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제임스 성경

천년왕국 이후의 곡과 마곡: 마지막 반란과 백보좌 심판, 은혜로 얻는 담대함

이 글은 성경 교사 피터 럭크만(Peter S. Ruckman)의 요한계시록 제14회 강의 내용을 주제별로 정리하고 재구성한 성경 해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 년 동안 다스리신 뒤에도 사람들은 왜 다시 사탄을 따라 반란을 일으킬까? 좋은 환경과 엄격한 통치만으로 인간의 내면까지 바뀌지는 않기 때문이다. 천년왕국에서도 아담의 본성은 남아 있다. 곡과 마곡의 마지막 반란은 그 사실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반란 뒤에는 백보좌 심판이 기다린다.

이 사건들을 이해하려면 시대와 대상을 구분해야 한다. 천년왕국의 절기와 희생제사는 지금 교회시대의 구원 조건과 다르다. 죽은 자들이 행위대로 심판받는 백보좌 역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섬김을 평가하는 그리스도의 심판석과 구별해야 한다. 같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모든 말씀을 같은 사람에게 같은 방식으로 적용할 수는 없다.

마지막 심판은 먼 미래의 사건으로만 넘길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재산과 명성, 종교적 배경과 좋은 평판이 모두 힘을 잃고 은밀한 생각까지 드러나는 날, 사람은 무엇을 의지할 수 있을까?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구원을 미룰 수 없는 이유도 분명해진다. 스스로 갚을 수 없는 죄의 빚을 그리스도께서 갚으셨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믿는 사람에게 심판 날의 담대함을 준다.

천년왕국에도 출생과 죽음이 있다

요한계시록 20:7 그 천 년이 끝나면 사탄이 그의 감옥에서 풀려나,

사탄이 풀려나는 때는 천 년의 통치가 끝난 뒤이다. 그때 다시 반란에 가담할 사람들이 어디서 나오는지 이해하려면, 천년왕국의 삶부터 살펴야 한다. 먼저 기억할 사실은 그때에도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다는 것이다.

환난을 지나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모두 회심한 것은 아니며, 그들에게서 태어나는 자녀들도 마찬가지이다. 아담의 본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산상설교에 따라 살아가더라도 모두가 마음에서부터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철권 통치 아래에서 산다. 럭크만은 일부 근본주의 학자들이 그리는 천년왕국과 달리, 성경이 말하는 통치의 엄격함을 군사 독재라는 표현으로 강조한다. 그 엄격함은 일상과 예배 질서 모두에 나타난다.

엄격한 처벌과 다시 시행되는 레위 율법

산상설교는 다른 사람을 어리석은 자라고 부르는 말까지 엄중하게 다룬다.

마태복음 5:2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까닭없이 자기 형제에게 노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의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며, 형제에게 라카라 하는 자는 누구나 공회의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요, 또 어리석은 자라 하는 자는 누구나 지옥불의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라.

이 말씀을 천년왕국의 통치에 적용하면, 남을 어리석은 자라고 부르는 말 한마디도 무거운 처벌을 받는다. 장막절 준수를 거부하는 경우에도 엄격한 처벌이 따른다. 럭크만은 두 사례의 형벌이 오늘날 살인이나 자동차 절도에 부과되는 형벌보다 훨씬 무겁다고 비교한다.

장막절에 참여하지 않는 민족들이 어떤 벌을 받는지는 스카랴 14장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스카랴 14:17 땅의 모든 족속 중에서 그 왕, 만군의 주를 경배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비가 내리지 아니하리라. 스카랴 14:18 만일 이집트의 족속이 올라오지 아니하면, 비가 없을 것이며, 재앙이 있으리니 그 재앙으로 주께서 장막절을 지키려고 올라오지 아니하는 그 이방을 치시리라. 스카랴 14:19 이것이 이집트의 벌이 될 것이요, 장막절을 지키려고 올라오지 아니하는 모든 민족들의 벌이 되리라.

장막절 준수는 민족들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올라오지 않는 족속에게는 비가 내리지 않고, 이집트에는 재앙이 따른다. 처벌은 이집트만의 일이 아니라 장막절을 지키지 않는 모든 민족에게 적용된다.

천년왕국에서는 장막절을 지킬 뿐 아니라 제단에서 희생제사도 드린다. 이 예배 질서를 자세히 살펴볼 본문은 에스겔 40–48장이다. 일부 의식만 남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레위 율법 체계가 거의 전부 다시 시행된다.

클라렌스 라킨의 해설과 그 영향

이러한 레위 율법과 희생제사의 재시행은 현대 주석가들을 당혹스럽게 한다. 럭크만은 게벨라인(Gaebelein), 페팅길(Pettingill), 스코필드(Scofield), 잉글리시(English), 맥클레인(McClain) 등의 저술이 천년왕국 예배의 성격을 거의 다루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반면 이 문제에 관한 클라렌스 라킨(Clarence Larkin)의 설명은 아마 가장 뛰어날 것이라고 평가한다.

라킨은 위대한 전천년주의 주석가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근본주의 전천년주의 진영에서는 그의 이름을 되도록 언급하지 않는다. 럭크만은 라킨의 해당 저작이 1909년에 나왔으며, 이 주제를 다루면서 그 책과 비슷한 내용을 담은 저술은 무엇이든 라킨의 1909년 저작을 베낀 것이라고 단언한다. 드한 박사(Dr. DeHaan), 시어도어 엡(Theodore Epp), 찰스 풀러(Charles Fuller)가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해 배운 거의 모든 것도 라킨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말한다.

정작 설교자들의 서재에는 라킨의 책이 있었다. 럭크만이 방문한 당대 주요 설교자들의 사무실이나 서재 가운데 『하나님의 경륜의 진리』(Dispensational Truth)가 없는 곳은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교단색이 강한 여러 집단에서는 맨 아래 선반의 잡지 더미 밑에 그 책을 조심스럽게 숨겨 놓았다. 책에서 배우면서 저자의 이름은 꺼내지 않는 모습을 꼬집는 일화이다.

럭크만은 천년왕국에서 레위 율법의 규칙과 규례가 다시 시행된다는 점에서 라킨의 접근이 옳다고 본다. 이 예배 질서가 낯설다면 에스겔 40–48장을 몇 시간 들여 공부해야 한다. 익숙한 교리의 틀로 미래의 규정을 판단하기 전에, 먼저 그 장들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는지 읽어야 한다.

골로새서의 그림자는 과거인가, 미래인가

이 예배 규정은 골로새서의 ‘그림자’와 어떻게 연결될까? 럭크만은 현대 보수주의 주석가들의 혼란이 골로새서 2장 16절의 해설에서 드러난다고 지적한다. 거룩한 날과 새 달과 안식일을 열거한 16절은, 그것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밝히는 17절과 함께 읽어야 한다.

골로새서 2:16 그러므로 음식으로나 마시는 것으로나 거룩한 날이나 새 달이나 안식일들에 관해서는 아무도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골로새서 2:17 이런 것들은 다가올 것들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여기서 주목할 표현은 “다가올 것들의 그림자”이다. 본문은 이것들이 그림자였다고 과거형으로 말하지 않고, 그림자라고 현재형으로 말한다. 헬라어 동사도 현재시제이다. 따라서 거룩한 날과 새 달과 안식일들을 초림 때 이미 성취된 것들의 그림자로만 읽으면 본문의 시제를 바꾸게 된다. 헬라어도 영어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럭크만은 당시 시중의 주요 주석서뿐 아니라 서기 185년 이후의 주석들 가운데서도, 자신이 아는 한 이 구절을 그대로 믿는 주석을 찾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주석가와 강해자들이 모두 이것들을 앞으로 올 것들의 그림자‘였다’고 고집한다는 것이다. 쟁점은 그림자라는 사실보다 그 그림자가 가리키는 성취를 과거에 두느냐, 미래에 두느냐에 있다.

비교할 점비판받는 주석의 설명본문에 따라 받아들여야 할 의미
그림자를 말하는 시제그림자였다현재도 그림자이다
그림자가 가리키는 성취초림 때 이미 성취된 것들앞으로 다가올 것들

시제 체계와 동사 어미, 명사 어미와 격변화, 동사 활용을 가장 요란하게 내세우는 학자들이 정작 성경이 자기들의 신학적·교리적 견해와 충돌하면 대학 1학년 수준의 문법 규칙까지 어기는 것은 우스운 모순이다. 어려운 문법을 얼마나 아느냐보다, 이미 가진 교리에 맞추어 본문을 바꾸고 있지는 않느냐가 중요하다.

이미 가진 교리에 맞추어 본문을 읽는 문제는 골로새서 2장 8절의 번역에서도 제기된다. 이번에는 시제가 아니라, 본문에 덧붙인 한 단어가 쟁점이다.

골로새서 2:8 아무도 너희를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노략질하지 못하도록 주의하라. 그것들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를 따른 것이며 그리스도를 따른 것이 아니니라.

문제가 되는 단어는 ‘철학’ 앞에 붙은 ‘his’, 곧 ‘그의’이다. 영문 본문의 차이를 보면 무엇을 지적하는지 분명해진다.

번역해당 표현표현의 차이
KJVthrough philosophy and vain deceit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ASVthrough his philosophy and vain deceit그 사람의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여기서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을 노략질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럭크만이 문제 삼는 것은 이 단어가 경고의 범위를 좁힌다는 점이다. ‘그 사람의 철학’으로 읽으면, 철학에 대한 경고를 특정인이 주장하는 잘못된 철학에만 한정할 여지가 생긴다. 철학 자체는 괜찮고 그 사람의 철학만 피하면 된다는 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영문 본문 비교

럭크만은 1880년 이후 주요 번역자들이 모두 이 단어를 삽입했으며, ‘그의’라는 말은 어느 헬라어 본문에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의 비판은 원어를 근거로 내세우면서 정작 본문에 없는 말을 넣어 경고를 약화한다는 데 있다.

앞서 다룬 절기의 ‘그림자’도 같은 문제로 연결된다. ‘다가올 것들’을 초림 때 이미 성취된 것으로만 설명하는 일과, ‘his’를 넣어 철학에 대한 경고를 좁히는 일에서 럭크만은 자신의 신학적 입장에 맞추어 본문의 의미를 조정하는 태도를 본다. 말씀을 배우려는 사람은 그 편견이 본문을 받아들이는 데 장애가 되고 있지 않은지 깨닫고 명심해야 한다.

천년왕국 이후에도 이어지는 예배 규정

거룩한 날과 새 달과 안식일의 준수는 어디까지 이어질까? 럭크만은 그 범위를 천년왕국 이후의 천 대까지 설명한다. 초림 때 모두 끝났다고 생각하면 천년왕국에서의 재시행부터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여기서 살펴볼 예배의 범위는 천년왕국 너머까지 이어진다.

