라엘에게 왕국을 제시할 때 표적이 필요했던 이유는 바울의 말에서도 드러난다.
고린도전서 1:22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한다는 점을 기억하면, 그들에게 왕국을 알릴 때 표적이 따른 이유와 오늘날 믿음의 근거를 구분할 수 있다. 대상과 시대를 구분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다. 그렇다면 미래에 남은 왕국은 어떤 시간표를 따라 이루어지는가? 다니엘의 70주는 이 질문을 구체적으로 다룬다.
다니엘의 70주: 아직 남아 있는 마지막 한 주
가까이 왔던 왕국이 연기되었다는 첫 번째 근거가 왕국의 임박성을 알린 선포라면, 두 번째 근거는 다니엘의 70주가 나뉘어 진행된다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 한 주를 앞선 69주와 구분해야 긴 간격을 이해할 수 있다.
다니엘 9:24 칠십 주가 네 백성과 네 거룩한 도성에 정해졌나니, 허물을 끝내고 죄들을 종결시키며 죄악에 화해를 이루고 영원한 의를 가져오며 그 환상과 예언을 봉인하고 지극히 거룩한 이에게 기름부으려 함이라.
“네 백성”은 다니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고, “네 거룩한 도성”은 예루살렘이다. 70주는 막연히 긴 시간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위해 정해진 기간이다. 그 기간에 이루실 일도 구체적이다. 허물과 죄를 끝내고, 죄악에 화해를 이루며, 영원한 의를 가져오고, 환상과 예언을 봉인하며, 지극히 거룩한 이에게 기름붓는 일이다.
이 계획은 아직 모두 완성되지 않았다. 로마서 11장은 이스라엘의 현재 상태와 미래의 회복 사이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보여 준다.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차기까지는”
로마서 11: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차기까지는 이스라엘의 일부가 완고하게 된 것이라.
바울은 이 신비를 모르면서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고 한다. 핵심은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차기까지는”이라는 기한이다. 이스라엘의 일부가 완고하게 된 상태는 끝없이 계속되지 않는다.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찬 뒤에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어진다.
로마서 11: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와서 야곱에게서 경건치 아니한 것을 제거하리라.
로마서 11:27 이는 내가 그들의 죄들을 없앨 때 그들에 대한 나의 언약이 이것임이니라.” 함과 같으니라.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은 미래를 향한다.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시고, 야곱에게서 경건치 아니한 것을 제거하시며, 그들의 죄들을 없애시는 일이다. 27절은 그 죄들을 없애시는 때를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과 연결한다.
이 약속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죄사함(National Forgiveness)을 다룬다. 오늘날 개인이 구원받는 것과는 구분해야 한다. 개인의 구원은 구원받는 바로 그때 이루어지며, 미래의 어느 날까지 예약해 놓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로마서 11장의 약속은 온 이스라엘을 향한 장래의 구원과 죄사함이다.
다니엘 9장이 이스라엘의 죄를 종결하고 화해를 이루기 위해 정해진 기간을 밝힌다면, 로마서 11장은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찬 뒤 이스라엘의 죄들을 없애실 것을 말한다. 두 본문은 같은 미래의 민족적 죄사함을 가리킨다. 그 회복을 위한 시간표는 나중에 새로 생긴 것이 아니라 다니엘에게 주어진 약속에서부터 이어져 왔다.
7주, 62주, 마지막 한 주
70주는 7주 + 62주 + 1주로 나뉜다. 앞의 두 구간을 합하면 69주이고, 마지막 한 주를 더하면 70주다. 숫자를 더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각 구간에 어떤 사건이 놓이는가다.

순서를 파악하기 위해 마지막 구간부터 살펴보자. 다니엘 9장 27절은 한 주 동안의 언약과 그 중간에 일어나는 일을 기록한다.
다니엘 9:27 그가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주 동안 언약을 확정하고, 그 주의 중간에 그가 희생제와 예물을 금지시킬 것이요, 그는 가증함을 확산시킴으로 황폐케 하리니 진멸할 때까지 할 것이며, 정해진 것이 황폐케 한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더라.
한 주 동안 언약이 확정되지만, 그 중간에 희생제와 예물이 금지되고 가증함과 황폐함이 뒤따른다. 마침내 정해진 심판이 황폐케 한 자에게 쏟아진다.
이것은 적그리스도와 맺는 언약이며, 마지막 한 주는 7년 환난에 해당한다. 한 주의 7일을 7년으로 대응시키는 계산이다. 이 기간에서는 하루를 한 해에 대응시켜 한 주를 7년으로 읽는다.
거의 모든 기독교 학자가 다니엘 9장 27절을 7년 환난과 연결하는 구절로 받아들인다. 마지막 한 주가 미래의 환난이라면, 이제 앞선 69주가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확인해야 한다.
