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제임스 성경

환난 전 휴거의 복된 소망: 몸의 구속과 두 음성

이 글은 김진하 목사(Dr. Gene Kim)의 「The Famous Rapture Prooftext No One Saw」 데살로니가전서 4:13–16 강의 내용을 주제별로 정리하고 재구성한 성경 해설이다.

사랑하는 성도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남은 사람들은 슬퍼한다. 그러나 그 슬픔 속에서도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릴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듯이, 그분 안에서 죽은 성도들의 몸도 다시 살아날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성도들 역시 몸이 변화되어 그들과 함께 주를 만난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은 바로 이 약속으로 성도들을 위로한다. 이 약속을 따라가면 몸의 구속과 환난 전 휴거가 무엇인지, 성도들을 데려가시는 오심과 지상 왕국을 세우시는 오심은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다. 그리고 휴거 때 울리는 하나님의 음성과 천사장의 음성이 각각 누구를 향하는지도 드러난다.

슬픔 속에서도 다시 만날 소망이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4:13 형제들아, 잠든 자들에 관해서는 너희가 모르게 되는 것을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가 소망이 없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

바울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도 슬퍼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소망 없는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고 했다. 다시는 만날 수 없다고 여기는 슬픔과, 다시 만날 약속을 알고 견디는 슬픔은 다르다.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은 감정을 억누르는 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죽은 성도들을 위해 무엇을 예비하셨는지 아는 믿음이다. 그들의 몸은 죽었지만, 주를 만날 약속에서 빠진 것은 아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성도들도 살아 있는 성도들과 함께 그날에 참여한다.

데살로니가전서 4:14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우리가 믿는다면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예수 안에서 잠든 자들도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안에서 잠든 자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데리고 오신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그분 안에서 죽은 성도들의 장래도 이 약속에 따라 바라볼 수 있다.

여기서 약속된 사람들은 죽은 사람 전체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잠든 자들이다. 구원받은 뒤 몸의 죽음을 맞은 성도들이다. 몸이 죽어도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런데 성경은 왜 그들의 죽음을 ‘잠’이라고 부르는가?

잠든 것은 몸이다

요한복음 11장에서도 죽음이 잠으로 표현된다. 이때 몸(body)과 혼(soul)을 구별해야 한다. 죽은 몸은 움직이지 않고 누워 있어 잠자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몸이 그렇게 보인다고 혼까지 의식을 잃은 것은 아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가르치는 혼의 수면설은 이 둘을 혼동한다. 몸의 죽음을 설명하는 성경의 표현을 가져와 혼도 무의식 상태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잠이라는 비유가 가리키는 대상은 몸이지 혼이 아니다.

의식(consciousness)과 양심(conscience)도 다른 말이다. 의식은 알고 기억하며 생각하고 반응하는 능력을 가리킨다. 죽은 뒤에도 혼은 이런 의식을 지니며 양심도 있다. 몸의 기능이 멈췄다고 혼의 모든 인식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죽음과 관련해 잠이나 의식의 부재를 말하는 구절들은 몸을 가리킨다. 혼이 잠든다고 가르치는 구절은 없다. 이 차이를 기억하고 전도서를 읽어 보자.

죽은 몸과 의식이 있는 혼의 구별

죽음의 잠은 몸에 적용된다. 몸의 활동이 멈추었다는 사실이 혼의 의식까지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혼의 수면설을 뒷받침한다며 자주 인용하는 구절이 전도서 9:5이다.

전도서 9:5 살아 있는 자들은 그들이 죽을 것을 알지만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 그들은 더 이상 상도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들에 대한 기억이 잊혀짐이라.

여호와의 증인은 죽은 자가 아무것도 모르고 그들에 대한 기억도 잊힌다는 말에서 사후 무의식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 말씀이 몸을 가리키는지 혼을 가리키는지 먼저 확인해야 한다. 바로 앞 절이 그 단서를 준다.

전도서 9:4 ○ 살아 있는 모든 자에게 참여하는 자에게는 소망이 있나니, 이는 살아 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라.

살아 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는 것은, 살아 움직이는 몸이 죽어 움직이지 않는 몸보다 낫다는 말이다. 사자의 몸은 죽었고 개의 몸은 살아 있다. 비교하는 대상은 몸이다.