앞으로의 예배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더 살피려면 이사야 66장을 공부해야 한다. 그 가운데 새 달과 안식일의 경배를 다루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이사야 66:23 주가 말하노라. 새 달부터 그 다음 새 달까지, 또 안식일부터 그 다음 안식일까지 모든 육체가 내 앞에 경배하러 오리라.

모든 육체가 새 달과 안식일에 주 앞에 경배하러 온다는 말씀이다. 럭크만은 이런 미래의 예배를 밝히는 킹제임스성경의 계시가 기존 생각을 찌를 만큼 날카롭다고 강조한다. 히브리어 학자가 사본이나 다른 언어의 연구 보조자료를 동원해도 찾아내지 못하는 계시가 그 본문에 있다는 것이다.

진리를 구할 때 가르치고 인도하고 지도하시는 분은 성령 자신이다. 어원학자나 언어학자라는 자격을 갖추고 뛰어난 언어 능력을 지녔다 해도, 그것만으로 성경을 이해할 능력까지 갖추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원어 지식이 곧 성경 이해는 아니다

헬라어 학자들의 천년왕국 이해는 언어를 다루는 능력과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능력이 같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헬라어 학자들은 전천년주의자가 아니었다. 럭크만은 이들이 그 점에서는 여름성경학교에 다니는 열 살짜리 아이만큼도 성경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일부 현대 헬라어 학자들이 전천년주의를 받아들인다는 사실도 그의 비판을 뒤집지는 못한다. 그들이 전천년주의를 배운 곳은 헬라어를 가르친 스승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법학자들의 저술과 원어 사전 역시 전천년주의자들이 쓴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 학자들의 전천년주의를 원어 학문이 성경 이해를 보장한다는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고 본다.

럭크만은 빈센트, 트렌치, 몰턴, 밀리건, 수터, 웨스트코트, 호트, 엘리콧, 라이트풋을 차례로 거론한다. 이들의 책은 성경을 믿는 사람들이 쓴 책이 아니며,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가장 단순한 진리조차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 그의 비판이다.

곡과 마곡의 전쟁은 언제 일어날까?

천 년의 통치가 끝나면 무엇이 달라질까? 요한계시록 20장 1절부터 이어진 사탄의 감금이 끝나고, 7절에서 사탄이 풀려난다. 그 뒤에 벌어질 전쟁은 그 이전의 전쟁과 구별해 읽어야 한다.

풀려난 사탄은 다시 민족들을 미혹하여 전쟁에 나설 무리를 모은다. 땅의 사방에 있는 이들은 곡과 마곡이라 불리며, 그 수는 바다의 모래에 비유될 만큼 많다.

요한계시록 20:8 땅의 사방에 있는 민족들,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려고 나가서 그들을 함께 모아 전쟁을 일으키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곡과 마곡이라는 이름은 에스겔 38장 2절에도 등장한다. 이 때문에 두 본문을 함께 살펴보게 되지만, 이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전쟁의 시점까지 같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에스겔 38장과 39장이 각각 어느 전쟁을 가리키는지 살펴야 한다.

에스겔 38:2 인자야, 너는 곡과, 마곡 땅과, 메섹과 투발의 최고 통치자를 대적하여 네 얼굴을 두고 그에 대하여 예언하여

곡과 마곡의 전쟁을 어느 시점에 두느냐에 관해서는 다음 세 가지 견해를 비교할 수 있다.

견해전쟁의 시점해당 견해의 설명
제임스 맥긴리(James McGinley)가 지지한 견해휴거 이전곡과 마곡의 전쟁이 휴거 전에 벌어진다.
일반적인 해석으로 소개된 견해그리스도의 재림 때에스겔 38장과 39장은 아마겟돈 전쟁을 가리킨다.
세 번째 견해환난 중간에스겔 38장과 39장의 전쟁으로 러시아가 제거되고 로마가 주도권을 잡는다.

이 글에서 따르는 해석은 두 장을 하나의 전쟁으로 묶지 않는다. 에스겔 38장과 39장은 서로 다른 두 전쟁이다. 38장은 이스라엘이 평안하고 안전하게 거해 온 뒤에 일어나는 전쟁으로, 천년왕국 이후를 다루는 요한계시록 20장과 연결된다. 반면 39장의 전쟁은 천년왕국 전에 벌어진다.

두 전쟁을 구별하는 단서는 전쟁 이후의 일들이다. 에스겔 39장에서는 이스라엘 집이 땅을 깨끗하게 하려고 일곱 달 동안 죽은 자들을 매장하고, 무기를 태우는 데 칠 년을 보낸다.

에스겔 39:12 이스라엘 집이 그들을 일곱 달 동안 매장하여 그 땅을 깨끗게 할 것이라. 에스겔 39:9 이스라엘의 성읍들에 거하는 자들이 나가서 무기들에 불을 놓아 태우리니 작은 방패들과 큰 방패들과 활들과 화살들과 몽둥이들과 창들이라. 그들이 불로 이 무기들을 칠 년간 태우리라.

태우는 무기는 작은 방패와 큰 방패, 활과 화살, 몽둥이와 창이다. 럭크만은 이처럼 매장과 무기 처리가 오랫동안 이어지는 문맥을 근거로 39장의 전쟁을 천년왕국 이전에 둔다. 이스라엘이 평안히 거해 온 뒤에 벌어지는 38장의 전쟁과는 구분된다. 전쟁이 끝나는 순간뿐 아니라 그 뒤에 무엇이 이어지는지까지 보아야 한다.

천년왕국 전후의 두 전쟁과 마지막 심판의 순서

유대 민족을 말살하려는 사탄의 마지막 시도

사탄이 모은 무리는 성도들의 진영과 사랑하시는 도성을 포위한다. 그 결말은 단 한 절에 기록되어 있다.

요한계시록 20:9 그들이 땅의 넓은 데로 올라가서 성도들의 진영과 사랑하시는 도성을 포위하니, 하늘에서 불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와 그들을 삼켜 버리더라.

이 공격은 유대 민족을 말살하려는 사탄의 마지막 시도이다. 요한계시록 12장에 나타나는 유대 민족을 향한 끊임없는 증오가 마지막 전쟁으로 터져 나온다. 그러나 포위한 군대는 목적을 이루기 전에 하늘에서 내려온 불에 삼켜진다.

지구를 거점으로 우주까지 채우려던 사탄의 야심은 이제 지상의 성도들과 도성을 향한 공격으로 좁아졌다. 남은 것은 스스로 멸망을 재촉하는 마지막 몸부림뿐이다.

사탄의 마지막 공격과 그 앞을 가로막는 왕

다섯째 그룹(cherub)인 사탄은 쓰러지면서도 주먹을 휘두르는 권투 선수처럼 하나님의 권위에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 한다. 럭크만은 이를 영웅 흉내를 내는 헛된 몸짓이자, 오히려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는 행동이라고 묘사한다. 공격의 목표는 복잡한 전장 배치나 광범위한 작전 계획 없이도 알 수 있다. 수도에는 정부의 수장이자 왕이 계시고, 사탄은 그 왕을 공격한다.

그 왕은 사탄이 처음 만나는 상대가 아니다. 사탄이 지구를 장악하려 할 때마다 그의 앞을 가로막아 온 유일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시험의 산과 재판정, 십자가와 땅의 심장부에 이르기까지 사탄이 그분과 맞닥뜨린 장소는 다음 성경 본문들과 연결된다.

사탄이 왕을 만난 장소연결되는 성경 본문
시험의 산마태복음 4장
재판정마태복음 26장
십자가마태복음 27장
땅의 심장부에베소서 4:8–12

에베소서 4:9 (따라서 그가 올라가셨다는 것은 그가 땅의 더 낮은 부분들로 먼저 내려가셨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에베소서 4:10 내려가셨던 그가 모든 하늘들 위로 올라가신 바로 그분이니 그가 모든 것을 충만케 하시려 함이니라.)

땅의 더 낮은 부분들로 내려가셨던 분과 모든 하늘들 위로 올라가신 분은 동일한 그리스도이시다. 마지막 반란에서 사탄이 맞서는 왕도 그분이다.

천 년의 통치가 끝난 때에는 1970년대 우주비행사들의 시도도 먼 옛날의 원시적인 시도로 회상된다. 예루살렘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대신할 종족을 낳을 준비가 이루어졌다. 사탄은 자기 보좌를 전능하신 분보다 높이고 ‘다윈식 유인원 원숭이’로 우주를 채우려 했으며, 그 일을 도울 존재들을 기대했다. 그러나 마지막 전투를 앞둔 지금, 그가 기대했던 모든 것은 이미 사라지고 무너졌다.

사탄이 이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혈과 육을 가진 인간들뿐이다. 그들이 싸워야 할 상대는 초자연적이고 죄 없으시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능을 지니신 구주이시다. 사탄의 교회와 하늘의 군단, 독재자들과 황제들은 사라졌다. 럭크만은 교황들뿐 아니라 메디케어, 사회화, 왕관들과 왕국들, 대학들까지 사탄에게 속했던 것들로 열거한다. 그 모든 것이 이제는 남아 있지 않다.

모든 것을 잃은 사탄은 마지막으로 앞뒤를 가리지 않는 맹렬한 ‘반자이 돌격’을 감행한다. 병력을 앞뒤와 양 측면으로 움직여 거룩한 도성을 포위하지만, 시작할 때부터 이미 패배한 싸움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고 함께 멸망으로 간다. 천년왕국에서도 인간에게는 여전히 아담의 본성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천 년 동안 왕의 통치 아래 살았다고 해서 사탄의 유혹에 더는 응하지 않는 존재가 된 것은 아니다.

도성을 포위한 군대에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응답은 불이다. 럭크만은 그 불이 무리를 삼키면서 전투가 불과 몇 분 만에 끝난다고 묘사한다. 장기간의 공방도, 전세 역전도 없다. 그것이 전부이다. 마지막 큰 전투가 인류 역사상 가장 짧은 전투로 끝나는 것이다.

로마서 6:23 이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말미암은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라.

사탄을 따라 왕을 대적한 인간들은 죽음으로 반역의 대가를 치른다. 마지막 돌격의 결말을 설명하는 말씀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이다.

전쟁의 끝과 땅과 하늘의 소멸

창세기 3:15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또 네 씨와 그녀의 씨 사이에 적의를 두리니, 그녀의 씨는 너의 머리를 부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부술 것이라.” 하시고

창세기 3장 15절에서 선포된 적대 관계는 요한계시록 20장 9절에서 끝난다. 뱀과 여자 사이, 뱀의 씨와 여자의 씨 사이에 벌어진 전쟁은 마지막 반란이 진압되면서 종결된다. 전쟁에 빗대어 말하면, 영원한 평화를 가져올 휴전이 체결되고 포로와 전리품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만 남은 셈이다. 더 싸울 때가 아니라 전쟁이 끝난 뒤 심판할 때가 온 것이다.