다니엘 9:26 육십이 주 후에는 메시야가 끊어질 것이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요, 또 장차 올 그 통치자의 백성이 도성과 성소를 파괴하리니 그 끝은 홍수로 뒤덮일 것이요 그 전쟁의 끝에는 황폐함이 정해졌느니라.
“육십이 주 후에는 메시야가 끊어질 것”이라는 예언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연결된다. 그분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죽으신다. 이어 도성과 성소의 파괴도 예언된다. 이 구절은 성경을 가진 유대인에게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설명할 때에도 중요한 근거가 된다.
다만 그 죽음이 시간표의 어느 자리에 놓이는지 이해하려면, 62주 앞에 있는 7주도 함께 읽어야 한다.
다니엘 9:25 그러므로 알고 깨달으라. 예루살렘을 복원하고 건축하라는 그 명령이 나오는 때부터 메시야 통치자까지 칠 주와 육십이 주가 될 것이요, 그 거리와 그 성벽이 재건되리니, 곧 고난스런 때들이라.
시간표의 출발점은 예루살렘을 복원하고 건축하라는 명령이다. 그 명령부터 메시야 통치자까지 먼저 7주, 이어 62주가 놓인다. 따라서 62주만 떼어 계산해서는 안 된다. 두 기간을 합한 69주 뒤에 메시야가 끊어지는 사건이 있고, 마지막 한 주는 아직 미래에 남아 있다는 것이 이 설명의 순서다.
69주와 마지막 한 주 사이의 간격
마지막 한 주는 십자가 직후 곧바로 시작되지 않았다. 앞의 69주와 미래 환난 사이에 교회시대가 들어왔다. 약 2천 년이라는 표현이 가리키는 긴 간격이다.
이 간격이 왕국의 연기를 보여 준다. 70주 전체를 중단 없이 이어지는 기간으로 읽으면, 메시야의 죽음 이후에 들어온 교회시대와 미래에 남은 환난을 구분할 수 없다. 69주가 지났다는 사실과 마지막 한 주가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을 함께 보아야 한다.
마지막 때를 기다리던 다니엘과 “때가 찼다”는 선포
다니엘 12:1 “그때에 미카엘이 일어서리니, 이는 네 백성의 자손을 위하여 일어서는 위대한 통치자라. 또 고난의 때가 있으리니, 그것은 민족이 생긴 이래로 그 때까지 결코 없었던 것이라. 그 때에 네 백성이 구제될 것이니, 곧 그 책에 기록되어 발견될 모든 자들이라.
이스라엘의 미래에는 민족이 생긴 이래 결코 없었던 고난의 때가 있다. 미카엘이 다니엘의 백성을 위해 일어서며, 책에 기록되어 발견되는 백성이 구제된다. 그러나 다니엘이 이 예언을 받던 당시에는 그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다니엘 12:4 그러나, 오 너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그 말씀을 닫고 그 책을 봉하라. 그 때에는 많은 사람이 이리저리 달릴 것이요 지식이 증가하리라.” 하더라.
다니엘 12:9 그가 말씀하시기를 “다니엘아, 네 길을 가라. 이는 그 말씀들이 마지막 때까지 닫혀 있고 봉해져 있을 것임이라.
말씀과 책을 마지막 때까지 닫고 봉하라는 명령은 예언이 주어졌지만 아직 성취의 때는 아니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의 회복과 죄사함을 위한 시간표도 그 정해진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왜 “가까이 왔다”고 하셨는가
마가복음 1:15 말씀하시기를 “그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도다.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그 때가 찼고”라고 선포하셨다. 다니엘에게는 말씀을 봉하고 기다리라고 하셨지만, 이제 이스라엘 앞에는 약속된 왕국이 가까이 와 있었다. 먼 훗날의 막연한 소망이 아니라 그들이 응답해야 할 일이었다. 침례인 요한도 같은 긴박함으로 선포했다.
마태복음 3:1 그 무렵에 침례인 요한이 와서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마태복음 3:2 말하기를 “너희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니,
요한과 예수님은 모두 왕국이 가까이 왔다고 전했다. 왕국이 임박했다는 선포는 이스라엘이 그것을 받아들일 기회가 실제로 주어졌음을 뜻한다. 그러나 그들은 메시아를 거부했고, 왕국의 실현은 미래로 미루어졌다. 당시의 임박성과 이후의 긴 간격을 왕국 연기설은 이 거부와 그 뒤에 들어온 교회시대로 설명한다.
본문을 대조하는 성경 공부
이 관계는 한 구절만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다니엘서와 복음서처럼 서로 다른 본문을 대조해야 한다. 김진하 목사는 이런 공부를 공연 중심의 교회 문화와 대비하면서, “성경 공부는 아주, 아주 지루하지요”라고 반어적으로 말한다. 분홍빛 구름 같은 연기, “여자 같은 남자들”의 머리카락과 몸짓, 흥미를 끌기 위한 공연을 직접 거론하며, 그런 자극에 익숙해져 성경 공부를 지루하게 여기는 태도를 강하게 비판한다.