그 문맥에서 5절의 아무것도 모르는 죽은 자도 죽은 몸을 가리킨다. 몸은 더 이상 알고 기억하고 반응하지 못한다. 이것을 혼의 상태에 관한 말로 바꾸면 몸과 혼을 뒤섞게 된다.

따라서 이 구절로 혼의 수면설을 입증할 수 없다. 성경을 올바로 나눈다는 것은 이런 구별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몸에 관한 말씀을 혼에 관한 말씀으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

복된 소망, 그리고 몸의 구속

디도서 2:13 그 복된 소망, 곧 위대한 하나님이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음이니,

복된 소망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 성도들을 데려가실 것을 기다리는 소망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은 그때 죽은 성도들이 부활하고 살아 있는 성도들과 함께 끌려 올라갈 것을 알려 준다.

죽은 성도의 몸도 지금의 상태로 남아 있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그 몸을 다시 살리고 변화시켜 하늘로 데려가신다. 죽음 앞에서도 성도의 장래를 말할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복된 소망’이라는 말에 아멘으로 응답하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 무엇을 기다리는지, 그 약속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 근거를 묻는 사람에게 디도서 2:13을 제시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을 데리러 나타나신다는 뜻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성도가 알아야 할 기본 교리다.

구원받은 성도도 여전히 신음하는 이유

로마서 8:21 피조물 자체도 그 썩어짐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운 자유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라.

로마서 8:22 모든 창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고통받는 것을 우리가 아노니

모든 창조물은 썩어짐의 속박 아래서 신음한다. 우리 몸이 병들고 지치며 쇠약해지는 것도 그 속박을 보여 준다. 몸을 가진 인간 역시 해방을 기다리는 피조물이다.

성령을 받은 성도라고 이 고통에서 이미 벗어난 것은 아니다. 바울은 성도들도 여전히 신음한다고 말한다.

로마서 8:23 그들뿐만 아니라 성령의 첫열매들을 가진 우리까지도 속으로 신음하며 양자 되는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느니라.

성령의 첫열매들을 가진 우리도 속으로 신음한다. 이미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지만, 몸은 여전히 고통과 썩어짐을 겪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다리는가? 바울은 “우리 몸의 구속”이라고 답한다. 지금의 속박에서 몸이 풀려나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운 자유에 이르는 것이다. 창조물도 성도도 그 해방을 기다리고 있다.

구원의 확신과 장래의 소망

로마서 8:24 이는 우리가 소망에 의하여 구원을 받았음이나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 사람이 보는 것을 왜 바라리요?

이 구절을 읽고 구원받았는지는 아무도 확실히 알 수 없으며, 그저 구원받았기를 바라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앞 절에서 무엇을 기다린다고 했는가? 몸의 구속이다. 혼이 구원받았는지 나중에 확인하는 일이 아니다.

성도의 혼은 이미 구원받았고, 그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아직 기다리는 것은 몸의 해방이다. 소망은 구원이 불확실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일이 아직 눈앞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몸에 관한 문맥에 혼의 구원 여부를 집어넣으면 본문을 왜곡하게 된다. 여호와의 증인이 몸의 죽음을 혼의 무의식으로 바꾸는 것과 같은 오류다. 여기서 문제 삼는 것은 상대를 같은 종교 집단으로 묶는 일이 아니라 몸과 혼을 뒤섞는 것이다.

이 소망은 일상에서도 절실하다. 몸은 병들고 피곤해질 뿐 아니라 육신 때문에 같은 죄와 잘못을 반복한다. 자기 육신에 화가 나고 지칠 때에도, 이 상태가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는다는 약속이 있다. 부활과 변화와 휴거는 이 몸이 마침내 해방될 날에 관한 말씀이다.

휴거 때 실제로 일어나는 일

휴거가 언제 일어나는지를 말하기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환난 전에 일어난다고 말하면서도 성도의 몸에 무슨 일이 생기는지 모른다면 기본을 놓친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과 고린도전서 15장이 그 내용을 알려 준다.

휴거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영어 성경에 rapture라는 단어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름이 본문에 없다는 이유로 사건까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성경을 부르는 Bible이라는 명칭도 마찬가지다. 그 단어가 본문에 없다는 이유로 쓸 수 없다면 성경의 이름부터 버려야 한다. Bible은 책을 뜻하며, 성경에는 책을 가리키는 book이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의 뜻을 확인한 뒤, 그에 해당하는 일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지 살펴야 한다. 라틴어에서 유래한 휴거라는 말은 붙잡아 데려가다, 낚아채다라는 뜻이다. 영어로는 ‘catch away’, ‘snatch’로 설명할 수 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붙잡아 데려가시는 일이 있는지를 보면 된다.