지상의 평화를 위해 드리는 기도는 응답된다. 그러나 그 평화는 세상을 구성하는 원소들이 불 속에서 해체될 때 찾아온다. 세상 문제의 해답은 통합(integration)도 분리(segregation)도 아니라 해체(disintegration)이다. 기존 세상을 합치거나 나누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상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0:11 또 내가 큰 백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니, 그의 면전에서 땅과 하늘이 사라졌고 그들의 설 자리도 보이지 않더라.

포위한 군대의 멸망으로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큰 백보좌가 나타나자 그 위에 앉으신 분의 면전에서 땅과 하늘 자체가 사라진다. 인간이 살아온 세계가 설 자리조차 남지 않는다. 최후의 반란 뒤에는 세계의 소멸이, 그 뒤에는 백보좌 앞의 심판이 기다린다.

창조주께서 하늘과 땅을 소멸시키실 때

허무주의자의 주장에도 일리는 있지만, 철학과 사회학에서는 그 생각을 잘못 발전시킨다. 궁극적인 파괴를 이해하려면 인간이나 마귀보다 하나님을 먼저 보아야 한다. 궁극적인 창조주이신 하나님 자신이 궁극적인 파괴자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속한 높은 지위의 존재 가운데 하나에게 죽음의 임무를 맡기시고, 그를 아바돈, 아폴루온, 곧 파괴자라고 부르신다.

요한계시록 9:11 또 그들에게는 자기들을 다스리는 왕이 있으니 끝없이 깊은 구렁의 천사요, 그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아바돈이며 헬라어로 그의 이름은 아폴루온이더라.

끝없이 깊은 구렁의 천사는 그들을 다스리는 왕이며, 아바돈과 아폴루온이라는 이름을 지닌다. 그러나 ‘파괴자’라는 이름이 파괴의 궁극적인 권능까지 뜻하지는 않는다. 럭크만은 전능하신 주께서 직접 일하실 때의 파괴에 비하면 마귀의 힘조차 보잘것없다고 강조한다.

럭크만은 주께서 일으키실 최종적인 파괴를 코발트 폭탄이 아닌 ‘물 폭탄’이라는 표현으로 묘사한다. 지난 20년 동안 자주 말해 온 내용이기도 한다. 하늘들과 땅이 맹렬한 열로 녹아내리고, 땅과 그 안에 있는 일들이 타버릴 것이라는 베드로의 말씀이 그 파괴를 보여 준다.

베드로후서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들이 굉장한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우주의 구성 요소들이 맹렬한 불로 녹아내리며 땅과 그 안에 있는 일들이 타버릴 것이라. 베드로후서 3:12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열망하라. 그때는 하늘들이 불에 타서 녹아 버리고 우주의 구성 요소들도 맹렬한 불에 녹아내릴 것이나

하늘들과 우주의 구성 요소들, 땅과 그 안의 일들까지 모두 이 파괴에 포함된다. 세계의 마지막을 결정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인간이 먼저 세계를 폭파해 성경에 기록된 결말을 바꾸어 놓을까 봐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는 설명도 이 확신에서 나온다.

핵전쟁 공포와 정부 통제에 대한 비판

마지막 파괴를 일으키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확신에서, 피터 럭크만은 당시의 원자폭탄 공포를 담배와 생태 환경 문제를 둘러싼 소동에 빗대어 강하게 비판한다. 특히 정부가 미국 남부를 경제적으로 무너뜨리려면 담배 농사부터 장악해야 하고, 교육적으로 무너뜨리려면 교육 체계를 망가뜨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북부의 큰 주들 가운데 많은 주정부가 이미 수년째 파산 상태에 있으며 돈이 남아 있는 곳은 남부뿐이므로, 정부가 담배와 교육을 통해 남부의 경제적·사회적 기반을 겨냥한다는 것이다.

그는 핵공격 한 번으로 인류가 당장 전멸한다는 전망도 거부한다. 성경에 기록된 앞으로의 전쟁이 적어도 세 번은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핵전쟁 위기론은 비상 법안이라는 명목으로 사람들의 재산과 땅을 통제하고 정부의 권한을 넓히는 데 쓰인다고 주장한다. 이 대목에서 그가 거부하는 전망은, 인간이 일으킨 핵공격이 성경에 기록된 미래를 모두 없애 버리고 인류 역사를 끝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경고해야 할까? 럭크만은 세상의 위기론과 성경을 믿는 선지자의 경고를 ‘늑대다!’라는 외침에 빗댄다. 늑대는 사람을 해치는 위험을 뜻하는 비유이다.

세상은 “늑대다, 늑대다, 늑대다!” 하고 외치지만 그곳에는 늑대가 없다고 말한다. 곧 닥칠 핵공격으로 인류 전체가 사라진다는 식의 전망을 거짓 경보에 빗댄 것이다. 반면 성경을 믿는 선지자가 “늑대다!” 하고 외칠 때에는, 이미 늑대가 문 안으로 들어와 자녀들을 잡아먹고 있다고 묘사한다. 진짜 위험이 이미 사람들의 삶을 해치고 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어지는 구원 권면을 보면 이 대비의 초점이 드러난다. 사람들은 세상의 위기에는 크게 반응하면서도, 죄와 불신 가운데 있는 자신에게 닥칠 심판은 외면한다. 여기서 구별하는 것은 세상이 조성하는 공포와 성경이 경고하는 실제 위험이다.

그 실제 위험을 지적하는 사람에게는 암울하다거나 부정주의적이라는 조롱이 돌아온다. 반사회적이라는 비난에 전쟁 선동꾼, 증오 선동꾼, 파시스트라는 낙인까지 붙는다. 럭크만은 정작 자신에게 닥친 위험을 외면하면서 다른 문제에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태도를 비판한다.

대기오염도 같은 비판의 대상이다. 럭크만은 대기오염을 둘러싼 소동의 배후에 산업을 통제하려는 정부의 목적이 있다고 주장하며, 여기에 속아 넘어가지 않을 분별력을 요구한다.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인간이 연쇄반응을 일으켜 비축된 핵무기를 폭발시킬 가능성이 아니다. 주께서 마침내 이 세계를 폭파하실 때에는 실제로 그렇게 하실 것이므로, 주께서 친히 행하실 파괴를 알아야 한다.

세상의 마지막은 사람의 예상이나 불안에 찬 글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말씀대로 이루어진다. 세상의 위기론을 좇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아니, 이 바보야, 성경을 읽으세요.”라는 거친 질책은 그 요구를 담고 있다. 지금 두려워해야 할 일은 휴거 때 남겨져 짐승을 경배하게 되는 것이다.

대기오염, 여성의 권리와 여성해방, 피임, 생태, 혁명을 외친다고 해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럭크만은 이 사회 문제를 하나도 빠짐없이 해결하더라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여전히 지옥에서 불타게 된다고 경고한다. 그 해결책이 휴거 때 남겨지는 일을 막아 주지도 않는다. 남겨져 적그리스도를 경배하게 될 위험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권면은 가장 절박한 문제, 곧 구원받지 못한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라는 데 있다.

라이프(Life)와 룩(Look) 잡지에서 읽은 내용을 믿고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태도도 같은 비판을 받는다. 잡지가 전하는 위기를 자신의 가장 절박한 문제로 받아들이기 전에,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과 자신이 구원받는 일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늘과 땅은 사라져도 계속되는 불못의 형벌

궁극적인 파괴를 결정하는 분은 주님이시다. 전략공군사령부(SAC)나 끝없이 되풀이될 미사일 보복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보복 미사일을 쏘고, 그 미사일에 보복하기 위해 다시 미사일을 발사하고, 거기에 또 보복하는 상황을 아무리 거듭 상상해도 마지막 파괴는 인간의 손에 달려 있지 않다. “형제여, 주님께서 터뜨리시면 그대로 터집니다.”

그때 태양계가 붕괴한다. 태양이 사라지고 목성과 금성과 화성도 사라지며, 지구는 거대한 불길과 핵폭발 속에서 날아간다. 그 규모 앞에서는 15메가톤짜리 코발트 폭탄조차 바구니 밑에서 터지는 1페니짜리 손가락만 한 폭죽 소리처럼 들릴 만큼 미미하다. 인간의 무기가 얼마나 큰 파괴를 일으킬 수 있는지를 넘어, 지금 존재하는 하늘과 땅 자체가 주님 앞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백보좌에 앉으신 분의 면전에서는 땅과 하늘이 설 자리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하늘과 땅의 소멸이 불못에서 받는 고통의 끝을 뜻하지는 않는다. 바로 앞 절에 기록된 마귀와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형벌은 영원히 계속된다.

요한계시록 20:10 그들을 미혹하던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그곳에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영원무궁토록 밤낮 고통을 받으리라.

불과 유황 못에는 이미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있다. 마귀도 그곳에 던져지고, 이들의 고통은 밤낮으로 영원무궁토록 계속된다. 세계의 소멸이 형벌의 소멸을 뜻하지는 않는다.

사람을 위해 준비되지 않은 곳에서의 영원한 상실

불못의 형벌은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가뿐 아니라, 누구를 위해 준비되었는가도 살펴야 한다.

마태복음 25:41 그때에 왕이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도 말하기를 ‘너희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준비한” 곳이지, 사람을 위해 준비한 곳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지옥에 간다면 자신에게 맞지 않는 곳에서 영원을 보내게 된다. 그곳은 “우주의 영원한 정신병원”으로 묘사된다. 그 안의 사람은 끝내 그곳에 어울리지 못한 채 제자리를 잃고, 고국에서 쫓겨난 듯한 존재로 남는다.

구원받지 못한 상태를 ‘잃어버린’(lost)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어에서 가장 쓸쓸한 말 가운데 하나인 이 단어에는 ‘사랑받지 못하는’(unloved), ‘홀로 있는’(alone), ‘버림받은’(forsaken)의 외로움이 모두 담겨 있다. ‘잃어버린’이라는 말은 단지 잠시 길을 찾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다. 영원히 제자리를 잃고 어디에도 맞지 않으며, 함께할 이도 속할 곳도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죽은 사람은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곳도 아닌 곳에서 영원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그분과 함께할 처소를 예비하셨다. 옛 교리문답은 인간의 목적을 이렇게 표현한다.

인간의 으뜸가는 목표와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영원히 그분의 임재를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의 임재를 영원히 누리도록 지음받은 사람이, 마귀와 그의 천사들과 함께 불못에 들어간다. ‘잃어버린’이라는 말의 비참함은 그 간극에 있다.

양심을 따랐다는 말과 빛을 거절한 책임

그렇다면 최선을 다하고 양심을 따랐다는 말은 어떨까? 데이브 가너의 질문은 그런 사람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묻는다.