그는 성경을 배우는 대신 쇼를 보러 다니면 가르침은 15분으로 줄이고 나머지 시간은 끝없는 말로 채우게 된다고 지적한다. 공부의 가치를 낮추려는 말이 아니라, 말씀보다 흥밋거리를 요구하는 태도를 꾸짖는 말이다. 본문을 대조하는 공부는 침례인 요한의 사명을 이해할 때에도 필요하다.
침례인 요한과 엘리야: 이미 온 사람과 앞으로 올 사람
왕국 연기의 세 번째 근거는 침례인 요한의 사명이다. 구약은 메시아의 길을 준비할 선구자를 예고했다. 요한은 왕보다 앞서 백성을 준비시켰고, 가까이 온 왕국을 맞도록 회개를 촉구했다.
요한복음 1장은 고난받는 메시아를 선포한 요한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 한 장만으로 그의 사역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다. 다른 본문들은 메시아와 왕국을 맞을 준비를 반복해서 다룬다.
백성이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며 침례를 받아야 했던 것도 그 준비와 관련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과 약속된 민족적 죄사함, 왕국의 실현을 함께 바라본 사역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회개하여 예수님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메시아를 거부하면서 민족적 회개와 죄사함에 이를 수는 없었다. 김진하 목사는 오늘날에도 이스라엘이 자기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가장 어려운, 가장 완고한 민족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논점은 요한이 요구했던 민족의 응답과 그 응답이 거부된 결과를 함께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3:3 그가 요단 강 주변에 있는 온 지방에 가서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니
요한은 요단 강 주변에서 회개의 침례를 전파했다. 왕의 도착을 알리는 데 그치지 않고, 백성이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그 왕을 맞을 준비를 하도록 요구했다.
누가복음 3:4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의 책에 기록된 바와 같으니라. 말씀하시기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음성이 있어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들을 곧게 하라.
누가복음은 그 사역을 이사야의 예언과 연결한다. 이어지는 말씀은 요한이 준비한 길이 어떤 미래를 바라보는지 보여 준다.
누가복음 3:5 골짜기마다 메워지고 산과 언덕마다 낮아지며 굽은 곳들이 곧아지고 험한 길들이 평탄하여지며
누가복음 3:6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고 하는도다.” 하였더라.
골짜기가 메워지고, 산과 언덕이 낮아지며, 굽고 험한 길이 곧고 평탄해진다. 마침내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본다. 이사야 40장과 함께 읽으면,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내려와 왕국을 세우실 미래를 바라본다. 그분이 왕으로 내려오실 때 온 땅이 흔들리고 변하며, 모든 육체가 하나님을 보게 된다. 그러나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는 일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요한이 왕국을 준비하러 왔다는 사실과 왕국이 당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구분해야 한다. 준비할 사명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왕을 맞아야 할 백성이 거부했기에 왕국의 실현이 미루어졌다는 설명이다. 이 관계는 엘리야에 관한 예언에서 더 선명해진다.
요한은 엘리야가 아니라고 하지 않았는가
말라키 4:5 ○ 보라, 내가 주의 크고 무서운 날이 오기 전에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말라키 4:6 그가 아비들의 마음을 자식들에게로, 자식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들에게로 돌이켜, 내가 와서 땅을 저주로 치지 않게 하리라.
말라키는 아비들의 마음을 자식들에게로, 자식들의 마음을 아비들에게로 돌이켜 땅이 저주를 받지 않도록 할 엘리야를 예고한다. 이 사명은 메시아가 재림하여 왕국을 세우시는 일을 준비하는 것이며, 요한이 맡았어야 할 역할이었다. 그러나 요한 자신의 대답을 보면 의문이 생긴다.
요한복음 1:21 그들이 묻기를 “그러면 네가 무엇이냐, 네가 엘리야냐?”고 하니, 그가 말하기를 “나는 아니라.”고 하자, “그러면 네가 그 선지자냐?”고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아니라.”고 하더라.
요한이 엘리야의 역할을 맡았어야 했다는 설명에는 곧바로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사람들이 요한에게 “네가 엘리야냐?”고 물었을 때, 그 자신이 “나는 아니라.”고 답했기 때문이다. 본인이 아니라고 했으므로 침례인 요한은 엘리야일 수 없다는 반론이다.
그렇다면 요한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는가? 요한이 실제로 착각했다고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부인만으로 결론을 내리기 전에 성경이 그 사명을 어떻게 밝히는지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1장의 출생 예고가 그 사명을 설명한다.