데살로니가전서 4:14는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잠든 자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데리고 오신다고 말한다. 부활뿐 아니라 이동도 약속되어 있다. 죽은 몸을 살리시는 일과 그 몸을 데리고 오시는 일이 함께 이루어진다.

휴거는 마음속에서 경험하는 위로나 비유가 아니라 몸이 실제로 부활하고 변화되어 옮겨지는 사건이다. 부활만 인정하고 이동은 부정한다면, 성도들이 함께 구름 속으로 끌려 올라간다는 말씀을 설명할 수 없다.

죽은 성도들이 뒤처지지 않는다

데살로니가전서 4: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오실 때까지 살아남아 있는 우리가 잠들어 있는 자들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바울은 주의 말씀으로 이 약속을 전한다. 사람이 세운 추측이나 시간표가 아니다. 살아 있는 성도와 이미 죽은 성도가 그날에 어떻게 참여할지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말씀이다.

김진하 목사는 환난 전 휴거를 부정하는 것을 상당히 심각한 이단으로 규정한다. 단지 여러 시간표 중 하나를 선호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약속을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성도들은 잠든 성도들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한다. 김진하 목사는 영어 prevent를 hinder(방해하다)로 풀어 적용하며, 살아 있는 사람들이 죽은 성도들의 참여를 막을 수 없다고 강조한다. 살아서 주를 기다리는 사람만 그날에 참여하고, 죽은 사람은 뒤처지거나 제외되는 것이 아니다.

휴거를 부정하는 사람도 이 약속을 막을 수 없다. 환난 전 휴거가 없다고 주장해도 하나님께서 죽은 성도의 몸을 살리고 하늘로 데려가시는 일은 이루어진다. 성도의 장래는 사람의 승인에 달려 있지 않다.

먼저 부활하고, 함께 올라간다

데살로니가전서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로부터 친히 내려오시리니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먼저 일어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다. 구원받고 죽음을 맞은 성도들이 먼저 부활한다. 그들이 뒤처지지 않는다는 약속이 이 순서로 드러난다.

데살로니가전서 4:17 그리고 나서 살아남아 있는 우리도 공중에서 주와 만나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려 올라가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영원히 주와 함께 있으리라.

이어서 살아남아 있는 성도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를 만난다. 죽은 성도가 먼저 부활한다고 해서 두 무리가 따로 주를 만나는 것은 아니다. 부활에는 순서가 있지만, 올라갈 때에는 함께 올라간다.

죽은 몸이 살아나고, 살아 있는 성도도 참여하며, 두 무리가 구름 속으로 옮겨져 공중에서 주를 만난다. 그 만남은 잠깐의 재회로 끝나지 않는다. 영원히 주와 함께 있게 된다. 이 약속이 있기에 죽은 성도를 생각할 때에도 소망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죽은 성도의 부활과 살아 있는 성도의 공동 참여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성도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아 있는 성도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려 올라가 같은 자리에서 주를 만난다.

성도들을 데려가시는 오심과 왕국을 세우시는 오심

데살로니가전서 4:15의 “주께서 오실 때”는 휴거를 가리킨다. 그렇다고 주의 오심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환난 후의 지상 재림과 같은 사건으로 묶어서는 안 된다. 성도들을 데려가시는 오심과 땅에서 통치하시려는 오심은 목적이 다르다.

성경의 시간표를 따라가 보자. 구약을 지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오셨고,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 뒤에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교회시대가 이어진다. 약 2천 년이라는 기간은 이 시대의 긴 간격을 나타내는 개략적인 표현이다.

교회시대 뒤에는 성도들이 들려 올라간다. 시점은 환난 도중이나 끝난 뒤가 아니라 환난이 시작되기 전이다. 환난이 끝나면 그리스도께서 땅으로 내려와 적그리스도를 정복하고 왕국을 세우신다. 천 년 동안 통치하신 뒤에는 기존 세계의 소멸과 새 창조가 이어진다.