“최선을 다하고 양심을 따랐는데 결국 지옥에 간다면 누구를 탓하겠느냐?”

럭크만은 단호하게 대답한다. “당연히 자신을 탓해야지요, 이 어리석은 사람아.” 책임은 주어진 빛을 거절한 자신에게 있다. 말재주와 조롱으로 그 책임을 부정하게 만드는 사람을 “입만 살아 있는 약에 찌든 코미디언”이라고 부르며, 그런 말에 설득되거나 웃어넘기지 말라고 경고한다.

럭크만은 주어진 빛을 실제로 따르는 사람은 결국 갈보리에 이른다고 답하며, 로마서 2장과 3장을 읽어 보라고 촉구한다. 처음부터 성경을 거절해 놓고 진리를 찾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 말부터 돌아보아야 한다. 양심을 따르려고 얼마나 애썼다고 느끼는지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빛을 무엇 때문에 거절했는지가 문제이다.

교육학의 어느 기준으로 보아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생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진리가 무엇인지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7:17 아버지의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라고 하셨다. 그 말씀은 외면하면서 불교, 힌두교, 도교, 이슬람교, 장미십자회에서 진리를 찾는다면 편견 없는 탐구라고 할 수 없다. 성경을 처음부터 탐구 대상에서 제외한 선택에 이미 편견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영원한 형벌과 교단의 신앙고백

불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마귀와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있는 곳으로 간다. 앞서 읽은 요한계시록 20장 10절은 그 형벌을 “영원무궁토록 밤낮 고통을 받으리라.”라고 기록한다.

이 경고는 그 세 존재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요한계시록 14장 9–11절은 짐승과 그의 형상에게 경배하고 표를 받는 사람들에게도 영원한 형벌을 선포한다.

요한계시록 14:9 셋째 천사가 그들을 따라가며 큰 음성으로 말하기를 “누구든지 그 짐승과 그의 형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표를 자기 이마나 손에 받는다면 요한계시록 14:10 그 역시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되리니, 그것은 그의 진노의 잔에 혼합하지 않고 부은 것이니라. 또 그 사람은 거룩한 천사들의 면전과 어린양의 면전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통을 받으리니, 요한계시록 14:11 그 고통의 연기가 영원무궁토록 올라가리라. 그 짐승과 그의 형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요한계시록 20장이 마귀와 짐승과 거짓 선지자를 다룬다면, 14장은 짐승에게 경배하고 표를 받은 사람들을 다룬다. 이들의 고통에도 끝이나 쉼이 없다. 불못은 잠시 형벌을 겪고 빠져나오는 곳이 아니다.

이러한 성경의 심판 가르침과 함께 살펴볼 것이 교파의 신조에서 흔히 말하는 일반 부활과 일반 심판이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과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 여러 신앙 조항, 영국 국교회의 39개조에서 자주 접하는 가르침이며, 장로교·감리교·루터교·성공회·로마 가톨릭의 주요 신앙고백 신조도 이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럭크만은 구원받지 않았으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모두 일반 부활과 일반 심판을 믿는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교단이 공통으로 고백한다는 이유만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성경이 가르치는 심판과 대조하여 살펴야 한다.

신앙고백과 목회자 교육 사이의 간극

오늘날 세속화된 기독교에서는 일반 교인이 믿는 것이 산상설교와 주기도문, 황금률뿐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교회가 공식적으로 고백하는 내용과 교인이 실제로 믿는 내용 사이에 그만큼 큰 간극이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십자가 사건 이전에 주어진 이 말씀들을 문맥에서 떼어 내어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말씀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 어떤 문맥에서 주어진 말씀인지 살피지 않고 대상을 달리해 적용하는 일이 오늘날 성경 공부에서 흔하게 나타난다.

그런데도 주요 교회들은 신앙고백의 기준을 두고 교인들에게 그 기준을 따르도록 요구한다. 그렇다면 설교자를 양성하는 대학에도 그 신앙고백에 따른 교리적 기준이 있어야 한다. 강단에 설 사람을 가르치는 곳에서 지키지 않는 기준을 예배당에 앉은 교인들에게만 기대할 수는 없다.

럭크만은 당시까지 지난 30년 동안 거듭 실시된 갤럽 조사를 거론하며, 침례교·감리교·장로교·성공회·루터교와 다른 교단의 목회자를 양성하는 교육자들 자신이 성경의 10분의 9 이상을 거부했다고 말한다. 상당수는 그보다 더 많이 거부했다며, 그 정도를 99.9999%라는 수치로까지 표현한다. 그의 비판은 일부 교육자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상당수가 동정녀 탄생과 몸의 부활을 믿지 않고, 실제 천국과 실제 지옥도 믿지 않는다고 분명히 밝혔다는 것이다.

그런 교육자들에게 배운 지도자들이 교회를 이끈다면, 교인들에게 성경에 대한 확신을 기대하기 어렵다. 목회자를 양성하는 단계에서는 성경을 거절하면서, 정작 그들에게 배우는 교인들에게는 신앙고백의 기준을 지키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교인의 막연한 믿음만 탓할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들의 교육부터 돌아보아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교단이 일반 부활과 일반 심판을 믿는다고 선언해도 그 선언만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 같은 교단 안에서도 어떤 사람은 믿고 어떤 사람은 믿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의 믿음이 엇갈린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사건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심판이 이루어지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사람의 동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참되심이다.

로마서 3:4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실로, 하나님은 참되시나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라. 기록된 바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고 함과 같으니라.

사람이 믿든 거부하든 하나님은 참되시다. 심판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그 심판의 진행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줄 수는 없다.

백보좌 심판과 그리스도의 심판석은 다르다

요한계시록 20:12 또 내가 죽은 자들을 보니, 작은 자나 큰 자나 하나님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져 있으며 또 다른 책도 펴져 있는데 그것은 생명의 책이라. 죽은 자들은 자기들의 행위에 따라 그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더라.

백보좌 앞에서는 행위가 기록된 책들과 별도로 생명의 책이 열린다. 작은 자나 큰 자나 죽은 자들이 그 기록에 따라 심판받는다. 그러나 ‘행위를 심판한다’는 공통점만으로 이 자리를 그리스도의 심판석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서는 사람도, 심판의 결과도 다르다.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행위에 따라 보상을 받는다. 행위가 시험을 견디지 못하고 불타 버리면 손해를 입지만, 그 사람 자신은 구원을 받는다.

고린도전서 3:15 만일 어떤 사람의 일한 것이 불타 버리면 그는 손해를 당하리라. 그러나 그 자신은 구원을 받게 되지만 불에 의해서인 것처럼 그렇게 되리라.

일한 것이 불타도 그 사람 자신은 구원을 받는다. 보상을 잃는 것과 구원을 잃는 것은 다르다. 현 교회시대에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은 백보좌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선다.

에베소서 2:8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백보좌 앞에는 생명의 책에 이름이 있는 환난 성도들과 천년왕국 성도들이 선다. 구약 시대와 교회시대, 환난과 천년왕국에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도 마땅한 대가를 받으러 나온다. 이 대상들을 구분해야 한다. 모든 시대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마지막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과, 환난 성도와 천년왕국 성도도 그 자리에 선다는 설명은 함께 읽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심판석과 백보좌 심판의 대상과 결과 비교

요한계시록 20:13 바다도 그 안에 있던 죽은 자들을 넘겨주고 또 사망과 지옥도 그들 안에 있던 죽은 자들을 넘겨주니 그들이 각자 자기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으며

럭크만은 바다가 죽은 자들을 넘겨주는 장면을 아담 시대와 노아 시대의 사람들, 노아의 메시지를 거부한 사람들에게까지 연결한다. 사망과 지옥도 그 안의 죽은 자들을 내어놓는다. 아담 때부터 마지막까지, 오래전에 살았다는 이유로 이 결산에서 빠지는 사람은 없다.

요한계시록 20:14 사망과 지옥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요한계시록 20:15 누구든지 생명의 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사망과 지옥이 불못에 던져지는 것이 둘째 사망이다. 생명의 책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도 불못에 던져진다. 또 다른 결산을 남겨 둔 중간 단계가 아니라 최후의 심판이다.

과학과 철학에 기대어 마지막 심판을 피하려는 태도

모든 시대는 완전한 타락과 붕괴, 해체로 끝나고 최후의 심판에 이른다. 시대들의 종결에 관한 이 위대하고 참된 교리는 현대 교육자나 자유주의자에게 크나큰 공포가 된다. 럭크만은 당시 미국의 주요 교육자들이 하나같이 이 결말을 죽도록 두려워한다고 비판하며, 그 모습을 거친 비유로 묘사한다. 이 말씀을 읽으면 속이 메스껍고 마음이 약해져, 다리를 쓰지 못하는 사람이 의지할 목발을 찾듯 헐떡인다는 것이다. 한 손에 쥔 목발은 과학이고, 다른 손에 쥔 목발은 철학이다.

대학에서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이들이 정작 자기 목숨이 위태로울까 두려워하며 그 두 목발에 기대어 절뚝거린다. 럭크만이 그들을 겁에 질린 나약한 겁쟁이들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진실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면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까지 같은 곳으로 데려가기 때문이다. 자신이 심판을 두려워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학생들에게도 심판을 피하려는 태도를 가르친다.

마태복음 15:14 그대로 두라. 그들은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들이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고 하시더라.

가르치는 사람과 그를 따르는 사람은 결국 함께 구덩이에 빠진다. 인간 본성이 이르는 명백한 끝을 피하고 부정하며 달아나는 사람은 나약하고 비현실적이며, 누구를 어디로든 이끌 자격이 없다. 그러나 이 경고를 교육자들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 자신의 마음속 비밀이 심판받는 일도 마주해야 한다. 그 심판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선악을 가리지 않고 은밀한 행위까지 심판하실 것을 바라지 않고, 마음속 비밀이 드러날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면 여전히 진리에서 도망치는 겁쟁이이다. 그런 사람이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성경을 목발 삼아 의지한다고 비난하는 것은 자신보다 분별력 있는 사람들에게 지나친 말을 하는 것이다. 성경을 의지하는 사람을 비웃기 전에, 자신은 하나님의 심판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전도서 12:14 이는 하나님께서 선이든 악이든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것들을 심판하실 것임이라.

하나님의 심판은 악한 일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선한 일도, 남에게 감춘 일도 그 앞에 놓인다. 럭크만은 이 말씀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과학과 철학을 목발로 삼는다고 되받아친다. 그런 반론과 사상을 대할 때 살펴야 할 말씀은 다음과 같다.

디모데전서 6:20 오 디모데야, 네게 맡겨진 것을 지키고, 비속하고 허황된 말장난과 거짓되이 일컬어지는 과학의 반론을 피하라.