누가복음 1:13 그 천사가 그에게 말하기를 “사카랴야, 두려워 말라. 너의 기도가 상달되어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천사는 사카랴에게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것이며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고 전했다. 이어 그 아이가 주 앞에서 무슨 일을 할 것인지 밝혔다.
누가복음 1:17 그는 엘리야의 영과 능력을 가지고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들의 마음을 자식들에게로, 불순종한 자들을 의인들의 지혜로 돌아오게 하며, 주를 위하여 마련해 놓은 백성을 예비시키리라.”고 하더라.
요한은 엘리야의 영과 능력으로 주 앞에 나아가 백성을 준비할 사람이었다. 특히 아비들의 마음을 자식들에게 돌이킨다는 말은 말라키 4장 6절의 엘리야 사명과 맞닿아 있다. 요한 자신이 엘리야라는 이름을 부인했다는 사실만으로 이 역할까지 지울 수는 없다.
“이미 왔다”와 “회복할 것이다” 사이의 조건
요한의 역할에는 “이스라엘이 그를 받아들였다면”이라는 조건이 붙는다. 그들이 받아들였다면 요한이 엘리야의 역할을 완수하고 왕국이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를 거부했고, 왕국은 연기되었으며, 모든 것을 회복할 엘리야의 사명은 미래에 남았다.

마태복음 17:10 주의 제자들이 주께 물어 말씀드리기를 “어찌하여 서기관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하나이까?”라고 하니
제자들은 서기관들이 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하는지 예수님께 물었다. 예수님은 엘리야가 먼저 온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셨다.
마태복음 17:11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과연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할 것이라.
예수님의 대답은 미래를 향한다.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할 때가 남아 있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는 이미 온 엘리야를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17:12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나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들 마음대로 대하였도다. 이와 같이 인자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고 하시더라.
이미 왔으나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대한 인물이 누구인지, 다음 절은 분명히 밝힌다.
마태복음 17:13 그때서야 제자들은 주께서 자기들에게 침례인 요한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임을 깨닫더라.
이미 온 인물은 침례인 요한이다. 앞으로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할 엘리야도 남아 있다. 두 말씀을 함께 읽으면 요한에게 주어진 역할, 그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기회, 실제로 그를 거부한 결과를 구분할 수 있다. 왕국 연기설은 이 거부로 실현이 미루어졌다고 설명한다.
왕국을 맞을 기회는 세 번 거부되었다
첫 번째 거부는 침례인 요한을 믿지 않은 일이었다. 요한의 침례에 관한 예수님의 질문에서 그 거부가 드러난다.

마태복음 21: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노라. 만일 너희가 말하면 나도 내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행하는지 말하리라.
마태복음 21:25 요한의 침례가 어디에서 왔느냐? 하늘로부터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난 것이냐?”고 하시니,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만일 우리가 하늘로부터라고 말하면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그렇다면 어찌하여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고 할 것이요,
지도자들은 요한의 침례가 하늘로부터 왔다고 답하면 왜 그를 믿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답을 의논하는 말 속에 이미 믿지 않았다는 사실이 담겨 있다. 왕국이 가까이 왔다고 전한 요한을 거부한 것은 그가 전한 왕국의 메시지도 거부한 일이었다.
두 번째 거부: “카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요한을 거부한 뒤에는 왕국을 선포하신 예수님을 거부했다. 요한복음 19장에서 빌라도와 유대인들이 주고받은 말의 쟁점은 예수님의 왕 되심이었다. 빌라도는 그분을 놓아주려고 애썼지만, 유대인들은 석방하는 일이 카이사에 대한 충성과 양립할 수 없다고 압박했다.
요한복음 19:12 이때부터 빌라도는 주를 놓아주려고 애쓰나 유대인들이 소리질러 말하기를 “당신이 이 사람을 놓아주면 당신은 카이사의 친구가 아니니이다. 자신을 왕이라고 하는 자는 누구나 카이사를 대적하여 말하는 것이니이다.”라고 하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왕이라고 말씀하고 계셨다. 유대인들은 바로 그 왕권을 문제 삼아, 자신을 왕이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카이사를 대적한다고 항의했다. 예수님을 놓아주면 카이사의 친구가 아니라는 말은 빌라도가 석방을 선택하지 못하도록 몰아붙이는 압박이었다.
요한복음 19:14 그 날은 유월절 예비일이고 제육시쯤이더라. 그가 유대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의 왕을 보라!”고 하니
요한복음 19:15 그들이 소리지르기를 “처단하소서. 처단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하더라.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의 왕을 내가 십자가에 못박으랴?”고 하니 선임 제사장들이 대답하기를 “카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라고 하더라.
빌라도가 “너희의 왕을 보라!”고 했을 때 그들은 왕을 받아들이는 대신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요구했다. “너희의 왕을 내가 십자가에 못박으랴?”라는 질문에는 “카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라고 답했다. 자신들의 메시아를 거부하고 카이사만을 왕으로 인정한 대답이었다.