성도들이 공중으로 올라가는 일과 주께서 땅에 왕국을 세우시는 일은 방향과 목적, 시점이 모두 다르다. 둘 다 주의 오심과 관계된다고 해서 같은 사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목적과 시점에 따라 구별되는 주의 오심 관련 사건들

갈보리의 구원 사역, 성도들의 휴거, 지상 왕국 수립, 천 년 이후의 세계 소멸과 새 창조는 목적과 시점이 다르다.

‘두 번째’라는 이름에 사건을 맞출 수는 없다

환난 전 휴거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묻는다. 휴거가 주의 오심이라면 그것이 두 번째이고, 그 뒤 지상에 내려오시는 일은 세 번째가 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재림의 영어 명칭인 second coming을 근거로 휴거와 지상 재림을 환난 후의 한 사건으로 묶으려 한다.

그러나 이름의 순번으로 말씀의 내용을 결정할 수는 없다. 먼저 ‘두 번째’라는 기준을 세우고 모든 사건을 거기에 맞추면, 각 본문이 말하는 대상과 목적, 시점을 놓치게 된다.

서구 기독교의 익숙한 계산법만을 기준으로 삼을 수도 없다. 유대인들은 주의 오심을 한 번으로 기대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건을 하나로 합쳐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이유로 서구 기독교에서 붙인 순번도 성경 해석의 최종 기준이 될 수 없다.

사건을 구별하려고 반드시 ‘세 번째 오심’, ‘네 번째 오심’이라는 표현을 찾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주의 오심, 그리스도의 오심이라는 말씀을 문맥에 따라 읽으면 된다. 십자가에서 죽으시려는 오심, 성도들을 데려가시는 오심, 왕국을 세우시는 오심은 각각 목적이 다르다.

재림이라는 이름은 사용할 수 있다. 다만 그 이름의 순번 때문에 다른 오심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기준은 성경에 기록된 사건이다. 말라키 3장을 보면 이 구별이 왜 필요한지 알 수 있다.

길을 예비하는 사자와 오시는 주

말라키 3:1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하리라. 또 너희가 찾고 있는 주가 갑자기 자기 성전에 오리니, 곧 너희가 기뻐하는 언약의 사자니라. 보라, 그가 오리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여기에는 두 사자가 나온다. 먼저 보내져 길을 예비하는 사자와, 자기 성전에 오시는 주이신 언약의 사자다. 사자는 보냄받아 메시지를 전하는 이를 뜻하지만, 두 인물이 맡은 역할은 다르다.

주의 길을 예비하는 첫 번째 사자가 누구인지는 마가복음이 알려 준다.

마가복음 1:2 선지서들에 기록된 바와 같으니 “보라, 내가 네 면전에 나의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네 앞서 네 길을 예비하리라.

마가복음 1:3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음성이 있어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들을 곧게 하라.’고 하는도다.” 하였더라.

마가복음 1:4 요한이 광야에서 침례를 주고,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니,

길을 예비한다는 말씀 바로 뒤에 광야에서 침례를 주는 요한이 등장한다. 먼저 보내진 사자는 침례인 요한이다. 그는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며 주의 길을 준비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 오신 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이 오심을 환난 끝의 정복과 왕국 수립으로 바꿀 수는 없다. 누가 길을 준비했고 그 뒤 어떤 사역이 있었는지를 보아야 한다.

구원을 위한 오심, 정복을 위한 오심

말라키 3:2 그러나 그가 오는 날에 누가 거할 수 있겠느냐? 그가 나타날 때 누가 서겠느냐? 이는 그가 정련하는 자의 불과 같고, 표백하는 자의 비누 같음이라.

정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비누가 그날의 엄중함을 보여 준다. 그분이 오시는 날 누가 거하고 설 수 있겠는가? 아무도 견딜 수 없는 심판과 정복의 날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마겟돈에 오셔서 세상을 산산이 부수고 적그리스도를 정복하며 왕국을 세우신다. 환난 전 휴거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이 정복과 왕국 수립을 주의 오심으로 읽는다. 그러나 그 사건 하나로 모든 오심을 설명할 수는 없다.

말라키 3:1에서 요한이 준비한 오심은 갈보리로 이어지고, 2절의 정복은 아마겟돈으로 이어진다. 죄인들을 위해 죽으시는 일과 적들을 정복하시는 일은 다르다. 어느 교파나 종교, 정통파 유대인이든 오심을 단 하나의 사건으로 제한하려면 이 차이를 설명해야 한다.