과학이라는 이름을 내세운다고 모든 반론이 참된 것은 아니다. 디모데는 맡겨진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컬어지는 과학의 반론을 피해야 했다. 그 반론을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할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

앞서 읽은 골로새서 2장 8절도 철학과 헛된 속임수가 사람을 노략질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를 따르는 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과 다르다. 성경을 믿는 사람을 비웃으면서 정작 자신은 그런 사상에 기대어 심판을 외면할 수 있다.

종교적 자유주의자들과 국제 사회주의자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믿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힘으로 지상천국을 이루려 한다. 하나님의 계시를 마주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큰 겁쟁이들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이 땅에 천국이 이루어지리라는 약속은 없다. 그분이 오신 뒤에도 이 땅의 천국은 천 년 동안 지속되는 일시적인 상태이며, 그 후에는 전면적인 해체가 기다린다.

이 전면적인 해체야말로 대기오염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해결책이라는 풍자는, 인간이 지금의 세상을 계속 개선하여 영구적인 천국으로 만들리라는 기대를 뒤집는다. 자기의 타락한 본성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이런 말씀을 부정적인 이야기로 여기고 거부한다.

모든 비밀이 드러나는 백보좌 심판

백보좌 심판에서는 죽은 자들이 책들에 기록된 행위에 따라 심판받는다. 그 대상에는 앞서 구분한 환난 성도와 천년왕국 성도도 포함된다. 영원이 시작되기 전 인류 역사에서 벌어질 가장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이 사건에서는 모든 은밀한 일이 공개적으로 드러난다. 사람들 앞에서 지켜 온 평판으로 자신을 감싸거나 비밀을 숨겨 둘 수 없다. 누구나 하나님께서 드러내시는 자신의 실제 모습으로 심판을 마주하게 된다.

마태복음 12:36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말하는 어떠한 빈말이라도 심판 날에는 그에 관하여 설명하게 되리라.

무심코 내뱉은 말도 결산에서 빠지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숨겨진 것이 드러나고 은밀히 행한 일이 알려질 것이라고도 말씀하셨다. 큰 잘못만 책임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시험을 통과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럭크만이 아는 한, 세상의 어떤 종교도 그 자리에서 영구적인 안전을 보장하거나 죄인을 가려 줄 수 없다. 유일한 해결책은 죄 없는 한 분의 인격과 사역 안에 자신을 숨기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이다. 그분의 생각과 동기와 행위만이 모든 것을 보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시선을 견딜 수 있다.

인간의 무력함과 배교로 끝나는 경륜

이 최후의 결산은 인간이 스스로 어떤 세상을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답도 드러낸다. 백보좌 심판은 인간의 타락에 뒤따르는 온갖 끔찍한 일 가운데 마지막 사건이다.

그 결말에서 드러나는 것은 인간의 전적 타락과 절대적인 무력함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지 않으시면 인간은 건설적인 일을 전혀 할 수 없다. 자신의 본성을 낙관하며 지상천국을 이루려 해도 타락의 결말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다. 럭크만은 여기서 말하는 전적 타락과 무력함을 칼빈주의적 견해와는 구별한다. 그의 초점은 인간이 하나님의 도움 없이 무엇인가 해낼 수 있느냐는 물음에 있다. 대답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계속 진보하고 진화하며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는 생각은 현대 교육과 과학을 떠받친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는 그와 반대의 교훈을 준다. 이 땅이 세워진 때부터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꾸준히 상승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시대에 따라 인간을 다루시는 구분을 경륜이라고 한다. 시대는 달라져도 실패는 반복된다. 모든 경륜은 배교로 끝난다.

그 실패는 혼란의 소용돌이와 까치 둥지, 증오와 공포, 거짓말과 도둑질, 정욕과 욕망, 배교가 뒤섞인 잡탕에 비유된다.

천 년 통치 뒤에 찾아오는 심판의 날

천 년 동안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신 뒤에도 반란이 일어난다는 사실은 그 실패를 마지막으로 드러낸다. 통치가 끝나면, 사람이 내뱉은 빈말까지 설명해야 하는 심판의 날이 온다.

성경은 이 심판의 날을 거듭 말한다. 그렇다고 모든 부활과 심판을 교파 간행물의 ‘일반 부활’과 ‘일반 심판’이라는 이름으로 한데 묶을 수는 없다. 럭크만은 그런 개념을 신학교의 모닥불에서 다른 신학교의 모닥불로 전해 내려온 신화 같은 전설에 빗댄다. 그가 거부하는 것은 시대와 대상을 구별하지 않는 설명이지, 마지막 심판 자체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천 년 통치 뒤에는 분명히 최후의 결산이 있다.

베드로후서는 지금 당장 모든 형벌이 집행되지 않는다고 해서 심판이 사라진 것은 아님을 보여 준다.

베드로후서 2:9 주께서는 어떻게 경건한 자들을 시험에서 구해 내시고 불의한 자들을 형벌에 처할 심판의 날까지 가두실 것을 아시느니라.

주께서는 경건한 자들을 시험에서 구해 내실 줄 아시며, 불의한 자들을 심판의 날까지 가두실 줄도 아신다. 죄를 지은 천사들도 예외가 아니다.

베드로후서 2:4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천사들조차 아끼지 않으시고 지옥에 던져서 흑암의 사슬에 내어주어 심판 때까지 가두어 두셨으며

그 천사들은 흑암의 사슬에 갇혀 심판 때를 기다린다. 현재의 하늘들과 땅도 정해진 날을 위해 간수되어 있다.

베드로후서 3:7 그러나 현재 있는 하늘들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보존되어 있으되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에 불사르려고 간수되어진 것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존된다는 것은 끝없이 존속한다는 뜻이 아니다.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에 불사르기 위해 보존되는 것이다. 불의한 자들과 죄를 지은 천사들, 현재의 하늘들과 땅 모두에게 정해진 결말이 있다.

그날을 앞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준비이다. 옛 노래에 담긴 물음도 자신에게 돌아온다.

큰 날이 다가옵니다. 큰 날이 다가옵니다. 여러분은 그 심판 날을 맞을 준비가 되었습니까?

다니엘의 보좌와 펼쳐지는 책들

다니엘 7장은 보좌 앞에서 심판이 준비되는 모습을 보여 준다. 9절에서 다니엘은 보좌들이 넘어져 있고 옛날부터 계신 분이 앉아 계신 장면을 본다.

다니엘 7:9 ○ 내가 보았더니 보좌들이 넘어져 있고, 옛날부터 계신 분이 앉으셨는데, 그분의 옷은 눈같이 희고 그분의 머리털은 순전한 양모 같더라. 그분의 보좌는 불타는 불꽃 같고 그 바퀴들은 타는 불 같더라.

눈같이 흰 옷과 순전한 양모 같은 머리털, 불타는 불꽃 같은 보좌와 타는 불 같은 바퀴들이 보인다. 이어지는 장면은 그 보좌 앞의 심판을 보여 준다.

다니엘 7:10 불 같은 강이 흘러 그분 앞에서 나오니 수백만 명이 그분을 섬기고 수천만 명이 그분 앞에 섰는데, 심판이 준비되었고 그 책들이 펼쳐졌더라.

여기서 주목할 표현은 ‘심판이 준비되었고’와 ‘그 책들이 펼쳐졌더라’이다. 영어 본문에서 심판 앞에 붙은 정관사는 막연한 심판 일반이 아니라 그 심판을 가리킨다.

책들이 펼쳐진다는 것은 기록에 따른 결산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럭크만은 이를 장부 검사와 재고 조사에 빗댄다. 실제 내역을 확인하고 다시 평가하는 날이다. 가장 위대한 세무 조사관이 장부를 살피시는 모습처럼, 그 심판은 철저하다.

요한계시록 20장 12절로 돌아오면 같은 표현이 눈에 들어온다. 하나님 앞에 사람들이 서 있고, 책들이 펼쳐져 있다. 그와 별도로 생명의 책도 열린다. 행위에 관한 기록과 생명의 책을 구별해 읽어야 한다. 죽은 자들은 책들에 기록된 행위대로 심판받으며, 15절은 생명의 책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이 불못에 던져진다고 밝힌다.

백보좌 앞에 펼쳐지는 행위의 책들과 생명의 책의 역할

행위대로 받는 심판과 은혜로 받는 구원

여기서 행위대로 심판받는 대상은 ‘죽은 자들’이다. 지금 교회시대에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나 민족들을 가리키는 말씀이 아니다. 이 대상을 놓치면 마지막 심판의 기준을 오늘날 구원받는 방법으로 잘못 가져오게 된다.

자기 행위를 의지하여 구원받으려 한다면 죽은 상태로 남게 된다.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는 이단의 말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결국 자기 행위에 따라 심판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고의로 알려 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지식이 부족한 것과 다르다. 말씀을 외면하고 자신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데에는 어리석음과 악함, 게으름과 무관심뿐 아니라 육신적인 욕망과 탐욕, 교만과 자기 의가 얽혀 있다.

고린도후서 11:15 그러므로 사탄의 종들이 의의 종으로 가장한다 하더라도 큰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종말은 그들의 행위대로 될 것이니라.

고린도후서는 의의 종으로 가장하는 사탄의 종들을 두고 “그들의 종말은 그들의 행위대로 될 것이니라.”라고 말한다. 지금 이 시대에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는 사역자들에게도 이 경고가 적용된다.

로마서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그분 앞에 의롭게 될 육체가 없나니 이는 율법을 통해서는 죄의 깨달음이 있음이니라.

율법은 사람을 의롭게 만드는 수단이 아니라 죄를 깨닫게 한다. 그 행위를 하나님 앞에 내세워 의롭다는 판정을 얻으려 해서는 안 된다. 앞서 읽은 에베소서 2장 8절은 지금 이 시대의 구원을 은혜와 믿음, 하나님의 선물로 설명한다. 바로 다음 절은 그 선물에 자기 공로를 덧붙일 수 없음을 밝힌다.

에베소서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선물을 받는 것과 자기 행위의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다르다. 구원이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누구도 자기 공로를 자랑할 수 없다. 디도서도 같은 근거를 밝힌다.

디도서 3:5 우리가 행한 의로운 행위에 의하지 않고 그의 자비하심에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으니

죄를 깨달은 사람이 내세울 것은 자신의 의로운 행위가 아니다. 구원의 근거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있다.

다른 시대의 의무를 지금의 구원 조건으로 삼지 말라

이 구분은 다른 시대의 말씀을 적용할 때에도 필요하다. 지금 교회시대에 사는 사람은 환난 중 적그리스도의 지배 아래 놓인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아니다. 셀라 페트라에 숨어 만나를 먹는 처지도 아니다. 그들에게 적용되는 안식일을 지금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우는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

또한 지금은 이방인들이 해마다 세 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왕을 뵈어야 하는 천년왕국도 아니다. 그때 민족들은 다윗의 보좌에 앉아 계신 살아 계신 구주께 경의를 표해야 한다. 스카랴 14장은 예루살렘을 치러 온 민족들 가운데 남은 자들이 해마다 왕께 경배하고 장막절을 지키러 올라온다고 기록한다.