십자가 뒤에도 남아 있던 기회
다니엘 9장 26절이 예언했듯이 메시야는 끊어지셨다. 그러나 십자가 죽음으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모든 기회가 곧바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와 스테판이 전한 말씀을 보면, 그들에게 왕국을 받을 기회가 계속 주어졌음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 3:17 이제 형제들아, 너희가 너희 관원들이 그리한 것과 마찬가지로 무지하여 그렇게 행한 줄을 내가 아노라.
베드로는 백성뿐 아니라 그들의 관원들도 무지하여 그 일을 행했다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죽음에 넘긴 책임을 지적하면서도, 그들이 알지 못한 채 행했다는 점을 함께 짚었다.
사도행전 3:1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아야 하리라고 미리 선포하신 것들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백성과 관원들이 무지하여 예수님을 죽음에 넘겼지만,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미리 알리신 말씀을 이루었다. 베드로는 이 두 사실을 밝힌 뒤 회개를 촉구했다.
사도행전 3:19 ○ 그러므로 너희는 회개하고 돌이키라. 그러면 주의 임재하심으로부터 새롭게 되는 때가 올 때 너희 죄들이 지워지리라.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권면은 이미 끝난 기회를 돌아보라는 말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에게 지금 응답하라는 요청이었다. 그 권면에 이어지는 두 절은 죄사함과 그리스도의 오심, 만물의 회복을 함께 보여 준다.
사도행전 3:20 또 하나님께서 전에 너희에게 전파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리라.
하나님께서 전에 전파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겠다는 약속이다. 지금 회개하라는 촉구는 오실 그리스도를 맞을 준비와 연결된다.
사도행전 3:21 하늘은 만물이 회복될 때까지 그분을 마땅히 받아들여야 하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이 일에 관하여 그의 모든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니라.
“만물이 회복될 때까지”라는 말에는 기다림이 끝나는 시점이 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현재의 기다림은 이스라엘이 바라던 회복의 때와 연결된다. 19절은 민족적 죄사함을, 20절과 21절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왕국 회복을 가리킨다.
사도행전 3:26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를 일으키사 너희를 복 주시려고 먼저 너희에게 보내어 너희 각자가 자기의 악한 행실로부터 돌아서게 하셨느니라.”고 하더라.
“먼저 너희에게”라는 말도 대상의 구분을 보여 준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각자가 악한 행실에서 돌아서도록 아들을 먼저 보내셨다고 말한다.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왔다면 왕국을 받았을 것이다.
베드로의 회개 촉구와 바울의 회복 약속
베드로는 이스라엘에게 회개를 요구했고, 바울은 이스라엘의 실족으로 이방인들에게 구원이 이른 경위와 이스라엘의 장래를 설명했다. 두 사람의 선포를 함께 읽으면, 이스라엘의 거부가 구원의 끝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로 향한 전환이었다는 점이 드러난다.
로마서 11:7 그러면 무엇이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였고 오히려 선택된 자들이 그것을 얻었으며 그 나머지는 오늘까지 완고해졌느니라.
이스라엘 안에서도 선택된 자들은 얻었지만 나머지는 완고해졌다. 민족 전체가 왕국의 선포에 응답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의 실족이 모든 일의 끝은 아니다.
로마서 11:11 그러면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실족함으로 넘어졌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그들의 실족으로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이르렀으니 이는 그들로 시기하게 하려 함이니라.
실족으로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이르렀다. 왕국 연기설은 이스라엘의 거부와 이방인들이 들어오는 교회시대를 이 순서로 연결한다.
로마서 11:12 그들의 실족함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고 그들의 쇠퇴가 이방인들의 부요함이 되었다면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은 어떠하겠느냐?
바울은 이스라엘의 실족과 쇠퇴에서 멈추지 않고 그들의 ‘충만함’을 묻는다. 실족으로도 이방인들에게 부요함이 왔다면, 회복될 때는 어떠하겠는가? 이어 그들을 받아들이는 일을 생명과 연결한다.
로마서 11:15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해가 된다면 그들을 받아들임은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는 생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는 생명”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회복을 가리킨다. 에스겔 37장은 죽어 있던 이스라엘이 생명을 얻고 자기 땅으로 돌아와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여 준다.
마른 뼈와 두 막대기: 회복될 이스라엘
에스겔 37장의 회복은 막연한 영적 상태만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마른 뼈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어디로 돌아갈지, 어떤 백성으로 하나가 될지 구체적으로 밝히신다.

에스겔 37:1 주의 손이 내게 임하시어 주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셔서, 뼈로 가득 찬 골짜기 가운데에 나를 세우시고,
에스겔 37:3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인자야, 이 뼈들이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오 주 하나님이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였더니
주께서 에스겔을 세우신 곳은 뼈로 가득 찬 골짜기였다. “이 뼈들이 살 수 있겠느냐?”라는 질문에 에스겔은 주께서 아신다고 답한다.
