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난 전 휴거: 부활의 순서와 하늘의 처소, 재회의 소망
이 글은 김진하 목사(Dr. Gene Kim)의 「NEW Rapture Doctrines You Didn’t Hear Before」 데살로니가전서 4:15–18 강의 내용을 주제별로 정리하고 재구성한 성경 해설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성도들은 휴거 때 뒤처지게 될까? 살아 있는 성도들과는 어디서 다시 만나며, 그 뒤에는 어디에서 살게 될까? 데살로니가전서 4장은 죽은 성도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아 있는 성도들이 그들과 함께 올라가 영원히 주와 함께하리라고 약속한다. 이 순서를 하늘의 처소에 관한 약속과 함께 읽으면, 환난 전 휴거가 왜 소망이며 위로인지 더 분명해진다.
왜 환난 전에 올라가는가
환난 전 휴거는 환난이 시작되기 전에 성도들이 주께로 끌려 올라가는 사건이다. 휴거 자체를 부정하는 견해와, 휴거는 인정하되 환난 중간이나 끝에 일어난다고 보는 견해는 각각 구별해서 살펴야 한다.
가장 불리한 조건부터 가정해 보자. 환난 전 휴거를 반박의 여지 없이 입증하지 못한다고 해도, 데살로니가전서 4장과 관련 본문들을 함께 읽으면 환난 전이라는 시점이 가장 논리적이다. 그러나 증거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환난 전 휴거를 확실하게 뒷받침하는 성경적 근거도 많다.
이 가정은 결론을 유보하거나 다른 시점도 똑같이 타당하다고 인정하는 말이 아니다. 최소한의 비교에서도 환난 전이라는 결론에 이르며, 그보다 강한 입증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를 확인하려면 언제 올라가는지와 함께 누구와 어디로 가고, 무엇을 위해 영접받는지도 살펴야 한다.
주께서 내려오실 때 들리는 음성
데살로니가전서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로부터 친히 내려오시리니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성도들을 데려가시려고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분은 주 자신이다. 그때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함께 들린다.
영어의 trump는 악기인 trumpet 자체가 아니라 그 소리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나팔 소리도 실제 악기를 부는 소리가 아니라 나팔처럼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호령과 나팔 같은 음성은 성도들을 부르시는 일에 함께한다.
천사장은 미카엘 한 명뿐이다. 다니엘서에서 미카엘은 환난 때 이스라엘을 위해 일어선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데려가실 때도 천사장의 음성이 들린다. 교회를 데려가시는 일과 미카엘이 환난 중 이스라엘을 위해 활동하는 일이 맞물리는 이 전환점이 휴거의 시점을 보여 준다.
교회를 데려가시는 일은 환난 중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시는 일과 구별된다. 이스라엘을 위한 환난의 시간이 시작될 때 교회가 올라간다는 점은 환난 전 휴거의 근거가 된다.
목자가 자기 양들을 이름으로 부른다
요한복음 10:1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양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길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요 강도라.
요한복음 10:2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요한복음 10:3 그에게 문지기가 문을 열면 양들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러면 그는 자기 자신의 양들의 이름을 불러서 이끌어 내느니라.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부르고, 양들은 그의 음성을 듣고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는 목자이며 신자들은 양이다. 문을 여는 문지기는 하나님과 연결된다. 하늘의 거처를 여시고 자녀들을 이끌어 들이시는 모습이 여기에 담겨 있다. 휴거 때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사람들을 각자의 이름으로 부르신다. 목자는 자기 양이 누구인지 알고 계신다.
다른 부활 장면에서도 먼저 대상에게 부르시는 말씀이 있다. 이름을 부르기도 하고, 소녀나 청년이라는 호칭으로 일어나라고 명하기도 한다. 요한계시록 4장의 “이리 올라오라”는 부름도 같은 흐름에 놓인다. 대상을 부르시고, 일어나거나 깨어나게 하시며, 이끌어 내시는 것이다.
먼저 부활하고, 함께 올라간다
데살로니가전서 4: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오실 때까지 살아남아 있는 우리가 잠들어 있는 자들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데살로니가전서 4:17 그리고 나서 살아남아 있는 우리도 공중에서 주와 만나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려 올라가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영원히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아 있는 성도들이 먼저 주께 나아가고 죽은 성도들이 뒤늦게 따라가는 것은 아니다. 오래전에 죽어 묘지에 묻힌 사람이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았다면 먼저 몸으로 부활한다. 그다음 살아서 남아 있는 성도들이 그들과 함께 끌려 올라간다.