스카랴 14:16 ○ 예루살렘을 치러 온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남아 있는 자도 각기 그 왕, 만군의 주께 경배하러, 또 장막절을 지키려고 해마다 올라올 것이라.

앞서 읽은 스카랴 14장 17–19절은 이를 거부하는 민족들에게 비가 내리지 않고 재앙이 따른다고 밝힌다. 왕이 예루살렘에서 다스리시는 때의 의무를 지금의 구원 조건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교회시대의 구원과 환난 및 천년왕국의 대상과 의무 구분

같은 이유로 산상설교를 내세워 자기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맞서서도 안 된다. 사람에게뿐 아니라 하나님께도 산상설교를 자기 의의 근거로 들이밀 수는 없다. 필요한 것은 육신적이고 교만하며 독선적인 태도를 버리는 일이다. 지옥으로 향하면서도 자기 의를 붙들고 있다면, 어디에서든 무릎을 꿇고 죄인으로서 자비를 구해야 한다. 누가복음의 세리는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는 대신, 차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한 채 하나님께 자비를 구한다.

누가복음 18:13 그런데 그 세리는 멀리 떨어져 서서 차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하더라.

세리는 자기 행위를 자랑하지 않았다. 죄인인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구했다. 구원이 하나님의 자비에 달려 있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그렇게 나아가야 한다.

오래 참으시는 지금과 모든 은밀한 것이 드러날 날

지금은 세상이 지금껏 경험한 것 가운데 하나님께서 가장 오래 참으시는 시대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거듭, 거듭, 또 거듭 멸하지 않고 두셨다. 노아 시대의 세상을 참으셨던 것보다 더 오래 두셨으며, 자기 아들을 위하여 그렇게 하셨다. 그러나 이 시대가 끝나면 정말 끝이다.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받으려 한다면, 지금 주어진 기회를 미루어서는 안 된다.

고린도후서 6:2 (말씀하시기를 “기뻐 받아들여진 때에 내가 네 말을 들었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도다.” 하였으니, 보라, 지금이 기뻐 받아들여진 때요, 보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다. 그러나 지금 오래 참으신다는 사실이 앞으로 심판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일들이 이루어질 때에는 사람의 행위와 감추어 둔 모든 것이 드러난다.

공개적으로 드러난 행동만이 아니라 남에게 숨겨 둔 일까지, 선하든 악하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럭크만은 그날의 엄중함을 생각하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얼마나 무서운 심판이 되겠습니까!”라고 외친다. 그러면서 이것은 경솔한 말이나 농담도, 주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말도 아니라고 덧붙인다. 두려운 심판을 생각하며 진심으로 하나님을 부르는 외침이다.

그날에는 사람들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짖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해변에 상륙할 때 들었던 것보다 더 많은 외침이 터져 나올 것이다. 셰르부르, 에니웨토크, 사이판, 타라와, 오키나와, 이오지마의 전장을 떠올려 생각해 보자. 죽음을 앞둔 보병이 더는 몇 마디밖에 할 수 없고, 마침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두 단어로 줄어들면 무엇이 남을까? “오,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는 외침이다. 사람이 그 지경에 이르면 달리 할 말이 없다. 그러나 하늘과 땅이 사라진 뒤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은 그 전장에서 겪는 두려움보다도 더 두려운 순간이다.

하늘과 땅이 사라진 뒤의 부활

백보좌 앞에 선 사람에게는 발밑의 땅조차 남아 있지 않다. 하늘과 땅이 사라진 뒤의 심판을, 럭크만은 사람들이 우주 공간에 서 있는 모습으로 묘사한다. 지금까지 당연히 딛고 살던 세계 자체가 없어졌으므로, 세상의 어떤 기반에도 의지할 수 없다.

그때 죽은 자들이 무덤과 사망과 지옥에서 나오는 부활은 분명히 있다. 다만 부활과 하늘을 통과해 위로 올라가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첫 번째 부활 때 하늘을 통과해 올라가는 일과 이 장면은 구별해야 한다. 여기서는 이미 하늘과 땅이 사라지고 우주의 구성 요소들이 녹아내렸다. 지금의 세계가 그대로 남아 있고 사람들이 그 사이로 올라간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종교적 배경과 사회적 지위도 보호가 되지 않는다

어떤 종교에 속했는지, 누구에게 배웠는지, 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한 사람이었는지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럭크만은 로마 가톨릭 사제와 주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 몰몬 장로, 캠벨파 설교자들을 직접 상대했다고 밝힌다. 당시 자신의 말을 듣던 사람들의 교사들이 사용한 책들도 시간을 들여 비평했다. 그들의 종교적 배경을 모르고 하는 경고가 아니며, 개인적인 감정이나 배경을 고려해 경고를 거두지도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32도 프리메이슨이든, 자기가 사는 동네의 거물이든 다르지 않다. 은행가나 의사, 변호사라는 직함도 보호가 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증인이시며, 하늘과 땅이 사라져도 하나님의 진리는 남는다. 세상에서 누리던 영향력으로 그 진리를 바꾸거나 심판을 피할 수는 없다.

그날에는 자동차도, 모터보트도, 비행기도 사라진다. 은행 예금과 보유 주식은 물론, 자신의 사업과 직업을 뒷받침하던 고객과 환자들도 사라진다. 학위 기록도 없으며, 짓밟힌 사람들을 보호하고 억압받는 대중을 구하려 애쓴 인도주의적 활동의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재산과 학력, 사회적 공헌까지 자신을 중요한 사람으로 여기게 했던 그 무엇도 내세울 수 없다.

사람은 발밑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선다. 그분의 광채는 힘차게 빛나는 태양보다도 더 찬란하다. 그 앞에서 책들이 펼쳐지고, 각 사람은 자기 삶을 해명해야 한다.

답변을 요구하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다. 경고를 전하는 설교자를 상대하는 자리가 아니다. 작은 자나 큰 자나 그 앞에 서서 자기 삶에 대해 답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모든 사정을 이해해 주기만 하는 분이 아니다. 자비만 남겨 두고 거룩함과 의를 지워 버리면, 한쪽으로 치우치고 도덕적으로 뒤틀린 신을 숭배하게 된다.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하나님을 생각해 왔기에, 그분 앞에서 결산해야 한다는 경고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프랑스 사람들이 하는 말 가운데 이런 표현이 있다.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은 모든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

이 말을 하나님께 적용하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사정을 모두 이해하시므로 자동으로 용서하셔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그 생각은 하나님의 거룩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오면서 익힌 생각이다. 그런 교육 속에서는 죄 없으신 하나님의 거룩함과 순결과 의가 오히려 낯설게 느껴진다.

하나님 앞에서는 은밀한 죄도 드러난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거룩함과 순결과 의가 지금은 낯설더라도, 심판 앞에서는 자신이 어떤 하나님을 마주하고 있는지 알게 된다. 그분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뿐 아니라 사람들이 감추어 둔 죄와 마음속 생각까지 아신다.

시편 90:8 주께서 우리의 죄악들을 주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빛 가운데 두셨으니

사람에게 숨긴 죄도 하나님의 얼굴빛 가운데 있다. 로마서는 그 은밀한 일들을 심판하실 분과 심판의 날을 밝힌다.

로마서 2:16 이런 일은 하나님께서 나의 복음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들의 은밀한 것들을 심판하실 그 날에 있으리라.

바울이 전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심판도 말한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끝내 비밀로 남은 일도 그 대상이다. 그러면 어디로 숨을 수 있을까?

욥기 34:22 죄악의 일꾼들에게는 자신들을 숨길 수 있는 암흑도 없고 죽음의 그림자도 없도다.

암흑도 죽음의 그림자도 피난처가 되지 못한다. 장소를 옮겨 숨을 수 없고, 앞서 읽은 마태복음 12장 36절처럼 무심코 한 말까지 설명해야 한다.

자신이 잊어버렸다고 해서 책임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다윗은 일상의 움직임과 생각, 입에서 나오는 말까지 하나님께서 모두 아신다고 고백한다.

시편 139:2 주께서는 나의 앉고 서는 것을 아시며 나의 생각을 멀리서도 이해하시나이다. 시편 139:4 보소서, 오 주여, 주께서 모두 아시나니 알지 못하시는 내 입의 말은 한마디도 없나이다.

행동과 생각과 말이 모두 그 앎 안에 있다. 사람에게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생각도 하나님께 감추어져 있지 않다.

럭크만은 이 말씀을 적용하며 “성경의 기록이 옳다면”이라는 조건문을 사용하지만, 곧바로 자신의 마음에는 아무런 의심도 없다고 밝힌다. 성경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질문이 아니라, 그 기록이 옳다는 확신 속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라는 요청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지금껏 품은 모든 생각을 아시고, 손을 댄 모든 곳을 보셨다. 어떤 나이트클럽이나 카바레에서도 조명이 충분히 어둡거나, 연기가 충분히 자욱하거나, 음악이 충분히 시끄러워서 은밀한 죄를 가려 준 적은 없다. 다른 사람의 눈과 귀를 막을 수는 있어도 하나님께 죄를 숨길 수는 없다.

예레미야 16:17 이는 내 눈이 그들의 모든 길들 위에 있음이니 그들이 내 얼굴로부터 숨지 못하며 그들의 죄악이 내 눈에서 감춰지지 못하리라.

‘모든 길들’ 위에 있는 하나님의 눈을 피할 장소는 없다. 어두운 나이트클럽이나 카바레도 다르지 않다.

럭크만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함과 모든 것을 아시는 능력을 가볍게 여기게 된 책임을 사상과 문학, 교육에 돌리며 강하게 비판한다. 엥겔스, 마르크스, 다윈, 톨스토이, 드 모파상, 헤밍웨이, 쇼펜하우어, 칼라일, 니체, 토이펠스드뢰크(Teufelsdröckh), 라이프니츠를 열거하고, 호러스 맨은 이름을 거듭 불러 지목한다. 이어 조반니 젠틸레, 성교육 정보·상담 단체인 SIECUS, 미국 전국교육협회까지 같은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들이 미국인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하나님은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아차릴 지각조차 없는 분이라고 믿게 만들었다는 질책이다. 럭크만은 이를 그들이 미국에 부린 가장 큰 속임수이자 가장 큰 바보짓이라고 부른다.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도록 배웠든, 그 생각 때문에 하나님의 눈이 어두워지는 것은 아니다.