요한계시록 19: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흰 말이 보이더라. 그 위에 앉으신 분은 신실과 진실이라 불리며 의로 심판하고 싸우시더라.

흰 말에 앉으신 분은 신실과 진실이라 불리며, 의로 심판하고 싸우신다. 환난 후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의 군대들을 정복하시는 모습이다. 그런데 그 정복으로 기존 하늘과 땅까지 곧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뒤에도 땅의 역사는 계속된다.

천 년 통치와 그 뒤의 새 창조

요한계시록 20:4에는 보좌들과 그 위에 앉은 자들, 그들에게 주어진 심판이 나온다. 예수에 대한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혼들도 있다. 짐승과 그 형상에 경배하지 않고 그 표를 받지 않은 이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서 천 년 동안 통치한다.

그리스도께서 왕국을 세우시면 이 천 년의 통치가 이어진다. 정복과 동시에 땅과 우주가 없어지지 않는다. 요한계시록 20:8은 천 년이 지난 뒤에도 땅을 언급하고, 9절은 그 땅에서 벌어지는 포위를 보여 준다.

요한계시록 20:9 그들이 땅의 넓은 데로 올라가서 성도들의 진영과 사랑하시는 도성을 포위하니, 하늘에서 불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와 그들을 삼켜 버리더라.

천 년 뒤에도 무리가 땅의 넓은 데로 올라가 성도들의 진영과 사랑하시는 도성을 포위한다. 그때에도 땅은 존재한다. 따라서 환난 후의 지상 정복과 세계의 완전한 소멸을 같은 순간으로 합칠 수 없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불은 포위한 무리를 삼킨다. 땅 위의 무리가 멸망하는 것과 땅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다르다. 무리가 불에 삼켜질 때 땅은 여전히 그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다. 그 뒤에는 그 장소 자체가 사라지는 일이 이어진다.

기존 하늘과 땅이 사라지는 날

베드로후서 3:4 말하기를 “그가 온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만물은 창조의 시작부터 그대로 있다.” 하리니

조롱하는 사람들은 만물이 창조 때부터 그대로라며 주의 오심을 부정한다. 베드로후서 3장은 이에 답하면서 이 세계의 마지막을 보여 준다.

베드로후서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들이 굉장한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우주의 구성 요소들이 맹렬한 불로 녹아내리며 땅과 그 안에 있는 일들이 타버릴 것이라.

하늘들이 사라지고 우주의 구성 요소들이 맹렬한 불로 녹아내리며, 땅과 그 안의 일들이 타버린다. 세계의 일부가 바뀌는 정도가 아니라 기존 우주가 완전히 소멸하는 사건이다. 지금의 세계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베드로후서 3:12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열망하라. 그때는 하늘들이 불에 타서 녹아 버리고 우주의 구성 요소들도 맹렬한 불에 녹아내릴 것이나

12절은 하나님의 날이 오는 것을 기다리라고 한다. 그날에도 하늘과 우주의 구성 요소들이 불에 녹는다. 4절의 오심의 약속에서 10절의 주의 날, 12절의 하나님의 날로 이어지면서 기존 세계의 소멸을 보여 준다.

따라서 오심에 관한 말씀을 환난 후의 정복에만 묶어 둘 수 없다. 왕국이 세워진 뒤에도 땅은 천 년 동안 존재한다. 하늘과 땅이 완전히 사라지는 사건은 그 통치 이후에 놓인다.

백보좌 앞에서 사라진 세계, 새로 나타나는 세계

요한계시록 20:11 또 내가 큰 백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니, 그의 면전에서 땅과 하늘이 사라졌고 그들의 설 자리도 보이지 않더라.

포위한 무리에 대한 불의 심판이 지나면 큰 백보좌가 나타난다. 그 위에 앉으신 분의 면전에서 땅과 하늘이 사라지고 설 자리조차 보이지 않는다. 기존 세계가 폭파되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완전한 소멸이다.

이 순서를 기억하면 두 사건을 혼동하지 않는다. 성도들의 진영과 도성이 포위될 때에는 땅이 있고, 백보좌 앞에서는 그 땅과 하늘이 사라진다.

요한계시록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있지 아니하더라.