두 무리가 서로 다른 곳으로 가는 것도 아니다. 부활은 먼저, 올라갈 때는 함께이다.

죽은 성도들의 부활이 먼저이며, 들려 올라갈 때는 살아 있는 성도들과 함께한다.
“휴거라는 말은 성경에 없다”는 반론도 본문이 묘사하는 사건을 없애지는 못한다. 휴거의 라틴어 어원은 낚아채거나 붙잡아 데려간다는 뜻과 연결된다. 데살로니가전서의 “끌려 올라가리니”가 바로 그 일을 말한다. 용어의 유무를 따지기 전에, 성경에 그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지 읽어야 한다.
부활에도 순서가 있다
고린도전서 15: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같이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고린도전서 15:22 이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을 살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전서 15:23 그러나 각자 자기의 서열대로 되리니 그리스도가 첫열매들이요, 그 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분께 속한 사람들이라.
고린도전서 15:24 그후에는 끝이 오리니 주께서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폐하시고 그 왕국을 하나님, 곧 아버지께 바칠 때라.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듯, 그리스도 안에서는 생명을 얻는다. 고린도전서 15장의 이 대조는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 그리스도 안의 죽은 성도들이 먼저 일어난다는 약속과 이어진다.
고린도전서는 부활이 “각자 자기의 서열대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부활과 하늘로 올라감의 순서를 세 무리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 순서 | 대상 | 본문과의 연결 |
|---|---|---|
| 첫째 |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에 연결되는 성도들 | 그리스도가 첫열매들이라는 표현 |
| 둘째 |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분께 속한 사람들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의 부활과 휴거 |
| 셋째 | 환난 성도들 | 그후의 끝을 환난과 연결한 별도의 부활·휴거 |

“첫열매들”은 복수형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첫열매를 포괄하신다는 뜻일 수도 있고, 그분의 부활에 함께한 여러 성도의 무리를 가리킬 수도 있다. 두 번째 가능성을 살펴볼 수 있는 본문이 마태복음 27장이다.
이렇게 그리스도 때의 올라감, 그리스도인들의 올라감, 환난 성도들의 올라감이라는 세 단계를 구별할 수 있다.
주의 부활 때 일어난 성도들은 어디로 갔는가
마태복음 27:52 무덤들이 열리며 잠들었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일어났으며
마태복음 27:53 주께서 부활하신 후에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도성으로 들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더라.
예수님은 부활하신 몸으로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셨다. 보통 이를 승천이라고 부르지만, 지상의 몸이 하늘로 올라간다는 넓은 의미에서는 휴거와 같은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마태복음 27장에서 일어난 이들은 구약 성도들이다. 본문은 그들의 혼만이 아니라 몸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된 문맥에서 무덤들이 열렸고, 주의 부활 후 이들이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도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나타났다.
그 뒤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다. 부활한 몸이 다시 무덤으로 들어가고 혼이 하늘로 갔을 수도 있고, 일부가 나중에 예수님과 함께 몸으로 하늘에 올라갔을 수도 있다.
몸이 부활했고 도성에서 사람들에게 나타났다는 일은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이후 몸으로 승천했는지는 별도로 남는 질문이다.
올라가는 사건은 한 번뿐인가
앞의 세 단계 구분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성경에는 에녹과 엘리야, 예수님이 땅에서 하늘로 올라간 사례가 있다. 하늘로 올라가는 사건이 오직 한 번뿐이라는 생각은 이 사례들만으로도 성립하기 어렵다. 다만 이 세 인물이 앞서 살핀 세 부활·휴거 무리를 대신하는 것은 아니다.
교리가 참인지 여부는 그것을 믿는 사람의 수로 결정되지 않는다. 김진하 목사는 세계에 수천 명의 바이블빌리버와 수백 곳의 바이블빌리빙 교회가 있어도, 세부 교리까지 같은 사람을 찾다 보면 한 도시나 카운티에서 홀로 남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자신이 아는 베이 지역에서도 바이블빌리빙 교회 외에는 이런 내용을 가르치는 교회를 알지 못한다고 한다.