에스겔 37:6 또 내가 너희 위에 힘줄을 놓고 너희 위에 살을 자라게 하고 피부로 덮고 너희에게 숨을 넣으리니 너희가 살리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힘줄과 살을 갖추고 피부로 덮으신 뒤 숨을 넣어 살게 하신다. 이어 이 뼈들이 누구인지 밝히신다.
에스겔 37:11 ○ 그때에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니라.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의 온 집이라. 보라,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뼈들은 말랐고 우리의 소망은 사라졌으며 우리의 부분은 완전히 끊어졌도다.” 하느니라.
뼈들은 이스라엘의 온 집이다. 그들은 소망이 사라지고 자신들의 부분이 끊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 상태로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에스겔 37:12 그러므로 그들에게 예언하여 말하라.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오 내 백성아, 내가 너희 무덤들을 열어서 너희로 너희의 무덤들로부터 나오게 하여 너희를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오리라.
무덤에서 나오게 하실 뿐 아니라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오신다. 생명을 얻는 일과 자기 땅으로 돌아오는 일이 함께 약속된다.
에스겔 37:16 너 인자야, 또 너는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유다와 그의 동반자 이스라엘의 자손을 위하여.”라고 쓰고 그 다음에 또 다른 막대기를 취하여 그 위에 “요셉, 즉 에프라임의 막대기와 그의 동반자 이스라엘의 온 집을 위하여.”라고 써서
에스겔 37:19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에프라임의 손에 있는 요셉의 막대기와 그의 동료 이스라엘의 족속들을 취하여 그들을 그와 함께, 즉 유다의 막대기와 함께 놓아 한 막대기가 되게 하리니 그들이 내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하라.
유다를 위한 막대기와 요셉, 곧 에프라임을 위한 막대기가 하나님의 손에서 하나가 된다. 막대기의 이름은 회복될 백성이 누구인지 보여 준다. 흩어지고 갈라진 이스라엘의 지파들이다.
에스겔 37:22 이스라엘의 산들 위에 있는 땅에서 그들을 한 민족으로 만들 것이니 한 왕이 그들 모두에게 왕이 될 것이요,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이 결코 다시는 두 왕국으로 나뉘지 아니하리라.
회복된 백성은 자기 땅에서 한 민족이 되고 한 왕 아래 모인다. 두 민족, 두 왕국으로 나뉘었던 상태도 끝난다. 사도행전에서 이스라엘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왕국에는 바로 이 회복의 약속이 담겨 있었다.
흩어진 백성이 모일 기회
당시 흩어진 유대인들은 어떻게 다시 모일 수 있었을까? 사도행전 2장의 예루살렘 절기는 이 질문과 관련된다. 온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으로 오고 있었다.
이들이 회개의 선포를 받아들였다면 그 모임은 민족적 재집결로 이어졌을 것이다. 절기를 지키러 오는 것만으로 왕국을 얻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선포에 응답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스테판의 증언: 왜 예수님께서 서 계셨는가
세 번째 거부는 스테판의 증언을 거부한 일이다. 그는 이스라엘이 자기 왕, 자기 메시야를 거절했다고 책망했다. 사람들은 이를 받아들이기보다 분노하며 이를 갈았다.
사도행전 7:54 ○ 그들이 이런 말을 듣고 마음이 상하여 그를 향해 이를 갈더라.
사도행전 7:55 그러나 그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늘을 주시하여 우러러보니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신 것을 보고
사도행전 7:56 말하기를 “보라, 하늘들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하니
스테판이 본 장면에서 눈에 띄는 것은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예수님이다. 이스라엘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지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받아들이실 준비가 되어 계셨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귀를 막고 스테판에게 달려들었다.
사도행전 7:57 그때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자기들의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큰 소리로 귀를 막고 달려든 행동은 더 이상 듣지 않겠다는 거부였다. 자기 왕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일이 스테판의 증언 앞에서 다시 반복되었다.
앉아 기다리심과 서 계심의 대조
사도행전은 예수님께서 서 계셨다고 기록한다. 반면 골로새서는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를 말한다. 앉아 계심은 기다림을, 서 계심은 행동할 준비가 되셨음을 보여 준다.

골로새서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으면 위에 있는 것들을 구하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앉아서 때를 기다리신다. 이 기다림은 약 2천 년 동안 이어졌다. 반면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은 행동할 준비가 되었음을 뜻한다. 스테판이 보았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곧 오실 준비가 되어 계셨다.
문 앞에 서 계신 심판자와 하늘의 열린 문
야고보서 5장은 미래 환난에서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인내를 권한다. 여기에서도 주의 오심이 가까울 때의 “서 계심”이 나타난다.