그렇다고 소멸이 모든 것의 끝은 아니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진 뒤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난다. 바다도 더 이상 없다. 기존 세계를 조금 손질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거하는 새 하늘들과 새 땅을 기다리도다.

베드로후서도 불의 소멸 뒤에 의가 거하는 새 하늘들과 새 땅을 약속한다. 새로운 하늘과 우주와 세계들, 새 땅이 시작된다. 요한계시록과 베드로후서는 함께 그 소망을 보여 준다.

천 년 이후의 포위와 불의 심판, 세계의 소멸과 새 창조

천 년 이후에도 땅에서 포위가 벌어진다. 하늘의 불이 포위한 무리를 삼킨 뒤, 백보좌 앞에서 땅과 하늘이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난다.

이름보다 목적과 시점을 보아야 한다

지금까지 살핀 말씀에는 적어도 네 가지 사건이 있다. 죄인들을 구원하시려는 초림, 성도들을 데려가시는 휴거, 환난 후 적그리스도를 정복하고 왕국을 세우시는 오심, 천 년 뒤 기존 세계의 소멸과 새 창조로 이어지는 사건이다.

오심이 정확히 네 번뿐이라는 뜻은 아니다. 더 많은 사례도 제시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횟수를 정하는 일이 아니라 각 사건의 목적과 시점을 살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려오시는 일을 그분의 오심이라 부를 수 있다면, 익숙한 ‘두 번째’라는 이름 때문에 다른 사건을 지울 수 없다. 그 사건들을 구별하기 위해 ‘세 번째’, ‘네 번째’라는 별도의 성경 문구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성도들을 데려가시는 일과 적들을 정복하시는 일이 다르고, 왕국을 세우시는 일과 천 년 뒤 세계가 사라지는 일도 다르다. 이 시간표를 구별하면 환난 전 휴거를 지상 재림과 합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이제 데살로니가전서 4:16으로 돌아가, 휴거 때 울리는 음성을 살펴보자.

휴거 때 울리는 두 음성

데살로니가전서 4:16에는 호령, 천사장의 음성,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나온다. 세 표현이 있지만 말하는 주체는 둘이다. 하나님의 호령과 나팔 소리는 한 주체의 음성이며, 천사장의 음성은 그와 구별된다.

주께서 친히 내려오셔서 입으로 성도들을 부르시고, 그 음성이 나팔처럼 울린다. 하나님의 호령과 나팔 소리는 아마 동시에 일어날 것이다. 천사장의 음성이 별개라는 말은 주체가 다르다는 뜻이다. 반드시 다른 시간에 울린다는 뜻은 아니다. 같은 휴거 사건에 두 크고 우렁찬 음성이 관계한다.

여기서 trump와 trumpet의 차이를 살펴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4:16의 KJV는 ‘trump’를 사용한다. trump는 나팔 소리에, trumpet은 그 소리를 내는 악기에 초점을 둔 말이다.

고린도전서 15:52 마지막 나팔 소리에 눈깜짝하는 순간에 그러하리라. 나팔 소리가 나면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하는 몸으로 일으켜지며 우리도 변화되리라.

고린도전서 15:52에는 ‘the last trump’와 ‘the trumpet shall sound’가 함께 나온다. 앞 표현 뒤의 콜론은 이어지는 나팔의 울림과 부활과 변화를 마지막 나팔 소리에 연결한다. 눈여겨볼 것은 성도의 부활과 변화가 일어날 때 울리는 소리다.

본문에 trumpet이라는 단어도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두 단어가 함께 쓰였지만 초점은 마지막 나팔 소리에 있다. 그 소리가 나면 죽은 성도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일어나고 살아 있는 성도들도 변화된다. 이 변화는 눈깜짝하는 순간에 일어난다.

나팔 같은 음성이 “이리 올라오라”고 말씀한다

요한계시록 4:1 이 일 후에 내가 쳐다보니, 보라, 하늘에 한 문이 열려 있는데 내가 들은 첫 음성은 나팔 소리 같았으며,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이리 올라오라. 내가 이후에 마땅히 일어나야 할 일들을 네게 보여 주리라.” 하더라.

요한이 들은 음성은 나팔 소리 같았지만, 단순한 악기의 신호음은 아니었다. 그 음성은 “이리 올라오라”고 말하고, 이후에 일어날 일들을 보여 주겠다고 말씀했다.