부활과 휴거 사이에 40일이 있을까
죽은 성도들이 먼저 부활한다면, 살아 있는 성도들과 함께 올라가기까지 시간이 있을까? 일부 바이블빌리버는 마태복음 27장의 성도들이 부활 후 도성에서 사람들에게 나타났다는 점에 주목한다. 예수님도 부활하신 즉시 승천하지 않고 적어도 40일 동안 땅에 계셨다.
이 두 장면을 본보기로 삼으면, 죽은 성도들도 부활한 뒤 약 40일 동안 지상에 머물다가 살아 있는 성도들과 함께 올라간다는 가설을 생각할 수 있다.
다만 신자들의 부활과 휴거 사이에 40일이 있다는 기간은 명시되어 있지 않다. 예수님의 행적에서 유추한 것이며, 마태복음 27장의 성도들이 이후 같은 경로를 따랐는지도 확정되지 않았다.
김진하 목사는 40일 간격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문제에서 자신의 반대 의견을 반드시 따라야 한다고 하지는 않으며, 시간 간격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을 가질 여지를 인정한다.
부활한 성도들이 거리에 나타난다면
그 가설대로라면 어떤 모습이 펼쳐질까? 죽은 성도들이 다시 나타나 거리에서 설교하고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다가 함께 올라갈 수 있다. 이미 죽은 줄 알았던 이들이 돌아와 자신들의 경고가 옳았음을 알린다면,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워킹 데드》나 할리우드 영화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를 부활과 휴거로 이해하는 대신 좀비 대재앙과 외계인 납치를 떠올릴 수도 있다. 그러나 죽은 자가 일어나고 하늘로 올라가는 이야기는 그런 영상물보다 훨씬 먼저 성경에 기록되어 있었다. 김진하 목사가 할리우드를 사탄적이라고 비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화의 이미지에 익숙해지면 성경의 사건을 엉뚱하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거리 전도 장면은 40일 간격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 그려 볼 수 있는 모습이다.
한편 환난 중에는 걸어 다니는 죽은 자들, 곧 악한 좀비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김진하 목사는 말한다. 이들은 휴거 때 부활한 선한 성도들과 다르다. 시점도 환난 중이며, 할리우드의 묘사는 오히려 이 악한 존재들에 가깝다. 따라서 두 이야기를 섞어서는 안 된다. 성경에는 편안하고 긍정적인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리 올라오라”와 “즉시”
요한계시록 4:1 이 일 후에 내가 쳐다보니, 보라, 하늘에 한 문이 열려 있는데 내가 들은 첫 음성은 나팔 소리 같았으며,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이리 올라오라. 내가 이후에 마땅히 일어나야 할 일들을 네게 보여 주리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4:2 또 내가 즉시 영 안에 있게 되었는데, 보라, 하늘에 한 보좌가 놓여 있고 한 분이 그 보좌에 앉으셨는데
요한계시록 4장에는 열린 하늘의 문, 나팔 같은 음성, 위로 올라오라는 부름이 나온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의 휴거와 대응하는 모습이다. 부름 뒤에 이어지는 말은 “즉시”이다.
비행기가 출발한다고 해 놓고 승객들에게 40일을 더 기다리라고 한다면 어떨까? 출발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당연히 화를 낼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올라오라고 부르신 뒤 오랫동안 지상에 남겨 두신다는 설명은 그 부름과 어울리지 않는다.
에녹과 엘리야도 부름과 떠남이 이어지는 사례이다. 요한계시록의 즉각적인 전환까지 함께 살피면, 긴 대기 기간을 두기보다 부활과 공동 휴거가 순간적으로 일어난다고 이해하는 편이 더 타당하다.

그렇다면 왜 죽은 성도들이 먼저 일어나는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죽은 성도와 살아 있는 성도의 상태가 다르다는 점에서 세 가지 설명을 생각할 수 있다.