야고보서 5: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오실 때까지 인내하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받을 때까지 오래 참나니
농부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듯이,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도 인내해야 한다. 이 기다림에는 앞으로 얻을 열매처럼 분명한 목적이 있다.
야고보서 5:8 너희도 인내하며 마음을 견고케 하라. 주의 오심이 가까움이라.
야고보서 5:9 형제들아, 정죄받지 않으려거든 서로 원망하지 말라. 보라, 심판하시는 분이 문 앞에 서 계시니라.
8절은 주의 오심이 가깝다고 하고, 9절은 심판하시는 분이 문 앞에 서 계신다고 한다. 서 계신 자세는 곧 오실 준비가 되어 계심을 보여 준다. 하늘의 문과 그리스도 자신이 문이라는 말씀을 함께 읽으면 이 관계가 더 선명해진다.
요한계시록 4:1 이 일 후에 내가 쳐다보니, 보라, 하늘에 한 문이 열려 있는데 내가 들은 첫 음성은 나팔 소리 같았으며,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이리 올라오라. 내가 이후에 마땅히 일어나야 할 일들을 네게 보여 주리라.” 하더라.
하늘에 열린 문과 “이리 올라오라”는 부르심을 위로 데려가시는 일과 연결하고, 요한복음 10장의 문이신 그리스도를 함께 읽는다.
요한복음 1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들의 문이라.
요한복음 10:9 나는 그 문이라.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가면 구원받을 것이며 또 들어가며 나오며 초장을 찾으리라.
스테판이 보았던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곧 오셔서 사람들을 받아들이실 준비가 되어 계셨다. 하늘의 열린 문과 위로 부르시는 음성, 문이신 그리스도, 문 앞에 서 계신 심판자를 함께 읽으면 그분께서 어떤 형태의 휴거나 그와 비슷한 일을 시작하시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스테판의 증언은 왕국 연기의 네 번째 근거다. 그리스도께서는 왕국과 마지막 때의 사건들을 진행하실 준비가 되어 계셨으나, 이스라엘이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다시 기다리셔야 했다. 거부된 기회와 그 뒤의 기다림이 왕국의 연기로 이어진다.
이 근거들은 왕국의 연기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사실임을 보여 준다. 침례인 요한과 미래 엘리야, 당시 가까이 왔던 왕국과 아직 남은 환난을 함께 이해하려면 성경을 경륜적으로 읽어야 한다.
스테판 이후, 선포의 대상이 이방인에게로 바뀐다
사도행전 7장을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의 거부로 읽으면, 그 이후 이방인을 향한 사역이 시작되는 순서에도 의미가 생긴다. 8장에는 에티오피아인이 등장하고, 9장에는 이방인의 사도 바울이 부름받으며, 10장에는 베드로도 이방인들에게 보내진다.

이 전환에서 첫 이방인으로 등장하는 사람이 8장의 에티오피아인이다. 왜 스테판 이전에 바울이 부름받지 않았는가라는 질문도 같은 순서로 설명한다. 이스라엘에게 마지막 기회가 주어진 뒤 이방인의 사도가 준비되었고, 이미 유대인에게 선포하던 베드로의 사역 대상까지 이방인으로 넓어졌다는 것이다.
서신서의 대상과 재림을 기다리는 표현
히브리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내용에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을 향한 교리가 함께 나타나는 것도 대상의 전환과 관련된다.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으로 바뀌었다가 미래 환난 때 다시 유대인으로 돌아간다는 시간표다. 논점은 각 말씀의 대상과 적용 시기를 구분해야 한다는 데 있다.
사도들이 마지막 때가 곧 닥칠 것처럼 말하고 예수님의 오심을 임박한 일로 기다린 이유도 왕국 연기설은 같은 방식으로 설명한다. 당시 왕국이 실현될 기회가 있었지만 그 실현이 미루어졌고, 사이에 교회시대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주신 경고도 이 관점에서 읽는다.
마태복음 24:15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리니, (읽는 자는 깨달으라.)
마태복음 24:16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들로 도망하라.
적그리스도와 관련된 멸망의 가증한 것이 나타나면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해야 한다. 당시 제자들에게 그 사건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면, 왜 그들에게 직접 경고하셨는가? 왕국이 연기되지 않고 당시 마지막 때의 사건들이 진행되었다면, 그 제자들이 이 경고를 따라 피해야 했을 것이다. 역시 실제로 일어난 일과 조건을 전제로 한 설명을 구분해야 한다.
불법의 신비와 로마의 권세
데살로니가후서 2:3 아무도 어떤 모양으로든지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이는 먼저 배교하는 일이 이르지 않고, 또 그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지 않고서는 그 날이 오지 아니함이라.