나팔처럼 울리면서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을 하는 음성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성도들을 직접 부르신다. 요한에게 하셨던 것처럼 땅에서 불러내어 자신과 함께 하늘로 올라오게 하실 것이다.

성도가 기다리는 것은 그저 큰 소리가 아니라 자신을 하늘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그렇다면 함께 등장하는 천사장의 음성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미카엘의 음성은 이스라엘을 향한다

천사장은 다른 천사들 위에 있는 우두머리다. 천사장이 셋이나 다섯이라고 말하는 견해도 있지만, 데살로니가전서에는 단수로 나온다. 유다서는 그 이름까지 밝힌다. 천사장은 하나이며, 미카엘이다.

유다서 1:9 그러나 천사장 미카엘도 모세의 몸에 대하여 마귀와 더불어 다투며 논쟁할 때 감히 그를 모독하는 비난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주께서 너를 책망하시느니라.”고 말하였느니라.

미카엘은 모세의 몸에 관하여 마귀와 다툰 천사장이다. 그렇다면 그가 누구를 위해 일어서는가? 다니엘서에 답이 있다.

다니엘 12:1 “그때에 미카엘이 일어서리니, 이는 네 백성의 자손을 위하여 일어서는 위대한 통치자라. 또 고난의 때가 있으리니, 그것은 민족이 생긴 이래로 그 때까지 결코 없었던 것이라. 그 때에 네 백성이 구제될 것이니, 곧 그 책에 기록되어 발견될 모든 자들이라.

“네 백성”은 다니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다. 미카엘은 유대인들을 위해 일어선다. 그때 구제되는 사람들도 책에 기록되어 발견될 다니엘의 백성이다.

유다서는 미카엘이 천사장임을 알려 주고, 다니엘서는 그가 이스라엘을 위해 일어선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음성이 성도들을 하늘로 부르는 것과 미카엘이 이스라엘을 위해 활동하는 것은 대상과 역할이 다르다. 미카엘의 활동은 이스라엘이 맞을 고난의 때와 연결된다.

성도들은 환난이 시작되기 전에 떠난다

마태복음 24:21 이는 그때에 대환란이 있으리니, 그와 같은 것은 세상이 시작된 이후로 지금까지 없었으며, 또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이라.

다니엘 12:1과 마태복음 24:21은 모두 이전에 없었던 고난을 말한다. 환난은 고난이며, 두 본문은 같은 전례 없는 고난을 가리킨다. 마지막 때 적그리스도와 관련된 7년 환난이다.

다니엘 12:1에서 눈여겨볼 말은 shall be, 곧 ‘있으리니’다. 미카엘이 일어설 때 고난은 이미 끝난 일이 아니라 앞으로 있을 일이다. 그의 활동은 환난의 시작에 놓인다.

미카엘은 내려와 음성을 울리며 이스라엘을 위한 환난을 시작한다. 하나님의 나팔 같은 음성은 성도들을 위로 부른다. 성도들은 올라가고, 미카엘은 내려온다. 두 음성이 향하는 대상과 맡은 일이 다른 것이다.

성도들을 위로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과 이스라엘을 위한 미카엘의 활동

하나님의 음성은 성도들을 하늘로 부르고, 미카엘의 음성과 활동은 이스라엘을 위한 환난의 시작에 연결된다. 같은 전환 시점에서 성도들의 떠남이 환난의 시작보다 앞선다.

이 전환 때 성도들이 환난을 겪다가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미카엘이 환난을 시작하기 전에 성도들이 먼저 떠나야 한다. 성도들에게 환난은 자신들이 떠난 뒤에 시작될 사건이다.

그래서 두 음성의 구별은 환난 전 휴거의 또 다른 강력한 증거가 된다. 교회와 이스라엘, 하나님의 부르심과 천사장의 활동을 구별하면 성도들의 휴거가 환난에 앞선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 모든 말씀은 처음의 약속으로 돌아온다. 예수 안에서 죽은 성도는 잊히지 않는다. 살아 있는 성도도 지금의 연약한 몸에 영원히 갇혀 있지 않는다. 죽은 성도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아 있는 성도들이 그들과 함께 올라가 주를 만난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몸의 구속과 영원히 주와 함께할 날이다. 구원받았는지 알 수 없는 불안한 미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확정해 주신 장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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