| 가능성 | 설명 |
|---|---|
| 몸의 재구성 | 죽은 성도들의 몸은 분해되었으므로 먼저 몸이 재구성되고 부활해야 한다. 살아 있는 성도들의 몸은 아직 온전하다. |
| 출발 위치의 차이 | 죽은 성도들은 땅 아래에 있으므로 지상에 있는 사람들보다 아래에서 먼저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
| 죽음의 제거 | 죽은 성도들에게는 죽음이라는 상태를 없애는 하나님의 일이 먼저 필요하다. |
김진하 목사는 세 번째 설명을 더 타당하게 여긴다. 살아 있는 성도들은 이미 살아 있지만, 죽은 성도들에게는 먼저 죽음을 없애고 몸을 일으키시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먼저 일어난다고 해서 반드시 긴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죽은 성도들이 부활하고 살아 있는 성도들이 합류하는 순서가 있어도, 전체 사건은 순간적으로 일어나 동시에 벌어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먼저”라는 단어만 보면 시간 간격 가설이 더 직접적인 설명처럼 보일 수 있다는 점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한 단어를 잘 설명한다고 해서 다른 본문까지 모두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요한계시록의 “즉시”와 여러 올라감의 사례를 함께 보면, 긴 간격 없이 순간적으로 일어난다는 결론을 유지하게 된다.
아기들도 함께 올라가는가
환난 전 휴거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에는 병원에 있던 아기들이 사라지는 장면이 나온다. 아기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영접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하늘로 갈 수 있을까?
답을 살펴보려면 데살로니가전서 4장의 “살아”와 “남아”를 구별해서 읽어야 한다. 일차적으로 두 말은 죽어 세상을 떠난 사람들과 달리 아직 생존해 있는 신자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아기들에게 적용할 때 “살아” 있다는 말은 육체적 생존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 죽은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는 상태도 가리킨다.
남아 있는 신자는 선악과 복음을 이해할 만큼 성장하여 구원받았고,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이다. 반면 살아 있는 사람의 범위에는 죄를 이해할 능력이 없어 하나님께서 살아 있는 것으로 여기시는 아기도 포함된다. 남아 있는 신자는 살아 있지만,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이 같은 의미에서 남아 있는 신자는 아니다.
죄를 이해할 수 있는지가 기준이다
로마서 7:8 그러나 죄가 계명을 통하여 기회를 잡아 내 안에서 온갖 색욕을 일으켰느니라.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는 죽은 것임이라.
로마서 7:9 내가 전에는 율법 없이 살았으나 계명이 오자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느니라.
율법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려 준다. 로마서 7장에서 율법이 없을 때는 죄가 죽어 있었지만, 계명이 오자 죄가 살아나고 사람이 죽었다. 죄가 죽어 있는 상태와 사람이 죄 가운데 죽은 상태는 다르다. 이 차이가 아기의 상태를 이해하는 열쇠이다.
아기는 죄와 선악, 하나님의 계명과 복음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 복음이 죄를 없애고 잘못된 상태를 바로잡는다는 사실도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죄 가운데 죽은 것으로 여기지 않으신다. 반대로 계명과 죄를 알게 되면, 자신이 죄 가운데 죽었으며 구원이 필요하다는 문제가 드러난다.
여기서 복음을 아직 듣지 못했다는 것과 복음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구별해야 한다. 이 설명이 복음을 듣지 못한 모든 사람을 무죄로 여긴다는 뜻은 아니다.
김진하 목사는 이와 관련해 진보주의자들이 자신을 죄인으로 부르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지적하는 율법을 없애려 한다고 비판한다.
무죄의 상태와 자녀를 잃은 부모의 소망
아담과 이브도 에덴 동산에서 선악의 지식을 취하기 전에는 무죄의 상태에 있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는 아니었지만 죄 가운데 죽은 상태도 아니었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사람의 상태를 똑같이 볼 수는 없다.
아기도 죄와 계명을 이해할 능력이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살아 있는 것으로 여기신다. 개인적인 영접을 한 적이 없더라도 하늘에 갈 수 있고 휴거에 포함되는 이유이다.
정신 요양시설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중 죄와 선악, 복음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이들에게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구원하신다. 기준은 시설에 사는지 여부가 아니라 이해할 능력이 있는지이다. 시설 거주자 전체를 같은 상태로 묶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아기나 너무 어린 자녀를 잃은 부모에게도 위로가 된다. 죄와 계명을 이해할 수 없었던 아이를 하나님께서는 죄 가운데 죽은 것으로 여기지 않으신다. 영접을 표현할 수 없었다는 이유로 그 아이가 하늘에 갈 소망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공중에서 주를 만난 뒤 어디로 가는가
성도들이 주를 만나는 곳은 구름 속의 공중이다. 죽은 성도들과 살아 있는 성도들이 함께 올라가 그곳에서 주를 만난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구름 자체가 하나님이 계시는 셋째 하늘은 아니다.