데살로니가후서 2:7 불법의 신비가 이미 활동하고 있나니 현재는 막는 자가 있어 막을 것이나 그가 그 길에서 옮겨질 때까지만 그리하리라.
데살로니가후서 2:8 그리고 나서 그 악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께서 그를 자기 입에서 나오는 영으로 소멸하시고 그의 찬란한 오심으로 제거하시리라.
앞으로 죄의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는 말씀과, 불법의 신비가 이미 활동하고 있다는 말씀이 함께 있다. 당시 종말의 사건들이 진행되었다면 로마 황제가 적그리스도의 역할을 맡았을 것이다. 왕국이 연기되면서 그 전개도 미루어졌으며, 미래의 적그리스도 역시 로마의 권세와 이어진다.
요한계시록 13:2 또 내가 본 그 짐승은 표범과 같고, 발은 곰의 발 같고,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자리와 큰 권세를 그 짐승에게 주더라.
13장은 짐승이 용에게서 능력과 자리와 큰 권세를 받는다고 기록한다. 17장의 일곱 산은 그 권세를 로마와 연결하는 근거로 제시된다.
요한계시록 17:9 지혜 있는 생각이 여기 있으니 일곱 머리는 그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은 일곱 언덕의 도시인 로마를 가리킨다. 바빌론, 용, 짐승, 일곱 산에 관한 본문을 함께 읽으면, 당시 로마 황제와 미래 적그리스도의 권세가 로마로 연결된다.
로마의 권세는 이교 로마에서 로마 가톨릭으로 이어졌다. 음모를 꾸미는 엘리트들과 바티칸의 권세를 통해 활동해 온 예수회도 그 안에 포함된다. 하나님께서 이들 세력의 활동을 허용하시고 로마의 권세가 계속되게 하신 까닭은 미래의 예언이 성취되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받아들였다면”이라는 조건과 실제 역사
지금까지의 설명에서 두 가지를 구분해야 한다. 하나는 이미 일어난 일이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이 받아들였을 경우 진행되었을 일이다. 과거에 성취된 예언을 인정하면서도 미래에 남아 있는 성취를 구분해야 교회시대가 어느 자리에 놓이는지 이해할 수 있다.
당시에도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강력하게 사용하고 계셨다. 그들이 받아들였다면 침례인 요한이 엘리야의 역할을 맡고 로마 황제가 적그리스도의 역할을 맡는 가운데 환난과 왕국이 진행되었을 것이다. 아들의 십자가 죽음은 이미 성취되었고, 남은 것은 이스라엘의 응답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민족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결과 과거의 성취와 미래의 왕국 사이에 교회시대가 놓였다.
| 구분 | 왕국 연기설의 설명 |
|---|---|
| 이스라엘이 받아들였다면 | 침례인 요한이 엘리야의 역할을 맡고, 로마 황제가 적그리스도의 역할을 맡는 가운데 당시 환난과 왕국이 진행되었을 것이다. |
| 실제로 거부한 뒤 | 왕국은 연기되었고, 이방인들이 들어오는 교회시대가 놓였다. 엘리야의 회복과 마지막 한 주의 환난은 미래에 남았다. |
왕국을 받아 돌아오는 귀인
마지막으로 누가복음 19장의 귀인 비유는 떠남과 귀환 사이의 간격을 보여 준다. 이 귀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귀인이 먼 나라로 떠나는 목적은 왕국을 받아 돌아오는 것이다.
누가복음 19:12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떤 귀인이 왕국을 받아서 돌아오려고 먼 나라에 가게 되었더라.
왕국을 세우러 오셨던 그리스도께서 거부당하셨다고 해서 그 뜻을 버리신 것은 아니다. 귀인은 왕국을 받아 돌아오려 떠났고, 비유는 실제로 그가 돌아오는 장면을 기록한다.

누가복음 19:15 그 귀인이 그 왕국을 받아서 돌아와 자기가 돈을 준 그 종들을 불러오라고 명하니, 이는 각자가 장사를 하여 얼마나 벌었는가를 알고자 함이더라.
귀인은 돌아와 자신이 돈을 맡긴 종들을 부르고, 각자가 얼마나 벌었는지 살핀다. 귀환 뒤에는 판단이 따른다. 그리스도께서도 미래에 돌아오셔서 왕국을 이루시고 심판하신다.
기다림이 길어졌다고 약속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왕국 연기설은 가까이 왔던 왕국이 거부된 역사와 그 사이에 들어온 교회시대, 다시 이루어질 이스라엘의 회복을 하나의 전개로 설명한다. 왕국의 연기는 피할 수 없는 진리다. 이 관점에서 오늘날의 기다림을 이해하는 길은 날짜를 계산하는 데 있지 않다. 이미 이루어진 말씀과 아직 남은 약속을 구분하고, 그 사이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바르게 읽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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