성경이 옳다면, 사람의 머릿속을 스친 생각 가운데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도서관에 새겨지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심판 때 책들이 펼쳐지는 장면은 모든 기록이 삼차원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에 입체음향까지 갖추어 재생되는 모습에 비유된다. 흐릿한 기억이나 일부만 남은 기록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가 그 사람의 실제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남에게 알려진 모습뿐 아니라 감추어 둔 생각과 행동까지 공개된다면, 자기 삶이 이웃의 심사조차 통과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그런 자신감은 독선적이고 위선적인 어리석음이다. 지난 20년 동안 마음과 상상을 스쳐 간 모든 생각이 그 영화에 담긴다고 생각해 보자. 은밀한 동기까지 백일하에 드러나 공개적으로 심판받는다면, 자기 자녀나 어머니의 심사조차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심판 앞에서 보호가 되지 않는 세상의 기반과 드러나는 삶의 기록

럭크만은 직설적인 표현을 양해해 달라고 하면서도, 그렇게 낱낱이 드러나고도 괜찮으리라 여기는 사람은 남녀를 막론하고 제정신이 아닌 병든 사람이라고 질책한다. 이 경고 앞에서는 유명한 사상가나 교육 단체의 잘못만을 생각할 수 없다. 자기 자신의 삶도 같은 빛 아래 놓인다.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과 생각의 순종

역대기상 28장에서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기라고 당부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섬김뿐 아니라 그 마음까지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이다.

역대기상 28:9 ○ 너,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을 알라. 그리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그분을 섬기라. 주께서는 모든 마음을 살피시고 생각의 모든 상상을 아시나니, 만일 네가 그분을 찾으면 그가 너를 만나실 것이나, 만일 네가 그분을 버리면 그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그분은 모든 마음과 생각의 상상을 살피신다. 찾으면 만나 주시지만 버리면 영원히 버리시겠다는 경고도 함께 주어진다. 남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보였는지만 내세워서는 그 앞에 설 수 없다. 그날에는 누가 홀로 의로운지 드러날 것이다.

바울도 주께서 오셔서 감추어진 것들과 마음의 의도를 드러내실 때까지 성급히 판단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고린도전서 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주께서 오시기까지는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 주께서 어두움에 감추어진 것들에 빛을 비추시고 마음의 의도들을 나타내시리라. 그때서야 하나님께로부터 각 사람이 칭찬을 받으리라.

지금 사람들에게 받는 평가는 마지막 판단이 아니다. 주님께서 숨겨진 행동과 마음의 의도까지 드러내신 뒤에야 각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는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영적 싸움은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뿐 아니라 생각과 상상도 다룬다.

고린도후서 10:5 여러 가지 구상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거역하여 스스로 추켜세운 모든 높은 것들을 무너뜨리며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니

남이 보지 못하는 생각도 그리스도께 복종시켜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거역하는 구상과 스스로 높아지는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일은, 장차 드러날 내면을 지금 다루는 영적 싸움이다.

사상과 문학, 권력과 명성도 답해야 한다

세상에서 높이 평가받은 작가와 사상가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의 가르침과 행동에 대해 답해야 한다. 럭크만은 여러 인물을 차례로 호명하며, 각자가 무엇에 대해 답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지적한다.

인물럭크만이 심판 앞에서 답해야 한다고 지적한 내용
마크 트웨인실천적 무신론
에밋 폭스·에밀리 캐디유니티와 유니테리언주의를 가르친 일과, 이를 두고 한 불경한 신성모독이라는 비판
존 듀이컬럼비아대학교에서 교육자로 나섰던 일과 인간의 앎에 대한 입장
칼 샌드버그빌리 선데이의 사역을 비방한 일
앨프리드 테니슨 경이신론
에드거 앨런 포와 스티븐 포스터술에 취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다는 비판

럭크만이 전하는 일화에서 존 듀이는 죽기 전 책상에 앉아 펜으로 글을 휘갈겨 썼다. 인간이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만이 유일한 진리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떻게 컬럼비아대학교의 교육자로 나서 다른 사람을 가르쳤는가? 럭크만은 그 모순에 대해서도 하나님 앞에서 답해야 한다고 질책한다.

새커리, 러셀, 몰리에르, 첼리니, H. G. 웰스, 디킨스, 에드거 앨런 포도 호명된다. 아나톨 프랑스, 오 헨리, 반 룬, 위고, 타킹턴, 톨스토이, 뒤마, 호메로스에게도 같은 경고가 향한다. 위대한 작가로 존경받았다는 이유로 자신의 글과 그 글에 실었던 권위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여기서 겨냥하는 것은 문학적 명성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위에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는 태도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경쟁하고 그 말씀을 무너뜨리려 하며, 그 자리에 말씀의 모방물을 세우려 했던 작가들은 일어나 답해야 한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보다 자신을 더 높은 권위로 세우려 했던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라블레와 발자크에 대한 비판은 작품의 도덕적 내용과 그 영향에 집중된다. 럭크만은 두 사람의 문학을 추잡하고 음란하다고 규정하며, 그 작품들이 휴 헤프너와 조 플레처, 일부 상황윤리론자들의 작업에 앞서 길을 놓았다고 비판한다. 이들에게 묻는 책임에는 자신이 쓴 문학뿐 아니라 그것이 뒤에 미친 영향도 포함된다.

심판 앞에 설 사람은 작가와 사상가만이 아니다. 샤를마뉴와 나폴레옹, 에이브러햄 링컨과 조지 워싱턴 같은 통치자와 정치 지도자, 제인 맨스필드와 클라크 게이블, 에롤 플린 같은 유명 배우도 그 자리에 선다. 월터 루서, ‘교황 조니’라고 불리는 인물, 스펠먼 추기경과 풀턴 쉰도 거론된다. 세상이 기억하는 온갖 영광을 지닌 사람들을 보게 되겠지만, 그날 드러나는 것은 주께서 아셨던 그들의 모습이다. 정치적 위상이나 대중의 사랑, 종교적 직함으로도 마음속까지 아시는 주님 앞에서 자신을 가릴 수 없다.

사람들의 평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그날은 다른 사람들의 실상이 드러나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는 날이 아니다. 자신도 주님께서 보시는 모습 그대로 마주하게 된다. 지금까지 자기 눈으로 판단해 온 모습이나 함께 어울리던 사람들, 친구와 친척들의 눈에 비친 모습은 최종적인 평가 기준이 되지 못한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저울의 판정은 이 경고를 선명하게 보여 준다.

다니엘 5:27 테켈은 왕을 저울에 달았더니 부족함이 나타났다 함이요,

왕에게 내려진 그 판정 앞에서 자신도 돌아보아야 한다. 가족과 친구, 친척과 사업 관계자들에게는 부족함 없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배교한 종교 체계 안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인정을 받는 것과 하나님의 저울에 달리는 것은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맡기실 분을 이미 정하셨다.

사도행전 17:31 이는 하나님께서 선정하신 그 사람을 통하여 의로 세상을 심판하실 한 날을 정해 놓으시고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시어 모든 사람에게 확증해 주셨음이라.”고 하니라.

그날의 기준은 하나님께서 선정하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일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확증이다. 주변에서 존경받는 사람이나 종교적 권위자와 자신을 비교할 자리가 아니다. 럭크만도 자신 역시 다른 사람들과 같은 죄인이므로 기준이 될 수 없다고 밝힌다.

럭크만은 부처와 노자, ‘마오쩌’로 언급한 인물, 공자를 가련하고 타락한 못된 자들이라고 비난하고, 무함마드에게는 뇌전증 환자라는 표현까지 사용한다. 이들 역시 심판의 비교 기준이 아니라는 질책이다. 다른 죄인보다 자신이 상대적으로 낫다고 여기는 것으로는 그날을 준비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잘못을 고칠 필요도, 누구에게 용서를 구할 필요도 없으셨으며, 이 땅에 사시는 동안 단 하나의 죄도 고백할 필요가 없으셨다. 바로 그분과 함께 저울에 달릴 때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지 알게 된다.

유명인과 평범한 사람 모두 자기 삶을 해명할 때

럭크만은 다시 구체적인 이름과 그들이 답해야 할 문제를 짚는다. 스피노자는 구약을 거부한 사람으로, 산타야나는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을 거부한 사람으로, 마키아벨리는 권력 정치를 내세운 사람으로 지목한다. A. J. 크로닌과 로이드 더글러스, 루터 와이글의 실상도 드러날 것이라며, 이들을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하나님께 대항하며 성경을 부인하는 죄인들이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다윈을 향해서는 원숭이 차림으로 어딘가 덤불에 걸린 꼬리를 빼내려고 애쓰는 모습을 그리며 조롱한다. 볼테르와 루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비웃었던 무신론자들이라는 비판을 가한다. 문학과 사상, 저술로 얻은 명성이 아무리 커도 각자는 일어서서 자신의 삶에 대해 답해야 한다.

호명은 니체와 샬럿 브론테, 스타인벡과 쿠퍼, 잭 런던, 키플링, 츠바이크와 휘트먼, 헤밍웨이와 오닐, 홉스와 제임스 조이스로 이어진다. 와일리와 스펜서, 골드스미스와 D. H. 로런스, 싱클레어 루이스와 도스 패소스, 토머스 울프, 헨리 제임스, 제임스 존스와 노먼 메일러까지 그 자리에 서야 한다.

유명인의 이름을 부르던 문답에는 곧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나란히 등장한다.

노먼 메일러는 어디 있습니까? 심판받으러 갔습니다. 우편배달부는 어디 있습니까? 심판받으러 갔습니다. 우유배달부는 어디 있습니까? 심판받으러 갔습니다.

‘그 늙은 린든’은 어디로 갔는가? 폴레트 고다르는, 아이젠하워는 어떻게 되었는가? 돌아오는 답은 같다. 심판받으러 갔다는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이제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이 문답은 사망 소식을 전하려는 것이 아니다. 유명인과 평범한 배달부를 나란히 부르며, 누구나 자기 삶에 대해 답해야 한다는 경고를 전한다.

지금 자신은 어느 심판 앞에 서게 될까?

아이젠하워와 패튼, 리 장군과 잭슨 장군도 이 질문을 피하지 못한다. 럭크만의 문답에서 이들 역시 심판받으러 갔다. 이름과 지위가 보호가 되지 않는다면, 자신은 어느 자리에 서게 될까?

이 시대에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첫째 부활 때 올라가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선다. 이미 구원받은 뒤 그리스도를 어떻게 섬겼는지 평가받는 자리이다. 구원을 얻기 위해 쌓은 공로를 검사받는 것이 아니다.

반면 이 시대에 그리스도를 거부한 사람은 백보좌 심판 앞에 선다. 하나님의 자녀를 덮는 완전한 의는 자기 행위로 얻는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씻기고 은혜로 전가받는 의이다. 지금 교회시대에 사는 사람은 이 차이를 알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 앞서 구분했듯 백보좌에는 환난 성도와 천년왕국 성도도 서므로, 다른 시대의 사람들까지 모두 같은 처지로 묶어서는 안 된다.