본문은 공중에서 만난 뒤 우주를 오랫동안 여행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영어 본문의 콜론 뒤에도 우주 항로가 아니라 영원히 주와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이 이어진다. 그렇다면 공중의 만남은 어떻게 하나님이 계신 하늘에서의 삶으로 이어질까?
하나님께서 빠르게 이동시키실 능력이 있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빛의 속도로 먼 우주를 가로지른다고 해도 여전히 공간 안에서 거리와 속도를 따지는 설명이다. 공중에서 하늘로 들어가는 길을 이해하려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하늘의 문을 살펴야 한다.
열린 문을 통해 셋째 하늘로
요한은 하늘에 열린 문을 보고 나팔 같은 음성으로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즉시 영 안에서 하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았다. 휴거 때 공중에서 주를 만난 성도들도 열린 문을 통해 곧바로 셋째 하늘에 들어간다.
이 문을 포털(portal), 곧 서로 다른 영역을 잇는 통로로 생각할 수 있다. 구름이 있는 대기에서 물리적인 3차원 영역을 벗어나, 4차원으로 표현되는 영역에 들어가 하늘에 이르는 것이다. 다만 경계를 넘는 구체적인 방식까지 정하는 설명은 아니다.
성령의 내주를 생각하면 물리적 탐색의 한계를 이해할 수 있다. 신자의 몸 안에 성령께서 계시지만, 살과 피와 심장과 장기를 아무리 조사해도 성령을 물리적 대상으로 찾아낼 수는 없다. 조사해서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계시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 조사 자체가 물리적 차원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하늘의 문이 열리는 것은 막이 찢어지듯 경계가 열리는 것과 같다. 대기를 조사하거나 더 먼 우주로 이동하는 일과는 다르다. 영적 실재를 물리적인 3차원 좌표 안에 가둘 수는 없다.
우주의 어둠과 지옥에 관한 생각
김진하 목사는 여기서 우주의 성격에 관한 생각도 덧붙인다. 우주가 사실상 끝이 없거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영역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옥과 비슷한 끝없는 심연일 가능성, 우주의 어둠과 지옥의 어둠이 관련될 가능성, 우주의 성격이 3차원과 4차원의 경계와 연결될 가능성을 생각한다.
이에 대해서는 스스로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개인적인 추측이라고 밝히며, 믿어야 할 교리로 요구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이는 앞서 살핀 요한계시록의 열린 문을 통한 이동과는 별개의 생각이다.
바벨탑은 왜 하늘에 닿으려 했는가
창세기 11:4 또 그들이 말하기를 “가서 우리를 위하여 도성과 탑을 세우되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도록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내자. 그리하여 우리가 온 지면에 멀리 흩어지지 않게 하자.” 하더라.
바벨탑은 높은 건축물을 통해 하늘에 닿으려는 시도였다. 여러 신화에서도 산과 탑이 중요하게 등장한다. 높은 곳을 통해 신적 영역에 접근하려는 생각이 그 배경에 있다.
그러나 높이만으로 하나님께 도달할 수는 없다. 계속 올라가면 우주 공간에 이르고, 사람이 질식하는 조건을 만날 뿐이다. 높이와 거리를 늘리는 일은 다른 영역으로 통하는 문에 들어가는 일과 다르다.
여기에는 고대에 잃어버린 지식의 문제도 얽혀 있다. 아주 오래전의 지식이 수천 년을 거치며 소실되고, 후대에는 구전으로 전해진 흔적만 남았다. 이집트인과 고대 칼데아인, 바빌론인은 그 지식을 자랑하거나 흔적을 추적하고 모방하려 했지만, 더 이른 시대의 지식에 온전히 도달하지 못했다.
바벨탑과 신화 속 산·탑은 그래서 단순한 건축물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하늘에 접근하려는 시도이자 잃어버린 지식을 되찾거나 재현하려는 시도이다.
측정할 수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가
에스겔서와 다른 선지자들의 경험에도 하늘이 열리는 장면이 나온다. 눈앞에 구름이 있어도 하늘의 문과 창문이 열리면, 그 너머 하나님이 계신 영역을 볼 수 있다.