요한계시록 20장 12절에는 행위가 기록된 책들과 생명의 책이 함께 열린다. 지금 이 시대에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사람은 그 생명의 책에 이름이 없다. 미래의 사건을 자세히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금 자신의 죄가 해결되었는지가 중요하다.

구원을 미루는 사람에게 필요한 두려움과 은혜

도덕적으로 살았다는 자신감도 구원을 대신할 수 없다. 옛 노래는 자기 의를 의지하는 사람과 구원을 나중으로 미루는 사람을 같은 심판 앞에 세운다.

도덕적인 사람이 심판받으러 왔으나, 자기 의라는 누더기로는 안 되었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도 도덕적인 사람으로 통했네. 구원을 소홀히 여긴 그 혼은 ‘오늘 밤은 말고, 나중에 구원받겠어. 지금은 구원을 생각할 시간이 없어’라 했네. 마침내 그들은 죽을 시간은 찾았네. 아, 잃어버린 자들은 자신의 운명을 듣고 바위와 산들을 향해 외쳤네. 그들은 기도했으나, 그 기도는 너무 늦었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도 도덕적인 사람으로 통했다. 좋은 평판이 하나님 앞에 설 의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구원을 생각할 시간이 없다고 미루다가 마침내 죽을 시간은 찾았다는 가사는, 죽음을 뒤로 미룰 수 없다는 사실을 찌른다. 운명을 듣고 바위와 산들을 향해 외치며 기도할 때는 이미 늦었다.

“럭크만 형제님, 저를 겁주려는 겁니까?”라는 가상의 질문에 럭크만은 주저하지 않고 답한다. “그렇습니다. 겁을 줘서 여러분에게서 지옥, H-E-L-L을 몰아내려는 겁니다.” 지옥의 철자를 하나씩 짚는 말장난까지 동원하는 이유는 구원을 더 미루지 않도록 재촉하기 위해서이다. 문제는 두려움을 느끼는 데 있지 않다. 두려워해야 할 일을 앞에 두고도 두려워할 분별력이 없는 데 있다.

히브리서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한 일들에 대해 하나님의 경고하심을 받고 두려움으로 행하여 방주를 예비함으로 자기 집안을 구원하였으니, 그것을 통하여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에 의한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노아의 두려움은 그를 무력하게 만들지 않았다. 아직 보지 못한 일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 실제로 방주를 예비하게 했다. 그 행동으로 자기 집안을 구원했다.

유다서 1:23 다른 자들은 불 속에서 끌어내어 두려움으로 구원하되, 육신으로 더럽혀진 그 옷조차도 증오하라.

유다서는 불 속에서 다른 사람을 끌어내되 육신으로 더럽혀진 옷조차 증오하라고 말한다. 심판을 경고하는 목적은 사람을 불 속에 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구원하는 데 있다.

그러나 두려움이 구원의 마지막은 아니다. 이어지는 노래는 두려움을 깨닫게 하는 은혜에서, 그 두려움을 없애 주는 은혜로 나아간다.

내 마음에 두려움을 가르쳐 준 것도 은혜요, 내 두려움을 없애 준 것도 은혜였네. 처음 믿던 그때, 그 은혜가 얼마나 귀하게 느껴졌던가.

심판을 두려워하게 하는 은혜와 믿을 때 두려움을 없애 주는 은혜는 서로 반대되지 않는다. 위험을 깨닫고 믿음에 이른 사람에게는, 자신을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한 은혜가 더욱 귀하다.

심판을 깨닫게 하는 두려움과 믿는 사람에게 주어진 담대함의 관계

하늘의 장부에 남은 죄의 빚과 구원 간증

럭크만이 부르곤 했다는 옛 찬송은 심판 앞에 펼쳐질 책들을 떠올리게 한다. 하늘의 장부 맨 위에는 자신의 이름이, 그 아래에는 아직 용서받지 못한 죄들이 적혀 있다. 찬송은 날마다 늘어 가던 그 빚이 어떻게 청산되었는지를 노래한다.

내가 이 땅에 살던 어느 때, 하늘의 장부에는 아직 용서받지 못한 죄의 묵은 빚이 남아 있었네. 맨 위에는 내 이름, 그 아래에는 많은 항목이 있었네. 장부를 맡은 이에게 가서 오래전에 청산했네. 오래전에, 오래전에. 그렇지, 묵은 빚은 오래전에 청산되었고, 오늘 내 기록은 깨끗하네. 오래전 그 빚을 청산할 때 그분이 내 죄를 씻어 주셨기 때문이네. 묵은 빚은 컸고 날마다 늘어 갔네. 늘 죄를 지으면서 갚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네. 그러나 앞날을 내다보고 고통과 비참함을 보았을 때, 청산하겠다고 말했고, 오래전에 그 빚을 청산했네.

날마다 죄를 지으면서 갚지 못하던 빚이 청산되었다. 기록이 깨끗해진 것은 처음부터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분이 죄를 씻어 주셨기 때문이다. “오래전에”라는 후렴은 그 일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확신을 거듭 노래한다. 럭크만에게도 그때가 있었다.

1949년 3월 14일 오전 10시에, 저는 제 빚을 청산했습니다.

자신이 빚을 청산했다는 말은 죄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고백이다. 그 값을 스스로 마련했다는 뜻은 아니다. 곧바로 이 말이 뒤따른다. “그 돈은 다른 분의 돈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빚을 갚을 돈이 없었다. 완전히 파산한 상태였고, 훔치기는커녕 빌릴 수도 없어 구걸해야 했다고 고백한다. 구원을 살 실제 돈이 필요했다는 말이 아니다.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도, 하나님 앞에 내세울 의도 없었음을 빚에 빗댄 것이다. 필요한 것은 다른 분에게서 받아야 했다.

이사야 64:6 그러나 우리는 다 불결한 것 같고,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걸레 같으며, 또 우리는 다 잎사귀처럼 시들며 우리의 죄악들은 바람처럼 우리를 옮겨갔나이다.

자신이 가진 의로 하나님 앞의 빚을 갚으려 해도, 그 의 자체가 더러운 걸레 같다면 구원의 밑천이 될 수 없다. 럭크만은 그런 자신을 길가에 앉아 적선을 기다리던 눈먼 바디매오에 빗댄다.

마가복음 10:46 ○ 그리고 그들이 여리코에 갔더라. 주께서 제자들과 많은 무리와 함께 여리코에서 나가실 때, 디매오의 아들 소경 바디매오가 대로에 앉아서 구걸하더라. 마가복음 10:51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고 하시니, 그 소경이 말씀드리기를 “주여,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더라.

럭크만은 길가의 바디매오처럼 아무것도 내세울 수 없는 처지에서 주님께 구원을 구했다. “주여,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바디매오가 자신에게 없는 시력을 구했듯, 그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갔다.

마가복음 10:50 그가 겉옷을 던져 버리고 일어나 예수께로 오더라.

겉옷을 던지고 주님께 나아가는 모습에, 자신의 파산 상태를 인정하고 구원을 구한 경험을 겹쳐 놓는다.

죄의 빚이 갚아졌음을 보여 주는 말씀

이 간증에서 자신에게 돌려 물을 질문이 나온다. 자신의 빚은 갚아졌는가? 누가, 언제 갚았는가? 얼마였으며, 갚아졌다는 영수증이 있는가? 은행가와 변호사, 의사도 답해야 한다. 직업과 지위가 아니라 죄의 빚이 해결되었다는 증거가 필요한 것이다.

빚을 갚으면 영수증이나 결제된 수표가 남는다. 럭크만은 구원의 확신에도 그런 근거가 있다고 설명한다. 그가 말하는 ‘영수증’은 특별한 체험이나 자기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다. 죄사함과 의롭게 됨을 약속하는 다음 말씀들이 그 증거에 해당한다.

죄의 빚과 그리스도의 구속, 하나님의 약속을 영수증에 빗댄 삽화

사도행전 13:38 ○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분을 통하여 너희에게 죄들의 사함이 선포되었으며 사도행전 13:39 너희가 모세의 율법으로는 의롭게 되지 못하였던 그 모든 일에 있어서도 믿는 자는 모두 그분을 통하여 의롭게 된다는 것이니라.

모세의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했던 모든 일에 있어서도, 믿는 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롭게 된다. 죄의 빚이 해결되었는지 확인하려고 자신이 율법을 얼마나 지켰는지 계산할 필요가 없다. 믿는 자에게 주어진 이 약속을 보아야 한다.

로마서 4:5 행함이 없어도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그분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지느니라.

말씀은 먼저 행위로 의로운 자격을 갖추라고 하지 않는다. 자기 공로를 내세울 수 없는 불경건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때, 그 믿음이 의로 여겨진다. 파산한 사람이 다른 분의 돈으로 빚을 갚았다는 비유가 뜻하는 것도 이것이다.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을 나타내셨느니라. 로마서 5:9 그러므로 이제 그의 피로 의롭게 되었으니 더욱더 우리가 그를 통하여 진노로부터 구원받게 되리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달라진 뒤가 아니라 아직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죽음으로 사랑을 나타내셨다. 약속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사람은 그분을 통하여 진노로부터 구원받는다. 럭크만이 손에 쥐었다는 ‘결제된 수표’에는 죄사함과 의롭게 됨, 진노로부터의 구원이 함께 적혀 있다.

심판 날의 두려움 대신 담대함

이 약속을 믿는 사람은 자신의 죄 때문에 심판 앞에서 정죄받을까 끝없이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 요한일서는 사랑과 두려움, 심판 날의 담대함을 연결한다. 럭크만도 바로 이 약속을 근거로 더는 그 두려움에 붙들려 있지 않다고 고백한다.

요한일서 4:18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내느니라. 이는 두려움에는 고통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해지지 못하였느니라.

두려움에는 고통이 있다. 그러나 온전한 사랑은 그 두려움을 쫓아낸다. 말씀을 믿고 죄의 빚이 갚아졌다는 ‘영수증’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계속 그 고통에 붙들릴 필요가 없다. 스스로 빚을 갚을 능력이 없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갚으셨다는 사실이다. 구원의 확신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그 약속을 믿는 데서 나온다.

요한일서 4:17 이렇게 우리의 사랑이 온전해졌나니, 이는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는 것이라. 이는 그분이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기 때문이니라.

그분이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다는 말씀은,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는 약속이다. 구원받은 사람은 심판에 대한 경고를 끝없는 불안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담대히 서면 된다.

아직 구원받지 못했다면 더 미루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과의 결산을 뒤로 미루지 말라. 럭크만이 사람들에게 구원을 촉구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죄의 빚은 스스로 갚을 수 없지만, 그리스도께서 갚으셨다. 그 약속을 믿는 사람에게 심판의 경고는 두려움으로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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