이 장면은 과학과 역사, 고대 이교 문화와 구전 전통을 함께 살펴보게 한다. 김진하 목사는 물리학자들도 3차원과 4차원 너머의 무엇인가와 우주의 경계를 인식하기 시작했지만, 정확히 짚어 내지는 못한다고 말한다. 성경은 이미 물리적 차원 너머의 존재를 보여 준다.
그는 무신론자인 물리학자 로런스 크라우스(Lawrence Krauss)가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어떤 물질과 에너지를 입증할 측정 장비가 없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소개한다. 여기서 살펴야 할 것은 측정 도구가 포착하는 범위이다. 도구로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하는 모든 것과 같지는 않다.
몸속을 조사하거나 대기를 관찰하고 우주의 거리와 속도를 재는 일은 모두 물리적 범위 안에서 이루어진다. 요한이 영 안에서 보좌를 본 사건을 그 범위에 가둘 수는 없다. 하늘의 문이 보여 주는 것은 극단적으로 빠른 이동보다 다른 영역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주께서 마련하신 집으로 영접받는다
요한복음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너희가 하나님을 믿으니 또한 나를 믿으라.
요한복음 14:2 내 아버지 집에는 많은 저택들이 있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리라. 나는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마련하러 가노라.
요한복음 14:3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내가 있는 그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은 먼저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과 자신을 믿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신자들을 위해 처소를 마련하러 가시며, 다시 오셔서 자신에게로 영접해 함께 있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약속에는 내려오심의 목적도 담겨 있다. 신자들을 주께서 계신 하늘의 처소로 데려가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몸으로 먼저 올라가셨듯, 신자들도 올라가 그분과 함께하게 된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은 공중에서 주를 만나 영원히 함께하는 일을, 요한복음 14장은 영접받아 함께 살 처소를 알려 준다. 두 본문을 함께 읽으면 휴거는 하늘의 집으로 영접받는 사건이다. 휴거를 부정하려면 주께서 신자들을 데려가시겠다는 이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설명해야 한다.
하늘의 처소로 가는 일을 천 년 뒤로 미룰 수 있는가
예수님이 환난 끝에 한 번 내려오시는 사건만으로 모든 약속을 설명하려 하면 문제가 생긴다. 그때부터 땅에서 천 년 동안 통치하신다면, 신자들을 하늘의 처소로 데려가시는 약속은 언제 이루어질까?
그리스도인들이 환난을 모두 통과하고 주의 내려오심 뒤에도 계속 지상에 남는다면, 하늘로 영접받는 일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천 년 통치가 끝난 뒤에야 하늘로 간다고 하면, 처소에 관한 약속을 천 년 뒤로 미루게 된다.
지상에서 천 년 동안 통치하신다는 사실 때문에라도 하늘로 데려가시는 일과 지상 통치를 시작하시는 일을 구별해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은 성도들이 올라가는 장면이다. 주께서 땅에 발을 디디고 천 년 통치를 시작하시는 장면은 아니다.
김진하 목사는 이렇게 천 년을 기다려야 한다면 앞서 반대한 40일 간격 가설을 차라리 받아들이겠다고 비판한다. 40일 가설을 채택한다는 말이 아니라, 처소에 관한 약속을 천 년 뒤로 미루는 설명이 그보다 훨씬 부당하다는 말이다.
마지막 전쟁만 피하면 진노를 피한 것인가
환난 후 휴거를 주장하는 견해 중에는 아마겟돈에서 주께서 민족들을 멸하실 때 성도들이 잠시 올라가 진노를 피한 뒤 곧바로 내려온다는 설명이 있다. 휴거를 인정하되 마지막 순간의 위험을 피하는 사건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진노는 아마겟돈에만 해당하지 않고 환난 전체에 해당한다. 그 진노를 피하려면 환난 전에 올라가야 한다. 환난을 전부 겪고 마지막에 잠시 벗어났다면, 진노를 피했다기보다 견뎠다고 해야 한다.
마태복음 24:13과 마가복음 13:13에서 끝까지 견디는 사람의 구원을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 말씀은 교회시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환난 중의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잠시 올라갔다 곧바로 내려온다는 시간표에는 또 하나가 빠져 있다. 주께서 준비하신 하늘의 처소에서 함께 살게 된다는 약속이다. 마지막 위험을 피했다는 설명만으로는 그 약속까지 설명할 수 없다.
하늘이 집이라면 땅에는 다시 올 수 없는가
영원히 주와 함께한다는 말이 하늘 밖으로 절대 나올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하늘을 하나님과 함께 사는 집으로 삼으면서, 주와 함께 땅에 내려와 천 년 동안 통치할 수 있다.
집이 있어도 휴가를 떠나 다른 곳에서 지낼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하늘이 집이어도 지상에서 천 년을 보낼 수 있다. 이 비유에서 지상의 천 년은 집을 떠나 보내는 휴가에 해당한다.
그 연장선에서 우주의 다른 곳으로 갈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성경이 여행 일정을 정해 주었다는 뜻은 아니다. 비유의 요점은 집과 소속이 정해져 있어도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환난 전에 하늘의 처소로 영접받고, 이후 주와 함께 돌아와 지상에서 천 년 동안 통치한다는 구분을 나타낸 개념도이다.
환난 전 휴거는 이렇게 하늘의 집으로 영접받는 약속과 지상 통치를 각각 제자리에 둔다. 두 사건을 합치거나 올라가는 일을 없애면, 하늘의 처소로 데려가시는 약속이 뒤로 밀리거나 사라진다.
다시 만나 함께 살리라는 위로
데살로니가전서 4:13 형제들아, 잠든 자들에 관해서는 너희가 모르게 되는 것을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가 소망이 없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
데살로니가전서 4:14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우리가 믿는다면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예수 안에서 잠든 자들도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데살로니가전서 4:18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데살로니가전서에서 휴거를 말하게 된 배경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이 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신자에게, 예수 안에서 잠든 사람의 죽음은 영원한 이별이 아니다. 그 몸이 부활하고 살아 있는 성도들과 함께 올라간다. 죽음이 마지막 승리를 거두지는 못한다.
“환난을 모두 겪은 뒤 올라간다는 것이 어떻게 위로가 되는가?”라는 질문에, 환난 후 휴거를 믿는 사람은 죽은 사랑하는 이들과 다시 만나는 것 자체가 위로라고 답할 수 있다. 재회 자체가 위로라는 점은 맞다.
그러나 약속은 재회에서 더 나아간다. 어디서 만나고, 누구와 함께 어떤 삶을 누리는지도 중요하다. 요한복음 14장의 처소 약속을 함께 읽으면, 잠깐 얼굴을 확인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먼저 세상을 떠난 구원받은 이들과 살아 있는 성도들이 모두 하늘의 집에 모여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된다.
이 소망은 사별한 사람만을 위한 것도 아니다. 살아 있는 성도에게도 어디로 영접받고 누구와 함께 살 것인지 알려 준다. 환난 끝에 잠시 올라갔다 내려오는 일이나 지상의 천 년 통치가 하늘의 집에 관한 약속을 대신할 수는 없다.
성경의 단어를 하나씩 읽는 이유
절별 성경 공부는 각 절의 모든 단어를 이해하고, 그 단어가 문장과 문맥 안에서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가는 일이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거나 좋아하는 교리의 결론을 확인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성경 전체를 이렇게 공부하면 여러 교리를 폭넓게 배우는 동시에 스스로 본문을 해석하는 능력을 기르게 된다. 한 구절을 세밀하게 읽는 훈련은 혼자 성경을 읽을 때의 어려움을 줄이고, 다른 교리를 배우는 기초가 된다.
가르치는 사람의 설명도 본문과 대조해야 한다. 재미있거나 설득력 있게 들린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말고, 어떤 단어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직접 확인해야 한다. 교사가 내용을 지어내거나 거짓말할 가능성도 있다. 판단 기준은 교사의 권위가 아니라 성경의 말씀이다.
언제든 떠날 수 있으므로 오늘 섬긴다
환난 전 휴거를 믿으면 게을러진다는 비판이 있다. 환난을 견뎌야 한다고 믿어야 용기를 내고 정신을 차려 하나님을 위해 싸울 텐데, 미리 올라간다고 기대하면 수고를 피하려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든 주를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은 오히려 섬김을 재촉한다. 하나님을 섬길 시간이 계속 남아 있으리라고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 미룬 일을 내일 할 기회가 반드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소망은 지금 섬겨야 할 이유가 된다. 부활과 재회, 하늘의 집에 대한 약속을 기다리는 성도는 남아 있는 시간 동안 하나님을 섬기고, 이 말씀으로 서로를 위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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